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붉은 노이즈가 액정 화면을 찢을 듯이 요동쳤다. 치지직거리는 기계 마찰음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것은 단순한 전파 간섭이 아니었다. 그것은 얼어붙은 무덤 속에서나 흘러나올 법한 눅눅하고 비린 기운이었다. 수신 불능 상태의 스마트폰 화면 위로, 마치 보이지 않는 손가락이 점액질 피를 묻혀 꾹꾹 눌러쓰는 것처럼 기괴한 주술 기호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선과 점이 뒤엉킨 원시적인 저주의 낙서가 소희의 손가락 끝을 향해 스멀스멀 뻗어 나갔다.

"오빠... 이거..."

소희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딱딱하게 굳었다.

준우는 망설이지 않았다. 소희가 폰을 떨어뜨리기도 전에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뒤로 밀쳐냈다. 동시에 오른손 검지 손가락을 붉게 타오르는 액정 화면 정중앙에 강하게 내리눌렀다.

화면과 손가락이 맞닿는 순간, 찌르르한 정전기와 함께 뼛속까지 시려 오는 음기가 준우의 지문을 타고 올라왔다. 가슴속 깊은 곳에 봉인된 [계율 대장]이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황동빛 장부의 첫 페이지가 뇌리 속에서 펄럭이며 경고음을 울렸다. 무단 침입한 인과율의 거부 반응이었다.

준우는 어금니를 악물고 손가락 끝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가문 대대로 내려온 정화의 온기를 손가락 끝 마찰력으로 전환했다.

"내 집 안방에서 감히 무단전재를 시도해?"

준우가 액정 위를 거칠게 쓸어내렸다.

치이이익!

정육점의 달궈진 석쇠 위에 비계 덩어리를 올린 것 같은 격렬한 파찰음이 거실을 가득 채웠다. 액정 화면에 그려지던 붉은 기호들이 준우의 손가락 끝에서 뿜어져 나온 백색 불꽃에 닿자마자 타는 듯한 그을음을 남기며 스러졌다. 기분 나쁜 탄내가 코를 찔렀다. 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음산한 호흡 소리는 단발적인 비명으로 변하더니 이내 뚝 끊겼다.

붉은 노이즈가 걷히고, 화면은 다시 차가운 검은색 액정으로 돌아왔다.

준우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손가락을 떼어냈다. 손가락 끝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지만, 상처는 없었다. 가슴속 대장이 다시 조용히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휴, 하마터면 액정 수리비 삼십만 원 날릴 뻔했네."

준우가 일부러 어깨를 으쓱하며 폰을 식탁 위로 툭 던졌다.

소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떨리는 숨을 뱉어냈다. 하지만 이내 특유의 샐쭉한 표정으로 오빠를 흘겨보았다.

"방금 그 손가락 마찰 쇼는 뭐야? 무슨 인간 라이터야? 연출은 그럴듯했는데 탄내가 너무 심해서 감점이야. 이번 퇴마 점수는 10점 만점에 4점 드립니다."

"목숨을 구해줬는데 4점이라니. 너 진짜 야박하다."

"생명 수당은 매달 내는 월세로 퉁치는 거지. 그리고 저 탄내 어쩔 거야? 환기나 시켜."

소희가 투덜거리며 창문을 열기 위해 베란다로 향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피하며 가볍게 웃었지만, 손끝에 남아 있는 잔진동까지 속이지는 못했다. 방금 그것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었다. 아파트 단지 전체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저주의 그물이 드디어 그들 남매의 사적인 공간까지 파고들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바로 그때, 거실 벽면에 붙어 있는 월패드에서 뚜- 하는 기계음과 함께 안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 아, 아. 입주민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입주자대표회의에서 전하는 공지 사항입니다.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소름 끼칠 정도로 차분하고 고상했다. 입대위 회장, 신옥주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필터를 거쳤음에도 특유의 가식적인 자애로움이 뚝뚝 묻어났다.

- 최근 단지 내에 근거 없는 악성 루머와 유언비어를 유포하여 우리 ‘더 하이스트 센트럴’의 품격과 자산 가치를 훼손하는 불순한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습니다. 엘리베이터 오작동이니, 있지도 않은 귀신을 보았다는 등의 허무맹랑한 소리는 모두 입주민들의 불안감을 조장하려는 외부 세력의 소행입니다.

준우는 팔짱을 낀 채 월패드를 차갑게 응시했다.

- 입대위는 아파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이러한 괴담을 구두로 유포하거나 인터넷 커뮤니티에 게시하는 자들을 추적하여 예외 없이 강력한 민형사상 고발 조치를 취할 예정입니다. 또한, 사설 보안업체를 통한 단지 내 순찰을 강화하여 거동 수상자나 선동꾼들을 즉각 격리 조치할 것이니 입주민 여러분께서는 안심하시고...

"어머나, 무서워서 오줌 싸겠네."

소희가 베란다 문을 열다 말고 뒤를 돌아보며 코방귀를 꼈다.

"저 아주머니는 입주민 대표가 아니라 고소 대표로 전직하셔야겠어. 아주 창조 경제의 선두 주자셔. 귀신한테 잡혀가기 전에 고소장 먼저 받아서 파산하겠네."

"자산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사람 목숨 줄 하나 끊어지는 것쯤은 먼지털이로 털어낼 위인이니까."

준우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원래 장사꾼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게 뭔지 알아? 상품에 하자 있다고 소문나는 거야. 저 여자는 지금 이 아파트라는 거대한 상품의 곰팡이를 벽지로 가리고 있는 거지. 그 뒤에서 시체가 썩어가고 있는데도 말이야."

"그 벽지, 오빠가 다 찢어버릴 거지? 난 곰팡이 핀 집에서는 딱 질색이라 말이지."

"당연하지. 난 세무조사 전문이잖아. 탈세한 놈들은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 영수증 발행해 주는 게 내 일이니까."

두 사람이 실없는 농담으로 거실의 무거운 공기를 억지로 털어내고 있을 때, 현관문 너머에서 규칙적인 노크 소리가 들렸다.

툭, 투둑. 툭.

일정한 박자. 군인 출신 특유의 절제된 신호였다.

준우가 인터폰 화면을 확인했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강도진 보안대장이 감시 카메라의 사각지대에 몸을 숨긴 채 서 있었다. 준우가 문을 열자, 강도진은 고양이가 쥐를 피하듯 신속하고 은밀하게 집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미안합니다. 신 회장 측 청소부들이 단지 곳곳에 깔려 있어서 눈을 피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강도진이 모자를 벗으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고, 눈빛은 극도의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방금 안내 방송 들으셨습니까? 신옥주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한 겁주기가 아닙니다. 실제로 청소부들이 실종된 주민들의 흔적을 지우고, 의문을 제기하는 입주민들을 차례로 '강제 격리'시키고 있습니다."

"소문은 들었습니다. 도진 씨는 괜찮은 겁니까?"

준우가 생수를 한 컵 건네며 물었다. 강도진은 물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바지 주머니에서 묵직한 물건 하나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모서리가 닳고 군데군데 그을린 흔적이 있는, 구형 아파트 마스터 스마트키였다. 겉면의 플라스틱은 열에 녹아내려 기괴하게 변형되어 있었고, 내부의 칩이 비쳐 보일 정도로 파손된 상태였다.

"이게 뭡니까?"

준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구형 마스터키입니다. 지금 사용하는 스마트 시스템 이전, 아파트 지하에 구축된 제식 제어벽과 직접 연결되는 유일한 물리적 단말기죠. 신옥주가 이 아파트 지하 심층부에 제단을 짓고 귀신들의 힘을 통제할 때 사용하는 시스템의 백업 키이기도 합니다."

강도진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고장 나서 폐기 처분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제가 몰래 빼돌렸습니다. 준우 씨의 그 기이한 능력을 보았습니다. 당신이라면... 이 고장 난 열쇠로 신옥주의 심장부에 균열을 낼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준우는 식탁 위의 구형 마스터키를 내려다보았다. 겉보기에는 쓸모없는 플라스틱 쓰레기 같았지만, 그 표면에서 미세하게 흘러나오는 영적 파동은 가슴속 [계율 대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이걸 저한테 주는 이유가 뭡니까? 보안대장으로서의 직무 유기 아닙니까?"

준우가 짐짓 차가운 말투로 뼈 있는 질문을 던졌다. 강도진은 피하지 않고 준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저를 따르던 대원 둘이 어제부로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신 회장실로 불려간 이후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요. 그 여자는 인간이 아닙니다. 자기를 돕는 조력자들조차 제물의 먹이로 던져주는 괴물입니다. 제 부하들을 찾고, 이 미친 짓을 끝내기 위해서라면 악마와도 손을 잡을 용의가 있습니다. 준우 씨, 당신의 그 '퇴마 전문성'에 제 목숨을 걸겠습니다."

강도진의 눈빛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묵직한 군인의 신뢰가 준우의 가슴에 와닿았다.

"좋습니다. 영수증은 나중에 신 회장에게 한꺼번에 청구하도록 하죠."

준우가 마스터키를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강도진이 떠난 후, 준우는 거실 식탁 위에 엘리베이터에서 입수한 '비공식 행동 수칙' 종이를 펼쳤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손각시와의 사투 끝에 챙겨둔 거울 조각을 꺼내 놓았다.

소희가 다가와 머리를 맞댔다.

"오빠, 그 종이 밑에 있는 빨간 줄 말이야. 그거 볼펜 자국치고는 너무 자국이 깊지 않아?"

"눈썰미는 좋네. 10점 만점에 8점 준다."

준우가 손가락으로 종이 하단을 쓸었다. 수칙 제5조 아래, 아무렇게나 그어진 듯한 의문의 '붉은 볼펜 자국'이 있었다. 언뜻 낙서처럼 보이지만, 빛에 비추어 보자 그것은 교묘하게 위장된 부적의 일종이자 규칙의 허점을 찌르는 계율의 설계도였다.

"이건 단순한 낙서가 아니야. 손각시가 엘리베이터 내부에서 인간을 사냥할 때 쓰는 행동 규약의 '예외 조항'을 억지로 쑤셔 넣은 흔적이지. '거울을 보지 말 것'이라는 규칙 아래에, '단, 거울 자체가 왜곡되어 음양이 전도되었을 때는 탑승객의 행위를 관측으로 인정하지 아니한다'는 법리적 예외를 볼펜 자국으로 위장해 적어놓은 거야."

"와, 귀신 세계에도 편법이 있네? 진짜 완전 세무조사 꼼수잖아."

소희가 감탄하며 손뼉을 쳤다.

"맞아. 그리고 이 거울 조각을 봐."

준우가 꺼내놓은 손각시의 거울 조각 중앙에는, 번개 모양의 미세한 음양 전도 규격 균열 흔적이 고정되어 있었다. 단순한 충격으로 깨진 틈이 아니었다. 인위적으로 음기와 양기의 흐름을 뒤틀어놓은 규격 균열이었다.

"입대위의 청소부 귀신들이 아파트 엘리베이터 결계 내부로 들어올 때, 이 균열을 통해 자신들의 전력 자원을 주입하고 조작해 들어왔던 거야. 일종의 우회 통로인 셈이지."

준우가 거울 조각 위에 손을 얹었다. 가슴속 [계율 대장]이 황금빛 안개를 뿜어내며 거울 속 균열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계율 대장 - 추가 조항 영수] [대상: 음양 전도 규격 균열 (물리적 트리거)] [효과: 결계 내부로 침투하는 적대적 존재의 영적 전력 자원을 정량적으로 역압수하여 아파트 내 결계 에너지로 환원함.]

거울 조각에 새겨져 있던 번개 모양의 균열이 하얗게 바래지더니, 이내 고운 모래가 되어 스르륵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순간, 아파트 내부의 음습한 공기가 한층 맑아지는 느낌과 함께 준우의 온몸에 새로운 힘이 샘솟았다. 청소부 귀신들이 파놓은 함정을 오히려 그들의 자원을 빼앗아 오는 강력한 역흡수 장치로 개조해 버린 것이다.

"완벽해. 이제 그들이 엘리베이터를 조작하려고 할 때마다, 오히려 우리 결계의 배터리가 충전되는 구조야."

준우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오빠, 진짜 악덕 채권추심업자 같다. 귀신 피를 말려 죽이네."

"합법적인 자원 회수라고 해두지."

바로 그때였다.

거실의 온도계가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섭씨 24도를 가리키던 디지털 숫자가 18도, 15도, 12도로 순식간에 곤두박질쳤다. 입김이 하얗게 뿜어져 나왔다.

스스스스...

소희의 등 뒤, 거실 불빛이 만들어낸 그녀의 그림자가 기이하게 요동쳤다. 사방으로 넓게 퍼져 있어야 할 그림자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스스로를 압축하며 소희의 발목 아래로 끈적하게 수축해 들어갔다.

"어...?"

소희가 발을 움직이려 했지만, 발목이 보이지 않는 사슬에 묶인 것처럼 바닥에 쩍 달라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그림자의 중심부에서 기괴한 윤곽이 솟아올랐다. 그것은 인간의 형상을 닮았으나 이목구비가 없는, 흑색 점액질로 이루어진 모방귀신의 첨병 분신이었다.

스으읍... 하아아...

분신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 소리는 방금 전 소희가 놀라 내뱉었던 숨소리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소희의 호흡 주기를 고스란히 복제하며 그녀의 생명력을 흡수하려는 수작이었다. 소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며 호흡 곤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소희야!"

준우가 계율 대장의 힘을 끌어올려 분신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강력한 황동빛 계약의 사슬이 분신의 목을 후려쳐 감았다.

크아아아악!

분신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준우의 정화력에 온몸이 불타오르면서도, 놈은 이목구비가 없는 얼굴을 준우를 향해 비틀며 기괴하게 웃었다.

그리고 놈의 찢어진 입 틈새로, 소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의 소희 목소리가 아니었다.

- 오빠... 살려줘... 뜨거워... 살려줘...

그것은 미래의 어느 순간, 절망적인 공포 속에서 소희가 울부짖을 최후의 영혼의 울음소리였다. 놈은 소멸하기 직전, 그 끔찍한 가청 파형을 거실의 공기 중에 고스란히 고정해 두고 차가운 재가 되어 스러졌다.

소희의 비명 소리와 똑같은 파형의 잔향이 거실 공기 중에 멈춘 채 진동했다.

준우는 굳어버린 손을 내리지 못한 채, 정적 속에서 미세하게 떨리는 동생의 미래 목소리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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