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끝을 찌르는 시큼한 매연과 얼어붙은 흙먼지가 허파 깊숙이 박혀왔다.
차디찬 칼바람이 뺨을 후려치는 감각에 눈을 떴을 때, 사방은 온통 잿빛이었다. 굳어버린 손가락 끝으로 거칠거칠한 무명천 옷자락과 그 위에 덧대어진 조악한 가죽 갑옷의 감촉이 느껴졌다.
머릿속에서 두 개의 기억이 사정없이 뒤엉키며 이명을 일으켰다. 현대 대한민국에서 무기화학을 전공하며 도서관과 실험실을 전전하던 대학원생 한정우의 기억. 그리고 이곳, 조선 함경도 북방의 변방 무산(茂山)에서 여진족의 동태를 살피던 종9품 기병 군관 박강우의 기억이었다. 두 영혼의 경계가 무너지며 척추를 타고 올라온 오한에 온몸이 크게 떨렸다.
"정신을 어디다 두고 있는 게냐, 박 부장."
귓전을 때리는 서슬 퍼런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서 있는 자는 붉은 융복을 걸치고 가죽 채찍을 손가락에 감아쥐고 있었다. 함경도 병마절도사 우영 소속의 군기 검수관, 조탁이었다. 그의 뒤편으로는 얼어붙은 지면 위에 가마니 몇 장이 덮인 채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흙더미가 보였다.
박강우는 무릎을 굽힌 채 바닥에 흩어진 누런 가루를 내려다보았다. 한눈에 보아도 불순물이 가득한 조악한 유황이었다. 그 옆에는 소금기 가득한 백색 결정과 거친 모래가 한데 뒤섞인 초석 더미가 썩은 침전물처럼 널려 있었다.
"이것이 이번에 무산 관아에서 병조의 명을 받아 납품받았다는 군기용 원료인가."
혼잣말처럼 터져 나온 박강우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조탁은 코웃음을 치며 채찍 끝으로 초석 더미를 툭툭 걷어찼다. 마른 먼지가 바람을 타고 박강우의 얼굴로 날아와 박혔다.
"그렇다. 조정의 은혜가 깊어 이 서북면의 척박한 땅까지 화약 원료를 보냈거늘, 네놈들이 관리하는 무산의 야포 주조소와 화약고에서는 매번 불량 화약만 터져 나오니 내 어찌 이를 묵과하겠느냐? 이번 군기 점검에서 한 톨이라도 규격에 맞지 않는 화약이 나온다면, 여기 고개를 처박고 있는 장인 놈들부터 군율로 다스릴 것이다."
조탁의 시선이 가마 옆에 엎드려 부들부들 떨고 있는 늙은 군 장인들에게 향했다. 그 일행의 맨 앞에는 얼굴이 숯검댕이로 가득한 서태식이 이빨을 악물고 바닥을 노려보고 있었다. 서태식의 손가락은 이미 수십 년간 쇳물과 화약독에 절어 거무스름하게 변색되어 있었다.
박강우는 침을 삼키며 바닥의 유황 가루를 손가락으로 살짝 찍어 올렸다.
그 순간, 눈앞의 시야가 기괴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망막 위로 푸른빛의 반투명한 이진법 기호와 분자 구조식이 홀로그램처럼 번져나갔다. 이질적인 감각이 신경계를 난폭하게 유린했다. 우측 안구 안쪽에서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발생했고, 오른쪽 세 손가락이 일시에 얼어붙은 것처럼 굳어 들어갔다.
뇌리를 때리는 명확한 수치 정보가 박강우의 의식 속으로 강제로 주입되었다.
[황(S) 순도: 41.2% / 비소(As) 함량: 14.8% / 점토 및 규산염 불순물: 44.0%] [초석(KNO3) 분율: 52.3% / 염화나트륨(NaCl) 및 모래 혼입률: 31.2% / 수분율: 16.5%]
허파가 쪼그라드는 듯한 압박감에 박강우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것은 화약의 원료가 아니다.'
이 조악하기 짝이 없는 혼합물은 화약을 만들기 위한 재료가 아니라, 불을 붙이면 유독가스를 내뿜으며 제자리에서 피식거리다 꺼질 쓰레기에 불과했다. 특히 비소 함량이 이토록 높은 유황을 그대로 가마에 넣고 끓였다가는 정제 과정에서 장인들이 비소 가스에 중독되어 피를 토하고 죽어 나갈 것이 자명했다. 초석에 섞인 다량의 염화나트륨은 공기 중의 수분을 빨아들여 화약을 축축하게 적실 터였다.
"이 원료로는 포를 쏠 수 있는 화약을 만들 수 없습니다."
박강우는 통증으로 마비되어 가는 오른손을 왼쪽 소맷자락 속으로 숨기며 차분하게 말했다.
조탁의 눈썹이 꿈틀했다.
"무엇이라? 네까짓 변방의 종9품 기병 놈이 군기시의 검수를 거쳐 내려온 군수품의 질을 논하는 것이냐? 이것이 조정의 법도이자 경국의 군율을 멸시하는 처사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조정의 법도를 논하셨습니까."
박강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릎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는 그의 손길은 건조하고 묵직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현대 화학도로서 살상 무기를 정제해야 한다는 도덕적 거부감과 혐오감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화약이 완성되면 그것은 사람의 살을 찢고 뼈를 으스러뜨리는 도구가 된다. 동시대인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기술을 제 손으로 완성해야 한다는 사실이 영혼을 짓눌렀다.
그러나 지금 물러선다면, 당장 눈앞의 무고한 장인들이 곤장을 맞고 목숨을 잃을 것이며, 다가올 임진년의 참화 속에서 북방의 병사들과 백성들은 왜군의 조총 불꽃 아래 낙엽처럼 쓰러질 터였다. 가문의 안위와 조선의 도리 중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는 외줄 타기였다.
"검수관 나리께서는 《경국대전》 병전(兵典) 군기시조(軍器寺條)를 잊으신 모양입니다."
박강우의 목소리가 연병장의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조탁의 안색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그 뒤에 서 있던 군관들과 아전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무라? 경국대전?"
"그렇습니다. 경국대전 병전에 명시되기를, '군기시에서 각 고을에 배포하는 무기와 그 원료는 반드시 정조(精造)함을 원칙으로 하며, 만약 불량한 원료를 공급하여 군비를 망친 자가 있을 시에는 해당 관원과 방납을 주선한 자를 엄히 치죄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동법 장오조(贓污條)에 따르면, 불량 원료를 정품의 가격으로 허위 계상하여 관아에 납품하고 그 차액을 가로채는 행위는 장형 백 대와 유배 삼천리에 처하는 중죄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박강우는 조탁의 발밑에 흩어진 유황 부대를 가리켰다.
"이 유황에는 비소와 점토가 절반을 넘게 차지하고 있으며, 초석은 염분이 빠지지 않아 축축하게 젖어 있습니다. 이는 군기시의 법도에 따른 검수를 통과할 수 없는 물건입니다. 검수관 나리께서는 이 조악한 잡석을 조정의 정품 유황이라 우기며 우리 무산의 장인들에게 화약 제조 실패의 책임을 묻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이 불량 원료를 무산 관아에 방납한 자가 누구입니까? 그리고 이를 묵인하고 검수 도장을 찍어준 군기시의 관원은 누구입니까?"
"이, 이놈이 미쳤구나!"
조탁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의 손에 들린 채찍이 잘게 떨렸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군졸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커졌다. 엎드려 있던 기술자 서태식은 고개를 번쩍 들고 박강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경악과 함께 기묘한 열망이 스쳤다. 하급 군관이 조정의 법전을 들이대며 검수관의 위선을 이토록 철저하게 깨부수는 광경은 변방의 무산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일이었다.
"내, 함경도 우영의 검수관으로서 네놈의 무엄한 주둥이를 찢어놓을 것이다! 감히 조정의 군수품을 모독하고 검수관의 권위를 능멸하다니, 이는 군령을 거역하는 반역이나 다름없다!"
조탁이 소리를 지르며 가죽 채찍을 높이 쳐들었다.
그러나 박강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의 두 눈은 심연처럼 깊고 고요했다.
"반역이라 하셨습니까. 오히려 법에 명시된 불량 군수품을 강요하여 북방의 방어 태세를 무너뜨리는 행위야말로 외적을 돕는 이적행위이자 반역입니다. 이 사실이 병조와 사헌부에 상소로 올라간다면, 과연 조정의 대신들이 누구의 목을 먼저 벨 것 같습니까?"
"이 하찮은 기병 놈이 감히!"
극도의 분노로 눈이 뒤집힌 조탁이 쳐들었던 채찍을 내팽개치고, 오른손을 크게 휘둘러 박강우의 뺨을 세차게 내리치려 했다. 바람을 가르는 파열음이 일었다.
스윽.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조탁의 손목이 허공에서 딱 멈추어 섰다.
박강우가 왼손을 뻗어 조탁의 손목을 단단히 움켜쥔 것이었다.
"이, 이거 놓지 못할까!"
조탁이 손을 빼내려 힘을 주었으나, 박강우의 손아귀는 무쇠로 만든 집게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말을 타며 활을 당기던 무인의 완력과, 생존을 향한 처절한 의지가 조탁의 관절을 옥죄었다. 조탁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박강우는 조탁의 얼굴 앞으로 한 걸음 바짝 다가섰다. 차가운 숨결이 조탁의 뺨에 닿았다. 박강우는 목소리를 낮추어, 오직 조탁만이 들을 수 있는 은밀하고 서늘한 어조로 읊조렸다.
"검수관 나리. 나리의 가문이 소유한 동지중추부사 댁의 한양 본가와, 이 무산의 불량 유황을 운송하는 상단 사이에 오간 장부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조탁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네, 네놈이 그것을 어찌……."
"이것은 단순한 군기 검수의 문제가 아닙니다. 영문법(營文法)에 따라 사사로이 하급 군관을 구타하고 군율을 어지럽힌 죄, 그리고 불량 군수품을 묵인하여 군비를 횡령한 죄.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터진다면 나리뿐만 아니라 나리의 배후에 있는 가문 전체가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박강우는 조탁의 손목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뼈가 맞부딪치는 으스러지는 소리가 미세하게 연병장의 정적을 깨뜨렸다. 조탁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려 흙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제 선택을 하셔야 할 시간입니다, 검수관 나리."
박강우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잔혹하게 올라갔다. 눈앞에는 새로운 위기와 수렁이 기다리고 있었으나, 그의 눈빛은 이미 가차 없는 사냥개와도 같았다.
조탁의 눈동자가 좌우로 잘게 흔들렸다. 그가 뿜어내던 기고만장한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직 사냥꾼의 덫에 발을 들인 짐승의 당혹감만이 그 자리를 채웠다.
함경도 무산은 한양의 사대부들에게 유배지와 다름없는 변방이었으나, 동시에 북방의 모피와 삼(蔘), 그리고 군기시의 화약 원료가 은밀히 거래되는 거대한 밀무역의 통로였다. 그 이권의 중심에는 서인의 거두 한필두 가문이 버티고 있었고, 조탁은 그 가문의 말단 집행인에 불과했다.
"네, 네놈이 대체 그것을 어찌……."
조탁의 목구멍에서 막힌 신음이 흘러나왔다.
박강우는 움켜쥔 손목을 더욱 강하게 비틀어 내리눌렀다. 뼈가 어긋나는 듯한 둔탁한 감각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그와 동시에, 박강우의 우측 안구 주변에서 다시금 극심한 발작 기운이 휘몰아쳤다. 머릿속이 번쩍이며 시야의 우측 반절이 암전되는 일시 마비 현상이 찾아왔다. 오른손 손가락들은 이미 감각을 잃고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어금니를 사려 물며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삼켰다. 차가운 식은땀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으나, 박강우는 표정을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오히려 눈앞의 조탁을 집어삼킬 듯한 냉혹한 응시를 유지했다.
"조정의 대신들이 이 북방의 척박한 땅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를 것이라 여겼습니까. 병조판서의 직인이 찍히지 않은 사사로운 장부가 사헌부 지평의 책상 위에 올라가는 순간, 나리의 목숨은 물론이요, 동지중추부사 댁의 가문 역시 무사치 못할 것입니다."
법전의 구절과 가문의 이해관계를 명확히 짚어내는 하급 군관의 태도에, 조탁은 마침내 무릎의 힘을 잃고 비틀거렸다. 박강우가 손을 놓아주자, 조탁은 제 손목을 움켜쥔 채 뒤로 서너 걸음 물러섰다. 그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주변에서 숨을 죽이고 지켜보던 무산의 아전들과 군졸들은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엎드려 있던 기술자 서태식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박강우의 뒷모습을 올려다보았다. 평생을 관료들의 폭정 아래에서 묵묵히 매질을 견뎌야 했던 장인에게, 법도를 들이대며 검수관을 굴복시킨 박강우의 등판은 기이할 정도로 거대해 보였다.
조탁은 마른침을 삼키며 깨진 자존심을 수습하려 애썼다.
"……좋다. 네놈이 이토록 당당하게 법도를 논하니, 내 이번 한 번은 무산 관아의 사정을 감안하여 원료의 상태를 다시 기록하겠다. 허나!"
조탁이 핏발 선 눈으로 박강우를 쏘아보았다.
"이 원료들이 조악하다 핑계를 대며 화약의 납품을 미룰 생각은 마라. 만약 다음 군기 검수일까지 정해진 수량의 흑색화약을 주조해내지 못한다면, 그때는 경국대전이 아니라 군률 그 자체로 네놈의 목을 벨 것이다."
"그리하십시오. 다만, 검수관 나리께서는 이 원료의 실제 상태를 기록한 관문(官文)에 서명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정제 과정에서 발생하는 손실을 아전들이 횡령이라 모함하지 못할 것 아닙니까."
박강우는 품속에서 미리 준비해 둔 서찰 한 장을 꺼내 조탁의 발밑에 던졌다. 원료의 불순물 함량과 수분율을 대략적인 비율로 적어둔, 합법적인 '불량 원료 확인서'였다.
조탁은 이가 갈리는 소리를 내며 붓을 들어 서명했다. 먹물이 종이 위에 번지는 순간, 박강우는 무산의 정제소를 장악할 최소한의 법적 명분을 확보했다.
"가자!"
조탁이 신경질적으로 채찍을 휘두르며 군졸들을 이끌고 연병장을 빠져나갔다. 그들의 발소리가 멀어지자마자, 박강우는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우측 안구의 통증이 관자놀이를 지나 턱관절까지 마비시키고 있었다. 직관안을 무리하게 기동한 대가였다. 흙먼지 묻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자, 손끝에 붉은 핏방울이 묻어났다. 코끝에서 흐른 피였다.
"부장 나리!"
서태식이 급히 달려와 박강우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의 거친 손길에는 이전과 다른 깊은 경외심이 담겨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어찌 종9품의 몸으로 저 기고만장한 검수관을 상대로 이리 무모한 짓을 하셨습니까. 저들이 한양의 세도가들과 연결되어 있음은 온 무산이 다 아는 사실이옵니다."
"틀린 말을 한 것이 아니니 걱정할 것 없다."
박강우는 마비된 오른손을 소매 속으로 깊이 감추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서 장인. 저들이 남긴 저 불량 유황과 초석을 가마로 옮겨야 하네. 시간박동이 얼마 남지 않았어."
"하오나 나리, 저 쓰레기 같은 원료로는 아무리 가마를 끓여도 불꽃조차 제대로 일어나지 않는 흑색 가루만 나올 뿐입니다. 저희 장인들이 수십 번을 시도했으나 모두 허사였습니다."
서태식의 말은 사실이었다. 당대 조선의 기술로는 저토록 불순물이 가득한 흙과 염분을 분리해낼 정밀한 여과 장치가 없었다.
박강우는 굳어버린 오른손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머릿속에는 이미 현대 무기화학의 정밀 정제 배합 공식이 홀로그램처럼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흙을 파고 오줌을 끓여 초석을 석출해내는 치토법의 한계를 뛰어넘는, 수율 계산에 기반한 새로운 '계량 화학식'이 그의 뇌리에서 완성되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전쟁을 위한 도구를 만드는 일이 아니었다. 다가올 난세에서 자신과 북방의 이들을 살리기 위한 유일한 생존 줄이었다. 살상을 향한 원초적인 혐오감이 가슴을 짓눌렀으나, 무산의 차가운 바람은 그 감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내게 방법이 있네. 가마의 온도를 조절하고, 석회와 재의 비율을 극도로 미세하게 맞춘다면……."
박강우가 말을 마치기도 전이었다.
연병장 입구 쪽에서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붉은 깃발을 등뒤에 꽂은 전령 한 명이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말을 몰아 연병장 한복판으로 들이닥쳤다.
"보라! 함경도 관찰사 영감의 급고(急告)다!"
전령이 말에서 굴러 떨어지듯 내려와 두 손으로 가죽 통을 높이 쳐들었다.
가마 주변에 모여 있던 장인들과 군관들의 안색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갔다. 관찰사의 급고는 북방의 여진족이 대규모로 남하하거나, 그에 준하는 국가적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만 발송되는 격문이었다.
박강우는 관자놀이의 통증을 억누르며 전령의 앞으로 걸어 나갔다.
"무슨 일인가."
전령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가죽 통에서 꺼낸 관문을 박강우에게 건넸다. 관찰사의 직인이 선명하게 찍힌 종이 위에는, 한필두 가문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듯한 잔인한 행정 명령이 적혀 있었다.
[북방의 정세가 급변함에 따라, 무산 정제소는 향후 열흘 이내에 고순도 군용 흑색화약 삼백 근을 제조하여 우영 군영으로 압송하라. 기일을 단 하루라도 어기거나, 화약의 순도가 기준에 미달할 시에는 무산의 도제조 이하 모든 군관과 장인들을 군기조달 지연 및 태만죄로 즉시 참수형에 처한다.]
열흘에 삼백 근.
그것은 현재 무산의 무너져가는 가마와 쓰레기 같은 원료 수준으로는 반 년을 주어도 불가능한 수치였다. 명백히 박강우의 반발에 분노한 한필두 일파가 합법적인 법의 테두리를 빌려 무산의 모든 장인들과 박강우의 목을 단번에 날려버리기 위해 파놓은 함정이었다.
서태식을 비롯한 장인들이 관문의 내용을 전해 듣고는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하기 시작했다.
"열흘이라니…… 이것은 우리더러 다 함께 목을 매라는 소리가 아닙니까!"
칼바람이 다시금 연병장을 후려치며 차가운 흙먼지를 지독하게 흩뿌렸다.
박강우는 소매 속에서 마비되어 가던 오른손을 천천히 꺼냈다. 그의 시선이 허공에 흩날리는 누런 유황 가루를 향했다. 신경계를 갉아먹는 극심한 통증 속에서, 그의 눈동자는 오히려 불꽃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