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마나 측정기의 황동색 지침이 가리킨 각도는 정확히 도진의 미간이었다. 측정기 내부의 진공관이 가열되며 발생하는 미세한 고주파 음이 고막을 찔렀다. 게이트의 잔류 마나 스파크가 허공에서 파지직 소리를 내며 사그라지는 찰나, 검은색 코트를 걸친 감시관 삼인의 그림자가 도진과 설아의 발끝까지 길게 늘어졌다.

"움직이지 마라. 측정기 센서의 마나 동기화율이 98%를 초과했다. 비정상 변이 반응이다."

선두에 선 감시관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그의 가슴팍에 새겨진 날카로운 저울과 검의 문양이 게이트의 백색 광에 반사되어 번뜩였다. 앱솔루트 오더의 하부 실행 부대. 그들은 생존 가치가 입증되지 않은 모든 변수를 현장에서 정화하는 도구들이었다.

설아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녀의 폐포가 수축하며 내쉬는 가쁜 숨결이 도진의 목덜미에 닿았다. 그녀의 심박수는 분당 134회까지 치솟아 있었다. 이대로 스캔이 완료되면 D급 변이 보스의 사체에서 흘러나온 고농도 마나 입자가 도진의 호흡기와 피부 표면에 잔존해 있다는 사실이 실시간으로 연산 장치에 기록될 터였다. 그것은 곧 즉각적인 구금과 해부를 의미했다.

도진의 안구 너머로 푸른색의 시스템 인터페이스가 조용히 명멸했다.

[보유 칼로리 데이터: 1,450 kcal] [현재 인과율 채무 등급: 임시 계정 (부하율 12%)]

'시간적 여유는 4.2초.'

도진은 뇌 세포의 연산 속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감시관들이 쥐고 있는 측정기는 대상의 생체 마나 방출량과 대기 중의 엔트로피 변화를 교차 검증하는 기계식 아날로그-디지털 하이브리드 연산기였다. 그렇다면 방출되는 마나의 파형 자체를 상쇄하는 것이 아니라, 마나의 존재 자체를 시스템적으로 '유실'된 데이터로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도진이 마음속으로 상점 카테고리를 급격히 스크롤했다. 허공에 소리 없이 정렬되는 수천 개의 고대 설계도와 개념 무기들 사이에서, 그의 시선이 하나의 임대 품목에 고정되었다.

[대여 항목: 잔여 마나 유실 가리개 (Residual Mana Dissipation Shroud)] - 등급: 고대 하급 개념 장치 (라이선스 등급 F) - 기능: 장착자의 신체 표면에서 방출되는 모든 마나 파형의 칼로리 환산 가치를 임시적으로 '0'으로 수치 제어함. - 대여 비용: 350 kcal / 10분 - 인과율 부하 피드백: 사용 즉시 주변 50m 이내의 마나 밀도가 1.4배 일시 상승함.

'단순한 가림막이 아니다. 마나를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나의 가치 측정 평형을 강제로 0으로 고정하는 개념 왜곡기군.'

합리적인 지출이었다. 정보 유출로 인한 신체 소멸 확률 99.8%를 단 350칼로리로 무효화할 수 있다면, 이 거래의 투자 대비 효율성은 극대화된다.

[계약을 체결하시겠습니까?] [주의: 대여 완료 시 '부하 피드백'으로 인해 게이트 주변의 대기 마나가 일시적으로 자극을 받습니다.]

'승인.'

도진의 신경망을 타고 서늘한 전류가 흘렀다. 그의 심장 고동 소리가 고막을 두드리는 순간, 그의 피부 표면을 감싸고 있던 미세한 마나 입자들이 마치 투명한 산성 용액에 녹아내리듯 급격히 중화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존재하되, 시스템의 물리 법칙상 '존재하지 않는 가치'로 연산 수식이 변조된 것이다.

위이이잉!

감시관이 쥐고 있던 황동색 측정기의 수정 구체가 돌연 거칠게 진동했다. 자색으로 빛나던 발광 다이오드가 순간적으로 꺼지더니, 이내 차가운 백색 등으로 전환되었다.

"어……?"

감시관의 손가락이 측정기의 보정 다이얼을 다급하게 돌렸다. 기어 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지만, 계기판의 지침은 무정하게도 왼쪽 끝을 가리킨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측정 수치: 0.00 µF (마이크로플럭스)] [대상 분류: 완전 무능력자 / 일반 민간인]

"이상하군. 방금 전까지 감지되었던 변이 마나 파형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측정기를 들고 있던 감시관이 미간을 찌푸린 채 도진을 쏘아보았다. 그의 시선은 도진의 낡은 가죽 재킷과 흙먼지로 범벅이 된 부츠를 훑어내렸다. 아무리 뜯어보아도 F급 하수구 청소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몰골이었다.

"기계 고장인가? 게이트 붕괴 여파로 필드 엔트로피가 급증해서 센서가 과부하를 일으킨 모양입니다."

뒤에 서 있던 다른 감시관이 장치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그 순간, '부하 피드백'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기 시작했다. 도진의 가리개가 가동된 대가로, 게이트 주변의 대기 마나 밀도가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했다. 웅, 하는 이명이 대기를 짓눌렀고, 바리케이드 너머의 수사관들이 들고 있던 고정식 대형 연산 장치들이 일제히 경보음을 울려대기 시작했다.

삐이이이-! 삐이이이-!

"경보! 게이트 내부가 아니라, 게이트 외부의 마나 평형이 깨지고 있다! 엔트로피 수치 급증!"

"전원 전투 대형으로 전환하라! 변이 보스의 잔재가 게이트 밖에서 2차 파동을 일으키는 것일 수도 있다!"

황동색 장치를 들고 있던 감시관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도진과 설아에게서 멀어졌다. 그들은 장치를 치켜들고 급격히 요동치는 허공의 균열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자신들이 쫓던 진짜 '변이의 원인'이 방금 전 제 발로 자신들의 눈앞을 지나쳐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였다.

"가자."

도진이 설아의 옷자락을 가볍게 잡아당기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설아는 멍한 눈으로 도진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그녀의 직관은 죽음의 그림자를 명백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진이 손가락 하나 까딱한 순간, 거대한 수사망이 마치 스스로 길을 비켜주듯 양옆으로 갈라진 것이다. 그녀는 소름이 돋는 팔을 감싸 안으며 도진의 뒤를 쫓아 빠른 걸음으로 게이트를 벗어났다.

바리케이드를 통과해 마포구의 무너진 콘크리트 잔해 사이로 숨어들 때까지, 도진은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가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고성능 판독 장치와 수십 명의 정예 수사관들이 한낱 F급 헌터의 조작된 데이터에 놀아나 엉뚱한 허공을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는 모습은, 그의 기계적인 뇌 깊은 곳에 기묘한 유희를 선사했다.

***

마포구 제3구역 대피소의 구석진 지하 보일러실.

콘크리트 벽면을 따라 흐르는 차가운 결로 현상 때문에 공기는 축축하고 비린 철분 냄새로 가득했다. 천장에 매달린 녹슨 파이프에서는 일정한 주기로 물방울이 떨어져 바닥의 웅덩이를 때리고 있었다. 탁, 탁, 탁. 규칙적인 소음만이 방 안의 적막을 채웠다.

설아는 보일러 본체에 몸을 기댄 채 주저앉아 있었다. 그녀의 오른쪽 허벅지 바지 깃은 이미 검붉은 혈흔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어간 상태였다. 게이트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억눌러 두었던 고통이 마침내 아드레날린 분비가 저하되면서 수면 위로 치솟은 것이다.

"아……윽."

그녀가 신음하며 상처 부위를 움켜쥐었다. 찢겨 나간 대퇴근 부위에서 미세한 마나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괴수의 이빨에 묻어 있던 변이 독소가 상처의 세포 조직을 괴사시키고 있는 징후였다.

도진은 그녀의 앞에 서서 렌즈를 통해 생체 정보를 스캔했다.

[대상: 백설아] - 생명력 수치: 34% (지속 감소 중) - 오염도: 변이 독소 2단계 (세포 괴사 진행률 14%) - 자산 가치 평가: 생존율 보존 시 향후 마포구 및 강동구 설계 데이터 확보의 핵심 가이드로 활용 가능. 손실 시 대체 자원 탐색 비용 2,400 kcal 소요 예상.

도진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그에게 백설아라는 존재는 단순한 동료가 아니었다. 험난한 고차원 던전의 규칙 속에서 자신의 생존율을 높여줄 정밀한 '투자 자산'이자, 변수를 통제하기 위한 유용한 도구였다. 자산의 가치가 소멸하기 전에 보존 조치를 취하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투자 행위다.

스윽.

도진이 상점 인터페이스를 열어 생체 복구 카테고리에서 아이템 하나를 선택했다.

[구매 항목: 나노 바이오 활성 겔 (Nano-Bio Activation Gel)] - 등급: 지구 기준 C급 연산 복구재 - 효능: 상처 부위의 세포 결합을 기하학적으로 재정렬하고, 이종 마나 독소를 분해하여 배출함. - 가격: 120 kcal

도진은 망설임 없이 구매 확정을 눌렀다. 그의 손바닥 위에 은색의 차가운 금속 튜브가 생성되었다. 그는 그것을 설아의 무릎 앞으로 툭 던졌다.

금속 튜브가 녹슨 바닥을 구르며 쨍그랑 소리를 냈다.

"발라라. 3분 이내로 괴사 진행이 멈출 거다."

설아는 바닥에 떨어진 튜브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들어 도진의 무표정한 눈을 응시했다.

"이거…… 굉장히 귀한 약이잖아요. 헌터 등급 B급 이상 전용 보급품 수준인데…… 왜 저한테 이런 걸 주시는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경계와 의아함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도진이 자신을 단순한 선의로 돕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길가에 다친 유기견을 가엾게 여기는 인간의 그것이 아니라, 정밀 기계의 마모된 부품을 수리할지 교체할지 저울질하는 기술자의 눈빛과 닮아 있었으니까.

"네 가치가 그 약의 가격보다 높기 때문이다."

도진이 벽에 기대어 서며 팔짱을 꼈다.

"너는 게이트 내부의 변이 구조를 육감적으로 감지해 냈다. 내 계산식보다 0.4초 빨랐지. 그것은 네가 시스템의 비정형 엔트로피를 추적하는 독특한 감각적 라이선스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다. 여기서 네가 사망하면, 나는 다음 던전에서 발생할 미지의 변수를 통제하기 위해 더 많은 칼로리를 소모해야 한다."

도진의 대답은 지독할 정도로 기계적이었고, 한 치의 감상도 섞여 있지 않았다.

"즉, 이 약은 너라는 생존 자산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감가상각 비용이다. 신뢰를 사기 위한 선급금이라고 생각해도 좋고."

설아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비정한 계산법이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가장 확실하고 투명한 보증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감정적인 동정은 언제든 변심으로 이어지지만, 철저한 이해관계에 기반한 계약은 배신하지 않는다.

"……지독한 계산기네요, 당신."

설아가 씁쓸하게 웃으며 튜브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상처 부위에 은빛의 겔을 도포하기 시작했다. 겔이 닿자마자 상처 부위에서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고, 찢어진 피부 조직이 기하학적인 그물망 모양으로 엮이며 빠르게 아물어 갔다.

그녀의 눈빛에 도진을 향한 기묘한 신뢰의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비록 기계적인 계산일지언정, 그는 자신을 확실하게 살려두는 유일한 존재였으니까.

***

설아가 약효에 취해 깊은 잠에 빠져든 지 한 시간째.

보일러실의 온도가 급격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입김이 하얗게 얼어붙을 정도의 한기가 공간을 지배하더니, 도진의 눈앞에 있는 매끄러운 공기 층이 마치 깨진 유리창처럼 쩍쩍 갈라졌다.

파지직, 파직.

자색의 미세한 스파크들이 회전하며 하나의 기하학적인 연산 구체를 형성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나풀거리는 검은 고딕 드레스를 입은 소녀의 형상이 홀로그램처럼 투사되었다.

독점 상점의 라이선스 딜러, 엘라였다.

"어머, 우리 가난하고 빚더미에 올라앉은 계약자님. 아주 영리하게 쥐새끼처럼 빠져나가셨네?"

엘라가 허공에 걸터앉아 다리를 까닥거리며 도진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는 인간의 생존 투쟁을 한낱 꼭두각시 놀음으로 여기는 지독한 조소와 흥미가 가득 담겨 있었다.

"잔여 마나 유실 가리개라니. 그런 하급 개념 장치를 그렇게 기만용으로 쓸 줄은 몰랐는걸? 지능이 높은 가축은 도축하기 까다롭다더니, 딱 그 꼴이야."

도진은 감정의 동요 없이 엘라를 응시했다.

"계약에 위배되는 행동은 없었다. 대여 비용은 내 소유의 칼로리로 정확히 지불했지."

"물론이지! 시스템은 절대 거짓말을 안 하니까."

엘라가 생글생글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도진의 시야에 붉은색 경고 텍스트가 거대하게 확장되며 나타났다.

[경고: 누적 인과율 채무 수치 87.4% 돌파] [주의: 채무 임계 수치(100%) 도달까지 남은 변환 칼로리: 180 kcal]

"하지만 장부를 좀 볼까? 가리개를 대여하면서 네 채무 수치가 상한선에 아주 아슬아슬하게 밀착했어. 이대로 던전 코어를 파괴해서 채무를 변제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내 예쁜 입으로 다시 한번 리마인드해 줄까?"

엘라가 도진의 귓가로 다가오듯 홀로그램 형상을 들이밀었다. 차가운 오존 냄새와 함께 그녀의 서늘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인과율 채무가 한도를 초과하는 즉시, 네 몸속을 흐르는 모든 마나는 '역전위 유령 마나(Reverse Phase Phantom Mana)'로 변환되기 시작할 거야. 그게 무슨 뜻이냐고?"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보랏빛의 미세한 마나 입자가 피어올랐다. 그 입자가 보일러실의 녹슨 철 파이프에 닿자, 아무런 물리적 충격도 없이 파이프의 금속 분자 결합이 해체되며 고운 붉은 먼지로 변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도진의 안구가 미세하게 수축했다. 물리적 타격이 아닌, 분자 구조 자체의 영구적인 붕괴였다.

"그래, 바로 이거야."

엘라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유령 마나는 물리적 실체가 없어서 그 어떤 방어막으로도 막을 수 없어. 네 몸 안에서부터 시작해서 주변의 모든 물질, 공기, 흙, 그리고 네가 그렇게 아끼는 동료들의 세포 조직까지 전부 분자 단위로 갈갈이 찢어발겨 분해해 버리지. 일종의 '존재 포맷'의 전조 증상이라고나 할까?"

"채무 변제 기한은?"

도진이 흔들림 없이 물었다.

"마포구 구역의 완전 포맷 카운트다운까지 남은 시간은 정확히 48시간. 그 안에 다음 타깃인 강동구 제어부 던전의 핵심 연산 구조를 파괴해서 에너지를 반환하지 않으면…… 펑! 서울의 동쪽이 우주 지도에서 깨끗하게 지워질 거야. 기대되지 않니?"

엘라는 도진의 냉정함이 무너지는 순간을 고대하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도진의 뇌는 이미 48시간이라는 제한 시간 동안 가용할 수 있는 자원과 동선, 그리고 강동구 던전의 연산 구조를 역설계하는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정보 제공은 고맙군. 채무 한도 돌파 시 발생하는 역전위 유령 마나의 붕괴 메커니즘을 전술적으로 활용할 방법이 생겼다."

"……하?"

엘라의 얼굴에서 순간적으로 장난기가 걷히고 황당함이 들어찼다. 그녀는 도진이 공포에 질려 구걸하거나 좌절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 인간은 시스템의 가장 치명적인 페널티이자 자멸의 징후마저도 '전술적 자원'으로 분류하여 계산기에 집어넣고 있었다.

"너, 정말 기분 나쁜 생명체구나."

엘라가 혀를 차며 홀로그램의 밀도를 낮추었다.

"어디 끝까지 버텨봐. 네 완벽한 계산식이 언제 가루가 되어 흩어질지, 내가 가장 높은 곳에서 팝콘이라도 먹으면서 지켜봐 줄 테니까."

파직! 하는 소음과 함께 엘라의 형상이 공기 중으로 비산했다. 보일러실의 온도가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도진의 시야에 남은 붉은색 카운트다운 수치는 멈추지 않고 줄어들고 있었다.

[047:59:52] [047:59:51]

***

지지직, 지직.

보일러실 선반 위에 놓여 있던 낡은 구형 진공관 라디오에서 갑작스러운 노이즈가 발생했다. 먼지 쌓인 스피커가 찢어지는 듯한 기계음을 내뱉더니, 이내 대한민국 행정안전부와 한국헌터협회의 공식 지정 비상 방송 채널의 주파수가 강제로 잡히기 시작했다.

- 아, 아. 국민 여러분께 알립니다. 본 방송은 초법적 질서 의회 '앱솔루트 오더'와 정부 합동 비상대책위원회의 특별 성명을 실시간 송출하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동요하지 마시고 비상 대피 지침에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지직거리는 소음 너머로, 차갑고 절제된 중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앱솔루트 오더의 의장, 기선우였다. 그의 목소리는 단 한 옥타브의 흔들림도 없이, 마치 신의 판결문을 낭독하는 대천사처럼 고요하고 잔인했다.

- 인류의 생존율 90% 달성을 위한 특별 정화 조치를 발표합니다.

설아가 기적적으로 눈을 뜨며 라디오 소리에 집중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짙은 긴장감이 서렸다.

- 현재 서울 동부, 강동구 하위 저개발 구역의 마나 엔트로피 누적치가 임계점을 초과했습니다. 해당 구역의 인구 대비 던전 제어 효율성은 현재 8.4%에 불과하며, 이는 인류 전체의 생존 확률을 3.2%포인트 하락시키는 심각한 시스템적 부하 요인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라디오 너머 기선우의 목소리는 기하학적 연산식처럼 정교했다.

- 이에 앱솔루트 오더 의회는 다수의 생존과 인류 종의 보존을 위해, 불필요한 하위 10%의 불안정 요소를 도려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금일부로 강동구 하위 구역 전체에 대한 '우주 시스템 강제 포맷' 승인을 연합 의회에 신청했음을 선언합니다. 포맷 예정 시각은 지금으로부터 48시간 뒤입니다.

"……뭐라고?"

설아의 입에서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강동구 하위 구역. 그곳은 갈 곳 없는 피난민들과 하위 등급 헌터들, 그리고 사회적 약자들이 모여 사는 거대한 판자촌이자 대피소 밀집 지역이었다. 그곳을 단순한 '효율성 미달'이라는 이유로 우주 시스템의 강제 포맷 권한을 이용해 완전히 소멸시키겠다는 선언이었다.

- 해당 구역의 주민들은 즉각적인 이주가 불가능하므로, 현 시간부로 강동구 전역을 폐쇄 격리 구역으로 지정합니다. 질서를 위한 고귀한 희생에 경의를 표합니다. 이상입니다.

라디오의 송출이 끊기고 지직거리는 정적만이 보일러실을 가득 채웠다.

도진의 안구 너머로 푸른색 연산망이 급격히 확장되었다.

강동구의 포맷 예정 시간은 48시간 뒤. 그리고 자신의 인과율 채무 만료 시간 역시 48시간 뒤.

두 개의 파멸적 카운트다운이 소름 돋을 정도로 정확하게 동기화되어 가리키고 있는 지점은 단 하나, 강동구 제어부 던전의 코어였다.

도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고 정교하게 빛나고 있었다.

"게임의 판이 깔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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