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아아악! 살려줘! 나 여기 있어! 옆에 있는 거 내가 아니야아아악!"
수직 난간부의 까마득한 구렁텅이 밑바닥으로부터 솟구쳐 오른 비명은 고막을 찢을 듯이 날카로웠다.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소름 돋는 음색, 숨이 넘어가는 불규칙한 호흡마저 영락없는 한소희의 것이었다.
준우의 손을 잡은 채 생긋 웃고 있는 가짜 소희의 입꼬리가 귀밑까지 찢어졌다. 살을 에는 듯한 냉기가 그녀의 손끝에서부터 준우의 손목으로 스며들었다.
"준우 씨!"
강도진이 권총을 겨누며 외쳤다. 그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짜 소희는 준우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목을 백팔십도 꺾어 준우를 올려다보았다.
"오빠, 저 밑에서 내가 울고 있잖아. 안 내려갈 거야?"
찢어진 입술 사이로 붉은 점액이 흘러내렸다.
준우는 숨을 들이쉬지 않았다. 심박수는 분당 70회를 고요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가짜 소희의 얼굴이 아니라, 자신의 왼쪽 손목시계형 단말기로 향했다.
그곳에는 소희의 스마트폰 메시지창에 미수신 상태로 예약 설정해 두었던 기이한 미래 송신 코드가 깜빡이고 있었다.
[0x7F4B - SAFE - SECURE_ROOM_01]
소희가 대피 시설로 지정된 지상 보안실에 안전하게 도착해 시스템에 접속하는 순간 자동으로 발신되도록 준우가 심어둔 양방향 검증 코드였다. 수직 통로의 가상 좌표와 차단벽 분쇄 신호를 추적하는 역발상 단서가 방금 막 활성화된 것이다.
진짜 소희는 지상에 있다.
"주파수 대역폭 240.15헤르츠."
준우가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인공지능 보이스 변조 엔진도 이것보다는 자연스러운 배음을 섞지. 사령의 음성 합성 기술이 겨우 이 정도라니, 세무조사 고지서를 보낼 가치도 없군."
준우는 가짜 소희의 손을 사정없이 내팽개쳤다. 동시에 품에서 [계율 대장]을 꺼내 들었다.
가짜 소희의 형상이 노이즈가 낀 텔레비전 화면처럼 지직거리며 일그러졌다. 비명 소리는 함정이었다. 침입자의 평정심을 무너뜨려 자멸하게 만들려는 모방귀신의 변칙적인 사냥 방식이었다.
"강 팀장님, 귀 막을 필요 없습니다. 가짜니까."
"알고 있었습니다. 저런 엉성한 목소리에 속아 넘어갈 만큼 우리 보안팀이 호락호락하지는 않죠."
강도진이 짧게 답하며 준우의 옆으로 다가섰다.
준우는 주머니에서 강도진이 건넸던, 고장 나서 방출된 아파트 구형 마스터 스마트키를 꺼냈다. 플라스틱 표면이 닳아 빠진 이 낡은 기기는 단순한 쓰레기가 아니었다.
"이 열쇠, 지하 제어반의 수동 차단벽을 오버로드할 수 있는 아날로그 주파수를 품고 있더군요."
준우가 구형 마스터키의 칩 부분을 계율 대장의 가죽 표지에 가볍게 마찰시켰다.
스파크가 튀었다. 찌르르하는 고주파 음이 동굴 벽면을 때렸다. 계율 대장에 기록된 손각시의 음기가 마스터키의 구형 회로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기기의 LED 창에 푸른빛이 가득 차올랐다. 고장 났던 기기가 아파트 지하 전체의 물리적 격리벽을 강제 오버로드하는 만능 열쇠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하강합니다."
준우가 거침없이 난간 너머의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미쳤군!"
강도진이 혀를 차면서도 지체 없이 준우의 뒤를 따라 로프를 움켜쥐고 하강했다.
수직 통로의 금속 벽면들이 빠른 속도로 위로 솟구쳤다. 하강하는 도중, 준우의 눈에 엘리베이터 승강로 내벽이 보였다. 그곳에는 2화에서 확인했던, 동 미러 내부의 고정된 번개 모양의 미세한 음양 전도 규격 균열 흔적이 고스란히 연장되어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콘크리트 균열이 아니었다. 입주자대표회의가 귀신들의 음기를 아파트 전체로 송출하기 위해 정교하게 설계한 일종의 영적 도파관이었다.
"규격 외 무단 증설 선로 확인."
준우가 하강하는 와중에도 계율 대장을 허공에 펼쳤다. 장부의 백지가 거칠게 넘어가며 붉은 낙인 같은 활자들이 새겨졌다.
"아파트 공동 관리 규약 제42조, 공용 부분의 무단 변경 및 불법 시설물 설치 금지. 이를 위반한 자의 영적 전력 및 음기 자원을 이 자리에서 전량 역압수한다."
탁!
준우가 허공에서 번개 모양의 균열에 구형 마스터키를 갖다 대었다.
지이이이잉!
벽면 전체에서 흐르던 붉은 노이즈가 순식간에 차단되며, 역류한 에너지가 계율 대장의 에너지 수치로 전환되었다. 수직 통로를 가득 채우고 있던 기괴한 하강 풍이 거짓말처럼 멈추고, 두 사람은 제사 동굴의 바닥에 부드럽게 착지했다.
바닥은 축축한 진흙과 썩은 피 냄새로 진동했다.
동굴 중앙에는 거대한 콘크리트 제단이 솟아 있었고, 그 주위로 수십 개의 횃불이 일렁이고 있었다. 제단 위에는 고급스러운 실크 한복을 걸친 여자가 서 있었다.
입주자대표회의 회장, 신옥주였다.
그녀의 손에는 검붉은 액체가 담긴 청동 잔이 들려 있었다. 잔 속에 담긴 것은 단순한 피가 아니었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 실종된 주민들의 생명력과 사령의 정수가 뒤섞인 영약이었다.
"결국 여기까지 기어 들어왔구나, 쥐새끼들이."
신옥주가 잔에 담긴 영약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녀의 목줄기가 순간적으로 검게 변했다가 다시 원래의 고운 피부로 돌아왔다. 그녀의 두 눈에는 기이한 황금빛 안개가 서려 있었다.
"과대망상증 환자치고는 환영 인사가 너무 거칠군요, 신 회장님."
준우가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걸어 나갔다.
"환영이라니? 이건 엄연한 자산 관리 회의란다."
신옥주가 차갑게 웃으며 제단 난간을 짚었다.
"이 아파트의 평당 가격이 얼마인지 아느냐? 이곳의 품격과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희생이 필요한 법이지. 일부 하층 입주민들, 가치 없는 인생들의 피를 조금 바쳐서 이 거대한 천국이 영속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정당한 세금이자 특별 관리비에 불과해."
그녀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죄책감도 없었다. 오히려 거대한 제국을 통치하는 군주와 같은 자아도취적인 오만이 가득 차 있었다.
"세금이라."
준우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재미있는 비유군요. 하지만 세금은 법적 근거가 있어야 징수할 수 있는 겁니다. 귀하가 집행하는 그 '특별 관리비'는 영적 사기 분양에 가깝지 않습니까?"
"뭐라구?"
"강 팀장님, 1화에서 우리가 확보했던 엘리베이터 비공식 행동 수칙 기억하십니까?"
준우가 품에서 낡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아파트 주민들 사이에서 비밀리에 유포되던, 붉은 볼펜 자국이 지저분하게 그어진 수칙서였다.
"이 수칙서 하단에 적힌 의문의 붉은 볼펜 자국. 처음에 저는 이것이 단순한 낙서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가문의 계율 대장과 대조해 본 결과, 이것은 이 땅의 원래 소유자이자 제단을 봉인했던 우리 한씨 가문의 '거부권 행사 표식'이었습니다."
신옥주의 얼굴에서 여유로운 미소가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이 땅의 지맥을 통제하고 귀신과의 임대차 계약을 체결할 권한은 본래 우리 가문에 있었습니다. 귀하와 저 모방귀신이 체결한 제단 계약은, 진짜 소유자의 동의를 받지 않은 명백한 무권대리 계약입니다. 즉, 원천 무효라는 소리죠."
"닥쳐라! 이 하찮은 가문의 잔재가 어디서 감히……!"
"또한."
준우는 신옥주의 말을 가차 없이 잘랐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법정에서 판결문을 낭독하는 판사처럼 냉혹하고 정교했다.
"귀하가 계약의 근거로 삼은 고대 비망록의 조항을 검토해 본 결과, '제물로 바쳐진 자의 영혼은 귀신에게 귀속된다'고 되어 있더군요. 하지만 대한민국 민법 제103조에 의거,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위반한 사항을 내용으로 하는 법률행위는 무효입니다. 영적 세계의 인과율 역시 이 보편적 정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준우가 계율 대장을 높이 치켜들었다.
"이에 본인, 한씨 가문의 정당한 상속자이자 계율 대장의 영수권자 한준우는, 귀하가 체결한 모든 불법 계약의 무효를 선고합니다. 더불어, 그동안 불법으로 편취한 아파트 주민들의 영적 자산과 음기 결계의 소유권을 이 자리에서 전부 압류합니다!"
콰아아앙!
계율 대장의 책장이 폭풍처럼 펄럭이며, 제단 사방에 설치된 횃불들이 일제히 푸른 불꽃으로 변했다.
"아아아악!"
신옥주가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제단에 흐르던 검은 영류가 급격히 역류하며 그녀의 육체를 옥죄기 시작했다. 그녀가 자랑하던 영생의 계약이, 준우의 정교한 법리적 파산 선고 앞에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이, 이놈이……! 감히 내 계약을 무가치하게 만들어?!"
"계약서 도장 찍기 전에 변호사 자문이라도 받지 그러셨습니까. 아, 귀신이랑 하는 거래라 불법 사채업자 수준의 약관밖에 없었겠군요."
준우가 차가운 독설을 내뱉었다.
"도진 씨, 지금입니다!"
"대원들, 사격 개시!"
강도진의 명령과 함께, 보안대원들이 일제히 제단을 향해 돌격했다.
그들의 총구에서 불빛이 뿜어져 나왔다. 탄환에는 준우가 역압수한 정화된 음기 에너지가 깃들어 있어, 신옥주를 지키기 위해 돌진하던 음기 병사들의 가슴을 정확히 꿰뚫었다.
푸스스스!
검은 연기로 변해 사라지는 사령들의 비명이 동굴을 가득 채웠다.
강도진은 군인 출신 특유의 절제된 동작으로 대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칼날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정화된 칼빛이 어둠을 가르고 음기 병사들의 목을 베어 넘겼다.
준우 역시 멈추지 않았다. 그는 계율 대장을 한 손에 쥔 채, 제단 중앙의 핵심 기둥으로 질주했다.
"그 제단 핵만 파괴하면 완전히 끝납니다!"
강도진이 외치며 신옥주의 마지막 호위병들을 가로막았다.
준우는 제단의 중심, 붉게 빛나는 거대한 원석 앞에 섰다. 그것이 바로 이 아파트 전체의 음기를 조율하고 모방귀신을 지상으로 끌어올리는 제단의 핵이었다.
"영수증 발행해 드리지요."
준우가 구형 마스터키를 제단 핵의 중앙 홈에 박아 넣었다.
"금액은 당신들의 파멸입니다."
우드드득!
마스터키를 통해 계율 대장의 모든 정화 에너지가 제단 핵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번개 모양의 균열이 원석 전체로 퍼져 나가며, 눈부신 백색 광운이 동굴 내부를 가득 채웠다.
콰구구구궁!
제단 핵이 사선으로 붕괴하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신옥주를 지탱하던 모든 음기 결계가 산산조각이 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안 돼……! 내 부가, 내 영생이……!"
신옥주는 바닥에 주저앉아 피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고귀하던 얼굴은 순식간에 늙어 가며 주름투성이로 변해갔다. 계약의 무효화로 인해 그동안 유예되었던 시간의 인과가 한꺼번에 그녀의 육체로 역류한 것이었다.
게임은 끝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신옥주의 눈빛에는 여전히 광기가 서려 있었다. 그녀는 무너진 제단 잔해 속에서 깨진 청동 잔의 날카로운 파편을 집어 들었다.
"한준우…… 너만은 살려두지 않겠다. 너와 네 동생, 그리고 이 아파트 전체를 내가 지옥으로 끌고 가마!"
"신옥주, 멈춰!"
강도진이 소리쳤으나 이미 늦었다.
신옥주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목을 그었다.
푸욱!
선명한 붉은 피가 제단의 붕괴된 틈새로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녀의 육체가 순식간에 메마른 미라처럼 변해갔고, 그 피는 지맥의 가장 깊은 곳으로 스며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자살이 아니었다. 자신의 영혼과 육체 전체를 매개체로 삼아 바치는, 최종적인 피의 계약이었다.
고오오오오—!
아파트 전체가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거대한 진동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수직 난간부 너머, 아파트의 중심 샤프트 구조 전체에서 기괴하고 거대한 영체가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파트의 콘크리트 벽면과 철골 구조물들을 비틀며 동화해 나가는, 모방귀신의 고대 본체였다.
지하 바닥이 갈라지며 엄청난 대폭발의 전조가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