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가마에서 이제 막 꺼낸 포신의 식는 소리가 울려 퍼지기 무섭게, 무산 북방 수비 경계 진지를 지키는 척후병들이 온몸에 피를 철철 흘리며 여진과 왜인 사수를 동반한 부대가 우회하여 목책을 뚫었다고 소리치며 성문으로 기어 들어왔다.
숨이 턱 끝까지 막힌 전령의 입에서 왈칵 흘러내린 선혈이 흙바닥을 검붉게 적셨다. 정제소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완성의 환희는 찰나의 순간에 얼어붙었다. 차갑게 식어가는 은백색의 백동 지자총통 50문이 정적 속에서 둔중한 빛을 발했다.
"여진 무리에 왜인 사수라니, 그게 무슨 해괴한 소리냐! 이 추운 북방 땅에 왜놈의 조총수가 어찌 나타난단 말이냐!"
서태식이 쇠망치를 떨어뜨리며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장인 특유의 성깔 대신 날 선 공포가 묻어났다. 사방에서 야장들이 술렁이며 뒤걸음질쳤다.
박강우는 쓰러진 척후병의 찢어진 군복 틈새로 박힌 탄자를 응시했다. 납으로 둥글게 뭉쳐진 탄환은 조선의 승자총통에서 나오는 것보다 구경이 작고 단단했다. 왜군의 조총탄이었다. 우려하던 인과의 역풍이 기어이 북방의 국경선까지 불어닥친 형국이었다.
"서 대장, 정신 차리시오."
박강우의 목소리는 칼바람보다 건조했다. 그는 오른손을 꽉 쥐었다. 손가락 끝마디가 얼어붙은 것처럼 굳어 가며 찌릿한 마비가 팔뚝을 타고 어깨까지 치밀어 올랐다. 직관안을 무리하게 가동한 대가가 하필 이 순간에 육체를 갉아먹고 있었다. 하지만 쉴 틈은 없었다.
"우물쭈물하다가는 주조한 포신을 써 보지도 못하고 왜놈들과 야인들의 칼받이가 될 뿐이오. 당장 장인들을 소집하여 기포 없이 구워낸 백동 지자총통을 성곽 위로 올려야 하오."
"하지만 군관님, 신형 포들은 아직 방패판도 달지 못했고 포차에 얹지도 못했습니다! 이 무거운 쇠뭉치를 맨몸으로 어찌 나른단 말입니까!"
"가죽끈과 삼줄을 가져오시오. 장사들을 모아 들것에 얹어서라도 날라야 하오. 정제해 둔 염초와 유황도 전부 성벽 위로 옮기시오. 단 한 홉의 화약도 이 정제소에 남겨두어서는 안 되오."
박강우는 왼손으로 검자루를 움켜잡으며 명령했다. 오른팔은 이미 감각이 소실되어 허벅지 옆에 무겁게 늘어져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통증을 억눌렀다.
정제소 마당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장인들과 포수들이 삼줄로 백동포의 포신을 단단히 묶어 올리기 시작했다. 사형 주조법으로 두께를 줄인 덕에 기존 청동포보다 무게가 삼분의 일은 가벼웠으나, 여전히 장정 넷이 매달려야 겨우 들릴 만큼 둔중한 무게였다.
"어영부영하지 말고 들어라! 이 포가 넘어가면 우리 목숨도 끝이다!"
서태식이 앞장서서 거친 어깨로 포신을 짊어졌다. 땀방울이 그의 턱끝에서 얼어붙어 고드름처럼 매달렸다.
박강우는 성벽으로 향하는 가파른 흙길을 걸었다. 무산성 성곽 위는 이미 혼란의 극치였다. 동사(凍死)를 피하기 위해 거적때기를 뒤집어쓰고 있던 수성군 군졸들은 포성 소리에 놀라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성을 지켜야 할 무산 부사의 군관들은 말에 올라타 도망칠 궁리만 하는 중이었다.
"적이 오고 있다! 남방의 왜놈들이 야인들의 길잡이를 받아 성벽 밑까지 당도했다!"
누군가의 비명 섞인 외침에 군사들의 대열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박강우는 성벽 여장 사이로 몸을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수많은 횃불이 무산성 앞벌판을 메우고 있었다. 그 불빛의 움직임은 여진족 야인들의 무질서한 약탈 행태와 완전히 달랐다. 횃불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질서정연하게 횡대로 늘어서고 있었다.
박강우는 눈가 주변의 신경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느끼며 억지로 직관안을 개방했다. 시야가 붉게 물들며 적들의 진형이 분자 단위의 격자처럼 쪼개져 보이기 시작했다.
그순간, 그의 등줄기로 서늘한 소름이 돋아났다.
조총을 든 왜인 사수들은 밀집해 있지 않았다. 그들은 조선의 화차가 내뿜는 화살과 포격을 의식한 듯, 평소보다 세 배 이상 넓은 간격을 두고 산개해 있었다. 게다가 그들의 전면에는 겹겹이 칠해진 두꺼운 판자 뒤에 철판을 덧댄 개량형 철갑 방패가 버티고 있었다.
본래 역사 속의 왜군이라면 임진년 초기에는 기동성을 중시하여 이 정도로 무거운 철갑 방패를 다수 운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강우가 무산에서 화약 기술을 혁신하고 주조법을 개량하는 순간, 역사의 인과적 자정 작용은 왜군 지휘부의 머릿속에 '조선의 강력한 화포에 대응하라'는 경고를 심어버린 것이었다.
그 결과물이 눈앞에 있는 변칙적인 조총 사격 진형과 철갑 차벽이었다.
"내가 이들의 진화를 앞당겼구나."
박강우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도덕적 혐오감과 기묘한 부채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자신이 살고자 만든 신기술이, 적들을 더욱 괴물처럼 강화하여 조선의 목을 죄어오고 있었다.
"군관님! 적들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옵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성벽 위를 지키던 한 늙은 포수가 사시나무 떨듯 떨며 소리쳤다. 그의 손에 들린 화승은 이미 눈발에 젖어 불씨가 꺼져 가고 있었다. 주위의 군졸들은 무기를 바닥에 떨어뜨린 채 뒤로 슬금슬금 물러서고 있었다.
"도망쳐야 한다! 저 철판 방패를 어찌 뚫는단 말이냐! 조총 탄환이 날아오면 우리는 무조건 죽는다!"
한 군관이 소리치며 성벽 아래 계단으로 발을 디뎠다. 대열이 무너지기 직전의 찰나였다.
박강우는 왼손으로 허리춤의 환도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퇴각하려던 군관의 발앞에 칼끝을 강하게 내리꽂았다. 불꽃이 돌바닥을 때리며 튀었다.
"어디를 가느냐."
묵직하고 건조한 박강우의 목소리가 성벽의 칼바람을 뚫고 울려 퍼졌다. 군관이 주춤하며 검자루를 쥐려 하자, 박강우가 한 걸음 다가서며 경국대전의 구절을 얼음보다 차갑게 읊조렸다.
"경국대전 병전, 수성(守城) 조에 이르기를, 적을 마주하여 성을 버리고 퇴각하는 자는 즉시 참형에 처하고 그 목을 성문에 걸며, 처자는 노비로 삼고 재산은 전부 몰수한다 하였소. 내 말이 틀렸는가, 군관?"
"이, 이 하급 군관 놈이 미쳤는가! 지금 적이 코앞인데 법전 따위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법이 있기에 우리가 군사이고, 이 법을 어기면 너희는 그저 도적 떼일 뿐이오."
박강우는 성벽 위로 도망치려던 군사들을 하나하나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그의 눈가 주변에서 붉은 직관안의 잔영이 무섭게 이글거렸다. 오른팔의 마비는 심해져 손가락이 구부러진 채 움직이지 않았으나, 그의 기세는 오히려 칼날처럼 예리했다.
"도망친다 한들 이 함경도의 얼어붙은 벌판에서 갈 곳이 어디 있겠는가! 너희가 여기서 무릎을 꿇으면, 저 아래 무산 고을에 있는 너희의 아들딸과 아내들이 왜놈의 조총에 구멍이 나고 야인들의 말굽에 짓밟혀 도륙당할 것이다! 살고 싶다면 버텨라! 버티고 저들의 목을 취해 법대로 공을 인정받아 살아남아라!"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었으나 감정에 휩쓸리지 않은 생존의 논리였다.
군사들의 눈빛에 서려 있던 막연한 공포가, 가족을 잃을지 모른다는 구체적인 생존 본능과 군법의 서슬 퍼런 칼날 아래에서 기묘한 살기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흩어졌던 창과 활을 다시 움켜쥐었다.
"포 가설을 완료했습니다!"
서태식이 이마의 피땀을 닦으며 소리쳤다. 성곽 여장 사이로 임시 거치대에 단단히 고정된 백동 지자총통 한 문이 머리를 내밀었다. 포신 표면에 새겨진 조밀한 기공 하나 없는 은백색 피부가 밤하늘의 달빛을 받아 차갑게 빛났다.
"화약을 장전하라."
박강우의 지시에 서태식이 미리 준비해 둔 한지 약포를 꺼냈다. 박강우가 직접 직관안으로 미세 불순물을 식별하고, 염초와 유황의 비율을 소수점 단위까지 맞추어 정제해 낸 극순도의 흑색화약이었다.
"일반 화약의 두 배 위력이다. 포신이 백동이기에 이 압력을 견딜 수 있으니, 주저하지 말고 들이부어라."
포수가 떨리는 손으로 정밀 정제 화약을 포구 안으로 밀어 넣고, 그 위에 흙을 다진 후 탄환을 장전했다.
저 아래 벌판에서는 적들의 선봉 사수들이 쇠사슬로 연결된 도하 차량과 조립식 목교를 앞세워 성벽 앞 해자를 건너려 진격하고 있었다. 삼십 장(약 90미터) 거리였다. 그들이 해자를 건너 차벽을 성벽 밑에 밀착시키는 순간, 조선군의 방어선은 무용지물이 될 터였다.
"왜놈들의 도하 차량을 조준하라."
박강우가 왼손으로 포신 후방의 가늠쇠를 조정했다. 오른팔의 감각은 완전히 사라져 돌덩이처럼 무거웠으나, 그의 왼쪽 눈은 적들의 목교 연결 부위의 분자적 약점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조준 완료했습니다!"
"점화하라."
포수가 화승을 도화선에 갖다 댔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포신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찰나의 침묵.
그리고 무산성 전체를 뒤흔드는 폭음이 밤하늘을 찢어발겼다.
쿠구구궁!
기존의 조선 청동포가 내뿜던 둔탁한 소리가 아니었다. 고도로 정제된 화약의 급격한 팽창력과, 이를 한계까지 가두어 방출한 백동 포신의 강인함이 결합하여 발생한, 고주파의 날카롭고 찢어지는 듯한 굉음이었다.
포신은 파열하지 않았다. 단 하나의 미세한 균열도 없이, 백동 지자총통은 뒤로 가볍게 반동하며 엄청난 양의 화염을 토해냈다.
성벽을 떠난 포탄은 허공을 가르며 삼십 장 밖의 벌판으로 날아갔다. 적들이 자랑스럽게 밀고 들어오던 도하 차량의 중심부에 정확히 직격했다.
쾅!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단단한 참나무와 철판으로 조립된 도하 차량이 종잇장처럼 산산조각이 나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주변을 엄호하던 왜군 사수들과 야인들이 폭풍에 휘말려 공중으로 솟구쳤다. 쇠붙이와 목재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왜군의 선봉 대열을 무자비하게 쓸어버렸다.
조총의 화망이 한순간에 끊겼다. 벌판은 단숨에 비명과 불길로 가득 찬 지옥도로 변했다.
"성공이다! 도하 차량이 박살 났다!"
성벽 위에서 지켜보던 조선 군졸들이 목이 터져라 환호성을 질렀다. 단 한 발의 포격으로 적의 가장 취약한 연결 고리를 끊어낸 쾌거였다. 신형 백동포의 가공할 위력에 장인들과 포수들의 얼굴에 광적인 희열이 깃들었다.
그러나 박강우는 환호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적들의 본진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초탄의 위세에 눌려 잠시 주춤하던 왜군의 후방 대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훈련된 기계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박살 난 선봉의 잔해를 우회했다.
그리고 그들의 전면에 서 있던 왜군 지휘조가 소수의 개량형 철갑 조립 차벽을 단단히 맞물리며 성문 코앞까지 우겨넣기 시작했다.
철갑 차벽은 비정상적으로 두꺼웠으며, 성벽 바로 밑의 급경사 지대로 파고들어 포격의 각도가 닿지 않는 사각지대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 어둠의 틈바구니 속에서, 적들이 성문을 파괴하기 위한 둔중한 돌파 공구를 꺼내 들어 올리는 금속음이 성벽 위까지 서늘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