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말발굽이 딛고 선 흙바닥에서부터 차가운 진동이 뼈마디를 타고 올라왔다.

철갑을 두른 군마들이 뿜어내는 거친 숨결이 한겨울의 무산 가마터를 가득 메웠다. 붉은 술이 달린 투구 아래로 번뜩이는 신립의 눈빛은 마치 먹이를 노려보는 맹수와 같았다. 손잡이를 쥔 그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검집의 금구(金具)가 서늘한 소리를 냈다.

박강우는 마비된 오른팔을 가죽 보호대 안으로 욱여넣으며 턱을 낮추었다. 직관안의 과도한 사용으로 인해 관자놀이가 터질 듯이 욱신거렸고, 손가락 끝은 감각을 잃은 채 얼어붙어 있었다. 그러나 신립의 서슬 퍼런 위압감 앞에서도 기색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무산 군기 정비관, 권관 박강우. 지변사사 대감을 뵈옵니다.”

박강우의 목소리는 건조하면서도 차분했다. 신립은 고삐를 쥔 채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가마터 주변을 포위한 오십여 명의 북방 기병들이 일제히 창끝을 기울였다. 쇠 냄새와 말의 땀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숨 막히게 무거웠다.

“관할 부사를 협박하여 군영의 사유 재산을 침탈하고, 사사로이 화약을 정제하여 도성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신립이 말 위에서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의 묵직한 음성이 가마터의 열기를 단숨에 집어삼켰다.

“조정의 법도가 서북면에는 미치지 않는 줄 알았더냐. 하급 군관이 사대부의 가문과 국경의 군율을 우롱한 죄, 그 목을 베어 경종을 울려도 부족함이 없다.”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신립은 문치(文治)의 논리로 설득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철저한 무골이자, 자신의 기병 전술이 조선 지상 최강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인물이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유학자의 도리나 경국대전의 자구 해석이 아니었다. 오직 전장에서의 절대적인 승리, 그리고 가문의 명예뿐이었다.

박강우는 고개를 들고 신립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대감께서는 북방의 여진을 소탕하시고 일세를 풍미하셨으나, 저들의 기동력은 날이 갈 수록 가팔라지고 있습니다. 대감의 기병이 아무리 용맹한들, 저들이 숲과 험지에 숨어 화살을 퍼부을 때 매번 피해 없이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무엄하다!”

신립의 호위 군관이 칼을 반쯤 뽑으며 소리쳤다. 그러나 신립은 손을 들어 이를 제지했다. 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하찮은 화포 따위로 기병의 돌격력을 대체하겠다는 가당치 않은 소리를 하려는 것이냐. 화약 무기는 성벽 뒤에 숨은 자들의 방어용일 뿐이다. 전장의 결정구는 오직 마병의 충격력이다.”

“대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박강우가 단호하게 말을 받았다.

“보완하려는 것입니다. 여진의 기마병들은 우리 조총과 승자총통의 발사 소음과 연기에 군마가 놀라는 약점을 귀신같이 알고 파고듭니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원하는 시점에, 원하는 위치에서 거대한 화염과 폭음, 그리고 시야를 완전히 차단하는 농밀한 연막을 터뜨릴 수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신립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박강우는 마비되지 않은 왼손을 들어 가마터 한편에 쌓인 신형 정제 화약 상자를 가리켰다.

“제가 정제한 화약은 황과 초석의 순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려, 연소 속도가 기존 판입화약의 세 배에 달합니다. 이를 소형 철통에 담아 기병의 돌격 경로 전방에 투척하거나 발사한다면, 적의 군마는 폭음과 거대한 연막에 갇혀 통제력을 잃고 자멸할 것입니다. 대감의 기병들은 혼란에 빠진 적들을 무력하게 유린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은 화포로 전쟁을 끝내자는 것이 아닙니다. 대감의 위대한 기병 전술을 완성하기 위한 보조 도구입니다.”

침묵이 가마터를 지배했다.

신립은 박강우의 말을 곱씹는 듯했다. 평생을 기병 전술에 바친 장수였다. 화약의 폭음과 연막이 전장의 대열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 통제 불가능한 변수를 조선 군측에서 완벽하게 제어할 수만 있다면, 기병의 돌격력은 배가 될 것이 분명했다.

“기병의 보조 도구라……”

신립이 낮게 읊조렸다. 그의 얼굴에서 서슬 퍼런 살기가 조금씩 걷히고, 그 자리에 장수 특유의 탐욕스러운 호기심이 들어찼다.

“네놈의 화약이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내 어찌 믿겠느냐.”

“군막을 빌려주신다면, 대감의 눈앞에서 직접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만약 그 화력이 대감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면, 이 자리에서 제 목을 거두셔도 좋습니다.”

박강우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신립은 그런 박강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마침내 보검의 손잡이에서 손을 떼어냈다.

“ 좋다. 기회를 주마. 군막을 쳐라.”

* * *

숲으로 둘러싸인 군막 안.

화로의 숯불이 붉게 이글거리며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신립은 상석에 앉아 박강우가 내놓은 소형 연막탄철통을 가만히 응시했다.

박강우는 가죽 장갑을 낀 왼손으로 조심스럽게 화약의 배합 비율을 설명했다. 마비된 오른손은 소매 안으로 감추었으나,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까지는 감추지 못했다. 직관안을 억지로 유지하느라 뇌수가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조금만 더 버텨야 한다.’

그는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경국대전의 구절들과 군수 조달 법칙을 되새겼다. 사대부의 권위를 정면으로 들이받는 것은 자살 행위다. 그들의 명분과 이익을 철저히 분석하여, 스스로 움직이게 만들어야 했다.

“이것이 제가 개량한 무산식 정제 화약입니다.”

박강우가 조심스럽게 철통의 마개를 열어 내부의 고운 입자를 보여주었다.

“황의 미세 불순물을 규산염 제련법으로 걸러내고, 초석의 수분율을 일정한 온도로 고정하여 제조했습니다. 대감께서 거느리신 오십 명의 기병이 이 연막탄을 각 두 발씩만 소지해도, 여진족 삼백 기의 시야를 완전히 차단하고 그들의 군마를 광란 상태로 몰아넣을 수 있습니다.”

신립이 천천히 손을 뻗어 화약 가루를 손끝으로 찍어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손가락을 비벼 감촉을 확인했다. 서북방의 전장을 구른 노장의 안목은 정확했다. 기존 군기시에서 올라오던 눅눅하고 잡질이 섞인 화약과는 차원이 다른 건조함과 균일함이었다.

“실로 놀라운 품질이구나.”

신립의 목소리에 담긴 경계심이 한풀 꺾였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무기라 한들, 조정의 군수 보급이 끊기면 무용지물이다. 한양의 서인 세력들이 네놈의 목숨을 노리고 있고, 관할 부사 역시 네놈의 정제소를 폐쇄하려 혈안이 되어 있다. 내 어찌 조정의 눈 밖에 난 하급 군관의 뒤를 봐주겠느냐.”

박강우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신립은 이미 이 신무기의 가치를 인정했다. 단지 정치적 부담을 지기 싫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그 부담을 덜어주는 동시에, 더 큰 먹잇감을 던져주면 그만이었다.

“대감, 조정의 군수 보급이 끊기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무산의 공방은 앞으로 대감의 직속 군영에만 독점적으로 이 신형 화약을 납품하게 될 것입니다.”

“무슨 근거로 그리 장담하느냐?”

“한양의 서인 세력이 무산의 재정을 통제하고 군량을 빼돌리는 명백한 물증을 확보했기 때문입니다.”

박강우의 말에 신립의 눈빛이 다시금 날카로워졌다.

“물증이라니?”

“대감께서 무산의 보급 가판을 유지해 주시고, 제 정제소의 독점적 운영권을 보장해 주신다면, 그 물증을 통해 서인 세력의 목줄을 쥘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리되면 대감께서는 조정에서 서인들의 견제 없이 독자적인 북방 군비를 확충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신립은 한참 동안 박강우를 묵묵히 응시했다. 하급 군관의 입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철저히 조정의 권력 구도를 꿰뚫고 있는 자의 음전한 권모술수였다. 하지만 신립에게는 지극히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북방 정벌의 야욕을 품은 그에게, 서인들의 간섭 없이 독자적인 화력과 자금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다.

“……좋다.”

신립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한 달의 기한을 주마. 그동안 무산의 보급망을 유지해 주지. 하지만 만약 한 달 뒤에 내 기병들을 만족시킬 만한 화약과 연막탄을 내놓지 못하거나, 네놈이 말한 물증이란 것이 허무맹랑한 소리로 밝혀진다면…… 그때는 네 목뿐만 아니라 이 가마터 전체를 불태울 것이다.”

“약조를 지키겠습니다, 대감.”

박강우가 엎드려 절했다.

신립은 군막을 나서며 수하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 무산 정제소를 짓누르던 거대한 압박이 일단은 한 걸음 물러선 순간이었다.

* * *

신립의 군대가 정제소를 떠난 직후, 박강우는 곧바로 집무실로 향했다.

오른팔의 마비 증상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으나, 손 끝의 감각은 여전히 무디었다. 그는 가죽 장갑을 거칠게 벗어던지고, 책상 밑 비밀 함에서 낡은 가죽 부대 하나를 꺼냈다.

1화에서 노획했던, 무산 지방의 무역 상인들이 운송하다 흘린 불량 유황 부대였다.

박강우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직관안을 가동했다.

[대상: 유황 포장 부대 표면의 압인(押印)] [성분 분석: 산화철 기반의 적색 안료, 동백기름 혼합물] [구조 판독: ‘동래 한씨 사가(私家) 상단’의 낙인 확인]

머릿속으로 붉은색 홀로그램 분자 구조가 시각화되며, 낙인의 미세한 균열 틈새로 한양 서인의 거두 한필두 가문의 상징 문양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박강우는 직관안을 끄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편두통이 송곳처럼 뇌를 찔렀지만, 그의 입꼬리는 비틀려 올라갔다.

“찾았다.”

그는 부사가 남기고 간 무산의 군량 무역 장부와 세관 공식 문서를 책상 위에 펼쳤다. 장부의 여백마다 적힌 필적과 한필두 상단의 낙인을 대조하기 시작했다.

조선은 건국 이래 사리사욕을 취하는 밀무역을 엄히 금해왔다. 특히 국경 지대에서의 군량과 유황의 무단 거래는 참형에 처해질 수 있는 대역죄였다.

장부를 한 장 한 장 넘기던 박강우의 눈이 어느 한 대목에서 멈추었다.

[만력 19년 11월, 무산 세관 통과 품목: 세동(細銅) 이백 근, 군량 오십 석. 수신처: 동래 왜관(倭館) 삼도왜인 상단.]

세동은 화포를 만드는 핵심 재료이고, 군량은 군대의 뼈대다. 이를 조정의 허가 없이 사사로이 왜인들에게 밀수출했다는 것은, 한필두 일파가 단순히 부패한 사대부를 넘어 국경을 팔아먹는 매국 행위를 자행하고 있음을 뜻했다.

“한필두…….”

박강우가 장부를 움켜쥐었다.

그는 현대인으로서 실제 살상 무기를 만들고 사람을 죽이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에 깊은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의 백성들을 다가올 참화에서 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썩어빠진 내부의 기생충들을 율법의 칼날로 도려내야만 했다. 그것이 그가 세운 생존의 법칙이었다.

박강우는 서태식을 불렀다.

“서 장인.”

“예, 군관 나리. 부르셨습니까?”

서태식이 긴장된 표정으로 방 안으로 들어섰다. 신립과의 대치에서 살아남은 박강우를 보는 그의 눈빛에는 이제 경외감을 넘어선 광적인 신뢰가 깃들어 있었다.

“무산 세관 관할의 창고로 간다. 군관 사병 열 명을 대동해라.”

“창고라 하심은…… 부사의 사가 창고 말씀이십니까?”

“아니.”

박강우가 장부를 덮으며 차갑게 말했다.

“한필두 일파의 현지 연락책이자, 왜인들과 밀무역을 주도하는 상단의 창고다. 한필두를 직접 찾아갈 필요는 없다. 세관의 공식 문서와 경국대전 군율에 의거하여, 그들의 창고 지기들과 물류를 책임지는 서리들을 죄인으로 체포 구금할 것이다.”

서태식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한필두는 조정의 실세 중의 실세였다. 그의 수하들을 체포한다는 것은 전면전을 선포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나리, 그것은 서인 가문의 공급줄을 정면으로 끊겠다는 뜻인데……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겐 신립 대감의 묵인과, 명백한 밀무역 장부가 있다. 법도대로 처리하는 것이니 저들도 표면적으로는 반발하지 못할 것이다. 서둘러라. 그들의 목줄을 조여야 우리가 숨을 쉴 수 있다.”

“예! 즉시 이행하겠습니다!”

서태식이 결연한 표정으로 방을 나섰다.

그날 오후, 박강우는 무산 세관의 공식 군관 자격으로 사병들을 이끌고 한필두 상단의 비밀 창고를 급습했다.

“무산 군기 정비관의 명령이다! 불법 밀무역 혐의로 창고의 모든 물품을 압수하고, 관련자들을 전원 의금부 전단계로 압송한다!”

경국대전의 구절을 읊으며 들이닥친 박강우의 기세에, 창고 지기들과 서리들은 감히 저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한필두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불량 유황 부대들과 밀무역 장부들이 고스란히 압수되었다.

한 가문의 명맥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치명적인 단서가 박강우의 손아귀에 완벽히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 * *

그날 밤.

정제소의 가마터는 낮 동안의 격동을 뒤로한 채 고요함방에 잠겨 있었다.

붉게 타오르던 가마들의 불꽃은 사그라들어 은은한 숯불의 잔상만을 남겼고, 장인들은 하루의 고된 노동에 지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서태식과 장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다듬어 놓은 사형 거푸집들과, 새롭게 주조 중인 백동 혼합 포신들이 어둠 속에서 차가운 철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정적을 깨뜨린 것은 미세한 발자국 소리였다.

삭풍이 부는 숲속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하나둘씩 정제소의 담벼락을 넘어 들어왔다. 그들의 걸음걸이는 소리가 없었고, 몸에서는 서북방 유목민 특유의 노린내와 살기가 풍겼다.

한양의 서인 가문이 박강우의 무산 공방을 완전히 파멸시키기 위해 고용한, 변방의 여진계 살수 무리였다.

그들의 손에는 기름에 적신 헝겊을 감은 횃불과, 흑색화약이 담긴 호조(壺甁)가 들려 있었다.

“철가마를 찾아라.”

낮고 거친 여진어의 속삭임이 어둠 속에 퍼졌다.

“가마를 부수고 화약고에 불을 지르면 끝이다. 흔적을 남기지 마라.”

가장 선두에 선 살수가 품 안에서 부싯돌을 꺼내 들었다.

탁, 타닥.

작은 불꽃이 기름 젖은 횃불에 옮겨붙는 순간, 붉은 화염이 야음 속에서 일제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수십 개의 횃불이 정제소의 철가마와 화약고를 향해 포물선을 그리며 투척되기 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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