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검수관의 두터운 손바닥이 허공을 가르며 박강우의 뺨을 향해 날아들었다. 거친 바람을 찢는 파공음이 연병장의 서늘한 공기를 갈랐다.

그러나 둔탁한 마찰음은 들리지 않았다.

박강우는 상체를 반 보 뒤로 물리며 오른손을 뻗어 검수관의 두꺼운 손목을 움켜잡았다. 강철 같은 아귀힘이 검수관의 관절을 파고들었다. 검수관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기 확장되었다. 변방의 일개 하급 군관 따위가 조정에서 파견된 검수관의 손을 감히 잡아채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이, 이 무엄한 놈이! 일개 참봉 직의 군관 주제에 어디서 감히 손을 대느냐! 당장 이 손을 놓지 못할까!”

검수관의 지르는 비명이 칼바람에 흩어졌다. 박강우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상대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의 손끝에는 여전히 가벼운 마비 증세가 남아 있었으나, 손목을 쥔 힘은 흩어지지 않았다.

“검수관 영감께서는 조정의 법도를 집행하러 오신 분이 아니십니까.”

박강우의 목소리는 건조하면서도 가라앉아 있었다.

“법도라니? 이놈이 감히 국법을 어기고 군기 조달을 지연시킨 주제에 입을 놀려!”

“경국대전(經國大典) 병전(兵典) 제십오 조를 아십니까.”

박강우가 얼음장 같은 어조로 읊조렸다. 주변에 모여 있던 장인들과 군관들이 일제히 숨을 죽였다.

“조정의 급고(急告)라 할지라도, 변방의 군기처에서 원료의 불량으로 인해 제조가 불가능한 상황이 명백할 시에는 당해 검수관이 즉시 관할 수령과 상의하여 정제 기한을 최소 사흘 이상 유예하도록 명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검수관이 사적인 감정이나 가문의 위세를 빌려 군관에게 사사로이 태형을 가하거나 신체에 위해를 입힐 경우, 이는 영문법(營門法)을 위반한 군령 침해이자 조정에 대한 반역으로 다스린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 무엇이라?”

“지금 영감께서 휘두르신 손은 일개 군관의 뺨을 치려 한 것이 아니라, 변방 수비의 핵심인 무산 정제소의 지휘권을 마비시키려 한 행위입니다. 이를 어찌 반역이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검수관의 얼굴이 붉다 못해 푸르게 질려갔다. 그 뒤편에서 말에 올라탄 채 상황을 관망하던 인물이 천천히 고삐를 당겼다. 무산 지대의 군무를 총괄하는 당상관이자, 함경도 병마절도사의 심복인 조태영이었다. 그는 박강우의 당당하고 막힘없는 율법 인용에 흥미를 느낀 듯, 가죽 채찍으로 말의 목덜미를 툭툭 치며 다가왔다.

“과연 소문대로 법에 밝은 군관이로군.”

조태영이 묵직한 목소리로 개입했다. 검수관은 조태영을 바라보며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당상 대감! 이놈이 감히 조정의 검수관을 반역자로 몰아세우고 있습니다! 당장 저놈의 목을 베어 군기를 세우셔야 합니다!”

조태영은 검수관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박강우를 내려다보았다.

“박 군관이라 했는가. 네 말이 율법에 부합하는 면이 있으나, 관찰사 영감의 급고는 이미 내려졌고 기한은 열흘이다. 당장 화약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율법이고 무엇이고 간에 이 정제소의 모든 목숨이 날아갈 터인데, 어찌 기한을 유예해 달라 떼를 쓰는가.”

박강우는 조태영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그러나 비굴한 기색은 추호도 없었다.

“당상 대감, 소인에게 단 하루의 시간만 주십시오.”

“하루라?”

“예. 단 하루 만에, 저들이 쓰레기라 부르며 버려둔 이 흙구덩이와 마구간의 오물 속에서 조정의 기준을 아득히 초과하는 고순도 초석을 추출해 보이겠습니다. 만약 하루 뒤에 소인이 증명해 내지 못한다면, 소인의 목을 먼저 베어 연병장 입구에 걸어 두셔도 좋습니다.”

조태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대 조선의 기술로는 초석 한 근을 제대로 정제하는 데만 수일이 걸렸고, 그마저도 불순물이 가득해 불꽃이 제대로 일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나 박강우의 눈빛에는 광기가 아닌, 기묘할 정도로 차가운 확신이 서려 있었다.

“조 좋다. 군령은 가볍지 않으니, 네 목숨을 담보로 한 약조를 받아들이겠다. 내일 이 시간에 내 친히 검수관과 함께 이곳을 다시 찾을 것이다. 만약 한 되의 고순도 초석이라도 나오지 않는다면, 네 가문 전체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조태영이 말을 돌려 연병장을 빠져나갔다. 검수관은 박강우를 노려보며 침을 뱉고는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사라지자마자, 서태식이 흙바닥을 기어와 박강우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나으리! 이 무슨 미친 짓이오카! 하루 만에 초석을 정제하다니요! 그것도 이 얼어붙은 무산 땅에서 어찌 그런 기적이 일어난단 말입니까!”

박강우는 대답 대신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의 오른손 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그의 망막 위로 기이한 시각적 환영이 펼쳐졌다.

'토착 물질 분자 구조 직관안(Eye of Chemical Formula).'

연병장 구석에 쌓인 마구간의 오줌 섞인 흙더미가 푸르스름한 빛으로 물들었다.

[유기 질소 화합물: 12.4%] [수분율: 45.2%] [칼슘 및 나트륨 불순물: 8.4%] [최적 정제 온도: 섭씨 82도 내외]

머릿속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극심한 두통이 엄습했다. 관자놀이의 혈관이 터질 것처럼 고동쳤고,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감돌았다. 능력을 가동할 때마다 신경계가 타들어 가는 대가였다. 박강우는 어금니를 악물며 고통을 삼켰다. 쓰러질 여유 따위는 없었다.

“서 장인, 넋 놓고 있을 시간이 없네. 당장 군사들을 소집해 마구간의 마른 흙과 소 오줌이 고인 흙을 전부 긁어모으게.”

“예? 오줌 섞인 흙을 말입니까?”

“그렇네. 그리고 뽕나무를 태운 재와 가마의 온도를 조절할 숯을 준비하게. 지금부터 치토법(取土法)의 극한을 보여줄 것이니.”

서태식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으나, 박강우의 서슬 퍼런 기세에 눌려 군사들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차가운 칼바람 속에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군사들은 삽을 들고 마구간 바닥을 깊숙이 파헤쳤다. 암모니아의 지독한 악취가 코를 찔렀으나, 박강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흙의 상태를 직접 손으로 확인했다.

그가 고안한 방식은 단순한 가열이 아니었다. 모세관 원리를 이용한 농축 정제였다. 흙에 물을 섞어 우려내는 일반적인 방식 대신, 대나무 관에 여과 장치를 겹겹이 쌓아 올렸다. 맨 아래에는 고운 모래를 채우고, 그 위에는 참숯가루, 다시 그 위에는 뽕나무 재를 얹은 뒤 마지막으로 오줌 섞인 흙을 다져 넣었다.

“가마에 불을 지피되, 연기가 가마 내부를 은밀히 감싸도록 조절하게. 온도가 너무 높으면 초석의 성분이 날아가고, 너무 낮으면 결정이 맺히지 않네.”

박강우는 가마 앞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직관안은 가마 내부를 흐르는 액체의 분자 이동을 실시간으로 추적하고 있었다.

[질산칼륨($KNO_3$) 농도 상승 중: 45%... 62%...]

손가락 마디마디가 굳어가는 일시적 마비 현상이 찾아왔다. 그는 왼손으로 오른팔을 꽉 움켜쥐며 버텼다. 이 고통 뒤에는 조선의 기술이 도약하는 만큼, 왜군 역시 전술을 개량할 것이라는 불안한 예감이 엄습했으나, 지금은 당장의 목숨을 건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밤이 깊어 가며 사위가 어둠에 잠겼다. 모닥불의 붉은 불꽃이 박강우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비추었다.

서태식은 가마솥 밑바닥에 고이기 시작한 맑은 액체를 바라보며 숨을 죽였다.

“나으리, 이 물빛이 어찌 이리 맑소카? 보통은 누런 기름때와 흙탕물이 가득해야 하거늘…….”

“뽕나무 재의 칼륨 성분이 흙 속의 질산칼슘과 반응하여 순수한 질산칼륨으로 치환되었기 때문이네. 이제 이 액체를 식히면 기적이 일어날 걸세.”

새벽녘이 되었을 때, 가마가 서서히 식어갔다.

서태식이 떨리는 손으로 가마솥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가마 내부를 확인한 순간, 노인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아흔 평생을 군기시와 변방의 정제소에서 보낸 그였다. 평생 수많은 초석을 보아왔지만, 이런 것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가마솥 바닥과 벽면에, 마치 겨울날 창문에 서린 성에처럼 눈부시게 하얀 결정들이 빽빽하게 돋아나 있었다.

“이, 이것이 정녕…….”

서태식이 손가락으로 백색 결정을 살짝 긁어내어 혀끝에 대었다. 혀를 찌르는 듯한 서늘하고 짠맛.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은, 극한의 순도를 지닌 초석이었다.

“나으리……!”

노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가마솥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백색 결정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모으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평생을 흙탕물 속에서 염초를 구걸하듯 만들었소카. 대포를 쏠 때마다 화약이 터지지 않아 동료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며 그것이 우리 장인들의 죄인 줄 알았는데…… 이토록 깨끗한 염초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니요…….”

서태식의 경외감 가득한 울음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깨뜨렸다. 박강우는 노인의 어깨를 지긋이 눌러주었다. 가슴 한구석에서 자신이 만든 이 물질이 결국 수많은 인간을 찢어 발길 살상 무기가 될 것이라는 현대인으로서의 거부감이 치밀었으나, 그는 짐짓 냉정을 유지했다.

바로 그때였다.

정제소 울타리 너머 어두운 숲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군사들의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 몇 개의 검은 그림자가 가마터 쪽으로 은밀히 다가오고 있었다.

박강우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서태식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 뒤, 옆에 놓인 목봉을 쥐고 몸을 낮추었다.

침입자들은 가마에 담긴 초석 용액을 뒤엎으려는 듯, 물이 담긴 가죽 부대를 손에 들고 있었다. 명백한 파괴 공작이었다.

박강우는 망설임 없이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억!”

첫 번째 침입자의 턱을 목봉 끝으로 정확히 가격했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괴한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어진 두 번째 괴한이 단도를 휘둘렀으나, 박강우는 그의 손목을 꺾어 단도를 빼앗고 허벅지를 깊숙이 찔렀다.

“끄아악!”

비명이 퍼지자 나머지 침입자들이 당황하여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이미 정제소의 군사들이 횃불을 들고 사방을 포위한 뒤였다.

박강우는 쓰러진 괴한들의 품을 수색했다. 그들의 옷 안쪽에서 붉은 낙인이 찍힌 서찰과 장부가 발견되었다. 박강우가 그 낙인을 확인하는 순간,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내렸다.

'동래상단(東萊商團) 한필두.'

그것은 한양의 실세이자 서인의 거두인 한필두의 사가 상단 낙인이었다. 이들은 무산 지방의 무역 상인들로 위장하여, 군기시로 흘러 들어가야 할 고순도 유황을 밀매하고 쓰레기 같은 불량 유황을 군영에 납품하던 도간(盜간) 밀매상들이었다.

박강우는 그들의 수레를 수색하여, 아직 미처 유통되지 않은 고순도 유황 수십 부대를 발견했다.

“이것을 잘 보관해 두어라. 아주 유용한 무기가 될 것이다.”

박강우가 장부를 소매 속에 집어넣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튿날 정오.

약속한 시간이 되자 당상관 조태영과 검수관이 거만한 걸음걸이로 정제소에 들어섰다. 검수관의 얼굴에는 이미 승리감에 도취된 비열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박 군관. 하루의 기한이 지났다. 약조한 대로 고순도 초석을 내놓지 못한다면, 네 목을 베어 군법의 엄함을 보일 것이다.”

검수관이 소리쳤다.

박강우는 아무런 말 없이, 가마솥에서 꺼낸 백색 결정을 담은 사발을 조태영과 검수관 앞에 내려놓았다.

“이것이 무엇이냐? 웬 소금 덩어리를 가져다 놓았느냐!”

검수관이 코웃음을 쳤다.

박강우는 사발에 담긴 백색 결정을 바닥에 넓게 흩뿌렸다. 그리고 소매 속에서 어젯밤 밀매상들에게서 압수한 고순도 유황 가루와 참숯가루를 정확한 비율로 섞어 그 위에 얹었다.

그는 품에서 부싯돌을 꺼내어 불꽃을 일으켰다.

*쉬이이익!*

순간, 굉음 대신 지극히 맑고 푸르스름한 불꽃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연기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고, 순식간에 날카로운 불꽃이 대기를 가르며 타올랐다. 완벽한 비연(飛煙) 반응이었다.

조태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평생 군을 이끌며 수많은 화약을 보아왔지만, 이토록 연기가 없고 연소 속도가 빠른 화약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 이것이 정녕 하루 만에 만든 염초란 말이냐?”

조태영이 말에서 내려와 재가 된 바닥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불순물이 없어 그을음조차 거의 남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당상 대감.”

박강우는 검수관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리고 소매 속에서 어젯밤 압수한 장부와 보고서를 꺼내 조태영에게 바쳤다.

“또한, 소인은 어젯밤 우리 정제소를 습격하여 군기를 파괴하려던 무리들을 생포했습니다. 그들의 품에서 나온 장부입니다. 이 검수관 놈이 한양의 세도가 한필두 가문의 상단과 결탁하여, 무산의 고순도 유황을 빼돌리고 불량 유황을 군영에 납품해 온 증좌가 여기 고스란히 적혀 있습니다.”

“무, 무엇이라?”

조태영이 장부를 펼쳐 들었다. 장부에는 검수관의 직인과 함께, 수천 근의 유황이 사사로이 유통된 기록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이, 이것은 모함입니다! 저놈이 나를 죽이려 조작한 것입니다!”

검수관이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었으나, 조태영의 얼굴은 이미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군수 비리는 북방 군부의 역린이었다. 더구나 이토록 완벽한 화약을 만들어낸 군관을 음해하려 한 죄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검수관을 당장 포박하라! 무산 수령에게 압송하여 군자금 유용 및 군기 파괴 음모죄로 엄히 다스릴 것이다!”

조태영의 호령에 군사들이 달려들어 검수관을 거칠게 끌고 갔다. 연병장에 모여 있던 장인들과 군사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변방을 짓누르던 거대한 착취의 사슬 하나가 박강우의 손에 의해 완벽하게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평화는 길지 않았다.

환호성이 채 가시기도 전, 정제소 정문 너머로 수십 기의 마병이 먼지를 일으키며 들이닥쳤다. 그들의 갑옷에는 조정의 정규군이 아닌, 한양 세도가 한필두 가문의 사가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마병의 선두에 선 자가 가죽 채찍을 휘두르며 박강우의 막사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손에는 붉은 비단으로 감싸인 한필두의 친필 서찰이 들려 있었다.

“함경도 관찰사 영감의 밀명이다! 무산 군관 박강우는 국방에 사용되어야 할 사가(私家)의 무역 재료를 무단으로 강탈하고 밀매상을 살해하려 한 혐의가 명백하다! 당장 박강우의 가택을 압수 수색하고 그를 한양으로 압송하라!”

서슬 퍼런 칼날들이 일제히 박강우를 향해 겨누어졌다. 겨우 찾아온 승리의 온기가 채 식기도 전에, 더 크고 잔인한 권력의 아가리가 그를 집어삼키기 위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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