릴로

대검이 수직으로 낙하하는 궤적은 망막 위에 붉은색 잔상선으로 기록되었다.

대기를 얼려붙이며 하강하는 냉기의 칼날. 목표는 백설아의 정수리다. 기사단 부단장의 신형은 초속 24미터로 가속되고 있었고, 검 끝에 실린 중력가속도와 마나 마찰계수를 고려할 때 충돌까지 남은 시간은 단 0.14초.

F급 헌터의 신체 스펙으로 이 물리적 낙하 운동을 정면에서 저지하는 것은 자살행위에 가까웠다. 도진의 뇌세포가 고속 연산을 시작했다.

‘지연 시간 0.14초. 내 대퇴이두근의 수축 속도로는 백설아를 밀쳐내고 검을 피할 수 없다. 물리적인 방어막 전개는 마나 전도율 부족으로 불가능.’

하지만 도진의 시야를 채운 고대 분석 렌즈는 기사단 부단장의 움직임 이면에서 기묘한 위상 왜곡을 포착해 내고 있었다. 부단장의 무모하리만치 완벽한 직선 낙하. 그것은 등 뒤의 빈틈을 메워주는 보이지 않는 '지지점'이 존재하기에 가능한 역학 구조였다.

부단장의 그림자 너머, 공기가 미세하게 굴절되는 특정 좌표가 존재했다.

도진은 망설임 없이 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손끝에 닿은 것은 차갑고 투박한 금속 질감. 2화에서 마포구 던전의 폐기물 보관소에서 수집했던, 쓸모없는 잡템으로 분류되었던 '부러진 고대 기하학 나침반'이었다.

[아이템: 부러진 고대 기하학 나침반 (손상도 78%)] - 분류: 유물 파편 - 기능: 인과율 구조의 비틀림 공간 추적 (작동 불가)

당시 감시관들은 이것을 단순한 고철로 취급했으나, 도진의 계량화된 눈은 이 유물이 가진 진정한 알고리즘을 읽어내고 있었다. 이 도구는 본래 고대인들이 차원의 틈새를 정밀 측정하기 위해 제작한 위상 역량계였다. 부러진 침 침 끝에 미량의 마나를 주입하자, 잠자던 고대 동력원이 비정상적인 진동을 일으키며 공명하기 시작했다.

바르르르.

나침반의 부러진 바늘이 가리킨 방향은 부단장의 대검이 아니었다. 좌측 4.2미터, 높이 1.8미터의 허공.

그곳은 시각적으로 완전히 비어 있는 공간이었으나, 나침반의 바늘은 그 좌표를 향해 극도로 요동치고 있었다. 은폐 마법을 시전한 채 대검의 궤적을 보정해 주던 저격수의 정확한 좌표였다.

"좌표 동기화 완료."

도진은 왼손의 나침반을 수직으로 고정했다.

바늘의 회전축을 강제로 비틀어 고정하는 순간, 부러진 금속 끝에서 청백색의 기하학적 광선들이 뿜어져 나왔다. 굴절된 시공간의 벡터를 역추적하는 고대의 연산식이 대기 중에 투사되었다.

[시스템: '부러진 고대 기하학 나침반'의 인과율 역추적 가동.] [오차 범위: 1.2밀리미터.] [대상 좌표 강제 고정 및 공간 굴절 역해킹을 시작합니다.]

"무슨 수작을...!"

부단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은폐 기사단의 존재는 아군조차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는 극비 자산이었다. 철저히 숨겨진 살인 병기가 도진의 조잡한 고철 나침반 하나에 노출될 리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진은 확신을 신뢰하지 않는다. 오직 수치화된 계산 결과만을 신뢰할 뿐이다.

츠지이이인-!

나침반의 중심축에서 뻗어 나간 광선이 허공의 한 점을 관통했다. 그와 동시에 공기가 깨진 유리창처럼 쩍쩍 갈라지며, 광학 미채 속에 숨어 있던 저격수의 실루엣이 선명하게 형상화되었다. 완벽하게 무방비 상태로 은폐를 유지하던 기사였다.

도진은 오른손에 쥐고 있던 고밀도 마나 나이프를 주저 없이 그 균열의 중심으로 찔러 넣었다.

서걱-!

"억...!"

보이지 않던 허공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도진의 칼날은 은폐한 기사의 플레이트 메일 사이, 겨드랑이 밑의 유기적 틈새를 정확히 지나 심장 좌심실을 관통했다. 1밀리미터의 오차도 없는 정밀한 물리학적 타격이었다.

심장이 파쇄된 기사의 신체가 뒤로 꺾이며 피를 토해냈다. 그가 유지하고 있던 공간 보정 마법이 도미노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낙하하던 부단장의 대검이 궤적을 잃고 비틀거렸다. 보정력을 상실한 대검은 백설아의 머리칼 끝을 스치며 바닥의 대리석을 내리찍었다. 지면이 폭발하듯 갈라지고 하얀 상염의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설아의 신체에는 단 한 줄기의 생채기도 나지 않았다.

"어떻게... 저 좌표를 알아채고..."

부단장이 대검의 반동으로 밀려나며 신음했다. 그의 투구 틈새로 보이는 눈동자에 경악과 공포가 뒤섞였다.

그가 이끄는 은폐 기사단은 앱솔루트 오더 의회가 자랑하는 무패의 암살 부대였다. 단 한 번도 그들의 공간 은닉이 간파당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는 마치 투명한 유리를 들여다보듯, 단 한 번의 연산으로 아군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도려냈다.

"간단한 기하학 공식입니다."

도진이 칼날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냉정하게 대꾸했다.

"당신의 하강 궤적은 지나치게 대칭적이었습니다. 중력과 기류의 저항을 고려했을 때, 좌측에서 바람을 막아주는 물리적 차폐막이 존재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각도였죠. 나침반은 그저 제 가설을 증명하는 도구였을 뿐입니다."

"이 괴물 같은 놈이..."

부단장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 남자는 인간의 감정이나 전장의 기세로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철저한 기계적 합리성, 적의 모든 패를 데이터로 치환해 붕괴시키는 연산력 그 자체였다. 그 냉혹함에 부단장은 생전 처음으로 등골이 서늘해지는 감각을 맛보았다.

그 순간, 도진이 쥐고 있던 부러진 나침반에서 밝은 빛이 터져 나왔다.

위상 저격수의 사망과 함께 흩어진 고밀도 좌표 에너지가 나침반의 빈 코어로 빠르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윙윙윙윙-!

[시스템: 사망한 고위 개체의 공간 데이터 회수 중.] [고대 기하학 나침반의 잔여 마나 정렬 성공.] [인과율 채무 환차익 발생!]

도진의 눈앞에 반투명한 시스템 로그가 쉴 새 없이 갱신되었다.

[알림: 수집된 좌표 에너지를 시스템 칼로리로 환산합니다.] [환산 가치: +1,200 kcal] [환차익을 적용하여 현재 소지한 인과율 채무의 일부를 즉시 변제합니다.] [인과율 채무율: 87.4% -> 79.2%]

"호오."

도진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3화에서 엘라가 경고했던 기억이 선명했다. 인과율 채무가 100%를 돌파하면 시스템의 '역전위 유령 마나'가 발생해 주변의 모든 물질 구성을 분자 수준으로 분해해 버린다던 경고. 87.4%라는 임계치 직전의 수치는 도진의 행동반경을 극도로 제약하는 족쇄였다.

하지만 적의 고위 기술을 역해킹하여 채무를 변제받는 이른바 '환차익' 거래는 도진의 계산식에도 없던 도약이었다. 채무율이 70%대로 내려앉으면서, 도진의 가용 자원에 거대한 여유 공간이 확보되었다.

"도진 씨, 살려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백설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도진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본능적인 야생적 감각은 도진이 자신을 방패막이이자 미끼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정확히 감지하고 있었다. 만약 도진의 연산이 0.01초라도 어긋났다면 그녀의 머리는 이미 두 조각이 났을 터였다.

그럼에도 설아의 눈동자에는 원망 대신 기묘한 신뢰가 깃들어 있었다. 기계 같은 정서 결함을 가졌을지언정, 이 남자의 계산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몸소 겪었기 때문이다.

"고마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도진이 감정을 배제한 어조로 말했다.

"백설아 씨의 생존 확률은 99.4%로 계산되어 있었습니다. 당신의 생존은 이 던전을 공략하기 위한 필수 자산입니다. 가치가 있는 자산을 소모하는 것은 가장 하책의 거래일 뿐입니다."

"정말 한결같네요, 당신은."

설아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몸을 일으켰다.

"어이, 거기 오더의 기사님."

도진이 시선을 다시 기사단 부단장에게 돌렸다. 그의 눈빛은 도축장에 선 수의사처럼 차분하고 집요했다.

"당신들의 대장은 하위 10%의 인구를 청소하는 것이 지구 생존율을 높이는 유일한 길이라 주장하더군요. 하지만 제 계산은 다릅니다. 시스템의 포맷 권한 자체를 박탈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생존 방식입니다. 그리고 그 첫 단계는 이 던전의 제어부를 장악하는 것입니다."

"감히 의장님의 대의를 모욕하는가!"

부단장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는 대검을 쥐고 다시 자세를 잡으려 했으나, 이미 기사단의 진형은 붕괴된 지 오래였다. 뒤쪽 터널에서 수레의 잔해에 깔린 대원들의 신음이 메아리쳤고, 유일한 저격수마저 차가운 시체가 되어 바닥에 누워 있었다.

완벽한 패배였다. 물리적인 무력이 아닌, 고도의 연산 대결에서 당한 참패.

"끝까지 우리를 방해하겠다면..."

부단장의 눈빛이 광기로 번뜩이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이 도진을 지나 제어부 던전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석조 기단으로 향했다.

그 기단 위에는 검은색 금속 실린더 수십 개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기선우가 설치해 둔 '인위적 포맷 기폭핵 장치'들이었다. 강동구 하위 구역을 시스템의 시공간 지도에서 영원히 지워버리기 위한 파괴의 쐐기들.

"우리가 이곳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이 구역의 가치는 소멸한 것이다."

부단장이 품 속에서 붉은빛이 감도는 원격 기폭 장치를 꺼내 들었다.

"의장님의 질서는 결코 타협하지 않는다. 48시간의 유예는 철회한다. 지금 이 순간, 강동구 제어부와 함께 너희 버그 개체들을 통째로 매장하겠다!"

"멈춰!"

설아가 소리쳤지만, 부단장의 손가락은 이미 기폭 버튼을 강하게 짓누른 뒤였다.

쿠구구구구구-!

중앙 기단에 박혀 있던 수십 개의 블랙 연산장치들이 일제히 적색 광을 뿜어내며 과충전 상태로 진입했다. 던전 내부의 마나 밀도가 기하급수적으로 폭증하며, 천장에서 거대한 암석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시스템의 강제 포맷 알고리즘이 폭주 지점까지 단 몇 분만을 남겨두고 가동된 것이다.

쿠구구구구구-!

중앙 기단에 박혀 있던 수십 개의 블랙 연산장치들이 일제히 적색 광을 뿜어내며 과충전 상태로 진입했다. 던전 내부의 마나 밀도가 기하급수적으로 폭증하며, 천장에서 거대한 암석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시스템의 강제 포맷 알고리즘이 폭주 지점까지 단 몇 분만을 남겨두고 가동된 것이다.

"미친 짓이다."

백설아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급격히 상승하는 마나의 압력에 노출된 그녀의 피부 위로 붉은 실핏줄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대기 중의 산소가 고밀도 마나에 밀려나 희박해지고 있었다.

반면, 도진의 안경 렌즈 너머 눈동자는 기계 장치처럼 고요하게 빛났다. 그의 망막 위로 폭주하는 에너지의 흐름이 벡터 그래픽 형태로 정밀하게 도식화되었다.

[위험: 강동구 제어부 코어 동기화율 94.2% 돌파.] [인위적 포맷 기폭핵 장치 에너지 방출량: 초당 450,000,000 파스칼.] [완전 붕괴까지 남은 시간: 180초.]

"도진 씨! 피해야 해요! 이 크기면 지하 터널 전체가 지워져요!"

설아가 도진의 옷자락을 잡아당겼으나, 도진의 신체는 연산 장치처럼 그 자리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퇴각로의 붕괴 속도가 우리의 최고 주행 속도보다 1.4배 빠릅니다. 도망치는 것은 생존율 0%의 무의미한 연산입니다."

도진은 오히려 폭주하는 기단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의 시선은 6화에서 고대 분석 렌즈로 복사해 두었던 블랙 연산장치의 미세한 진동 패턴에 고정되어 있었다.

‘고유 공진 주파수: 4,120 Hz.’

이 장치들은 우주 시스템의 강제 포맷 신호를 수신하여 국소 부위에 증폭시키는 물리적 안테나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직관적이다. 안테나가 신호를 수신하기 전에, 그 수신 소자 자체를 물리적으로 파괴하거나 분해하면 된다.

하지만 저 강철보다 단단한 고차원 합금을 단 3분 만에 파괴할 마법이나 무기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단 하나, 시스템의 근본적인 모순을 이용하는 것 외에는.

도진은 허공에 손을 뻗어 '시스템 독점 상점'의 인터페이스를 강제로 호출했다. 푸른색 홀로그램 스크린이 비정상적으로 요동치며 열렸다.

스스스...

화면 중앙에 검은 고양이의 형상을 한 상위 라이선스 관리자, 엘라의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는 노골적인 조소와 흥미가 서려 있었다.

[“어머, 우리 영리한 채무자님? 채무를 조금 갚자마자 다시 지옥의 문턱에서 나를 부르네? 이번엔 무슨 거래를 하려고? 설마 그 몸뚱이로 저 포맷 장치들을 다 맨손으로 부수겠다고 우기진 않겠지?”]

"엘라. 3화에서 네가 했던 경고를 기억하고 있다."

도진은 폭풍처럼 몰아치는 마나 폭풍 속에서 차갑게 읊조렸다.

"인과율 채무가 한계를 초과해 100%를 돌파하는 순간, 내부의 마나가 물리적 장벽을 무시하고 주변의 모든 물질을 분자 수준으로 붕괴시키는 '역전위 유령 마나'로 변환된다고 했지."

[“...그랬지. 그건 시스템이 계약자를 말살하기 위해 내리는 궁극의 페널티야. 설마?”]

엘라의 냉소적이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도진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기상천외한 역발상을 알아차린 탓이다.

"현재 내 채무율은 79.2%."

도진은 상점 창에서 가장 비싸고 무거운 고대 문명의 설계도 하나를 임시 렌탈 카트에 집어넣었다.

[아이템: 고대 아르카디아의 엔트로피 감쇄 벽 설계도 (임대)] - 임대 비용: 3,500 kcal (인과율 채무 가산)

이 버튼을 누르는 순간, 도진의 인과율 채무는 즉시 100%를 초과하여 임계점을 돌파하게 된다. 그리고 시스템은 도진의 신체를 소멸시키기 위해 그의 '내부 마나'를 역전위 유령 마나로 강제 변환할 것이다.

"내가 죽기 전, 역전위 유령 마나가 방출되는 그 0.08초의 찰나."

도진은 고대 분석 렌즈의 초점을 4,120 Hz의 공진 주파수에 맞추었다.

"그 유령 마나의 파동을 블랙 연산장치의 고유 주파수와 정확히 동조시킨다. 시스템의 살상용 페널티를 저 포맷 장치들의 합금을 분해하는 에너지로 역전위시킨다."

[“미친 개체 같으니라고! 그 제어가 단 1밀리초만 어긋나도 네 심장이 먼저 분자 단위로 쪼개져서 증발할 거야! 이건 자살행위야!”]

"계산상 성공 확률은 88.7%입니다. 시도하지 않았을 때의 생존율인 0%보다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도진은 주저 없이 구매 확정 버튼을 눌렀다.

딸깍.

[시스템: 경고! 인과율 채무가 한계 치수(100%)를 초과하였습니다!] [현재 채무율: 154.2%] [페널티 가동: 역전위 유령 마나(Reverse-Potential Ghost Mana)가 계약자의 마나 회로에서 발생합니다.] [모든 물질 구성의 영구 분해 프로세스를 시작합...]

"윽...!"

도진의 척추를 타고 극도의 고통이 휘몰아쳤다. 그의 혈관을 흐르던 마나가 차가운 은색의 유령 마나로 변환되며 세포막을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장기가 녹아내리는 듯한 감각 속에서도 도진은 눈을 부릅떴다.

그는 오른손에 쥔 고대 나침반의 회전축을 블랙 연산장치의 중앙 제어부를 향해 정렬했다. 자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은색의 유령 마나를 나침반의 굴절 공식을 통해 4,120 Hz의 파동으로 압축하여 발사했다.

슈우우우우-!

도진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차가운 은색 광선이 기단 위의 블랙 연산장치들을 휩쓸었다.

물리적인 폭발은 없었다. 하지만 은색 광선이 닿는 순간, 그 단단하던 검은 합금 장치들이 마치 뜨거운 물에 녹는 설탕처럼 소리 없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분자 결합이 해체되며 미세한 검은 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흩날렸다.

"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부단장이 비명을 질렀다. 자신이 작동시킨 무적의 포맷 장치들이 고작 일개 헌터의 몸에서 나온 정체불명의 마나에 녹아내리는 광경은 그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이었다.

장치들이 파괴되자, 폭주하던 적색 광과 마나 폭풍이 거짓말처럼 가라앉기 시작했다.

턱.

도진은 무릎을 꿇었다. 그의 입가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채무 초과 페널티를 역용한 대가로 그의 마나 회로의 30%가 영구적으로 손상되었다.

[알림: 포맷 기폭 장치의 파괴로 강동구 하위 구역의 제어권이 일시 동결되었습니다.] [그러나 비정상적인 인과율 폭주로 인해 '부하 피드백(Load Feedback)'이 강제 발동합니다.]

쿠르릉! 점차 안정되던 던전 내부가 다시 한번 크게 흔들렸다. 이번에는 기폭 장치가 아닌, 던전 자체의 시스템이 도진의 버그 행위를 감지하고 강제 대응에 나선 것이다.

안경 화면에 가혹한 시스템 메시지가 붉은 글씨로 인쇄되었다.

[위험: 부하 피드백으로 인해 강동구 전체의 강제 포맷 예정 시간이 단축됩니다.] [남은 시간: 48시간 -> 12시간.]

"시간이... 줄어들었어?"

설아가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48시간이었던 생존 유예가 단 12시간으로 단축된 것이다. 12시간 안에 이 거대한 강동구 던전의 핵심 코어를 파괴하지 못하면, 이 구역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시공간에서 영원히 지워진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부단장이 피를 토하며 잔인하게 웃었다.

"12시간이라... 그 시간 안에 너희가 대성당 깊은 곳의 코어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욱이 우리 의회의 본대가 이미 이 구역으로 진입하고 있으니..."

스스스스.

그때, 무너진 터널 저편의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횃불 빛과 함께 강인한 기운을 풍기는 한 무리의 헌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선두에 선 사내는 거대한 대방패를 짊어진, 바위처럼 단단한 체구의 사내였다. 그의 눈빛에는 동료를 잃은 깊은 분노와 슬픔, 그리고 오더 세력을 향한 강한 적개심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연합 길드의 수장, 한태령이었다.

그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도진과 설아, 그리고 오더의 처형 기사단을 번갈아 바라보며 방패를 고쳐 잡았다. 수많은 생명을 지키기 위해 검을 든 정통파 영웅의 안광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오더의 사냥개들이 결국 여기까지 마수를 뻗쳤군."

한태령의 묵직한 목소리가 동굴 벽을 울렸다.

도진은 피 묻은 입가를 닦아내며 한태령을 응시했다. 그의 분석 렌즈가 한태령의 신체 스펙과 보유한 장비의 마나 전도율을 실시간으로 계산해 내기 시작했다.

'한태령. 연합 길드의 수장이자, 강동구 방어전의 핵심 자산.'

남은 시간은 단 12시간. 도진의 뇌세포는 이미 한태령이라는 거대한 자산을 아군으로 포섭하여, 자신이 독점 상점에서 구매한 '엔트로피 감쇄 벽 설계도'를 실현하기 위한 가혹하고 정밀한 수학적 계산에 돌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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