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59:57]`
스마트폰 액정 위에서 가차 없이 깎여 나가는 붉은색 타이머.
소수점 아래의 밀리초 단위까지 깜빡일 때마다 이준의 우측 어깨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뼈와 인대 사이에 가솔린을 들이붓고 불을 붙인 것만 같은 작열감이었다.
쿵, 쿵, 쿵.
심장이 귓전에서 터질 듯이 요동쳤다. 이준은 오른팔을 왼손으로 꽉 움켜쥔 채, 백송고등학교의 높은 담벼락을 향해 달렸다. 가을밤의 밤공기가 폐부 안으로 칼날처럼 들이쳤다. 거칠게 몰아쉬는 숨줄기마다 쇠비린내가 섞여 나왔다.
`[시스템 경고: 과부하 부채 80% 누적]` `[우측 극상근 가동률: 88.5% → 72.1% 급감]`
시야 구석에 떠오른 반투명한 푸른색 장부의 수치가 실시간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단 한 번. 최태오의 슬라이더를 짓이기기 위해 타격 회계 장부의 '신체 강제 조율' 기능을 한계까지 끌어다 쓴 대가는 상상을 초월했다.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회귀하기 전, 자신의 야구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갔던 그 영구 파열의 전조가 어깨 안쪽에서 사납게 이빨을 드러냈다.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다. 절대로.’
이준은 이빨을 악물었다. 턱관절이 으스러질 듯한 압력이 가해졌다.
백송고 담장 너머, 어두운 학원가 골목 끝자락에 홀로 차갑게 빛나는 세련된 유리 건물이 보였다.
[ARENA MAX: Sports Rehabilitation Clinic]
최첨단 사설 재활센터, 아레나 맥스.
일반적인 고교 야구선수들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고가의 장비와 극비 프로그램을 보유한 곳이었다. 동시에 이곳의 센터장 한소희는 데이터와 스포츠 과학만을 신봉하는, 철저하리만치 차가운 분석가로 유명했다.
철컥.
이준은 어깨를 늘어뜨린 채 아레나 맥스의 무거운 유리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로비는 고요했다. 야간 진료 시간이 이미 끝난 듯, 안내 데스크의 조명은 꺼져 있었고 안쪽 물리치료실에서만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진료 끝났습니다. 예약 없이 야간에 들어오시면 곤란해요.”
안쪽에서 구두 굽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얀 가운을 걸친 여성이 차트를 정리하며 걸어 나왔다. 단정하게 묶어 올린 머리칼, 지적인 테 안경 너머로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 아레나 맥스의 센터장, 한소희였다. 그녀는 불쑥 침입한 이준의 백송고 야구부 바람막이를 흘깃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학생, 백송고 야구부는 우리 센터 공식 협력 구단이 아니야. 감독 서명이나 학부모 동의서 없이는 야간 긴급 스캔 안 받아 줘. 돌아가.”
한소희의 목소리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카르텔의 입김이 닿는 백송고 야구부에 대한 은근한 혐오가 묻어나는 어조였다.
이준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 더 다가가 한소희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려 턱끝에서 툭 떨어졌다.
“동의서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뭐?”
“지금 내 어깨를 스캔하지 않으면, 당신은 역대 최고의 임상 데이터 하나를 영영 놓치게 될 겁니다.”
이준의 목소리는 낮고 낮았지만, 이상할 정도로 확신에 차 있었다.
한소희는 헛웃음을 터뜨리려 했다. 고작 고등학생 야구선수 하나가 야간에 무단 침입해 늘어놓는 허풍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보안 요원을 호출하기 위해 데스크폰으로 손을 뻗은 그 순간이었다.
“우측 극상근 하부 관절막, 염증 지수 1.42.”
이준이 툭 던지듯 말했다.
한소희의 손가락이 송수신기 바로 위에서 뚝 멈췄다.
“삼각근 내측 미세 파열 0.87밀리미터. 회전근개 가동 범위 평상시 대비 16.4% 저하. 그리고 어깨 관절강 내 삼출액 고임 현상 발생.”
이준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의 시야에는 타격 회계 장부가 실시간으로 분석해 올리는 신체 수치가 정밀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우측 극상근 염증 수치 분석 완료: 1.42 Index]` `[미세 파열 영역: 0.87mm]`
이준은 그 수치를 그대로 입 밖으로 읊었을 뿐이었다.
한소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녀는 스포츠 의학계에서 뼈가 굵은 전문가였다. 환자가 자신의 주관적인 통증을 '아프다'라고 표현하는 경우는 수천 번 봤어도, 소수점 두 자리의 염증 지수와 밀리미터 단위의 파열 크기를 스스로 진단하는 인간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너, 방금 뭐라고 했어?”
“의심스러우면 저 뒤에 있는 프리미엄 초음파 기계로 직접 확인해 보시든가요.”
이준은 턱끝으로 안쪽 검사실을 가리켰다.
한소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성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밀어내고 있었지만, 이 고등학생의 눈빛에 담긴 기묘한 완벽주의와 오만이 그녀의 학구열을 자극했다.
“따라와.”
한소희가 가운을 펄럭이며 검실실로 발을 옮겼다.
이준은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검사실 중앙에 놓인 수억 원 호가하는 독일제 정밀 초음파 스캐너가 웅장한 구동음을 내며 켜졌다. 이준은 익숙하게 침대에 걸터앉아 오른쪽 바람막이 소매를 벗어 내렸다. 단단하게 갈라진 어깨 근육이 드러났지만, 관절 주변은 이미 붉게 상기되어 열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한소희가 차가운 젤을 이준의 어깨에 바르고 탐촉자를 가져다 댔다.
모니터 위로 흑백의 근육 섬유 영상이 빠르게 지나갔다. 한소희의 손길이 바빠졌다. 그녀의 눈동자가 모니터의 수치와 이준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사정없이 흔들렸다.
스캔 장비의 연산 장치가 화면 우측 하단에 정밀 분석 수치를 도출해 냈다.
`[Inflammation Index: 1.42]` `[Micro-tear: 0.87mm]`
완벽한 일치였다.
단 0.01의 오차도 없이, 이준이 구두로 고지한 수치와 초음파 장비의 스캔 결과가 소수점까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한소희는 탐촉자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소름이 돋아 팔다리의 솜털이 일어섰다.
“어떻게…… 어떻게 안 거지? 네 몸에 센서라도 박아 둔 거야? 아니면 사전에 다른 병원에서 스캔하고 온 건가? 그럴 리가 없어. 이 정도 급의 장비는 국내에 세 대뿐인데…….”
그녀는 혼란에 빠져 중얼거렸다. 고작 18세의 야구 유망주가 자신의 육체를 세포 단위로 통제하고 감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의학의 영역을 벗어난 초자연적인 데이터 통제력이었다.
이준은 한소희의 경악을 가만히 응시했다.
“말했잖습니까. 나를 완벽하게 관리하면, 당신은 전무후무한 데이터를 얻게 될 거라고.”
한소희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는 안경테를 치켜올리며 이준의 눈을 노려보았다. 이 소년은 단순히 치료를 받으러 온 환자가 아니었다. 무언가 거대한 판을 짜고 자신을 끌어들이려는 설계자였다.
“너, 보통 녀석이 아니구나.”
한소희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탐촉자를 내려놓았다.
“맞아. 네 말대로 이건 미친 데이터야. 내 평생 이런 정교한 신체 인지 능력을 가진 운동선수는 본 적이 없어. 하지만 백송고 야구부 카르텔이 널 가만두지 않을 텐데? 그 감독 녀석, 선수 하나 망가뜨려서 자기 실적 올리는 데 도가 튼 인간이잖아.”
그녀는 팔짱을 끼며 검사대 옆 캐비닛을 가리켰다.
“그리고 나 역시 위험한 도박은 하지 않아. 사실…… 내가 개인적으로 연구 중인 전용 나노 테라피 기술이 있어. 이름은 '아로마 나노 리커버리 세션'.”
한소희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근육과 인대의 미세 손상을 분자 단위로 빠르게 수복하는 특수 화학 세션이지. 하지만 임상 데이터가 극히 위험하게 부족한 상태야. 카르텔의 압박을 받는 백송고 선수들에게 투여했다가 문제라도 생기면 내 센터는 문을 닫아야 해. 그래서 비공식적으로 극소수에게만 테스트하고 있었지.”
이준의 눈빛이 깊어졌다.
‘아로마 나노 리커버리 세션.’
타격 회계 장부가 요구하는 '피로도 부채'를 단숨에 상환할 수 있는 완벽한 열쇠였다. 장부의 경고등을 끌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위험한 임상이라도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다. 어차피 이대로 일주일이 지나면 어깨가 파열되어 야구 인생이 끝장나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 임상 데이터, 내가 채워 주지.”
이준이 단호하게 말했다.
“뭐?”
“당신이 연구하는 그 세션의 완벽한 피임상자가 되어 주겠다는 뜻입니다. 내 몸의 수치는 소수점 단위로 당신의 모니터에 기록될 겁니다. 실패할 확률은 제로에 가깝습니다. 내가 내 몸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으니까.”
한소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배짱이 보통이 아니네. 고등학생 주제에 치료를 구걸해도 모자랄 판에, 나랑 거래를 하자고? 이 아레나 맥스의 1회 세션 비용이 얼마인지 알고나 하는 소리야?”
“돈이라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이준은 침대에서 내려와 한소희가 서 있는 테이블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큰 체구가 한소희의 시야를 압도하듯 뿜어내는 기세가 대단했다. 이준은 테이블을 두 손으로 짚고 상체를 숙였다. 그의 매서운 눈빛이 한소희의 안경 너머 눈동자를 꿰뚫었다.
실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압박.
이준은 과거 32세의 베테랑 타자로서 겪었던 산전수전을 모두 담아 한소희를 몰아붙였다. 이것은 구걸이 아니었다. 동등한, 아니 오히려 우위에 선 자의 침묵逼供 협상이었다.
“나를 완벽히 관리해 주십시오.”
이준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 대가로, 당신의 아레나 맥스는 카르텔이 지배하는 이 얄팍한 고교 야구 판때기를 넘어설 겁니다. 내가 메이저리그 무대에 서는 순간, 이곳은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독점 신체 설계소’로 전 세계에 이름을 떨치게 될 테니까.”
메이저리그.
고등학생의 입에서 나온 단어치고는 너무나도 거대하고 황당한 포부였다. 하지만 한소희는 웃을 수 없었다. 이준의 눈 속에 담긴 집념과 확신, 그리고 방금 확인한 초자연적인 신체 데이터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소년은 진짜다.
진짜 괴물이 자신의 발로 아레나 맥스를 찾아온 것이다.
한소희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스포츠 과학자로서의 본능이 그녀의 뇌리를 강타했다. 이 기회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이라는 직감이 온몸을 지배했다.
“……미치겠군.”
한소희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책상 서랍을 열어 두꺼운 서류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아레나 맥스의 극비 임상 및 독점 재활 관리 계약서였다.
“싸인 해. 대신 이 계약은 철저히 비밀이야. 백송고 감독이나 학부모 카르텔 귀에 들어가는 순간, 우리 둘 다 끝장나는 거니까.”
탁.
한소희가 붉은 인패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준은 망설임 없이 오른손 엄지에 붉은 인장을 묻혔다. 그리고 계약서의 가장 아랫부분, 자신의 이름 옆에 꾹 눌러 찍었다.
지장이 선명하게 찍히는 순간, 이준의 시야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군 동맹 체결 완료: 한소희 (아레나 맥스)]` `[피로도 부채 상환 경로 활성화: 아로마 나노 리커버리 세션]` `[현재 부채 잔액: 80%]`
어깨의 타는 듯한 통증이 아주 미세하게 누그러지는 기분이 들었다. 완벽한 통제 하에 들어왔다는 안도감이 이준의 뇌리를 스쳤다.
“좋아, 계약은 성립됐어.”
한소희가 계약서를 거두며 차갑게 말했다.
“이제 정밀 스캔을 마무리하고 첫 세션 스케줄을 잡지. 다시 누워 봐.”
이준은 다시 검사대에 누웠다. 한소희는 초음파 탐촉자를 다시 쥐고 이준의 어깨 안쪽, 그리고 목덜미와 승모근이 이어지는 연결 부위로 스캔 영역을 넓혔다.
스캐너의 연산 속도가 빨라지며 모니터에 더 깊은 층의 근육 다발들이 입체적으로 구현되기 시작했다.
삐비빅. 삐비빅.
갑자기 기계에서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렸다.
초음파 모니터 화면에 나타난 승모근과 극상근의 경계면이 온통 붉은색과 보라색 노이즈로 뒤덮여 있었다. 근섬유들이 마치 거칠게 꼬인 쇠밧줄처럼 엉망진창으로 엉켜 있는 모습이었다.
한소희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그녀는 모니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 너 이게 무슨 상태인지 알고나 있는 거야?”
그녀의 목소리가 경악으로 크게 갈라졌다.
“승모근 섬유들이 극단적으로 꼬여서 극상근을 짓누르고 있어! 뼈와 인대 사이의 공간이 아예 사라졌다고!”
한소희는 이준의 어깨를 짚으며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너, 당장 내일부터 시합 뛰면 어깨뼈가 진짜 완벽히 조각난 채 은퇴하게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