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공동의 차가운 웅덩이에 발목을 딛자마자, 뼛속까지 시려 오는 음기가 장화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물결이 기괴하게 출렁이며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희미한 붉은색 비상등 불빛 아래, 똑같은 단발머리와 똑같이 찢어진 셔츠를 입은 두 명의 소희가 기우뚱한 자세로 서 있었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붉은 피가 뺨을 타고 내려가는 궤적마저 소름 끼치도록 일치했다.
"오빠……!"
"오빠! 저 가짜한테 속으면 안 돼!"
두 목소리가 동시에 귓전을 때렸다.
왼쪽에 선 소희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웅덩이의 물을 첨벙이며 소리쳤다.
"내가 진짜야! 오빠가 맨날 노잼 드립 칠 때마다 내가 1점 준 거 기억 안 나?"
"웃기지 마! 오빠의 썰렁한 블랙 유머를 버틸 수 있는 강철 멘탈은 나밖에 없어! 저년이 내 기억을 모방한 거야!"
오른쪽의 소희 역시 지지 않고 준우를 매섭게 노려보며 소리쳤다.
한준우의 손등 위로 검푸른 혈관이 마치 살아 있는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장부의 한계를 무리하게 끌어다 쓴 대가로 폐부 깊은 곳에서부터 타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심박수는 이미 정상 범위를 초월해 귓가에서 이명처럼 쿵쾅거렸다.
어느 쪽이 진짜인가. 단 한 번의 잘못된 선택으로 동생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지하 공동에 선포된 '이름을 부르는 자는 혀가 뽑힌다'는 계율의 저주가 준우의 목숨을 앗아갈 터였다. 모방귀신은 준우가 갈등의 늪에 빠져 스스로 파멸하기를 기다리며 교묘하게 침묵의 덫을 놓고 있었다.
하지만 한준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신파극 찍을 시간 없다. 지연이자율 계산하기도 바쁜 몸이거든."
준우는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두 명의 소희 중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가문 대대로 내려온 비법서, 품 안의 [계율 대장]이 싸늘한 영기를 뿜어냈다. 1화에서 엘리베이터 비공식 행동 수칙 하단에 적혀 있던 의문의 '붉은 볼펜 자국'의 규칙 왜곡 흔적. 그것은 단순한 낙서가 아니었다. 손각시의 행동을 규약상으로 불법 판정하여 강제 영수할 수 있게 해주는 핵심적인 인과율 공식의 힌트였다.
'거울 속의 대칭은 본질을 모방하나, 음양의 전도 균역을 통과할 때 반드시 규격의 균열이 발생한다.'
준우의 영안(靈眼)이 가짜 소희의 왼쪽 뺨을 꿰뚫어 보았다. 그곳에는 2화에서 확인했던 '동 미러 내부의 고정된 번개 모양의 미세한 음양 전도 규격 균열 흔적'이 아주 일시적인 붉은 노이즈 형태로 흐르고 있었다. 입대위의 부패한 청소부 귀신들이 결계 내부로 조작해 들어올 때 발생하는 전력 자원의 역압수 트리거. 모방귀신은 소희의 껍데기를 완벽히 베꼈지만, 그 영체의 본질에 새겨진 거울의 균열 자국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오빠, 왜 그래? 빨리 날 구해줘……!"
왼쪽의 소희가 완벽한 동생의 목소리로 애원하며 품속에서 시퍼런 단검을 꺼내 들었다. 준우의 팔을 베어 그 피를 취하고, 계율의 인과를 무너뜨리려는 모방귀신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가짜의 단검이 준우의 목통을 향해 무자비하게 쇄도했다.
준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검지와 중지를 가볍게 맞대고 튕겼다.
딱!
"불법 무단 도용은 징벌적 손해배상 대상이야."
그의 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불꽃이 계율 대장의 서약과 공명하며 집수조 전체를 삼킬 듯한 기세로 폭발했다. 붉은 화염이 아닌, 영혼의 찌꺼기마저 태워버리는 순백의 영기 화염이 가짜 소희의 얼굴을 정면으로 강타했다.
콰아아앙!
귀를 찢는 비명과 함께 가짜의 형상이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타들어 갔다. 지루한 증거 검증이나 감정적 신파 따위는 끼어들 틈이 없었다. 압도적인 단서 검증을 통한 즉결 가혹 폭파. 그것이 한준우의 방식이었다.
화염의 잔상이 허공에 흩어지는 와중에도, 진짜 소희는 뒤편에서 태연하게 서 있었다. 소희는 검지와 중지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끼운 채, 마치 시가를 깊게 피워 무는 듯한 시니컬한 가식 흉내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가문 전속의 독특한 블랙 위트이자, 남매만이 공유하는 완벽한 가짜 식별 신호였다.
"점수는?"
준우가 옷자락에 묻은 가짜의 재를 털어내며 물었다.
"10점 만점에 1.2점. 연출은 좋았는데, 내 명품 단발머리 끝이 초 단위로 살짝 탈 뻔했잖아. 오빠, 퇴마 비용에서 미용실 값 제한다."
소희가 피식 웃으며 묶여 있던 밧줄을 손쉽게 풀어내고 웅덩이 밖으로 걸어 나왔다. 이름조차 부르지 않았기에 지하 공동의 계율은 발동하지 않았다. 완벽한 구별의 확정이었다.
그때, 타버린 모방귀신의 영체 잔해 속에서 검은색 가죽으로 제본된 두꺼운 기록부 한 권이 툭 떨어졌다. 모방귀신의 핵심 기억 기록부였다.
준우가 다가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계율 대장의 봉인이 반응하며 기록부의 내용을 정량적 자원으로 영수(領收)하기 시작했다. 대장의 장장들이 미친 듯이 넘어가며, 30년 동안 이 아파트 단지 밑바닥에 숨겨져 있던 추악한 기억의 파편들이 준우의 뇌리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건……."
준우의 눈동자가 차갑게 굳어갔다.
기록부 속에는 30년 전, '더 하이스트 센트럴'의 가치를 천문학적으로 상승시키기 위해 입주자대표회의의 선대들이 벌인 짓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들은 아파트의 지전류를 독점하고 막대한 부를 쌓기 위해, 대대로 계율을 지키며 대지를 수호하던 준우의 가문을 모함하여 몰살시켰다.
그리고 그들의 영혼과 피를 이 지하 최심부 제단의 인신 제물로 의탁하는 불법 사탄극을 벌였던 것이다. 가문의 파멸은 천재지변이 아닌, 철저히 기획된 인간들의 부동산 탐욕극이었다.
"우리 집안을 아주 알뜰하게도 쪼개 드셨군."
준우의 목소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바닥의 웅덩이를 서서히 얼려 들어갔다.
쿠구구구궁!
지하 공동 전체가 거세게 흔들렸다. 망가진 제단 주변의 돌가루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제단의 폭주하는 붕괴 에너지를 닥치는 대로 삼켜 기괴하게 부풀어 오른 형태가 어둠 속에서 솟구쳤다.
신옥주였다.
인간의 이성을 완전히 상실한 채, 사악한 영성과 혼화(魂化)된 그녀의 잔해가 흉측한 거인의 형상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다 죽여버리겠다! 내 아파트야! 내 돈이라고! 너희 가문 같은 미개한 무당 놈들에게 한 푼도 줄 수 없어!"
신옥주의 혼화 잔해가 아파트 기저 골조를 받치고 있는 거대한 콘크리트 기둥들을 향해 돌진했다. 지하시설 전체를 무너뜨려 준우 남매와 함께 자폭하려는 마지막 소용돌이였다. 천장에서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낙하하기 시작했다.
"오빠, 저 할머니 완전히 맛이 갔는데? 이대로 두면 우리 다 콘크리트 만두가 될 거야!"
소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준우는 주머니 속에서 강도진 보안팀장이 건넸던 고장 난 구형 마스터 스마트키를 꺼냈다. 암전 상태의 지하시설 격리 제어벽을 강제 오버로드하여 준우가 선점해 진입할 수 있게 해주는 열쇠 장치.
"소희야, 휴대폰 준비해."
"이미 세팅 끝났지!"
소희가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액정 화면에는 6화에 미수신 상태로 예약 설정해 두었던 기이한 미래 송신 코드가 깜빡이고 있었다. 그것은 모방귀신이 자신들의 탈출 경로로 숨겨놓았던 수직 통로 내의 가상 좌표와 차단벽 분쇄 신호를 역발상으로 추적하는 영적 파형이었다.
"오버로드 개시한다."
준우가 구형 마스터 스마트키의 단자를 소희의 스마트폰 충전 포트에 강제로 꽂아 넣었다.
이이이이잉!
두 장치가 공명하며 청색의 전류가 지하 공동 전체로 뻗어 나갔다. 준우는 계율 대장을 펼쳐 들고 그 거대한 에너지를 하나의 법리적 계약으로 묶어 세웠다.
"피고인 신옥주. 아파트 공용 부부 무단 점거 및 사적 이익을 위한 불법 인신 제물 계약 위반. 이에 따라 피고의 모든 영적 자산과 붕괴 에너지는 관리 규약 제49조에 의거, 아파트 영구 정화 결계의 동력으로 강제 몰수 및 영수한다!"
쿠르릉!
신옥주가 유도하려던 자폭 소용돌이가 역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구형 마스터키의 통제 하에 들어간 대지의 에너지가 거대한 깔때기 모양으로 신옥주의 영체를 빨아들였다.
"아악! 내 아파트가! 내 영생이!"
신옥주의 단말마가 지하 공동에 울려 퍼졌으나, 이내 사방으로 뻗어 나간 결계의 푸른 빛 속으로 완전히 분쇄되어 흡수되었다. 지하시설을 가득 채웠던 음습한 음기가 한순간에 정화되며, 거대한 수직 샤프트를 따라 푸른빛의 정화 결계가 웅장하게 솟구치기 시작했다.
"휴, 관리비 고지서에 퇴마 비용 청구하면 볼만하겠네."
준우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억지스러운 독설을 뱉었다.
그러나 평화는 길지 않았다.
콰과과과광!
지하 공동 밑바닥에서부터 차원이 다른 격렬한 진동이 올라왔다. 이번에는 신옥주의 자폭 시도가 아니었다. 지하 깊은 곳에 존재하던 거대한 지맥의 수직 통공 전체가, 신옥주의 소멸과 함께 급격하게 수축하며 거대한 암석 무덤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어이, 한준우! 당장 피해!"
저 멀리 통로에서 피를 흘리며 달려오던 보안대장 강도진이 찢어지는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수직으로 뚫려 있던 엘리베이터 샤프트의 지지대들이 차례대로 굉음을 내며 비틀리기 시작했다. 지맥의 대함몰이 시작된 것이었다. 49층짜리 초고층 마천루 '더 하이스트 센트럴' 메인 타워 전체가 통째로 지하 공동 아래로 가라앉기 직전의 최악의 함몰 가스 분출 사태가 남매의 머리 위를 덮쳐오고 있었다.
쿠구구궁, 쿠르르릉!
단순한 진동이 아니었다. 발밑의 콘크리트 바닥이 마치 살아 있는 짐승의 가죽처럼 기괴하게 부풀어 올랐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쩍쩍 갈라지는 균열 틈새 사이로 수천 년간 고여 있던 음습한 썩은 흙냄새와 유황 가스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가스를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듯해 준우는 옷소매로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손목을 타고 올라온 검푸른 혈관은 이미 목덜미를 지나 턱밑까지 뻗쳐 있었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나올 것처럼 요동쳤다.
"오빠, 이거 봐! 기계가 비명을 지르고 있어!"
소희가 내민 스마트폰 화면 속, 예약 송신 코드가 붉은색 전기 노이즈로 뒤덮이며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지하시설 전체의 격리 제어벽이 붕괴하면서 흘러나온 영적 과전류가 스마트 기기를 완전히 과부하시키는 중이었다.
동시에 머리 위 대기가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파열음이 연속해서 울렸다.
깡! 깡! 콰아아아앙!
엘리베이터 샤프트 내부를 수직으로 관통하던 수십 조의 초고장력 강철 와이어들이 장력을 이기지 못하고 끊어지며 콘크리트 내벽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잘려 나간 쇠사슬들이 채찍처럼 허공을 가르며 사방으로 튀었고, 그 충격으로 십 수 톤에 달하는 엘리베이터 카(Car)가 허공에서 수직 낙하하기 시작했다.
"한준우! 뒤로 뛰어!"
균열 너머에서 쇠창살을 붙잡고 있던 강도진이 찢어지는 손귀의 고통도 잊은 채 소리쳤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무너져 내리는 암석의 굉음에 가로막혀 모기 소리처럼 흩어졌다. 지반 자체가 밑바닥부터 통째로 함몰되고 있었다.
준우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흔들리는 웅덩이 한가운데로 발을 굳건히 디뎠다. 그의 손등 위에서 붉은빛으로 타오르던 [계율 대장]의 서장들이 폭풍에 날리는 낙엽처럼 요란하게 펄럭였다. 가문의 정수이자 초자연적 비법서인 대장이, 이 거대한 건조물의 붕괴를 영적 규약의 위반으로 인식한 것이다.
'건축법 시행령 제32조, 구조 안전의 확보.'
준우의 머릿속에 현대식 소방법과 안전 규정들이 계율 대장의 문체로 치환되어 떠올랐다. 이 아파트는 단순한 콘크리트 덩어리가 아니다. 수천 명의 인간이 매일 밤 숨 쉬고 잠드는 거대한 수직의 영적 영토다. 입대위가 사사로이 제단을 쌓아 지맥을 훼손한 행위는, 대지의 신성과 입주민들의 계약을 정면으로 위반한 불법 점거였다.
"이 땅의 소유권은 입대위도, 저 심연의 괴물 것도 아니다."
준우가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이빨로 깨물었다. 붉은 선혈이 뿜어져 나와 계율 대장의 빈 페이지 위로 뚝뚝 떨어졌다.
"여기에 입주한 이들의 평범한 일상과 계약한 것은 나다. 대장(契律 臺帳), 영수를 선포한다!"
지하 공동 전체에 준우의 피와 공명하는 백색의 낙뢰가 내리쳤다.
스스스스스!
소희의 스마트폰에서 뻗어 나온 가상 좌표 신호와 강도진의 구형 마스터키가 내뿜는 오버로드 전류가, 준우의 피를 매개로 하여 계율 대장의 규약 속에 단단히 얽혀들었다. 뒤틀리던 철골들이 쇳소리를 내며 제자리를 찾아가려 요동쳤고, 무너지던 천장의 암석들이 허공에 그대로 멈춰 섰다. 아파트 기저 골조 자체가 거대한 영적 결계의 기둥으로 재배치되는 과정이었다.
"어우, 오빠 멋있는 건 좋은데 발밑이 좀 심각하거든?"
소희가 준우의 가죽 재킷 소매를 잡아끌었다.
바닥의 웅덩이가 급격하게 소용돌이치며 아래로 꺼지기 시작했다. 지하 5층 집수조 밑바닥의 사구역이 완전히 허물어지면서, 그 아래 깊이를 알 수 없는 암흑의 지맥 공동이 아가리를 벌린 것이었다.
쉬이이이익!
그 구멍 속에서 차가운 냉기와 함께, 수십 년간 갇혀 있던 시커먼 고대의 지액 가스가 무서운 속도로 분출되기 시작했다. 가스가 닿는 곳마다 콘크리트 벽면이 순식간에 부식되어 가루로 흘러내렸다.
동시에 지상 49층까지 치솟아 있던 '더 하이스트 센트럴'의 메인 타워가 1도, 2도, 서서히 옆으로 기울어지는 감각이 발바닥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건물 전체를 지탱하던 수직의 중심축이 통째로 꺾여 내리며 사십구 층 아래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기 직전의 절체절명의 수렁.
엄청난 기압 차로 인해 고막이 터질 듯한 이명이 준우의 뇌리를 강타했고, 어둠 저편에서 지맥의 원시 신성을 품은 거대한 사악한 눈동자들이 일제히 개안하는 소름 끼치는 환영이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