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포신 내부의 구리와 아연 배합 이질감으로 가득했던 기포들이 고순도 화약의 엄청난 팽창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울부짖기 시작했다. 청동포의 매끄럽던 표면에 미세한 실금들이 거미줄처럼 뻗어 나가며, 그 틈새로 검붉은 가스가 뿜어져 나왔다.

“어, 어라? 이, 이것이 무슨 소리냐?”

이종석을 비웃던 무산 보좌관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그의 눈앞에서 거대한 청동 포신이 부풀어 오르며 분열하기 직전의 파열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터지기 직전의 화약고 옆에 선 자들의 비명이 찢어지듯 터져 나왔다.

박강우의 안구 뒤편에서 차가운 전류가 번쩍였다. 시야가 흑백으로 반전되며 포신의 단면이 반투명하게 투과되었다.

[Cu 83.2% / Sn 11.5% / Fe 2.1% / Air Void 3.2%] [내부 압력: 180MPa -> 임계점 초과] [파열 예상 경로: 포미 30cm 지점 좌측 편향]

직관안이 제시하는 붉은색 파열 궤적이 허공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시간이 기형적으로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붉은 궤적이 뻗어 나가는 방향의 끝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굳어 있는 서태식과 늙은 장인들이 서 있었다.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다면 쇳물보다 뜨거운 청동 파편이 그들의 가슴과 목투덜이를 관통할 것이 자명했다.

오른쪽 관자놀이를 찌르는 듯한 극심한 편두통과 함께 오른손 끝마디가 뻣뻣하게 굳어 들어갔다. 뇌수를 송곳으로 헤집는 듯한 통증이 척추를 타고 내려왔다. 무리하게 분자 구조를 들여다본 대가였다. 박강우는 마비되어 가는 오른팔을 억지로 움켜쥐며 서태식의 덜미를 낚아챘다.

“엎드려!”

그의 외침과 동시에 서태식의 묵직한 몸뚱이가 흙바닥으로 처박혔다. 박강우는 기어이 다른 두 명의 군사들까지 발로 차 쓰러뜨리며 미리 쌓아 둔 삼중 흙포대 방호벽 뒤로 몸을 날렸다.

쿠우우웅—!

대기를 찢는 폭음이 무산의 하늘을 뒤흔들었다.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폭발음 뒤로 날카로운 파편이 허공을 가르는 파공음이 연달아 고막을 때렸다.

슈우욱! 퍽!

불과 한 뼘 두께의 흙포대 상단에 주먹만 한 청동 파편이 박혀들며 매캐한 흙먼지를 뿜어냈다. 방호벽 뒤로 피하지 못했던 이종석 일당의 비명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아악! 내, 내 다리! 내 다리가!”

“사, 살려주시오! 관장님! 사람 살려!”

초석 정제소의 공터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박강우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방호벽 너머를 살폈다.

시험 발사했던 지자총통의 형체는 간데없고, 포가가 놓여 있던 자리에는 시커멓게 그을린 구덩이와 찢겨 나간 청동 조각들만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종석은 어깨에 쇳조각이 깊숙이 박힌 채 피를 흘리며 흙바닥을 뒹굴고 있었고, 그의 옆에 서 있던 보좌관은 파편의 충격파에 밀려 기절한 채 피거품을 물고 있었다.

“정녕…… 정녕 포가 터진 것인가.”

서태식은 흙먼지투성이가 된 얼굴로 박강우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경악과 공포,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경외감으로 잘게 떨리고 있었다. 만약 박강우가 자신을 낚아채 쓰러뜨리지 않았다면, 지금쯤 저 널브러진 쇳조각 중 하나가 자신의 목을 베어 갔을 터였다.

“군관 나으리…… 어찌 이를 미리 아셨습니까? 화포가 이리 허망하게 깨질 것을 어찌 아시고…….”

늙은 장인 한 명이 이가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주변의 군사들 역시 박강우를 신명(神明)이라도 본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스스로 무릎을 꿇었다.

박강우는 마비로 인해 굳어 버린 오른손 손가락을 은밀히 소매 속으로 감추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피 냄새와 화약 연기가 뒤섞인 공기를 들이마셨다.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하게 울렸다. 현대인으로서 살상 무기를 만들고 있다는 죄책감의 이면에서, 눈앞의 무고한 조선인들을 기어이 살려냈다는 안도감이 뜨겁게 요동쳤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주조가 불량한 포에 고순도 화약을 넣는 것은 자멸을 자초하는 일이라고.”

박강우는 냉담한 목소리로 말을 뱉으며 이종석에게 다가갔다. 신음하는 이종석의 발치에 떨어진 검게 그을린 청동 파편을 가죽신으로 툭 찼다.

“이종석 검수관. 법대로 정밀 검증을 거치지 않고 독촉한 결과가 이것이오. 경국대전 병전(兵典) 군기조에 이르길, ‘검수를 소홀히 하여 군기를 파손하고 군사를 상하게 한 자는 장(杖) 일백에 유(流) 삼천리에 처한다’ 하였소. 내 오늘 일을 그대로 장계에 올려 조정에 보고할 터이오.”

이종석은 핏기가 가신 얼굴로 박강우를 올려다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한양 서인 가문의 뒷배를 믿고 기고만장하던 기세는 간데없고, 오직 처벌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만이 그의 몰골에 가득했다.

“박, 박 군관…… 제발, 살려주게. 내가 눈이 멀어 그랬네. 이 일은 없던 것으로…….”

“치료가 급해 보이니 일단 관아의 의원에게 압송하라.”

박강우는 차갑게 명령했다. 군사들이 신속하게 움직여 신음하는 이종석과 기절한 보좌관을 들것에 실어 날랐다. 그들의 기세등등하던 추태가 단 한 번의 폭발로 완전히 꺾인 순간이었다.

이종석 일당이 떠난 자리에 정적만이 감돌았다. 서태식은 부서진 포가의 잔해를 허망하게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으리, 이종석 저놈을 치워버린 것은 통쾌하나 이제 어찌합니까? 포를 만드는 가마도, 귀한 청동도 다 깨졌으니 무산의 군기 제조는 이대로 끝장입니다. 조정에서 검수관을 다치게 했다며 우리 모두의 목을 칠지도 모릅니다.”

장인들의 얼굴에 다시 어두운 그늘이 드리웠다. 박강우는 그들을 둘러보며 나직하게 웃었다.

“가마가 깨진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 가마가 잘못되었던 것이다.”

박강우는 흙바닥으로 걸어가 부러진 나무 막대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서태식과 장인들이 보는 앞에서 먼지가 자욱한 지면에 선을 긋기 시작했다.

“지금껏 너희는 진흙을 이겨 거푸집을 만들고 쇳물을 부었다. 맞느냐?”

“그렇습니다. 대대로 내려온 밀가마 주조법입니다.”

“진흙은 수분을 머금고 있다. 아무리 불에 구워 말린다 한들, 천 도가 넘는 청동 쇳물이 들어가는 순간 흙 속의 미세한 수분이 기화하며 가스를 뿜어내지. 그 가스가 빠져나가지 못하고 쇳물 속에 갇힌 것이 바로 오늘 포를 깨뜨린 기포다.”

박강우의 손끝에서 그려지는 도면은 정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단순한 선의 나열이 아니었다. 거푸집의 단면과 쇳물이 흘러 들어가는 탕구(湯口), 그리고 가스가 빠져나가는 배기공의 위치가 완벽한 비율로 그려지고 있었다.

“모래를 써야 한다.”

“모래 말씀이십니까? 모래는 흐트러져 형상을 유지하지 못할 터인데요?”

서태식이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박강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모래가 아니다. 고운 강모래에 찰기가 있는 황토를 십 분의 일 비율로 섞고, 거기에 기름과 볏짚 태운 재를 버무린다. 이를 사형(砂型)이라 한다. 모래 입자 사이의 미세한 틈새가 쇳물이 들어올 때 발생하는 가스를 완벽하게 밖으로 배출해 준다. 또한, 포신을 세워서 주조해야 한다. 누워서 부으면 쇳물의 무게 때문에 기포가 한쪽으로 쏠려 오늘처럼 약한 부위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의 설명은 명쾌했고, 한 치의 막힘도 없었다. 대대로 야철지에서 뼈가 굵은 서태식이었지만, 모래를 섞어 가스를 배출하고 포를 세워 주조한다는 이론은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주었다.

“이…… 이것이 정녕 가능하단 말입니까? 쇳물이 모래를 쓸어내리지 않겠습니까?”

“탕구를 나선형으로 깎아 쇳물이 소용돌이치며 완만하게 흘러내리도록 설계하면 된다. 그리하면 쇳물이 거푸집 벽면을 깎아 먹지 않고 바닥부터 차오르게 되지.”

박강우는 지면에 그린 사형 주조 도면의 핵심 가스 배출 구멍을 막대기로 꾹 찍었다.

“이것이 조선의 화포 주조 한계를 깨뜨릴 사형 주조법이다. 나와 함께 이 포를 만들겠느냐?”

서태식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눈에 서린 것은 의구심이 아니었다. 기술자로서 평생을 갈구해 온 ‘완벽한 화포’에 대한 광적인 열망이었다. 그는 박강우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나으리, 이 서태식이 목숨을 바쳐 이 도면을 실현해 보이겠습니다. 저를 부려 주십시오.”

주변의 모든 장인과 군사들이 일제히 그 뒤를 따랐다. 변방 무산의 차가운 먼지 속에서, 박강우를 향한 병장들의 절대적인 복종과 신뢰가 마침내 단단하게 굳어지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 정제소 외곽을 지키던 신뢰할 만한 군사 한 명이 급히 달려와 박강우에게 다가왔다. 그의 품에서 꺼내진 것은 흙먼지가 묻은 밀서 한 통이었다.

“나으리, 영외의 밀수 무역로를 감시하던 대원들이 국경 근처에서 회수한 것입니다. 왜인의 동향이 심상치 않습니다.”

박강우는 밀서를 받아 펼쳤다. 종이의 질감과 서체는 조선의 것이 아니었다. 밀서에는 왜국 조총병들의 새로운 진형과 대규모 화망 사격 훈련에 대한 첩보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왜인들이 남방 왜관을 통해 대량의 염초를 밀수하고 있으며, 조총 사격 시 삼단 교대 사격을 넘어선 밀집 화망 전술을 완성해 가고 있음.]

박강우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 들어갔다.

‘인과의 역풍이 벌써 시작되었나.’

자신이 조선의 흑색화약 순도를 높이고 주조 기술을 개량하려 하자, 역사의 자정 작용이 왜군의 전술 개량을 앞당기고 있었던 것이다. 쿠로다 나가마사의 세력이 벌써 북방의 기술 변화를 감지하고 움직이고 있다는 은밀한 징후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밀서의 하단에는 무산 지방의 무역 상인들이 한양 서인의 거두 한필두의 낙인이 찍힌 불량 유황 부대를 운송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경로와 장부가 첨부되어 있었다.

‘한필두 일파가 무산의 초석뿐만 아니라 유황 이권까지 독점하여 군비를 가로채고 있었군.’

박강우는 밀서를 손아귀에 꽉 쥐어 구겼다. 가슴 깊은 곳에서 차가운 분노와 함께 전율이 일었다. 이대로 둔다면 무산은 왜군의 침략 전에 내부의 탐관오리들에 의해 고사할 것이 뻔했다.

“서태식.”

“예, 나으리.”

“당장 사형 주조를 위한 강모래와 황토, 그리고 도가니를 보강할 석탄을 확보하라.”

서태식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그것이…… 나으리. 무산의 관아에서 보내오는 군기 예산이 이번 달부터 완전히 끊겼습니다. 한필두 대감의 가문과 결탁한 관할 부사가 무산의 모든 재정을 통제하고 있어, 흙 한 줌, 모래 한 부대조차 살 돈이 없습니다.”

박강우가 눈을 가늘게 뜨기도 전에, 정제소 언덕 너머에서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타다다닥!

붉은 깃발을 앞세운 군사들이 정제소의 허름한 울타리를 부수며 들이닥쳤다. 그 수가 어림잡아 삼십 명은 족히 되어 보였다. 그들의 선두에는 화려한 군복을 입고 안장에 높이 앉은 무산 부사가 서 있었다. 그의 곁에는 어깨에 붕대를 감은 이종석이 독기 어린 눈으로 박강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명이 없는 군기 파손은 대역죄다! 하급 군관 박강우가 사사로이 화약을 제조하여 조정을 기만하고 관원을 상해하였으니, 당장 저놈을 포박하라!”

무산 부사의 서슬 퍼런 외침과 함께 삼십 명의 사병들이 칼을 빼 들고 가마터를 겹겹이 포위했다. 시퍼런 칼날들이 벼랑 끝에 선 박강우의 목전을 향해 일제히 겨누어졌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