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구구구구궁!
지반을 뚫고 솟구치는 진동은 단순한 지진이 아니었다.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진동은 뼛속의 골수까지 잘게 흔들어 놓았다. 지하 제단의 공기는 순식간에 섭씨 영하 이하로 급강하했다. 호흡을 뱉을 때마다 허연 입김이 서리태처럼 뿜어져 나왔다.
신옥주가 제 목을 그어 바친 피는 검푸른 지맥의 균열 속으로 사정없이 빨려 들어갔다. 그 피를 마신 아파트의 수직 샤프트가 콘크리트 비명을 지르며 뒤틀렸다. 49층 마천루의 거대한 뼈대인 철골들이 인간의 관절 꺾이는 소리를 내며 우그러들었다.
"이, 이게 무슨……!"
강도진이 비틀거리며 무너지는 기둥을 붙잡았다. 그의 등 뒤에 서 있던 보안대원 두 명이 굉음과 함께 쏟아져 내린 콘크리트 더미 아래로 처박혔다.
"팀장님! 다리가, 다리가 안 움직입니다!"
"크아악! 살려줘!"
무너진 거대한 난간 벽이 강도진의 허벅지와 대원들의 하반신을 무겁게 짓눌렀다. 2톤은 족히 넘을 콘크리트 덩어리였다. 짓이겨진 군화 사이로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위를 올려다보니, 수직으로 뻗은 엘리베이터 통로 전체에서 기괴하고 거대한 음기의 형체가 꿈틀거리며 기어 내려오고 있었다. 아파트 전체를 제 껍데기로 삼은 모방귀신의 고대 본체였다.
준우는 차가운 침묵 속에서 손에 쥔 가죽 장부를 펼쳤다. 계율 대장(契律 臺帳)의 누런 종이들이 광풍에 펄럭였다.
"지연이자 청구할 시간도 안 주는군."
준우가 읊조리며 품에서 붉은 볼펜 자국이 선명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1화에서 엘리베이터 비공식 행동 수칙 하단에서 찾아냈던, 정체불명의 낙서 같던 붉은 선들. 그것은 단순한 낙서가 아니었다. 가문의 선대가 남겨둔, 귀신의 변칙적인 행동을 규약상 '불법'으로 규정하고 강제 영수하기 위한 인과율 공식의 핵심 힌트였다.
여기에 강도진이 넘겨주었던 구형 마스터 스마트키를 결합한다. 고장 나 방출되었던 그 플라스틱 조각이, 지금 준우의 손안에서 지하시설 격리 제어벽을 강제로 오버로드하는 완벽한 열쇠로 작동하고 있었다.
"강 팀장, 엄살 부리지 말고 머리나 숙이십시오."
준우가 마스터키를 제단 바닥의 균열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동시에 엘리베이터 동 미러 내부에서 보았던 번개 모양의 미세한 음양 전도 규격 균열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그 균열은 입대위의 사설 청소부들이 결계를 조작해 들어올 때 사용하던 전력 통로였다. 역으로 그 통로를 타고 흐르는 음기를 정량적으로 압수하여 정화된 양전하 에너지로 치환한다.
파지직! 파지지직!
계율 대장에서 뿜어져 나온 백색의 정화 광운이 구형 마스터키를 타고 바닥으로 회오리쳤다.
"영수증 발행. 항목은 무단 점거 및 기물 파손에 대한 강제 집행."
쿠웅!
준우가 발을 구르자, 강도진과 대원들을 짓누르고 있던 거대한 콘크리트 난간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에 밀려나듯 허공으로 가볍게 튕겨 나갔다. 무거운 돌덩이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저 멀리 처박혔다.
"윽……! 고맙습니다, 한 선생!"
강도진이 다리를 절며 대원들을 부축해 뒤로 물러섰다. 그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인간의 힘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적이었다.
하지만 위기는 이제 시작이었다.
수직 샤프트의 어둠 속에서 수백, 수천 명의 곡소리가 겹쳐진 기괴한 음파가 쏟아져 내렸다. 아파트 환풍구와 스피커를 장악한 모방귀신이 준우의 이성을 찢어발기기 위해 가장 깊은 트라우마를 끄집어낸 것이었다.
[준우야…… 준우야…… 살려다오…… 왜 우리를 두고 혼자 살아남았니…….]
지하 동굴 전체를 가득 채운 것은 십여 년 전, 준우의 가문이 몰살당하던 참극의 날에 울려 퍼졌던 부모님의 비명이었다. 뼈가 바스러지고 사지가 찢기던 그날의 생생한 타격음과 피비린내가 공기 중을 떠돌았다. 준우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눈앞이 붉게 번지며 심장이 찢어질 듯한 통증이 찾아왔다. 악귀의 정신 공격이 그의 방어벽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때였다. 준우의 주머니 속 무전기가 거친 노이즈를 뿜으며 켜졌다.
치이이익—!
"아, 아! 마이크 테스트! 하나, 둘, 셋! 야, 거기 동굴 속에서 목청 자랑하는 음치 귀신 새끼들아! 들어라!"
무전기 너머에서 들려온 것은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유쾌하고 짱짱한 한소희의 목소리였다.
"~♪ 오빠를 버리고 간 귀신 놈들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난다네~♬ 에헤라디야~ 박자도 안 맞고! 창법은 완전 70년대 신파조에! 야, 요즘 트렌드는 힙합이거든? 어디서 구린 옛날 노래를 메들리로 틀고 자빠졌어!"
소희의 앙칼진 목소리가 지하 제단의 음산한 통곡 소리를 단숨에 찢어발겼다.
"소희야…… 너 지금 뭐 하는 거냐?"
준우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무전기를 바라보았다. 귓가를 맴돌던 기괴한 환청이 소희의 트로트 조롱 가사 한 소절에 맥없이 부스러져 내렸다.
"오빠 정신 차리라고 부르는 사랑의 세레나데지! 내 점수는요? 10점 만점에 귀신 놈들 창법은 마이너스 오백 점! 오빠, 저 구린 음치 새끼 아가리를 닥치게 만들어 줘! 고막 테러 당해서 나 귀에 피 날 것 같아!"
준우의 입꼬리가 가늘게 떨리며 비틀린 미소를 그려냈다.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트라우마가 남매 특유의 핀잔 속에서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동감이다. 창법이 너무 구식이라 지연이자 계산하는 내 지적 수준까지 떨어지는 기분이군."
준우가 차갑게 가죽 장부를 허공으로 던졌다.
"계율 대장 제7조, 무단 복제 및 상표권 침해 금지 조항 적용. 가중 부채 기능을 임시 소환 정지 조항으로 치환한다."
스마트폰 화면이 깜빡였다. 소희가 미리 예약 설정해 두었던 기이한 미래 송신 코드가 준우의 화면으로 수신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텍스트가 아니었다. 모방귀신이 탈출 경로로 숨겨놓은 수직 통로 내의 가상 좌표와 차단벽 분쇄 신호를 추적하는 역발상 단서였다.
"강 팀장, 지금입니다! 아파트 스마트 홈 IoT 삼중 전자기 필터를 양전하 출력 회로망으로 원거리 개조합니다!"
"작동합니다!"
강도진이 무전기로 지상 제어실에 대기 중인 대원들에게 소리쳤다.
위이이잉—!
아파트 전체를 감싸고 있던 초현대식 스마트 시스템이 거꾸로 돌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 샤프트를 따라 흐르는 고압 전류가, 계율 대장의 정화된 백색 음양 전도 에너지와 결합하여 거대한 순환 고리를 형성했다.
그 순간, 지하 암반벽 깊숙한 곳에 조각되어 있던 준우 가문의 선대 귀신 억압 표식이 눈부신 금빛으로 공명하기 시작했다.
"이 땅의 주인은 너희 같은 모방 쓰레기들이 아니다."
준우가 손가락을 퉁겼다.
콰르릉! 콰과과광!
더 하이스트 센트럴 49층 마천루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낙뢰가 수직 샤프트를 타고 내려왔다. 그것은 지상을 파괴하는 번개가 아니었다. 오직 악한 음기만을 태워버리는 소거빛의 정화 전류였다.
"끄아아아아아악!"
아파트 벽면과 동화되어 가던 모방귀신의 거대한 영체가 백색 낙뢰에 직격당해 비명을 질렀다. 벽면에 돋아나 있던 기괴한 눈알들과 입들이 순식간에 재가 되어 바스러졌다. 신옥주의 피로 맺어진 사악한 계약이, 준우의 철저하고 과학적인 규제 퇴마력 앞에 법적 파산을 선언당하듯 처참하게 붕괴했다.
지하 제단을 가득 채웠던 음산한 안개가 사방으로 기화하며 흩어졌다.
"이겼…… 어?"
강도진이 넋을 잃고 탄성을 뱉었다. 아파트를 뒤흔들던 진동이 가라앉고, 천장에서 떨어지던 돌가루도 멈췄다. 완벽한 승리처럼 보였다.
하지만 기화되어 흩어지던 모방귀신의 마지막 영체가, 검은 연기 덩어리가 되어 지상 방호벽 쪽으로 무섭게 쏘아져 갔다.
"……오빠?"
무전기 너머로 소희의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소희야! 피해!"
준우가 소리치며 수직 샤프트 난간을 향해 달렸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지상 가드레일 옆에서 오빠의 무전을 지원하며 방호벽을 지키던 소희의 발밑으로, 검은 연기가 뱀처럼 뼘을 넓히며 들이닥쳤다. 모방귀신의 잔해가 마지막 단 한 명의 제물을 끌고 가기 위해 그녀의 다리를 낚아챈 것이었다.
"이 더러운 괴물 새끼가……!"
준우가 허공을 날듯 몸을 던졌으나, 지하 5층의 깊은 구덩이에서 지상까지의 거리는 너무도 멀었다.
스스스스슥!
"오빠—!"
소희의 짧은 비명과 함께, 그녀의 육체가 수직 샤프트 깊은 곳에 위치한 검은 배수구 속으로 연기처럼 빨려 들어갔다. 배수구의 쇠창살이 기괴하게 휘어지며 열렸다가, 이내 쾅 소리를 내며 닫혀버렸다.
완벽한 어둠이 다시 한번 수직 샤프트 밑바닥을 집어삼켰다.
"소희야!"
준우의 목소리가 거친 철골 구역을 짓누르며 튕겨 나갔다.
그가 딛고 있던 시멘트 바닥이 찰나의 순간에 산산조각이 났다. 용수철처럼 몸을 던진 준우의 손끝이 닫힌 배수구 쇠창살에 닿았으나, 손에 잡힌 것은 오직 차갑고 단단한 무쇠의 감촉뿐이었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살을 에는 듯한 냉기가 타고 올라왔다.
쿵!
준우의 어깨가 철제 배수구 문에 강하게 부딪혔다. 쇠창살 틈새로 손을 밀어 넣으려 하자, 손가락 껍질이 얼어붙은 철 표면에 달라붙었다가 찢어지며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비켜봐라!"
뒤늦게 달려온 강도진이 소총 개머리판으로 쇠창살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깡! 깡!
불꽃이 튀었지만 두꺼운 무쇠 문은 찌그러지기는커녕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타격의 반동으로 강도진의 손귀가 찢어져 피가 흘렀다.
"이거 일반 하수구가 아닙니다."
강도진이 이를 갈며 신음했다.
"지하 5층 집수조 밑바닥에 이런 수직 통로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아파트 준공 도면에서도 이 구역은 콘크리트로 완전히 밀폐된 사구역(死區域)으로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신옥주와 그 청소부 놈들이 숨겨둔 진짜 통로라는 뜻이겠지."
준우는 찢어진 손가락 끝의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어둠을 응시했다.
그의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격렬하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계율 대장의 가죽 표지가 마치 살아 있는 심장처럼 불규칙하게 요동쳤다.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검푸른 혈관의 변색이 손목을 타고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하…… 으윽."
턱 끝이 가늘게 떨렸다. 급격하게 장부의 한계를 끌어다 쓴 대가였다. 수십 마리의 괴담 귀신들을 영수하며 누적된 저주와 왜곡된 인과율이, 준우가 감정의 동요를 일으킨 틈을 타 그의 육체로 무섭게 역류하고 있었다. 심박수가 분당 150회를 넘어서며 폐부가 찢어질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한 선생! 얼굴색이 엉망입니다. 일단 뒤로 물러나서……!"
"방해하지 마십시오."
준우가 강도진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낮고 싸늘했다.
"의뢰인이 납치당했는데 세무조사관이 퇴근하는 법은 없습니다. 특히 그 의뢰인이 내 평생의 전 재산이라면 더더욱."
준우는 떨리는 왼손으로 자신의 스마트폰을 켜 들었다.
액정 화면 위로 소희가 미리 설정해 두었던 기이한 미래 송신 코드가 붉은빛을 내며 깜빡이고 있었다.
`[ERROR: 0x0214_SYS_BYPASS_ACTIVE]` `[COORDINATE: B6_UNDER_VOID_77]`
"이건……."
강도진이 준우의 화면을 훔쳐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소희가 납치되기 직전에 전송되도록 예약해 둔 시스템 우회 신호입니다."
준우의 손가락이 화면 위를 빠르게 미끄러졌다.
"모방귀신 놈은 아파트의 스마트 홈 IoT 주파수를 타고 이동합니다. 놈이 소희를 끌고 수직 샤프트 아래로 내려갈 때 발생할 공간 비틀림을 역계산해서, 차단벽의 강제 개방 신호를 내 폰으로 쏘도록 소희가 미리 판을 짜둔 겁니다."
"그럼 이 코드가 저 무쇠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란 말입니까?"
"열쇠 정도가 아닙니다."
준우의 눈에 번뜩이는 안광이 서렸다.
"아예 문짝째로 뜯어버릴 폭약이지요."
준우는 구형 마스터 스마트키를 액정 화면 위에 겹쳐 올렸다. 그리고 계율 대장의 마지막 빈 페이지를 펼쳐, 소희가 보내온 난수 코드를 피 묻은 손가락으로 거칠게 뭉개 쓰기 시작했다.
지이이잉!
스마트폰의 스피커에서 귀를 찢는 듯한 고주파 소음이 분출했다. 동시에 수직 샤프트 벽면에 설치된 스마트 홈 제어 단자함들이 일제히 스파크를 일으키며 폭발하기 시작했다. 정화된 양전하 에너지가 소희의 우회 코드를 타고 지하 배수구의 잠금장치 속으로 사정없이 역류해 들어갔다.
철커덕! 우드드득!
굳게 닫혀 있던 배수구의 쇠창살이 내부에서부터 톱니바퀴가 으스러지는 비명을 지르며 뒤틀렸다. 마침내 틈새가 벌어지며, 밑바닥을 알 수 없는 거대하고 음습한 지하 공동의 아가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어둠 속에서 훅 끼쳐오는 것은 현대식 아파트의 냄새가 아니었다.
수백 년간 썩어 들어간 흙과 뼈, 그리고 원시적인 피비린내였다.
"강 팀장. 여기서부터는 민간인 출입 금지 구역입니다."
준우가 배수구 틈새로 발을 디디며 말했다.
"돌아가서 생존자들을 대피시키십시오."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내 대원들을 구해준 빚이 아직 남았습니다!"
강도진이 소총을 고쳐 잡으며 준우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의 눈빛에도 단단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그때였다.
치이이익— 지직.
준우의 손에 들려 있던 무전기에서 다시 한번 거친 잡음이 흘러나왔다.
[오빠……? 내 말 들려……?]
소희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들리던 유쾌하고 씩씩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가늘고, 물속에서 말하는 것처럼 웅얼거리는 기괴한 음색이었다.
[여기 너무 어두워…… 추워……. 오빠, 나 데리러 올 때…….]
무전기 너머의 목소리가 찰나의 침묵 끝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꼭 혼자 와야 해. 다른 사람이랑 같이 오면…… 나 죽을지도 몰라. 알았지?]
준우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동시에 준우의 품 안에 있던 계율 대장이 스스로 장장을 넘기며 붉은 낙인 같은 글자를 새겨 넣기 시작했다.
스스스슥!
`[새로운 계율 감지: 최심부 진입 시, 동행자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혀가 뽑힌다.]` `[주의: 영수되지 않은 계율의 함정이 발동 중입니다.]`
무전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애처로운 목소리.
그것은 진짜 동생의 간절한 구조 요청인가, 아니면 준우를 고립시키기 위해 모방귀신이 파놓은 최후의 한정 질문법인가.
어둠이 소용돌이치는 지하 공동의 입구에서, 준우는 서서히 조여오는 인과의 덫을 마주한 채 붉게 물들어가는 계율 대장을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