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빠... 살려줘... 뜨거워... 살려줘...
공기 중에 고정된 소희의 목소리가 유령처럼 맴돌았다. 음파의 궤적이 붉은 실처럼 거실의 서늘한 공기를 가르며 진동했다. 섭씨 12도까지 곤두박질친 온도계 탓에 뿜어져 나오는 입김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이목구비가 없는 흑색 점액질의 잔해는 이미 재가 되어 바닥에 흩어졌건만, 그가 남긴 끔찍한 미래의 파형은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욱 또렷해졌다. 피부를 바늘로 찌르는 듯한 한기가 온몸을 타고 올라왔다.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고주파 음역대였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고막이 터져 나가거나, 뇌수가 뒤흔들려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을 터였다.
"오빠... 나 머리가... 너무 울려..."
소희가 관자놀이를 움켜쥐며 비틀거렸다. 그녀의 눈가에 핏발이 서서히 돋아나고 있었다. 모방귀신의 분신이 소멸하기 직전 뿜어낸 마지막 저주, 즉 미래의 인과를 현재로 끌어당겨 영혼의 주파수를 강제로 동조시키는 악독한 가청 파형 공격이었다.
준우는 떨리는 손가락을 꽉 맞잡았다. 가문이 몰살당하던 그날 밤의 핏빛 기억이 뇌리를 스쳤지만, 차갑게 얼어붙은 이성은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벼려졌다. 두려움이 목구멍까지 차오를수록, 준우의 입꼬리는 비틀린 호선으로 찢어졌다.
"소리 설계가 제법 아마추어 같군. 가청 주파수를 억지로 비틀어서 인간 신경계를 자극하는 수법이라니, 요즘 귀신들은 저작권법도 안 배우나?"
준우는 한 걸음 내딛으며 소희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의 손아귀에 닿은 소희의 피부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준우는 망설임 없이 그녀를 거실 한구석에 마련해 둔 사통 결계 영역으로 밀어 넣었다.
안방 문틀을 개조해 엘리베이터 내부 샤프트와 동일한 영적 밀폐 구역으로 구축해 둔 소형 격리실이었다. 황동빛으로 도금된 특수 부재들이 문틀을 따라 촘촘히 박혀 있었다.
"들어가서 귀 막아. 10초 센다."
"오빠, 나 진짜... 머릿속에서 오빠가 죽는 목소리가 들려..."
소희의 눈동자가 흐릿하게 풀려가고 있었다. 모방귀신의 전형적인 정신 오염 주술이었다. 가까운 이의 가장 비참한 최후를 끊임없이 재생하여 영혼의 방어벽을 무너뜨리는 수법.
준우는 소희의 이마를 향해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딱!
"앗!"
"10점 만점에 0.5점짜리 삼류 가스라이팅이다. 평소 내 독설에 단련된 멘탈이 고작 이런 환청에 흔들려서야 쓰겠나? 정신 차려, 한소희. 네 오빠는 그렇게 쉽게 안 죽어. 채권 추심도 안 끝났는데 저승길 길동무를 해줄 리가 없잖아."
이마를 얻어맞은 충격과 함께 소희의 눈동자에 서렸던 붉은 기운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녀는 아픈 이마를 문지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오빠, 진짜 뼈 때리는 건 반칙이지... 근데 덕분에 정신은 번쩍 드네. 진짜 지독한 드립이야."
"안전 가이드라인 준수해. 문 닫는다."
준우는 격리실의 무거운 방음문을 걸어 잠갔다. 문이 닫히는 순간, 틈새를 메우고 있던 황동빛 결계가 일제히 반응하며 거실의 더러운 음파를 차단했다.
홀로 거실에 남은 준우는 품속에서 묵직한 가죽 표지의 [계율 대장]을 꺼내 들었다. 장부를 펼치자, 거친 양장 종이 위로 황동빛 서체들이 살아 숨 쉬듯 꿈틀거리며 빛을 발했다.
"타인의 목소리를 무단으로 도용하고, 미래의 불확실한 인과율을 강제로 현재에 고정하는 행위."
준우는 붓끝에 자신의 영력을 실어 장부의 새로운 면에 거침없이 내리썼다.
[계율 대장 제4조 2항: 허가받지 않은 가청 파형의 인위적 고정 및 영적 음해 행위는 그 즉시 사기적 계약 행위로 간주하여, 피해자의 영적 자산으로 강제 귀속한다.]
글자가 완성되는 순간, 장부에서 뿜어져 나온 황동빛 사슬들이 거실 공기 중에 고정되어 있던 붉은 소리 파형을 향해 뱀처럼 뻗어 나갔다.
철그렁!
허공을 움켜쥐는 쇠사슬 소리와 함께, 붉은 실들이 맹렬하게 요동쳤다. 사슬은 음파의 진동 주기를 강제로 옭아매며 그것을 정량적인 빛의 입자로 으깨어 가기 시작했다.
- 크아아악...! 오빠... 살려...!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마지막으로 터져 나왔으나, 준우의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는 사슬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영수(領收) 완료. 이제 이 소음은 내 사유 재산이다."
파앗!
붉은 음파가 완전히 부서지며 장부의 페이지 속으로 스며들었다. 거실을 짓누르던 기괴한 냉기가 순식간에 걷히고, 실내 온도가 정상 궤도로 빠르게 회복되었다. 준우는 가볍게 호흡을 가다듬으며 장부를 덮었다.
* * *
"오빠, 이거 좀 봐봐."
상황이 정리된 후 격리실에서 나온 소희가 스마트폰을 준우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화면에는 백그라운드에서 기괴하게 작동하고 있는 미지의 통신 프로세스 회로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아까 그 분신이 내 폰을 매개로 침투했던 흔적을 추적해 봤는데, 내부에 이상한 데이터 패키지가 숨겨져 있어. 수신인도 없고, 발신인도 공란인데... 특정 타깃 시간에 자동으로 발송되도록 예약 설계되어 있어."
준우는 소희의 스마트폰 화면을 넘겨받아 정밀 분석했다. 화면 구석에서 미세하게 명멸하는 이진법 코드들 사이에, 한글과 한자가 기묘하게 뒤섞인 주술적 수식들이 암호화되어 심어져 있었다.
"예약 송신 코드군."
준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는 단순한 기계적 에러가 아니었다. 아파트 내부의 스마트 홈 시스템과 연동되어, 특정 조건이 충족되는 순간 아파트 전체의 제어벽을 일시에 무력화하고 수직 엘리베이터 통로를 지옥의 아가리로 개방하도록 설계된 기이한 미래 송신 코드였다.
"이걸 역추적하면 놈들이 숨겨둔 지하시설의 격리벽 좌표를 딸 수 있겠어. 하지만 지금 당장은 락이 걸려 있군. 특정 시간이 되어야만 이 코드가 활성화되도록 구조가 짜여 있어."
"그럼 그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소희가 걱정스러운 듯 묻자, 준우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놈들이 쳐놓은 덫을 우리가 역으로 이용하면 되지. 세무조사를 나갈 때는 피조사기관이 장부를 조작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는 법이다."
준우는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거실 한편에 놓인 엘리베이터 비공식 행동 수칙 사본을 바라보았다. 1화에서 아파트 주민들 사이에서 복사본으로 은밀히 유포되던 그 종이였다.
그는 종이 하단에 조잡하게 적혀 있던 의문의 '붉은 볼펜 자국'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소희야, 이 붉은 볼펜 자국이 단순한 낙서인 줄 알았지?"
"어? 그냥 누군가 필기하다가 삐끗한 거 아니었어?"
"아니야. 이건 교묘하게 왜곡된 인과율의 틈새다."
준우의 목소리에 확신이 실렸다.
"손각시는 원래 밤 12시 이후 거울을 세 번 보면 목을 꺾는 규칙을 가지고 있었어. 하지만 이 붉은 볼펜 자국은 그 규칙의 전제 조건을 교묘하게 비틀어 놓았지. '거울을 보지 않아도, 거울에 비친 그림자만으로도 계약이 성립된다'는 식으로 귀신에게 유리하게 조항을 위조한 흔적이었어. 즉, 귀신 측에서 먼저 계약의 원칙을 훼손한 불법 행위를 저지른 거지."
소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 그래서 오빠가 그때 손각시를 법적으로 파산시키고 강제로 영수할 수 있었던 거야? 상대방이 먼저 계약 위반을 했으니까?"
"정확해. 귀신들이 아무리 막강한 원시적 신력을 가지고 있어도, 이 아파트라는 현대적 격자망 속에서는 규칙을 따라야만 힘을 발휘할 수 있어. 그들이 먼저 꼼수를 부려 규칙을 왜곡한 순간, 나는 계약법상의 위반을 근거로 그들의 신력을 고스란히 압류할 수 있었던 거지."
준우는 이어 안방 화장실에 걸려 있는 스마트 미러를 가리켰다. 거울 표면에는 번개 모양의 아주 미세한 음양 전도 규격 균열이 고정되어 있었다. 지난 2화에서 발견했던 기이한 틈새였다.
"그리고 이 균열 역시 입대위의 부패한 청소부들이 심어놓은 간이 통로였어. 결계 내부의 전력 자원을 조작해 자신들의 사냥개 귀신들을 침투시키기 위한 전기적 접속 단자였지."
준우가 미러의 균열 표면을 가볍게 두드리자, 황동빛 미세한 스파크가 튀었다.
"하지만 내가 이미 이 균열의 전도 규격을 역으로 분석해서 흐름을 뒤집어 놓았다. 이제 그들이 이 균열을 통해 전력을 공급하거나 결계를 조작하려 드는 순간, 오히려 아파트 단지 전체의 전력 자원이 우리 쪽 결계 배터리로 정량적으로 역압수되어 충전되는 트리거로 변모했지. 한마디로, 무단 도용된 빨대를 역으로 꽂아 그들의 피를 빠는 구조를 완성한 거다."
"와... 진짜 악질 채권자보다 더하네. 귀신들 통장 잔고까지 탈탈 털어가는구나."
소희가 혀를 내둘렀지만, 그녀의 안색은 한층 밝아져 있었다. 오빠의 철저하고 빈틈없는 법리적 퇴마 방식이 주는 기묘한 안정감 덕분이었다.
* * *
바로 그때, 아파트 단지 내부의 방송 스피커에서 치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안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심야 11시가 넘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방송을 켜는 것은 명백한 규정 위반이었다.
[아, 아... 입주민 여러분께 알립니다. 현재 아파트 단지 내 조경 정비 및 액운 타파를 위한 야간 정화 행사가 중앙 밤놀이터에서 진행 중입니다. 입주자대표회의에서 특별히 준비한 무상 다과와 기념품이 준비되어 있으니, 주민 여러분께서는 지금 즉시 밤놀이터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립니다...]
기이할 정도로 차분하고, 동시에 묘하게 고저가 없는 기계적인 목소리였다.
준우의 심박수가 미세하게 빨라졌다. 창밖을 내다보니,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아파트 단지 중앙 놀이터에 형형색색의 조명이 켜지고 있었다.
놀이터 주변에는 벌써 수십 명의 주민들이 홀린 듯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어딘가 모르게 부자연스러웠다. 관절이 뻣뻣하게 굳은 채, 마치 보이지 않는 실에 이끌려 움직이는 꼭두각시 인형 같았다.
따르릉!
준우의 손에 들린 무전기에서 보안팀장 강도진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한준우 씨! 지금 상황이 이상합니다. 입대위 회장 신옥주가 주민들에게 '야간 정화 행사'라는 명목으로 단체 행동을 유도했습니다. 저희 보안팀이 제지하려 했으나, 입대위 측 사설 청소부들이 입구를 막아서고 주민들을 강제로 놀이터로 밀어 넣고 있습니다!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군."
준우가 차갑게 말했다.
- 그렇습니다. 주민들의 눈이 완전히 풀려 있습니다. 마치 무언가에 집단 최면이라도 걸린 것처럼... 게다가 신옥주 그 여자가 주민들 앞에서 '아파트 가치 수호와 액운 퇴치'를 운운하며 선동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두면 주민 전체가 제물의 제단으로 끌려갈 겁니다!
"알겠소. 지금 내려가지."
준우는 계율 대장을 품에 단단히 챙겨 넣었다.
"오빠, 나도 갈래."
소희가 단호한 표정으로 앞서 나가려 하자, 준우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너는 이 집 안의 격리실을 지키고 있어. 아까 검출한 그 예약 송신 코드의 신호 강도를 모니터링하면서, 혹시라도 외부에서 강제 오버로드가 들어오면 아까 말한 미러의 균열 역송전 트리거를 작동시켜. 그게 지금 네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소희는 잠시 준우의 눈을 응시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오빠도 조심해. 10점 만점에 10점짜리로 완벽하게 털고 와."
"걱정 마라. 세무조사관의 사전에 봐주기란 없다."
준우는 현관문을 열고 어두운 복도로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아파트 벽면 전체가 미세하게 진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음산한 주파수가 콘크리트 벽을 타고 수직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모방귀신이 주민들의 목소리와 생명력을 흡수하기 위해 아파트 전체에 거대한 덫을 놓은 모양이었다.
* * *
중앙 밤놀이터는 기괴한 축제의 장으로 변해 있었다.
화려한 네온사인 조명이 어지럽게 회전하고 있었지만, 그 불빛은 놀이터를 채운 음산한 안개를 걷어내지 못했다. 오히려 안개 속에서 기괴하게 굴절되며 붉고 푸른 기류를 만들어낼 뿐이었다.
"우리 아파트의 가치는 우리가 지킨다! 괴담을 퍼뜨려 집값을 떨어뜨리는 불순분자들을 몰아내고, 단지의 안녕을 위해 다 함께 춤을 춥시다!"
확성기를 잡고 단상 위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는 것은 입대위 핵심 간부이자 극성 지지자인 중년 사내, 배동수였다. 그의 눈은 탐욕과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으며, 목덜미에는 검푸른 핏줄이 기괴하게 솟구쳐 있었다.
그 아래에서 수십 명의 주민들이 기괴한 장단에 맞춰 흐느적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그들의 등 뒤에는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시꺼먼 점액질의 실가닥들이 연결되어 하늘 높이 솟아오른 엘리베이터 샤프트 탑을 향해 뻗어 있었다. 종속 주술 가닥이었다. 주민들의 생명력과 영혼의 주파수를 모방귀신에게 강제로 링크시키는 일종의 영적 빨대였다.
"집값을 올려야 한다...! 괴담은 거짓말이다...!"
주민들은 꼭두각시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며 춤을 추었다. 자본과 탐욕에 눈이 멀어, 자신들이 괴물의 먹이로 바쳐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였다.
"참 눈물겨운 이기주의군."
준우의 나직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안개를 가르고 울려 퍼졌다.
주민들의 기괴한 춤사위가 일시에 멈추었다. 수십 개의 흐릿한 눈동자가 일제히 준우를 향해 쏠렸다. 단상 위의 배동수가 준우를 발견하고는 안색을 붉히며 손가락질을 해댔다.
"저, 저 미친놈! 또 나타났구나! 경비들 뭐 해? 저 집값 떨어뜨리는 악질 선동꾼 놈을 당장 끌어내지 않고!"
사설 청소부 복장을 한 거구의 사내 세 명이 몽둥이를 치켜들고 준우를 향해 돌진했다. 그들의 몸에서도 음산한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인간의 탈을 썼을 뿐, 이미 모방귀신의 주술에 완전히 잠식된 사냥개들이었다.
준우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품에서 [계율 대장]을 꺼내어 허공에 가볍게 펼쳤을 뿐이었다.
"아파트 공동 주택 관리 규약 제32조. 단지 내 공용 공간에서의 무허가 집단 집회 및 주민들의 영적 자산 강제 유용 행위는 금지된다."
준우가 장부의 한 페이지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겼다.
"또한, 본 대장의 정당한 소유주는 단지 내의 모든 부정한 채무 관계를 강제로 회수하고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할 권한을 가진다. 인적 공세 처분 수식 발동."
웅-!
장부에서 뿜어져 나온 눈부신 황동빛 장막이 놀이터 전체를 쓸고 지나갔다. 준우를 향해 달려들던 청소부들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들의 몸을 감싸고 있던 검은 기운이 황동빛 사슬에 묶여 허공으로 뽑혀 나갔다.
"크아아악! 내, 내 힘이...!"
"사채업자 앞에서 무단 대출을 가동하려 들다니, 이자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는 모양이군."
준우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단상 위의 배동수와 뒤편의 주민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걸음걸이는 지극히 차분하고 우아했으나, 그가 내딛는 발걸음마다 황동빛 파동이 일어나 바닥의 흙더미를 정화해 나갔다.
"이, 이 미친놈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주민 여러분! 저놈이 우리 아파트를 망치려고 합니다! 저놈을 잡아야 우리 집값이 오릅니다!"
배동수가 악에 바쳐 소리쳤다. 홀린 주민들이 다시 준우를 향해 덮쳐오려 움찔거렸다.
도덕적 신파나 위선적 망설임 따위는 준우에게 사치였다. 그는 주민들이 피해자라는 이유로 봐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스스로 탐욕에 눈이 멀어 괴물의 계약서에 서명한 대가는 혹독해야 마땅했다.
"계약서의 약관을 읽지 않은 죄. 그 연체 이자는 몸으로 갚아야지."
준우가 대장의 수식을 허공에 써 내렸다.
[인적 공세 처분: 동조된 영적 연결망의 강제 단절 및 부당 이득 반환 청구.]
장부에서 뻗어 나간 무수한 황동빛 칼날들이 허공을 갈랐다.
서걱! 서걱! 서걱!
공기를 가르는 명쾌한 소리와 함께, 주민들의 등 뒤에 연결되어 있던 검은 점액질 실가닥들이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무자비하게 잘려 나갔다.
동시에 주민들이 맺고 있던 부정적인 종속 계약의 에너지가 역류하여 준우의 대장 속으로 정량적으로 흡수되었다. 대장의 페이지가 황동빛으로 거세게 빛나며 아파트 단지 전체의 결계 동력을 급격하게 충전시켰다.
"아아악!"
"억...!"
실가닥이 끊어지는 비명과 함께 수십 명의 주민들이 끈 떨어진 인형처럼 바닥으로 풀썩풀썩 쓰러졌다. 그들의 눈가에서 검은 기운이 빠져나가고, 흐려졌던 눈동자가 서서히 제빛을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차가운 밤이슬을 맞으며 놀이터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깨닫고는 공포에 질려 서로를 바라보았다.
"내가... 내가 왜 여기 있지?"
"이게 무슨 상황이야...?"
단상 위의 배동수 역시 등 뒤의 연결 가닥이 무참히 잘려 나가며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주술의 힘이 사라지자, 그를 지탱하던 광기 어린 거드름도 순식간에 깨져 나갔다.
준우는 쓰러진 배동수의 코앞까지 걸어가 그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세무조사 끝났다. 네놈이 주민들의 영혼을 담보로 취한 부정한 주술적 이익은 전부 압류 처리되었다."
주민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준우가 귀신들의 주술을 깨뜨려 자신들을 구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챈 이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상이 명백히 드러나는 통쾌한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바닥을 기며 흙먼지를 뒤집어쓴 배동수가, 갑자기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리며 준우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려 발악했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에서 침과 피가 뒤섞여 흘러내렸다.
배동수는 준우를 향해, 그리고 정신을 차린 아파트 주민들 전체를 향해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아파트 정면 로비의 거대한 대리석 벽면에 그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반사되며 메아리쳤다.
"하하하! 이 미친놈아! 너희들 속지 마! 저놈이 누군지 알아?! 가문 전체가 미치광이 짓을 하다가 하룻밤 사이에 전부 처참하게 몰살당한 그 저주받은 핏줄의 생존자라고! 귀신보다 더 미친놈의 피가 흐르는 괴물 새끼가 바로 저 한준우다!"
로비에 모여 있던 주민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준우의 심장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끔찍한 트라우마의 봉인이, 수많은 이들의 눈앞에서 사정없이 뜯겨 나가는 찰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