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사흘 내로 신형 지자총통(地字銃筒) 50문이라 함은 평시의 도편수와 석수, 야장들이 반년을 매달려도 채우지 못할 수량이었다. 더구나 대포를 주조할 구리와 주석은 무산 군기창의 대장에 단 한 근도 남아 있지 않았다.

붉은 낙인이 찍힌 통첩장을 쥔 박강우의 오른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전날 밤 직관안을 무리하게 가동한 대가로 밀려온 신경 마비가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은 탓이었다. 손가락 마디마디를 타고 흐르는 둔중한 통증이 척수를 따라 머리통을 짓눌렀다.

붉은 칠을 한 서장을 들고 온 신립의 전령은 가가대소하는 기색도 없이 차갑게 서 있었다.

"보아하니 기한을 맞추지 못할 엄살을 부릴 셈인가 보오."

전령의 목소리에는 북방 기병의 기세를 등에 업은 오만함이 가득했다.

박강우는 구겨진 통첩장을 책상 위에 정갈하게 펴서 올려놓았다. 그리고 차분하게 전령의 눈을 직시했다.

"신립 대감의 명은 엄중하나, 군기를 주조하는 일은 율법과 제도를 따르는 법이오. 무산 부사가 예산을 전용하여 군기창의 원료가 바닥난 상황에서, 독촉장 하나로 쇠붙이가 하늘에서 떨어지지는 않소."

"네 이놈! 감히 대감의 군령 앞에 핑계를 대는 것이냐!"

"핑계가 아니라 실상(實狀)을 고하는 것이오."

박강우는 품에서 전날 밤 받아낸 내관 김판석의 자백서와 무산 관아의 세무 장부를 꺼내 책상 위에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이것이 무엇인지 아시오? 한양 서인의 거두 한필두 대감의 낙인이 찍힌 불량 유황과 구리를 밀무역하던 장부요. 무산 관아가 공적으로 사들여야 할 고순도 동광석과 염초가 이 장부에 적힌 사가(私家)의 창고로 흘러 들어갔소. 나는 지금부터 경국대전 호전(戶典)의 무단 전매죄와 군기 횡령죄를 적용하여, 이 불법 자재들을 압수할 것이오. 전령께서는 신 대감께 무산의 군기가 사흘 안에 준비될 것이라 전하시오. 단, 법도에 따른 자재 확보가 끝나는 대로 말이오."

전령은 박강우의 서슬 퍼런 태도와 책상 위에 놓인 장부의 붉은 낙인을 번갈아 보았다. 사대부 가문의 은밀한 이권이 얽힌 장부를 하급 군관이 대담하게 움켜쥐고 흔드는 모습에 전령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전령은 더는 말을 얹지 못하고 굳은 얼굴로 군례를 올린 뒤 방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기 무섭게 공방의 도편수 서태식이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의 얼굴은 차갑게 식은 잿빛이었다.

"나리! 미친 짓입니다! 사흘이라니요! 가마를 예열하는 데만 하루가 꼬박 걸리고, 진흙 거푸집을 빚어 말리는 데 이틀이 넘게 걸립니다. 게다가 청동을 녹일 구리와 주석은 어디서 구한단 말입니까? 이건 우리 목을 베겠다고 작정한 정략입니다!"

"서 도편수."

박강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태식의 거친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의 오른손에서 느껴지는 마비 증상이 어깨를 통해 서태식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기존의 진흙 거푸집은 쓰지 않는다."

"예? 진흙을 안 쓰면 무엇으로 포를 빚는단 말입니까?"

"모래다."

서태식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조선의 전통적인 주조법은 찰흙과 황토를 섞어 거푸집을 만들고, 이를 가마에서 구워내는 도토형(陶土型) 공법이었다. 이 방식은 거푸집을 건조하고 굽는 과정에서 미세한 균열이 생기기 쉽고, 완성된 포신 내부에 기포가 차서 폭발할 위험이 비일비재했다.

"강모래와 미세한 황토를 섞어 다진 후, 기름을 먹여 고정하는 사형(砂型) 주조법을 쓴다. 모래틀은 수분의 배출이 빠르고 가스 구멍을 내기 쉬워 쇳물을 붓는 즉시 기포 없이 굳는다. 건조 시간은 반나절이면 충분하다."

"모래로 쇳물의 압력을 버틴단 말입니까? 그런 공법은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내가 보여줄 테니, 장인들을 소집해라. 그리고 관아의 형방들을 불러라. 한필두의 하수인들이 숨겨둔 밀무역 창고를 털 시간이다."

박강우의 명령은 단호했다.

두 시간 뒤, 무산 동쪽 계곡 깊숙한 곳에 숨겨진 비밀 창고의 문이 도끼에 찍혀 처참하게 부서져 내렸다. 창고 안에는 가마니 수백 개가 겹겹이 쌓여 있었다.

박강우가 가마니 하나를 대검으로 찢자, 누런 빛깔의 유황 가루가 쏟아져 나왔다. 유황 가루 표면에는 한양 서인 가문의 표식인 '한(韓)' 자가 선명하게 낙인찍혀 있었다. 1화에서 무산의 무역 상인들이 숨기려 했던 바로 그 불량 유황 부대들이었다.

"이것이 바로 조정의 눈을 속이고 국경을 넘어 여진족과 밀거래하려던 군기 자재다."

박강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선언했다. 옆에 서 있던 관아의 형방들은 장부에 적힌 수량과 현물의 낙인을 대조하며 손을 떨었다. 서인의 거두 한필두의 목줄을 쥘 수 있는 명백한 물증이 확보된 순간이었다.

박강우는 창고 안쪽을 더 깊숙이 수색했다. 구석진 곳에 먼지가 자욱하게 쌓인 무거운 궤짝들이 늘어서 있었다. 대검 끝으로 궤짝의 자물쇠를 부수고 뚜록을 열자, 은백색의 광택을 띠는 금속 덩어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것은... 구리가 아닙니다. 은도 아니고, 철도 아닌데 어찌 이리 무겁단 말입니까?"

서태식이 금속 덩어리를 하나 집어 들며 고개를 가웃거렸다.

박강우의 눈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그는 심호흡을 크게 한 뒤, 각오를 다지며 뇌 속의 직관안(Eye of Chemical Formula)을 기동했다.

'각성.'

머릿속이 징 하는 고주파 소리로 가득 찼다. 우측 안구 주변의 모세혈관이 터질 듯 팽창하며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이윽고 눈앞의 금속 덩어리 표면 위로 투명한 격자 구조와 화학 기호들이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 Ni : 68.2% / Cu : 28.4% / Fe : 2.1% / As : 1.3% ]

고순도 니켈과 구리의 합금 광석. 그리고 변방의 아연과 주석광들이었다.

조선에서는 이를 '백동(白銅)'이라 불렀으나, 가공이 까다롭고 녹는점이 너무 높아 화포 주조에는 거의 쓰지 못하고 장식용 경대나 숟가락을 만드는 데나 쓰이던 버림받은 금속이었다. 하지만 현대 무기화학을 전공한 박강우에게 이것은 신이 내린 축복이었다.

'니켈 함량이 15%에서 20% 사이로 조율될 때, 동합금의 인장 강도는 일반 청동의 세 배를 넘어선다. 포신이 파열되는 불량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완벽한 복합 백동 합금이다.'

직관안의 푸른 수식들이 허공에서 소수점 단위의 배합 비율을 계산해 내기 시작했다.

[ Ni-Cu-Zn 주조 공식 시각화 완료. 목표 용융 온도: 1,150℃. 슬래그 분리를 위한 규산염(SiO2) 투입량 계산 완료. ]

"크윽...!"

능력의 가동이 끝나자마자 오른쪽 관자놀이가 송곳으로 찔린 듯한 극통이 밀려왔다. 박강우는 비틀거리며 창고 벽을 짚었다. 오른팔 전체가 얼음물에 담근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가며 감각이 사라졌다. 턱 끝에서 굵은 식은땀이 바닥의 흙먼지 위로 뚝뚝 떨어졌다.

살상을 위한 대포를 만들어야 한다는 현대인으로서의 도덕적 혐오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이 쇳물이 훗날 수많은 인간의 살점을 찢고 뼈를 으스러뜨릴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지옥을 이겨내지 못하면, 사흘 뒤 자신의 등가죽이 벗겨질 것이고, 몇 달 뒤 임진년의 참화 속에서 북방의 병사들과 무고한 백성들이 왜군의 조총 부대 앞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갈 터였다.

"나리! 괜찮으십니까?"

서태식이 놀라 박강우를 부축하려 했다. 박강우는 마비된 오른손을 소맷자락 속에 숨기며 차갑게 손을 내저었다.

"괜찮다. 이 백동 광석과 아연, 그리고 이 장부를 모두 정제소로 압송해라. 오늘 밤, 우리는 조선에 없던 화포를 빚는다."

* * *

그날 밤, 무산 초석 정제소의 가마터는 거대한 지옥도와 같았다.

붉은 화염이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며 밤하늘을 삼켰다. 가마의 용융 온도를 1,100도 이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관노와 군속 장인 백여 명이 달라붙어 풀무질을 해댔다. 장인들의 온몸은 숯검정과 땀으로 범벅이 되어 번들거렸다.

"불길을 더 올려라! 쇳물이 탁해지면 안 된다! 모래사판의 수분을 완전히 날려 보내라!"

서태식의 목소리가 쇳소리를 내며 정제소 마당을 울렸다.

박강우는 마비된 오른팔을 붕대로 단단히 동여맨 채 가마 바로 앞까지 걸어갔다. 가마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뺨을 태울 듯이 뜨거웠다.

양반 사대부이자 군관의 신분인 자가 가마터의 가장 뜨거운 자리에 버티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장인들의 분위기는 달라져 있었다. 통상 조선의 군관들은 멀찍이 떨어진 정자나 장막 안에서 술을 마시며 독촉만 할 뿐, 쇳가루를 뒤집어쓰는 천한 일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박강우는 왼손으로 커다란 철제 도가니 집게를 쥐었다. 마비된 오른손은 겨우 집게 끝을 받치는 지지대 역할밖에 하지 못했지만, 그의 눈빛에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군관 나리! 위험합니다! 뒤로 물러서십시오!"

야장 한 명이 소리쳤다.

"시끄럽다. 쇳물을 붓는 순간의 온도가 어긋나면 사흘 뒤 우리 모두의 목이 날아간다. 목숨이 걸린 일에 양반의 체면이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서 도편수, 규산염 모래를 투입해라! 슬래그를 분리한다!"

박강우가 직접 도가니 집게를 쥐고 쇳물 가마 앞으로 다가서자, 주위의 소란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관노들과 장인들의 눈빛에 경외감과 함께 뜨거운 무언가가 차올랐다.

"나리께서 직접 가마를 지키신다! 야장 놈들아, 풀무질을 멈추지 마라! 죽을 힘을 다해라!"

서태식이 울컥한 목소리로 지르며 풀무줄을 잡았다. 백 명의 장인이 내뿜는 거친 숨소리와 풀무의 웅장한 바람 소리가 밤공기를 가득 채웠다.

그때, 가마터 외곽의 어둠 속에서 푸른 관복 위에 수놓인 호표 흉배를 가린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사내의 손에는 조정의 권한을 상징하는 함경 감찰 마패가 쥐어져 있었다.

그는 서인의 전횡을 견제하고 실용적인 군비 확충을 도모하려던 좌의정 류성룡의 비밀 복심, 종5품 판관 이덕형이었다.

이덕형은 붉은 화염 속에서 직접 쇳물 도가니를 나르는 박강우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양반의 법도와 가문의 권위만을 내세우며 당쟁에 골몰하는 한양의 사대부들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존재. 법과 율령을 칼날처럼 휘두르며 부패한 관료들을 척결하고, 천한 장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불가능한 군기를 창조해 내는 변방의 군관.

이덕형은 천천히 박강우에게 다가가 마패를 가볍게 들어 보였다.

"박 군관이라 하셨는가."

박강우는 가마의 열기 속에서 이덕형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땀과 그을음으로 엉망이었으나, 눈빛만큼은 송곳처럼 예리했다.

"조정의 감찰관께서 이 누추한 가마터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류 대감께서 북방의 호랑이가 자라고 있다는 소문을 들으시고 나를 보내셨소. 와서 보니 소문보다 더한 광경이구려. 사대부의 신분으로 천한 야장들과 고락을 같이하며, 조정의 법을 빌려 세도가의 목을 죄다니."

이덕형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나는 그저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뿐입니다. 대포가 없으면 북방의 병사들이 죽고, 사흘 뒤에는 내 등가죽이 벗겨집니다. 법과 제도는 힘없는 자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패일 뿐입니다."

"좋은 기개요. 한양의 서인들이 김판석의 자백을 덮으려 들겠으나, 류 대감께서 조정에서 그들의 입을 막아줄 것이오. 그대는 오직 이 가마를 지키고 무기를 완성하는 데만 몰두하시오. 내가 그대의 방패가 되어주겠소."

이덕형은 협조와 경탄의 눈빛을 전하며 어둠 속으로 조용히 사라졌다. 조정의 든든한 우군이 확보되는 순간이었다.

"쇳물이 끓어 넘칩니다! 주조를 시작하겠습니다!"

서태식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가마 안에서 주황빛으로 달아오른 백동 쇳물이 출렁였다. 박강우는 마비된 오른팔에 힘을 쥐어짜며 도가니를 기울였다.

"부어라!"

은백색에 가까운 형광빛 쇳물이 모래와 황토로 단단히 다져진 사형 주조틀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기존의 진흙 틀이었다면 수분이 끓어오르며 쇳물이 사방으로 튀고 거푸집이 깨졌을 터였다.

하지만 강모래 사이의 미세한 틈새로 고온의 가스가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부드럽게 빠져나갔다. 쇳물은 막힘없이 모래틀 구석구석을 채워 나갔다. 기포는 단 하나도 발생하지 않았다.

"성공이다... 쇳물이 완벽하게 들어앉았습니다!"

야장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이어진 지옥 같은 주조 작업 끝에, 마침내 사형 거푸집이 분해되기 시작했다. 망치로 겉면의 모래틀을 깨뜨리자,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포신들이 정제소 마당에 줄지어 누웠다.

그것은 푸르스름하고 투박한 조선의 기존 청동포가 아니었다.

차갑고 은은한 은백색의 광택을 내뿜는, 기포나 균열이 단 한 군데도 없이 매끄럽게 뻗은 신형 백동 지자총통 50문이었다. 니켈의 높은 인장 강도 덕분에 포신의 두께를 기존보다 대폭 줄였음에도 불구하고, 폭사 위험은 전무한 혁신적인 화포였다. 사틀을 이용해 단 사흘 만에 대형 화포 50문을 완벽하게 주조해 낸 것은 조선 왕조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적이었다.

"이것이... 정녕 우리가 만든 포란 말인가."

서태식은 은백색으로 빛나는 포신을 어루만지며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장인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승리의 기쁨을 나누었다. 태생적인 조선 주조 기술의 한계를 완연히 돌파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그러나 승리의 여운은 길지 않았다.

가마에서 이제 막 꺼낸 포신의 식는 소리가 치익 하며 밤공기를 가르는 무섭게, 정제소의 무거운 목조 정문이 부서질 듯이 열렸다.

"비보요! 북방 경계 진지에서 급보가 왔소!"

정문 안으로 기어 들어온 것은 온몸에 피를 철철 흘리며 활과 조총 탄환에 상흔을 입은 북방 척후병들이었다. 그들의 군복은 갈가리 찢겨 있었고, 얼굴은 공포로 일그러져 있었다.

"무산 북방 수비 목책이 뚫렸습니다! 여진 무리와... 그리고 왜인 사수(沙手)를 동반한 정체불명의 부대가 우회하여 성문 앞까지 들이닥치고 있습니다! 적들의 조총 사격 진형이 예전과 다릅니다! 목책이 순식간에 화망에 휩싸여..."

척후병은 말을 끝내지 못하고 붉은 피를 토하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조선의 화력 발전에 반응하여 역사적인 자정 작용으로 왜군의 개량 전술과 대응 부대가 예상보다 훨씬 일찍 북방의 국경선까지 치고 올라온 것이었다.

은백색으로 빛나는 신형 화포의 냉각 소리 위로, 멀리 무산 성벽 너머에서 적들의 불길과 대포 소리가 불길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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