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면을 박차고 오르는 괴수의 거구가 대기를 짓눌렀다.
질량 약 2.4톤. 전면 투영 면적 4.2제곱미터. 변이 시스템이 주입한 초고밀도 마나가 괴수의 우측 견갑골과 흉쇄유돌근을 비정상적으로 팽창시키고 있었다. 단순한 돌진이 아니었다. 괴수가 도약하는 궤적을 따라 던전 내부의 대기압이 급격히 저하되었다. 고막을 찢을 듯한 진공 수축음이 고압 실린더가 터지는 소리처럼 고막을 때렸다.
[경고: 대상의 체내 마나 포화도 180% 돌파.] [물리적 충돌 시 예상 폭발 반경: 520m] [충돌까지 남은 시간: 1.8초]
도진의 시야 왼쪽 구석에서 황색 경고등이 초당 4회 빈도로 점멸했다.
그의 뇌세포는 이미 인간의 생리적 한계를 넘어선 고속 연산 영역에 진입해 있었다. 괴수의 돌진 각도는 수평선 대비 14도. 왼팔을 잃은 불균형을 메우기 위해 왼쪽 무릎의 내전근에 비정상적인 부하가 걸려 있었다. 도진은 오른손에 쥔 ‘임전용 개념칼날’의 가죽 손잡이를 다시 움켜쥐었다. 손바닥 가죽 표면에서 흘러나온 땀이 칼날의 미세한 진동 모터와 결착하며 둔탁한 마찰음을 냈다.
"142초."
개념칼날의 잔여 유지 시간이었다.
도진은 왼발을 축으로 몸을 35도 회전시켰다.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극심한 피로감이 뇌하수체를 자극했으나, 그의 안구는 오직 괴수의 흉골 정중앙, 붉게 점멸하는 D급 변이 코어의 기하학적 좌표만을 추적했다.
"엘라, 개념칼날의 출력 한계를 120%까지 오버클록한다."
귓가에서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홀로그램 나비가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 미쳤어? 네 미약한 인체 전도율로 그 출력을 버티겠다고? 심근경색으로 심장이 멈춰도 난 반품 안 받아줘, 계약자 씨.
"잔소리는 연산 효율을 떨어뜨려."
도진의 심박수가 분당 165회로 치솟았다.
개념칼날의 칼날 면에서 푸른 빛의 미세 전류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것은 마력이 아니었다. 공간의 물리적 결합 상수를 강제로 재조정하는 개념적 연산 수식의 시각화였다. 칼날을 고정 지탱하는 우측 완요골근의 미세 혈관들이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툭툭 터져 나갔다. 피부 표면으로 붉은 피가 배어 나왔지만, 도진의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콰아아앙!
괴수가 도약했다.
반사되는 그림자가 도진의 머리 위를 완전히 덮어씌운 순간, 도진은 무릎을 굽히며 지면과의 각도를 20도로 좁혔다. 괴수의 왼손 톱날 같은 손톱이 도진의 머리칼을 스치며 공기를 가르는 파열음을 냈다. 단 3센티미터의 격차.
그 찰나의 틈새로 도진은 개념칼날을 사선으로 밀어 넣었다.
스으으윽.
물리적인 저항감은 존재하지 않았다. 칼날이 괴수의 두꺼운 가죽과 마나 방어막을 통과하는 느낌은 끓는 물에 달궈진 나이프가 버터를 가르는 것보다 매끄러웠다. 개념칼날에 내장된 '상위 결합 해제' 연산이 괴수의 물리적 구조를 분자 단위로 단선시키고 있었다.
[개념 참격 성공.] [대상의 마나 순환 경로 74% 단선.] [인체 과부하 발생: 사용자의 근력 수치가 일시적으로 30% 감소합니다.]
"컥……!"
도진의 목구멍에서 비릿한 혈향이 울컥 솟구쳤다.
오른팔 전체의 신경망이 불타는 듯한 격통이 일었다. 등가교환의 대가였다. F급의 나약한 육체로 고차원 개념 무기를 기동한 대가는 신경세포의 일시적 괴사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이성은 통증을 단순한 '수치적 노이즈'로 분류해 억눌렀다.
괴수의 거구가 허공에서 요동쳤다. 물리적 결합을 잃어버린 괴수의 우측 반신이 기하학적으로 완벽하게 분할되며 바닥으로 쏟아졌다. 뼈와 살이 뜯겨 나가는 소리가 아니라, 유리창이 깨지는 듯한 건조한 파열음이 던전 내부를 채웠다.
퍽! 쿵!
반 토막 난 괴수의 상체가 바닥을 구르며 먼지를 일으켰다. 점막과 푸른 피가 사방으로 튀었지만, 도진은 먼지구름 속에서도 오직 단 하나의 중심점만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피를 흘리는 오른팔을 무감각하게 늘어뜨린 채, 왼손으로 칼날을 고쳐 쥐었다.
괴수의 가슴팍에서 노출된 D급 코어가 불규칙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자폭을 위한 임계점 도달까지 남은 시간은 45초.
도진은 주저 없이 칼날의 끝을 코어 중심부에 수직으로 내리꽂았다.
콰직!
붉은색 결정체가 산산조각이 나며, 그 안에 갇혀 있던 고밀도 마나 에너지가 도진의 손끝을 타고 역류하기 시작했다.
[시스템 알림: D급 변이 보스 '그림자 추적자'의 연산 구조를 완벽히 해체했습니다.] [에너지 구매력 고정 앵커(Energy Anchor) 가동.] [추출된 칼로리 데이터: 12,000pt] [현재 인과율 채무 상황 업데이트 중……]
* * *
던전 구석, 무너진 석축 잔해의 그늘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백설아는 무릎을 꿇은 채 눈 앞의 광경을 응시했다.
그녀의 가슴팍에 붙어 있는 D급 힐러의 문양은 이미 균열이 가 있었다. 그녀가 속해 있던 공략대는 괴수가 변이를 일으킨 순간 단 3분 만에 전멸했다. 대원들의 뼈가 으스러지고 비명이 낭자하던 생지옥 속에서, 그녀 역시 오른쪽 다리의 경골이 골절되어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던전에서 가장 무능하다고 소문난 F급 헌터 강도진의 뒷모습이었다.
"아……."
설아의 입술 사이로 마른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감각은 야생 동물에 가까울 정도로 직관적이었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 도진이 보여준 움직임은 강한 마력이나 초월적인 무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복잡한 수학 문제를 가장 단순한 공식으로 풀어내는 수학자의 손길 같았다. 가볍고, 비정하며, 소름 끼치도록 정밀했다.
도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설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피비린내 나는 사투를 끝낸 인간 특유의 흥분이나 안도감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차갑게 가라앉은 유리알 같은 시선이 그녀의 전신을 훑었다.
[개체 분석: 백설아 (D급 힐러)] [상태: 우측 경골 골절, 마나 고갈율 92%] [손실률 예상: 방치 시 42분 내 과다출혈 및 감염으로 사망 확률 87%] [투자 가치: 세이프존 구축을 위한 기초 생체 에너지 공급원 및 정신적 지지체로서의 확률 78%]
도진의 뇌내 연산 장치가 그녀를 '구해야 할 동료'가 아닌, '잔존 가치가 높은 자산'으로 분류했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도진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설아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도진의 온몸에서 풍기는 혈향과 차가운 마나가 그녀의 본능적인 공포를 자극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철저한 이성적 거동이 이 붕괴해 가는 던전 안에서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닻처럼 느껴졌다.
"강도진 씨……? 어떻게 그 괴수를 혼자서……."
"질문에 답할 여유는 연산 용량 낭비입니다."
도진은 그녀의 말을 가차 없이 자르며 품에서 상점 인터페이스를 호출했다. 허공에 푸른빛의 스크린이 떠올랐다. 일반적인 헌터들의 시스템 창과는 궤를 달리하는, 기하학적이고 복잡한 수식들로 가득 찬 독점 상점의 메인 화면이었다.
[에너지 구매력 고정 앵커 작동 결과] [확보된 칼로리: 12,000pt] [임전용 개념칼날 대여료 및 인과율 채무: 15,000pt] [잔여 채무: 3,000pt] [경고: 제한 시간 내 잔여 채무 미청산 시 서울시 마포구 행정 구역 포맷 시퀀스가 유지됩니다.] [남은 포맷 제한 시간: 8분 12초]
"역시 부족하군."
도진이 혀를 차며 주변의 잔해를 둘러보았다. 코어를 흡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스템의 인과율 채무는 완전히 탕감되지 않았다. 3,000포인트의 공백. 마포구 전체가 소멸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막기 위해서는 이 던전 내부에서 추가적인 '가치'를 찾아내야만 했다.
그때, 부서진 보스의 잔해 아래쪽에서 기이한 공진 주파수가 감지되었다.
도진의 왼쪽 눈에 내장된 고대 분석 렌즈의 격자무늬가 빠르게 회전하며 특정 좌표를 클로즈업했다. 흙먼지와 부서진 암석 사이에 반쯤 묻혀 있는 금속 물체였다.
"저건……."
도진이 다가가 흙을 털어냈다. 그것은 황동으로 만들어진, 지침이 부러져 나간 작은 나침반이었다. 외관상으로는 아무런 마력도 느껴지지 않는, 던전 쓰레기에 불과해 보였다. 일반적인 헌터라면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쳤을 물건이었다.
하지만 도진의 시야에는 나침반의 내부 기어들이 미세하게 맞물려 돌아가며, 던전 내부의 불안정한 시공간 균열을 실시간으로 추적하는 연산 구조가 투영되고 있었다.
[아이템 분석 중……] [명칭: 부러진 고대 기하학 나침반 (파손 상태)] [분류: 고대 문명 연산 장치] [시스템 판정 가치: 0G (일반 상점 기준 가치 없음)] [특이사항: 인과율의 비틀림 공간 및 은폐 마법의 궤적을 역연산하는 기능 보유.]
- 어머, 그걸 주웠네?
엘라가 도진의 어깨 위로 내려앉으며 조롱 섞인 어조로 속삭였다.
- 지침도 부러진 고물딱지를 어디다 쓰려고? 시스템 상점에서도 그건 고철값 10골드도 안 쳐줘. 그냥 포기하고 마포구가 날아가는 걸 구경하는 게 어때? 꽤 장관일 텐데.
"가치의 기준은 시스템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자가 정하는 거다."
도진은 조용히 나침반을 자신의 분석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비록 지금은 작동하지 않는 부품에 불과하지만, 이 장치가 가진 '인과율 추적' 기능은 추후 앱솔루트 오더의 은폐 기술을 무력화할 핵심 열쇠가 될 터였다. 그의 뇌세포는 이미 7단계 뒤의 미래까지 계산을 끝마치고 있었다.
"백설아 씨."
도진이 쓰레기 더미에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불렀다.
"예, 예?"
"당신이 소지하고 있는 마나 포션과 잔여 장비들의 총칼로리 용량을 계산하겠습니다. 장비를 전부 저에게 양도하십시오."
"장비를요? 하지만 이건 협회 지급품이라 함부로……."
"선택지는 두 가지입니다."
도진이 한 걸음 다가가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강요도,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단지 차가운 사실의 나열만이 존재했다.
"첫째, 장비의 명의를 보존한 채로 8분 뒤 마포구와 함께 분자 단위로 소멸한다. 둘째, 장비를 양도하고 생존 확률을 98.4%로 끌어올린다. 3초 내로 결정하십시오."
설아는 도진의 눈동자 속에서 기이한 확신을 읽었다. 그는 미친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연산식을 쥐고 있는 자의 눈빛이었다.
"……가져가세요. 어차피 다리가 부러져서 쓸 수도 없으니까요."
[백설아 소유의 D급 마도 외투 및 잔여 포션 양도 완료.] [전체 가치 환산 중……] [변환율: 3,200 칼로리 데이터 확보.] [인과율 채무 탕감 완료.] [잔여 마일리지: 200pt] [마포구 영구 포맷 시퀀스가 취소되었습니다. 연산 상태 정상 복구.]
머릿속을 짓누르던 붉은색 경고등이 마침내 청색의 안정 신호로 전환되었다.
도진은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압박감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오른팔의 통증 역시 연산 장치의 출력이 정상화되면서 완화되기 시작했다.
"계산 완료. 생존율 100% 확보했습니다. 나가시죠."
도진은 가볍게 백설아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의 손길은 지극히 효율적이고 조심스러웠으나, 거기에는 어떠한 인간적인 온기도 섞여 있지 않았다. 오직 부러진 뼈에 추가적인 손상을 주지 않기 위한 부축의 각도만이 정밀하게 계산되어 있을 뿐이었다.
* * *
던전 게이트 입구.
소용돌이치는 푸른색 포탈 너머로 마포구의 흐린 하늘이 보이고 있었다. 던전 내부의 붕괴 여파로 인해 게이트 주변의 대기는 여전히 불안정하게 요동치며 백색 마나 스파크를 일으키고 있었다.
"잠깐만요."
출구 바로 앞에 도달했을 때, 도진이 설아의 어깨를 붙잡아 걸음을 멈추게 했다.
"왜 그러세요?"
"게이트 외부의 마나 밀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습니다. 일반적인 대기 상태가 아닙니다."
도진의 고대 분석 렌즈가 게이트 너머의 공간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게이트 밖, 바리케이드 뒤편으로 검은색 코트를 입은 사내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들의 가슴팍에는 날카로운 저울과 검이 교차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한국헌터협회 산하의 특수 감시국. 그리고 그들을 지휘하는 것은 앱솔루트 오더의 하부 실행 부대원들이었다.
"비정상 변이 감지기를 가동하고 있군."
도진의 시야에 게이트 주변을 샅샅이 훑고 있는 황동색의 대형 연산 장치들이 포착되었다. 마포구 던전의 마나 엔트로피가 급격히 요동쳤던 원인을 추적하기 위해 협회가 파견한 정예 수사관들이었다.
"D급 변이 보스가 소멸하면서 방출된 인과율 파형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나가면 내 몸에 잔존하는 개념칼날의 마나 잔재와 당신의 급격한 마나 변화율이 실시간으로 동기화되어 발각됩니다."
설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럼 어떡해요? 여기서 붙잡히면…… 변이 보스를 혼자 잡았다는 게 알려지면 의회 녀석들이 가만두지 않을 텐데요."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앱솔루트 오더'는 통제 불가능한 규격 외의 강자나 버그 개체를 극도로 경계했다. 그들의 공리주의적 연산에 방해가 되는 변수는 조기에 '제거'하는 것이 그들의 정의였으니까.
게이트 너머에서 확성기를 통과한 기계적인 목소리가 던전 내부로 흘러 들어왔다.
"안쪽의 생존자들에게 알린다. 현재 마포구 제3번 던전은 비정상적 에너지 등락으로 인해 특별 격리 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전원 장비를 해제하고, 마나 측정기 앞으로 순서대로 도보 이동하라. 불응 시 즉각 사살할 권한이 부여되어 있다."
뚜벅, 뚜벅.
가죽 구두가 지면을 밟는 소리와 함께, 마나 측정기를 든 감시관들이 게이트 안쪽으로 천천히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손에 들린 측정기의 바늘이 도진과 설아가 서 있는 방향을 향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남은 거리는 불과 20미터.
도진의 안구 너머로, 수사관들의 정밀 분석 수식망이 붉은색 그물처럼 좁혀오는 모습이 실시간으로 전개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