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발굽 소리가 정제소의 고요를 깨뜨렸다. 수십 필의 마병이 뿜어내는 먼지 구름 너머로 가죽 갑옷을 걸친 사내들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들의 가슴팍에 새겨진 한양 세도가 한필두 가문의 문양이 붉은 석양빛을 받아 불길하게 일렁였다. 선두에 선 사내가 고삐를 낚아채며 박강우의 막사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손에 들린 붉은 비단 서찰이 바람에 펄럭였다.
“함경도 관찰사 영감의 밀명이다! 무산 군관 박강우는 국방에 사용되어야 할 사가의 무역 재료를 무단으로 강탈하고 밀매상을 살해하려 한 혐의가 명백하다! 당장 박강우의 가택을 압수 수색하고 그를 한양으로 압송하라!”
쇠붙이가 부딪히는 서슬 퍼런 소리와 함께 마병들이 일제히 환도를 뽑아 들었다. 갓 검수관을 실각시키고 환호하던 정제소의 장인들과 군사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서태식이 억센 손으로 망치를 움켜잡으며 박강우의 앞을 막아서려 했다. 그러나 박강우는 담담하게 서태식의 어깨를 짚어 뒤로 물러서게 했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박강우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시선은 마병들의 칼날이 아닌, 선두에 선 사내의 품에 안긴 붉은 서찰로 향했다.
“관찰사 영감의 밀명이라 하였느냐.”
목소리에는 한 치의 떨림도 없었다. 박강우는 천천히 소매 안에서 묵직한 구리 패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무산 수령의 정식 관인이 찍힌 군수 창고 관리 부신이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 병전(兵典) 인신조(印信條)에 이르기를, 변방 국경의 군수품과 그 관리에 관한 전권은 조정이 파견한 수령과 해당 진영의 장수에게 귀속된다고 하였다. 또한 동법 수성조(守城條)에는 변방의 군영 내에 보관된 화약 원료 및 무기 재료는 오직 국방의 용도로만 전용될 수 있으며, 사가의 사사로운 채무나 소유권 주장을 이유로 군영의 통제를 벗어날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다.”
박강우의 목소리가 연병장에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마병을 이끌고 온 한필두 가문의 수하, 이종석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곳 무산 정제소의 유황과 초석은 이미 무산 수령의 관인 아래 관군 군수품으로 등재되어 보관 중이다. 아무리 관찰사 영감의 서찰이라 할지라도, 정식 조교(朝敎)나 병조의 관문(關文) 없이 사가의 사사로운 이권 분쟁을 핑계로 국경 수비의 요새를 수색하고 군자를 몰수하는 것은 명백한 월권이자 경국대전에 반하는 불법이다.”
“이 하찮은 변방 군관 놈이 감히 관찰사 영감의 명을 거역하겠다는 말이냐!”
이종석이 채찍을 쳐들며 호통쳤다. 그러나 박강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 더 다가서며 서찰을 쥔 이종석의 손목을 노려보았다.
“내가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네놈들이 국법을 어기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 군수 창고를 강제로 열고 유황을 반출하려 한다면, 나는 즉시 경국대전의 율법에 따라 너희를 ‘군기 약탈 및 국경 방비 방해죄’로 다스릴 것이다. 무산 수령의 관인이 찍힌 이 부신이 증명하거늘, 감히 사가의 사졸들이 관군의 창고를 침탈하려 드는가!”
박강우의 추슬러진 호령에 뒤편에 서 있던 조선군 포수들과 장인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다잡았다. 비록 불량 무기로 연명하던 변방의 군사들이었으나, 서슬 퍼런 법의 명분과 자신들을 지켜주려는 박강우의 기세에 동조한 것이었다. 수적으로나 명분으로나 밀린 것은 이종석 일파였다. 관찰사의 서찰이라 한들 정식 병조의 결재를 거치지 않은 사가의 밀명에 불과했기에, 기세등등하던 마병들의 말들이 웅성거리며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이종석은 이를 갈았다. 당장 칼을 휘둘러 박강우의 목을 베고 싶었으나, 무산 수령의 정식 관인과 경국대전의 조항을 들이미는 하급 군관의 논리는 빈틈이 없었다. 대낮에 관군과 무력 충돌을 일으켰다가는 아무리 한양의 한필두라 해도 뒷감당이 어려웠다.
“오냐. 법을 운운하며 목숨을 보전하겠다는 속셈이구나. 그러나 이 화약들이 정녕 군수품으로 쓰일 가치가 없다면, 그때는 이 창고의 모든 것이 우리 가문의 손에 넘어올 것이다.”
이종석은 채찍을 거칠게 거두며 말을 돌려 세웠다.
“가자! 무산 수령을 통해 정식 시험 발사를 요구할 것이다. 네놈이 만든 그 조잡한 화약이 터지지도 않고 쓸모없는 흙더미에 불과하다는 것이 밝혀지는 날, 네 목과 이 창고는 모두 우리 차지다!”
먼지 바람을 일으키며 마병들이 정제소 정문을 빠져나갔다. 군사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 박강우의 미간은 가볍게 좁혀졌다. 위기는 모면했으나 그들이 요구한 시험 발사라는 칼날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그날 밤, 무산 야장소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붉게 달아오른 쇳물이 도가니 속에서 출렁이며 거친 불꽃을 튀겼다. 야장 서태식은 땀 범벅이 된 얼굴로 쇠집게를 쥐고 포신 주형을 응시하고 있었다.
박강우는 야장소 한구석에 놓인 청동포 포신 앞으로 다가갔다. 당대 조선의 기술로 주조된 황동과 청동의 혼합 포신이었다. 겉보기에는 매끄러운 구리 빛을 띠고 있었으나, 박강우는 본능적으로 가슴 깊은 곳에서 거부감을 느꼈다.
‘이것으로 사람을 죽여야 하는가.’
화학도로서 지닌 지식이 살상을 위한 무기로 구현되는 순간마다 밀려오는 원초적 혐오감이었다. 그러나 다가올 전란의 참화 속에서 무고한 이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 강철과 화약의 힘이 반드시 필요했다. 박강우는 혐오감을 억누르며 오른쪽 눈에 힘을 주었다.
‘직관안(Eye of Chemical Formula).’
순간, 박강우의 시야가 급격히 뒤틀렸다. 매끄러운 청동 포신의 표면이 투명하게 변하며 그 내부의 분자 구조가 홀로그램처럼 시각화되어 뇌리로 쏟아져 들어왔다.
[Cu: 62.4%, Zn: 31.2%, Sn: 2.1%, Pb: 3.5%, Impurities (Fe, S): 0.8%] [내부 기포 밀도: 4.2/㎤ - 가스공(Blowhole) 다수 발생] [결정 입계 균열 위험도: 극대]
심각한 구리 결손이었다. 구리와 주석의 황금 비율은 온데간데없고, 조악한 아연과 납이 불균일하게 섞여 있었다. 게다가 쇳물을 부을 때 발생한 가스가 빠져나가지 못해 포신 내부 곳곳에 미세한 기포가 벌집처럼 들어차 있었다. 이대로 화약을 넣고 격발하면 팽창하는 가스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포신 자체가 산산조각이 날 것이 자명했다.
“아윽!”
갑자기 오른쪽 관자놀이를 찌르는 듯한 극심한 두통이 박강우를 덮쳤다. 동시에 오른쪽 손가락 마디마디가 뻣뻣하게 굳어 들어갔다. 직관안을 가동할 때마다 신경계를 타고 흐르는 인과적 부작용이었다. 눈앞이 흐려지고 안구 주변의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박강우는 비틀거리며 포신을 짚었다. 차가운 청동의 감촉이 마비되어 가는 손끝에 겨우 전해졌다.
“군관 나리! 왜 그러십니까?”
서태식이 깜짝 놀라 쇠집게를 내려놓고 다가왔다. 박강우는 깊은 숨을 들이쉬며 마비된 오른손을 소매 속에 감췄다. 관자놀이의 통증을 억누르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무것도 아니네. 서 야장, 이 포신은 쓸 수 없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며칠 밤낮을 새워 흙을 바르고 쇳물을 정성껏 부어 만든 포신입니다. 겉모양도 이리 매끄러운데 쓸 수 없다니요?”
서태식의 얼굴에 섭섭함과 반발심이 스쳤다. 평생 쇳물을 만져온 장인으로서의 자존심이 상한 것이었다.
“이 포신 내부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숨구멍과 기포가 가득 차 있네. 구리와 아연의 배합이 맞지 않아 쇳물이 식는 속도가 달랐기 때문이지. 이 상태로 화약을 다져 넣고 불을 붙이면, 포신이 폭발하여 포수들의 목숨을 앗아갈 것이네.”
“그, 그럴 리가 있습니까? 여태껏 북방의 포들은 다 이렇게 만들어왔습니다!”
“그리하여 발포할 때마다 포신이 터져 장인들과 군사들이 죽어나가지 않았던가?”
박강우의 건조하면서도 묵직한 반문에 서태식은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조선의 화포는 위력적이었으나, 쏠 때마다 터지는 아군 살상 무기이기도 했다.
“우리는 전통적인 진흙 주형을 버려야 하네. 진흙 주형은 수분을 머금고 있어 뜨거운 쇳물이 들어가는 순간 수증기를 발생시키고, 그것이 빠져나가지 못해 포신 내부에 기포를 만드네. 모래와 고운 진흙을 일정한 비율로 섞어 단단히 다진 후, 열을 가해 완전히 건조시킨 ‘사형(砂型) 주조법’을 써야 하네. 그래야 가스가 모래 틈새로 빠져나가 기포 없는 견고한 포신을 얻을 수 있네.”
서태식은 박강우의 상세한 설명에 넋을 잃었다. 주물 표면의 기포가 수분 때문이라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이해한 장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박강우는 그의 고집이 꺾인 것을 확인하고 쐐기를 박았다.
“시간이 없네. 한필두의 수하들이 곧 시험 발사를 강요할 것이네. 그들은 우리의 실패를 바라고 있어. 결코 저들에게 부서지는 대포를 보여줄 수는 없네.”
서태식은 침을 크게 삼키며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이 다시 망치를 꽉 움켜쥐었다.
***
사흘 뒤, 무산 군영의 공터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한필두 가문의 보좌관이자 수하인 이종석이 무산 수령의 대리 관원을 대동하고 정제소 앞마당에 나타났다. 그들의 뒤에는 무산 야장소에서 급히 끌고 온 기존 주조 방식의 청동포 한 문이 거치되어 있었다.
“박 군관, 드디어 네놈이 호언장담하던 화약의 성능을 시험할 날이 왔구나.”
이종석이 거만하게 웃으며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포신을 툭툭 쳤다.
“관례에 따라 이 정제소에서 생산된 초석으로 만든 화약을 이 청동포에 넣고 시험 발사를 진행하겠다. 만약 화약의 위력이 포신을 밀어내지 못하거나, 혹은 네 정제법에 문제가 있어 불발된다면, 그것은 국방의 군자를 낭비한 죄로 네 목을 쳐도 무방하다는 뜻이겠지.”
그들의 목적은 명백했다. 박강우가 개발한 고순도 화약 제련법을 불량으로 몰아세워 압수하고, 자신들의 가문이 그 기술과 정제소를 통째로 가로채려는 수작이었다.
박강우는 무산 수령의 대리 관원을 향해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시험 발사를 진행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군기시(軍器寺)의 전례와 율법에 의하면, 새로운 화약과 화포를 시험할 때는 반드시 포구의 내경과 포신의 두께를 정밀하게 검증한 후, 안전 거리를 확보하고 격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만에 하나 발생할 사고를 막기 위함이지요.”
“흥, 잔말이 많구나. 어차피 쏠 대포인데 무슨 검증이 필요하단 말이냐!”
이종석이 윽박질렀다. 박강우는 대리 관원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관원 영감, 만약 법도에 따른 정밀 검증 없이 발사를 강행했다가 사고가 발생하면, 그 모든 책임은 격발을 지시한 이들에게 돌아갑니다. 그것이 경국대전의 규율입니다.”
대리 관원은 박강우가 율법을 들이밀자 흠칫 놀라며 이종석의 눈치를 보았다. 몸을 사려야 하는 하급 관료의 본능이 작동한 것이었다.
“으음, 박 군관의 말이 맞소. 법대로 포구를 정밀 검증하고 진행합시다.”
박강우는 미리 준비한 쇠막대와 자를 꺼내 청동포의 포구 안쪽을 재는 척했다. 그리고 서태식과 군사들에게 은밀하게 신호를 보냈다.
“포구의 정밀 검증을 마쳤으니, 이제 화약을 장전하겠소.”
박강우는 정제소에서 만든 고순도 흑색화약을 정량대로 포신에 밀어 넣었다. 불순물이 완벽히 정제된 그의 화약은 당대 조선의 화약보다 폭발력이 최소 서너 배는 강력했다. 박강우는 직관안으로 확인했던 포신의 기포 결함을 떠올렸다. 이 불량 청동포에 고순도 화약을 넣고 쏘는 것은 시한폭탄에 불을 붙이는 것과 같았다.
“사수들은 화약을 장전한 후, 즉시 50보 뒤의 방호벽 뒤로 대피하라.”
박강우가 단호하게 지시했다. 군사들과 장인들은 그의 지시에 따라 신속하게 거점을 비우고 멀찍이 물러섰다.
“이 무슨 해괴한 짓거리냐! 고작 대포 한 발 쏘는데 수십 보를 물러서다니, 겁쟁이 놈들 같으니라고!”
이종석은 비웃음을 흘리며 포신 바로 옆에 서서 채찍을 휘둘렀다. 그의 수하들과 무산 보좌관 역시 박강우의 행동을 엄살이라 여겨 포신 근처에서 거드름을 피우며 서 있었다.
“네놈의 그 잘난 정제 화약이 얼마나 대단한지 똑똑히 지켜보겠다. 어서 불을 붙여라!”
이종석의 재촉에 박강우는 아무 말 없이 화약선에 불을 붙였다. 타들어 가는 도화선의 붉은 불꽃이 바람을 타고 포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치이이익—
불꽃이 포신 내부로 사라지는 순간, 박강우는 이종석과 보좌관 일당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귀를 막으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 순간, 대포의 거대한 굉음이 아닌, 기괴하고 날카로운 쇳소리가 공터를 찢었다.
끼이이이이익—!
포신 내부의 구리와 아연 배합 이질감으로 가득했던 기포들이 고순도 화약의 엄청난 팽창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울부짖기 시작했다. 청동포의 매끄럽던 표면에 미세한 실금들이 거미줄처럼 뻗어 나가며, 그 틈새로 검붉은 가스가 뿜어져 나왔다.
“어, 어라? 이, 이것이 무슨 소리냐?”
이종석을 비웃던 무산 보좌관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그의 눈앞에서 거대한 청동 포신이 부풀어 오르며 분열하기 직전의 파열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터지기 직전의 화약고 옆에 선 자들의 비명이 찢어지듯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