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대패퇴를 선언하듯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던 모방귀신의 본체가 순식간에 검은 안개로 기화했다. 가드레일 옆에서 방호벽을 든 채 버티고 서 있던 소희의 가냘픈 육체가, 그 칠흑 같은 어둠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수직 샤프트의 거대한 배수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쿠구구구궁!

마치 거대한 짐승이 먹이를 삼키듯, 쇠창살이 뜯겨 나간 구멍 속으로 소희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심연에 가까운 어둠이 그 자리를 채웠다. 사방에서 진동하는 것은 현대식 시멘트 건물의 냄새가 아니었다. 지하 깊은 곳에서 수백 년간 썩어 들어간 진흙과 축축한 짐승의 가죽, 그리고 원시적인 피비린내가 섞인 악취가 수직 통로를 타고 역류해 올라왔다.

"소희야!"

강도진이 찢어지는 부상을 입은 손으로 가드레일을 붙잡으며 절규하듯 소리쳤다. 그의 군화 끝이 미끄러지며 배수구 가장자리의 콘크리트 잔해를 어둠 속으로 떨어뜨렸다.

준우는 미동도 없이 그 깊은 구멍을 내려다보았다. 손에 쥔 무전기에서는 여전히 소희의 가냘픈 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꼭 혼자 와야 해. 다른 사람이랑 같이 오면…… 나 죽을지도 몰라. 알았지?]

애처롭고 가냘픈,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목소리. 그러나 준우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비틀려 올라갔다. 냉소적인 웃음이 뺨을 타고 흘렀다.

"혼자 오라고?"

준우가 무전기를 가볍게 툭툭 쳤다.

"내 여동생은 납치를 당하면 당했지, 이런 3류 신파극 대사를 읊으며 질질 짤 위인이 아니다. 점수를 매기자면 10점 만점에 0.1점짜리 발연기군. 모방귀신, 네놈의 대본 작성 능력은 세무서 고지서보다 성의가 없다."

품 안에 품고 있던 가죽 제본의 계율 대장이 요동쳤다. 붉은 낙인처럼 새겨진 글자들이 준우의 안구를 찔러왔다.

`[새로운 계율 감지: 최심부 진입 시, 동행자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혀가 뽑힌다.]`

귀신이 파놓은 지독한 덫이었다. 동행자의 이름을 부르는 즉시 신체 훼손의 저주가 실체화되는 규칙. 준우는 옆에서 당장이라도 뛰어내릴 기세인 강도진의 어깨를 억센 악력으로 붙잡았다.

"강 팀장. 들었습니까? 저 안에서는 제 이름을 부르지도, 그렇다고 소희의 이름을 부르지도 마십시오. 부르는 순간 혀가 뿌리째 뽑혀 나갈 테니까."

"그게 무슨……!"

강도진이 눈을 부릅떴다. 준우는 대답 대신 자신의 스마트폰을 켜 화면을 응시했다. 소희의 스마트폰 메시지창에 미수신 상태로 예약 설정되어 있던 기이한 미래 송신 코드들이 깜빡이고 있었다.

`0x4F8B77 - TRACE_PENDING - SYSTEM_OVERRIDE`

이것은 단순한 통신 에러가 아니었다. 소희가 납치되기 직전, 자신의 스마트홈 우회 제어 장치를 통해 준우에게 간직하라고 남겨둔 역발상의 좌표였다. 모방귀신이 공간을 왜곡하며 도주할 때 발생하는 수직 통로 내의 미세한 주파수 변화와 음양 전도율의 수치.

"가장 깊은 곳의 좌표가 잡혔군."

준우가 주머니에서 묵직한 금속 물체를 꺼냈다. 보안팀장 강도진이 예전에 그에게 넘겨주었던, 고장 나서 폐기 처분된 아파트 구형 마스터 스마트키였다. 플라스틱 표면이 긁히고 낡은 이 구형 키는, 현대적인 디지털 잠금 방식과 달리 아파트의 원시적인 물리 회로망에 직접 간섭할 수 있는 고유한 주파수를 지니고 있었다.

준우가 소희의 예약 송신 코드를 구형 마스터키의 무선 칩셋에 강제로 동조시켰다.

지지직!

낡은 스마트키의 붉은 LED 표시등이 미친 듯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암전 상태로 굳게 닫혀 있던 지하시설의 격리 제어벽 전체를 강제로 오버로드하여, 준우가 가로막힌 통로를 선점하고 돌파할 수 있게 해주는 열쇠로 완벽하게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제대로 작동하는군. 강 팀장, 여기서부터는 속도전입니다."

말을 마친 준우는 망설임 없이 핏빛 어둠이 소용돌이치는 수직 구멍 속으로 몸을 던졌다.

***

바람이 고막을 찢을 듯이 울부짖었다.

준우의 몸이 수직 샤프트의 거친 콘크리트 벽을 따라 낙하했다. 사방으로 뻗어 나간 구리 배선과 쇠파이프들이 날카로운 손톱처럼 그의 옷자락을 찢어발겼다.

그 순간, 준우는 자신의 엘리베이터 비공식 행동 수칙 종이 하단에 적혀 있던 의문의 '붉은 볼펜 자국'을 떠올렸다. 아주 오래전, 가문의 선조가 남겨둔 기이한 궤적. 그것은 단순히 쓰다 만 낙서가 아니었다. 귀신이 설정한 공간적 규칙을 법리적으로 왜곡하고 파산시키기 위한 인과율 공식의 힌트였다.

'붉은 선이 그어진 구역은 사유지가 아니며, 점유 권한이 없는 불법 적치물로 간주한다.'

아파트 관리 규약 제24조. 입주민의 동의 없이 공용 공간을 무단 점거한 시설물은 즉각 철거 및 원상복구의 대상이다.

준우는 낙하하는 도중 벽면에 돌출된 거대한 철제 구조물을 발견했다. 입대위의 사설 청소부들이 지하 제단으로 통하는 통로를 숨기기 위해 임의로 설치한 불법 격리벽이었다.

"불법 건축물에 대한 강제 집행을 시작하지."

준우가 공명하는 구형 마스터키를 격리벽의 수동 제어 단자함에 꽂아 넣었다.

콰아아앙!

강력한 전자기적 오버로드가 단자함을 관통했다. 동시에, 더 하이스트 센트럴의 동경 미러 내부에서 보았던 번개 모양의 미세한 음양 전도 규격 균열 흔적이 준우의 뇌리에 겹쳐졌다. 그 균열은 청소부 귀신들이 결계 내부로 조작해 들어올 때 사용하는 영적 송전선이었다.

"돌려받겠다. 그동안 무단으로 도용한 전력 자원 전부를."

준우의 손끝에서 푸른 불꽃이 튀었다. 균열을 통해 역류한 음양 전도 에너지가 구형 마스터키로 흡수되며 백색의 낙뢰가 되어 격리벽을 강타했다.

쿠구구구궁!

강철로 된 차단벽이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폭발의 반동을 이용해 가볍게 바닥에 착지한 준우의 눈앞에, 기괴한 핏빛 마력 웅덩이가 출렁이는 지하 최심부의 거대 공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

그 시각, 지하 공동의 중심부.

검붉은 점액질이 가득 찬 극한의 마력 웅덩이 한가운데에 소희가 사슬에 묶인 채 갇혀 있었다. 사방으로 뻗은 괴물의 핏줄 같은 구리 배선들이 그녀의 사지를 조여왔다.

보통의 열일곱 살 소녀라면 비명을 지르며 기절했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소희의 눈동자에는 두려움 대신 서슬 퍼런 광채가 서려 있었다. 준우의 피를 이어받은 가문의 영안이 극도의 위기 상황 속에서 완전히 각성한 것이었다.

"이 징그러운 것들이 감히 누굴 감금하려 들어?"

소희가 이를 악물며 머리를 흔들었다. 머리카락 사이에 꽂혀 있던, 가문 전래의 벽사(辟邪)용 은으로 도금된 단단한 금속 머리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소희는 구두 끝으로 조심스럽게 머리핀을 끌어당겼다. 손가락이 묶여 있었지만, 유연한 몸을 비틀어 겨우 머리핀을 움켜잡았다. 그녀의 눈에 괴물의 심장 역할을 하는, 웅웅거리며 진동하는 굵은 배선 뭉치가 보였다. 현대식 엘리베이터의 전원선과 원시적인 귀신의 혈관이 기괴하게 융합된 핵심 결속점이었다.

"우리 오빠가 오면 네놈들은 세무조사 정도로 안 끝나. 감옥에 가기 전에 내가 선급금부터 떼어 가마."

소희가 머리핀을 움켜쥐고 온 힘을 다해 괴물의 심장 결속 배선 틈새를 내리찍었다.

푸수욱!

"키에에에엑!"

공동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기괴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배선 틈새에서 검은 피와 함께 푸른 스파크가 사방으로 튀었다. 소희의 돌발적인 행동으로 인해 모방귀신이 구축해 놓았던 외부 통신 신호 왜곡 결계가 강제로 누전되며 붕괴하기 시작했다. 준우를 속이기 위해 흘려보내던 무전기 너머의 거짓 음향들이 노이즈와 함께 완전히 깨져 나갔다.

"어디서 오빠를 낚으려고 수작질이야, 깡통 귀신 주제에!"

소희가 침을 뱉으며 쾌활하게 웃었다. 그녀의 변칙적인 방해 공작은 지하 공동 전체의 영적 균형을 사정없이 흔들어 놓았다.

***

"컥……!"

격리벽을 돌파해 공동 내부로 진입하던 준우가 멈춰 서며 붉은 피를 토해냈다.

지이이잉!

준우의 전신 땀구멍에서 붉은 피가 송골송골 배어나와 셔츠를 적시기 시작했다. 장부에 기록된 수많은 계율의 인과율이, 최심부의 원시적 음기와 충돌하며 무서운 속도로 역류하고 있었다. 손목의 검푸른 혈관이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요동치며 피부를 뚫고 나올 듯 꿈틀거렸다. 폐부가 타들어 가는 지옥 같은 고통이 엄습했다.

뒤따라 내려온 강도진이 그 모습을 보고 경악해 외쳤다.

"한 선생! 몸이……!"

"이름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준우가 피가 섞인 기침을 뱉어내며 차갑게 웃었다. 그의 눈동자는 고통 속에서도 오히려 기괴할 정도로 맑게 빛나고 있었다.

"체납된 세금이 좀 많아서 독촉장이 세게 날아온 것뿐입니다. 원래 고소득자일수록 세무조사 강도가 높은 법이지요."

준우는 비틀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계율 대장을 꽉 쥐었다.

동시에 그가 가진 영적 혈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지하 최심부에 잠들어 있던 비선 결계의 정령이 준우의 피와 공명하고 있었다. 이 결계는 단순한 아파트의 정화 장치가 아니었다. 서울 한복판, 수백 만 가구의 안전과 생명력을 지탱하는 도심형 안식 수호 기둥으로 완전 개방될 수 있는 거대한 영적 혈맥이었다.

"내 여동생이 안에서 판을 흔들고 있군. 오빠 노릇을 하려면 이 정도 인과율쯤은 씹어 삼켜야지."

준우가 자신의 피가 묻은 손가락으로 계율 대장의 봉인을 강제로 쓸어내렸다.

스스스스슥!

대장의 장장들이 미친 듯이 넘어가며 역류하던 저주의 붉은 실타래들을 강제로 억누르기 시작했다. 남매의 보이지 않는 신뢰와 연대가, 육체를 파괴하려던 인과의 폭풍을 잠재우는 강력한 쐐기가 되었다. 전신의 통증이 가라앉으며, 준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영기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순수하게 정화되기 시작했다.

"가자."

준우가 거침없이 핏빛 웅덩이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

출렁이는 웅덩이 앞에 도달한 준우가 걸음을 멈추었다.

수직으로 쏟아지는 희미한 비상등의 붉은 불빛 아래, 물결이 출렁였다. 그리고 준우의 발목이 차가운 웅덩이의 점액질에 닿는 순간, 그의 안구가 크게 흔들렸다.

"오빠……!"

"오빠! 저 가짜한테 속으면 안 돼!"

두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졌다.

웅덩이 한가운데, 똑같은 단발머리, 똑같은 찢어진 셔츠, 그리고 똑같이 이마에 피를 흘리고 있는 두 명의 소희가 나란히 묶여 있었다. 눈빛마저도 완전히 판박이였다. 심지어 두 소녀의 손에는 똑같은 은색 머리핀이 쥐어져 있었다.

"내가 진짜야! 오빠가 맨날 노잼 드립 칠 때마다 내가 1점 준 거 기억 안 나?"

왼쪽의 소희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웃기지 마! 오빠의 썰렁한 블랙 유머를 버틸 수 있는 강철 멘탈은 나밖에 없어! 저년이 내 기억을 모방한 거야!"

오른쪽의 소희 역시 지지 않고 준우를 바라보며 외쳤다.

두 명의 소희. 어느 쪽이 진짜 동생이고, 어느 쪽이 준우의 마음을 무너뜨려 계율을 어기게 만들려는 모방귀신의 교묘한 의태인가.

눈앞의 기우뚱 서 있는 두 명의 여동생을 바라보며, 준우의 손에 든 계율 대장이 불길한 붉은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단 한 번의 잘못된 선택으로 동생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계율의 저주가 준우의 목숨을 앗아갈 것이다.

지하 공동의 차가운 정적 속에서, 두 명의 소희가 준우를 향해 동시에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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