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09:58]

식막(視幕) 중앙에 강제로 고정된 적색의 디지털 숫자가 가차 없이 소수점 단위까지 깎여 나가기 시작했다.

차원의 균열이 찢어발긴 제어실 내부에는 현실의 깨진 아스팔트 조각과 고대 던전의 유황 냄새가 뒤섞인 비정상적인 대기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공기가 압축될 때마다 고막을 찌르는 이명이 발생했다.

방금 전, 적색의 번개가 내리꽂힌 자리는 바닥재인 화강암이 기화하여 지독하게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도진 씨! 일어나! 빨리 피해야 해!"

백설아가 도진의 멱살을 움켜쥐다시피 하며 소리쳤다. 그녀의 거친 호흡이 도진의 뺨에 닿았다. 방금 전 '나노 바이오 활성 겔'로 다리의 괴사 상처를 치료했음에도 불구하고, 급격한 환경 변화에 그녀의 심박수는 분당 152회까지 치솟아 있었다.

도진은 그녀의 손을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떼어냈다. 그의 감정 중추는 차분했다. 정서적 효율 증후군은 이 상황에서 공포 대신 오직 산술적인 나열 값만을 뇌리에 띄웠다.

'피할 곳은 없다.'

도진은 주변 공간의 기하학적 왜곡 상태를 정밀 분석 렌즈로 훑었다.

[공간 동기화 왜곡도: 94.2%] [현실 구역 강동 F-3과 던전 제어부의 중첩률이 임계점을 초과했습니다.] [대피 경로 차단. 물리적 탈출 시도 시 99.8%의 확률로 신체 분자 구조가 시공간 단면에 끼여 절단됨.]

퇴로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10분이라는 데드라인은 도망치라는 경고가 아니었다. 이 공간을 구성하는 연산 코어를 파괴하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조치를 취해 동기화를 강제로 해제하라는 시스템의 절대적인 명령이었다.

"설아 씨. 제자리에서 산소 소모를 최소화하세요. 움직이면 마나 압력 변동으로 인해 폐포가 파열됩니다."

도진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 위에는 조금 전 인과율 채무 98.2%라는 파멸적인 대가를 치르고 획득한 '태초의 영토 진흙'이 기하학적인 입방체 형태로 회전하고 있었다. 칠흑 같은 액상 자성체와 닮은 그것은 주변의 빛마저 왜곡시키며 중력장을 비틀고 있었다.

상점의 딜러인 엘라가 경고했던 목소리가 그의 메모리 칩에 저장된 데이터처럼 선명하게 재생되었다.

- 인과율 채무 한도를 초과하면 말이지, 네 몸 안의 마나가 전부 역전위 유령 마나로 바뀌어서 주변의 모든 물질과 함께 분자 단위로 녹아내릴 거야. 깔끔하게 포맷되는 거지.

현재 남은 채무 마진은 단 1.8%.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내딛으면 파멸이다. 그러나 도진의 연산 장치는 이 최악의 페널티 안에서 유일한 돌파구를 찾아내고 있었다.

[08:12]

숫자가 다시 줄어든다.

상공의 균열 너머로 수십 개의 기하학적 안구들이 돋아난 고차원 방어 가디언, '패러독스 프로텍터'의 거대한 촉수들이 제어실 천장을 부수며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괴수들의 표피는 불규칙한 디지털 노이즈로 뒤덮여 있었고, 그것들이 움직일 때마다 차원의 벽면에 긁히는 듯한 소름 끼치는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도진 씨, 저것들이 내려와요! 제발...!"

설아가 직관적인 생존 본능에 따라 단검을 꼬나쥐었다. 그녀의 근육이 잔뜩 긴장해 수축하는 것이 보였다. 효율적인 자산 가치 보존을 위해서라도 그녀의 사망은 막아야 했다.

'가디언과의 직접 전투 시, 현재 보유 장비로 승리할 확률 4.2%. 전투 소요 시간 최소 15분. 타임아웃으로 인한 폭사 확률 100%.'

도진은 가만히 서서 던전 제어 코어를 주시했다.

붉게 타오르는 구체의 코어는 초당 60회의 주파수로 고동치고 있었다. 이 구체가 바로 앱솔루트 오더의 의장 기선우가 설치한 포맷 장치와 연동되어 강동구 하위 구역 전체를 우주 지도에서 지워버릴 기폭 장치였다.

"엔트로피 평형을 강제로 마이너스로 떨어뜨린다."

도진이 중얼거렸다.

"뭐라고요?"

설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도진은 설명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는 시스템 독점 상점의 인터페이스를 활성화했다.

웅-

눈앞에 가상 스크린이 반투명하게 펼쳐졌다.

[독점 상점 라이선스: 등급 F (인과율 채무 상태)] [현재 누적 인과율 채무: 98.2%] [경고: 채무 제한선 임박.]

도진은 화면을 거침없이 슬라이드하여 '태초의 영토 진흙'의 가변 속성 설정 창을 열었다. 고대 문명의 설계도를 임대하고 물질을 개조할 수 있는 권한이 독점 상점의 핵심 기능 중 하나였다.

"시스템. 태초의 영토 진흙의 구조식을 '역위상 흡수체'로 재연산해라."

[명령 수신. 해당 변환을 위해서는 추가적인 인과율 연산력이 필요합니다.] [요구 칼로리: 150 kcal (보유량 부족으로 인한 인과율 채무 자동 양도)] [경고: 이 명령을 수행할 경우, 누적 인과율 채무가 임계치를 초과합니다!]

"강행한다."

도진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조차 없었다.

[경고! 인과율 채무율이 임계점을 돌파합니다: 98.2% -> 100.0%] [위험! 역전위 유령 마나 발현 조건 충족. 시스템 강제 포맷 시퀀스가 가동 대기 상태에 진입합니다.]

찌르르릉!

도진의 척추를 타고 전율이 흘렀다. 혈관 속을 흐르는 마나가 갑자기 얼음물처럼 차갑게 식어 내리는 감각. 피부 표면에 미세한 푸른빛의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역전위 유령 마나가 그의 육체를 구성하는 분자 결합을 느슨하게 만들기 시작한 징후였다.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투명해지며 바스러지려는 찰나였다.

"도진 씨! 손이...!"

설아가 경악 어린 비명을 질렀다.

[03:45]

"괜찮습니다. 예정된 물리 현상일 뿐입니다."

도진은 차갑게 대꾸하며 변환된 '태초의 영토 진흙'을 양손으로 쥐었다. 이제 진흙은 단순한 액체 형태가 아니었다. 그것은 주변의 모든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암흑의 소용돌이 기하학적 구체로 변해 있었다.

그는 한 걸음씩 던전 코어를 향해 걸어갔다.

상공에서 내려온 패러독스 프로텍터의 촉수 하나가 도진의 어깨를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쏘아져 내려왔다. 공기를 찢는 파열음이 고막을 때렸다.

"비키세요."

도진은 상체를 단 5cm 왼쪽으로 기울여 촉수의 궤적을 피했다. 스쳐 지나간 촉수의 풍압만으로도 뺨에 붉은 핏줄기가 그어졌지만, 그의 눈동자는 고정되어 있었다.

코어의 정중앙.

그는 양손에 쥔 역위상 진흙을 코어의 룬 문자 중심부에 밀어 넣었다.

푸수우우우-!

뜨거운 달궈진 철판에 물을 부은 듯한 기괴한 소음이 제어실 전체를 메웠다.

코어에 새겨진 붉은 룬 문자들이 진흙과 접촉하는 순간, 격렬하게 요동치며 검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에너지가 방출되는 것이 아니라, 진흙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시스템 알림: 고대 제어 코어의 마나 엔트로피 급감 감지.] [엔트로피 수치: 87% -> 54% -> 12%...]

"말도 안 돼... 마나가 역류하고 있어?!"

가상 통신망의 스피커를 통해 엘라의 경악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평소의 빈정거리던 오만함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극히 기계적이면서도 생생한 당혹감이었다.

"강도진! 너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채무 한도를 넘겨서 역전위 유령 마나를 발생시켜 놓고, 그걸 코어의 자폭 에너지와 상쇄시키고 있는 거야?!"

"정확한 계산입니다, 엘라."

도진은 피가 흘러내리는 뺨을 닦지도 않은 채 답했다.

"자폭 시퀀스는 초고농도의 양(陽)의 엔트로피 폭주입니다. 반면 내 몸에서 발생하기 시작한 역전위 유령 마나는 물질을 분해하는 음(陰)의 엔트로피죠. 두 이질적인 시스템 에너지를 태초의 영토 진흙이라는 고차원 매개체를 통해 1대 1로 충돌시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이, 미친... 두 에너지가 서로를 잠식하면서 평형 상태가 된다고? 하지만 그건 소수점 아래 여섯 자리까지 완벽하게 주파수를 맞추지 않으면 양쪽 모두 폭발해서 서울 전체가 날아갈 도박이야!"

"그래서 맞췄습니다."

도진의 시야 속 분석 렌즈가 미친 듯이 연산 수식을 토해내고 있었다.

[00:05] [00:04] [00:03]

도진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유령 마나와 코어의 붉은 열기가 진흙 속에서 격렬하게 소용돌이치며 보라색의 불꽃을 일으켰다.

손가락 뼈가 비쳐 보일 정도로 투명해지던 도진의 손이, 서서히 실체를 되찾기 시작했다. 두 파괴적인 에너지가 서로를 갉아먹으며 완벽한 영(0)의 상태로 수렴해 가고 있었다.

[00:02]

턱.

지독하게 붉은색으로 깜빡이던 타이머가 단 '2초'를 남겨두고 정지했다.

제어실을 가득 채웠던 붉은 섬광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공중에 떠 있던 패러독스 프로텍터의 촉수들이 힘을 잃고 연기처럼 바스러져 내렸다.

정적.

오직 도진의 거친 호흡 소리와 코어가 동결되며 내뿜는 차가운 서기만이 제어실 바닥에 깔렸다.

[시스템 알림: 엔트로피 평형 완료.] [자폭 프로토콜이 강제 동결되었습니다.] [시공간 동기화 오류가 해제되며, 강동 F-3 구역의 공간 데이터가 안정화됩니다.] [인과율 채무율이 임계점 이하로 안전하게 재조정됩니다: 100.0% -> 42.1% (상쇄 처리 적용)]

도진은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는 꼿꼿이 선 채로 자신의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손실된 에너지는 없었다. 오히려 코어의 폭주 에너지를 흡수하여 채무의 상당 부분을 탕감받는 데 성공했다. 계산대로였다.

"하... 하하..."

가상 화면 속에서 엘라의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홀로그램 형상이 도진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었다. 그녀의 이마에 맺힌 가상의 식은땀 입자들이 파르르 떨렸다.

"인류라는 하등 지성체의 뇌에서 이런 연산 제어가 가능하다고? 시스템의 취약점을 역이용해서 채무를 상쇄시키다니... 진짜 괴물 같은 놈이네."

엘라의 눈동자에 서린 조롱은 이제 경외감과 진득한 흥미로 바뀌어 있었다. 그녀는 도진의 기계적 합리주의에 완전히 굴복한 듯, 길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인정할게. 넌 이 상점을 다룰 자격이 있어. 아니, 어쩌면 이 시스템 자체를 통제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띡. 띡. 띡.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푸른색의 시스템 코드들이 나비처럼 날아올랐다.

[조건 달성: 시스템 가이드라인을 초과하는 개척 연산 증명.] [독점 상점의 상위 카테고리 '기밀 설계 탭'의 잠금이 해제됩니다.] [상위 라이선스 권한 일부가 사용자 '강도진'에게 이양됩니다.]

도진의 시야에 새로운 인터페이스 창이 활성화되었다. 이전에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던 황금빛 탭들이 일제히 열리며, 고대 문명의 정수가 담긴 푸른색 청사진들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그중에서도 정중앙에 떠오른 단 하나의 설계도가 도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독점 설계도: 엔트로피 감쇄 벽 (Entropy Attenuation Wall)] - 등급: 고대 유물 규격 - 기능: 감시 및 간섭 완벽 차단. 외부 부하 피드백의 충격파를 100% 흡수 및 열에너지로 재환원. - 설명: 우주 수확 알고리즘의 눈을 멀게 하는 궁극의 장벽. 이 장벽이 설치된 영토는 시스템의 '포맷' 권한으로부터 영구히 격리된다.

도진의 심장이 미세하게 빠르게 뛰었다.

이것이다.

그가 기선우의 '앱솔루트 오더'에 맞서 강동구에 구축하려 했던 완벽한 세이프존의 심장. 단 한 명의 무고한 유실자도 발생하지 않는 오아시스를 만들기 위한 물리적 기초가 마침내 그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도진 씨..."

뒤에서 설아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지만, 도진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기묘한 경외감과 신뢰가 깃들어 있었다.

자신들을 도구로 평가하는 그의 계산법이 오싹하면서도, 그 계산이 단 한 번의 오차도 없이 자신을 살려냈다는 사실이 그녀로 하여금 그를 따르게 만들었다.

"이제... 끝난 건가요?"

"아니요."

도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시선은 벌써 제어실 입구 쪽을 향해 있었다.

"동결의 여진이 시작됩니다."

쿠구구구구-!

코어가 정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누적되었던 마나의 물리적 압력이 빠져나가며 제어실 천장의 거대한 석조 기둥들이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육중한 돌덩어리들이 바닥으로 추락하며 사방으로 먼지 폭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도진이 경계한 것은 단순한 붕괴가 아니었다.

지이잉-!

그의 분석 렌즈에 던전 외곽으로부터 다가오는 거대한 금속 반응들이 포착되었다.

단순한 괴수의 반응이 아니었다. 극도로 정제된 마나 엔진의 구동음. 그리고 차갑고 묵직한 강철이 지반을 짓이기며 굴러오는 소리였다.

콰르릉! 콰콰쾅!

제어실 입구의 석벽이 통째로 박살 나며 먼지 구덩이 속에서 기괴한 형상의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거대한 철갑 수레였다.

사방에 날카로운 회전 칼날이 돋아 있고, 전면에는 마도 포신이 장착된 살인 병기. 수레의 측면에는 붉은색 도료로 정교하게 그려진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수평의 천칭.'

앱솔루트 오더의 문장이다.

"찾았다. 규격 외의 소요를 일으키는 버그 개체들."

철갑 수레 위에서 전신을 은색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가 검을 뽑아 들며 차갑게 선언했다. 그의 뒤로 수십 명의 마도 저격수들이 일제히 총구를 겨누며 제어실을 겹겹이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빛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오직 '생존율 90%를 위한 하위 10%의 제거'라는 의회의 신념만이 서려 있을 뿐이었다.

"의회의 명령이다. 강도진, 그리고 백설아. 인류의 존속을 저해하는 불안정 요소를 이 자리에서 즉시 처형한다."

사방을 포위한 적들의 총구에서 마나의 푸른 불빛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탈출구는 완전히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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