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치열한 발포와 승세를 거두던 바로 그 순간, 연속 사격으로 인해 혼합 백동포 중 가장 큰 주성 포신의 가운데 부분이 열변형으로 인해 빨갛게 그슬리며 파열 경보인 하얀 열기 구멍을 보이기 시작했다.

쇠가 우는 소리였다. 금속이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갈라지는 비명이 성벽 위의 포연을 뚫고 강우의 고막을 찔렀다.

오른쪽 안구 주변이 송곳으로 헤집는 듯한 극심한 발작 기운으로 요동쳤다. 동시에 어깨에서부터 손가락 끝마디까지 퍼져 나가는 빙결 같은 감각이 오른팔 전체를 무겁게 짓눌렀다. 굳어 가는 손가락을 왼손으로 움켜잡았으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3화에서 무리하게 직관안을 가동했을 때 겪었던 마비 증후가 이번에는 더욱 가혹한 실체로 발을 뻗어왔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강우는 어금니를 사려 물었다. 턱뼈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귓전에서 가깝게 울렸다.

지금 백동포가 터진다면 포수에 서 있는 장인들과 군사들은 물론이요, 이 무산 성벽 자체가 왜군의 철갑 아래 짓밟히게 될 터였다.

한양의 밀정을 통해 조선의 북방 화력 개량 정보를 조기 조달했던 왜군 장수 쿠로다 나가마사. 그들이 밀수된 철갑 차벽을 들고 조선 화포의 유효 사각을 무력화하며 성벽 밑까지 밀고 들어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조선의 기술적 도약이 불러온 인과의 역풍이 적들의 비정상적인 전술 개량을 촉발했고, 그 결과가 바로 눈앞의 철갑 진형이었다.

강우는 흐려지는 시야를 억지로 붙잡으며 왼쪽 눈의 직관안을 극한으로 개방했다.

파르르 떨리는 안구 너머로 백동 지자총통의 내부 분자 구조가 반투명한 격자망으로 투과되어 보였다. 구리와 니켈, 그리고 아연이 뒤엉킨 백동의 결정 입계가 고열에 의해 사방으로 찢어지고 있었다. 응력 집중 선(Stress Concentration Line)이 붉은색 실선으로 포신 허리에 어지럽게 그어졌다. 균열이 임계점을 넘기까지 남은 시간은 채 백 호흡도 되지 않았다.

"서 장인! 고로에서 찌꺼기를 거르고 남은 황산 정제 도료를 가져오너라! 당장!"

말을 내뱉는 장수가 터진 입술 사이로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포신 뒤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던 서태식이 강우의 핏발 선 눈을 보고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나 고리, 군관 나리! 포신이 이미 붉게 달아올라 저승길 길목을 보고 있사옵니다! 물을 부으면 그대로 터져서 이 성벽 위의 목숨들이 다 날아가옵니다!"

"물을 붓는 것이 아니다! 황토 점토에 소금을 섞고, 거기에 황산 정제 도료의 점성을 결합하여 외벽에 바를 것이다! 어서 움직여라!"

강우의 목소리는 쇠를 긁는 듯 건조하고 엄격했다.

장인들은 군관의 서슬 퍼런 기세에 눌려 더는 대꾸하지 못했다. 서태식은 황급히 성벽 한편에 마련된 군기 제조용 가마솥으로 달려갔다. 가마솥 안에는 유황을 정제할 때 나온 부부산물인 황산 정제 도료와 염분이 섞인 진흙물이 끓고 있었다.

강우의 뇌리 속에서 소수점 단위의 배합 비율이 급박하게 회전했다.

[황토 분말 42.5%, 정제 염분 7.2%, 황산 점토 도료 50.3%.]

이 비율만이 급격한 온도 강하로 인한 포신의 균열 이완을 막고, 외부에서 열응력을 가두는 응력 소광 시각 보호 조치를 완성할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수분이 과하면 수증기 폭발로 포신이 산산조각 날 것이고, 점성이 부족하면 달아오른 백동 표면에서 도료가 그대로 흘러내려 무용지물이 될 터였다.

"황토를 세 홉 더 섞어라! 소금은 반 홉만 더 쳐라!"

오른팔의 마비가 흉부까지 타고 올라오는 감각 속에서도 강우의 지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서태식과 장인들이 땀방울이 눈을 가리는 줄도 모르고 흙먼지 속에서 도료를 비벼 댔다. 점성이 가득한 회황색의 진흙 도료가 완성되자, 강우는 마비된 오른팔을 가슴팍에 고정시킨 채 왼손으로 도료 통을 움켜쥐었다.

"내가 바를 테니, 너희는 포구를 지탱해라."

"군관 나리!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달아오른 포신 앞은 지옥 불길이나 다름없습니다!"

서태식이 강우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라. 붉은 선의 흐름을 보지 못하면 도포의 두께를 조절할 수 없다. 조금이라도 두께가 어긋나면 그 자리에서 포신이 터진다."

강우의 왼쪽 눈은 이미 붉은 핏발로 가득 차 있었다. 직관안이 가리키는 응력 선은 실시간으로 뒤틀리고 있었다. 백동의 연성이 한계에 다다라 조금만 압력이 치솟아도 포신 중앙부가 팽창하여 터질 기세였다.

강우는 왼손으로 끈적한 도료를 한 움큼 움켜쥐고 달아오른 포신으로 육박해 들어갔다.

치이이이익!

도료가 벌겋게 그슬린 포신 표면에 닿는 순간, 매캐한 황산 가스와 함께 살을 태울 듯한 고열의 증기가 뿜어 나왔다. 강우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왼손의 가죽 장갑이 순식간에 시커멓게 타들어 가며 손바닥 피부가 짓무르는 통증이 덮쳐왔으나, 그의 시선은 오직 직관안이 보여주는 청색의 열 평형선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정교하게 계산된 두께로 도료를 펴 발랐다. 염분이 열을 흡수하며 미세한 결정을 형성했고, 황산 정제 도료의 점성이 백동의 외벽을 단단하게 감싸 안으며 수축을 억제했다.

그때였다. 포구를 받치고 있던 나무 지지대가 우지끈하며 금이 갔다. 포신이 아래로 기울며 뜨거운 포구가 서태식의 머리 위로 쏟아지려 했다.

"서 장인! 피해라!"

강우는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다. 마비되어 움직이지 않는 오른팔 대신 왼쪽 어깨로 서태식의 몸을 거칠게 밀쳐냈다.

쿵!

바닥을 구르는 찰나, 달아오른 포구의 열기가 강우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서태식은 흙바닥에 처박힌 채 넋이 나간 눈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군관이라는 자가, 사대부의 가문 출신이 하찮은 기술자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전장의 불길 속으로 제 몸을 던진 것이다.

"나리…… 어찌하여 이런 비천한 자를 위해……."

"헛소리 마라."

강우는 왼손으로 지포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흙먼지와 그을음으로 범벅이 된 그의 얼굴은 지독하리만큼 차분했다.

"포를 만들 장인이 없으면 이 성벽은 무너진다. 내 너를 살린 것은 오직 이 성을 지키기 위함이다."

강우는 흙바닥에 떨어진 도료를 다시 긁어모아 포신의 마지막 균열 부위에 처발랐다. 서태식은 입술을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두 눈에 서린 것은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광기에 가까운 충성심이었다.

"나리가 살려주신 목숨, 여기서 다 쓰겠습니다."

서태식이 강우의 곁으로 다가와 도료가 담긴 버킷을 받쳐 들었다. 마비된 군관의 왼손과 쇳물로 굳은 장인의 굵은 손이 달아오른 포신 앞에서 굳건하게 맞잡혔다. 두 사람의 협동 아래, 응력 소광 도료가 포신 전체를 빈틈없이 덮어씌웠다.

기적처럼, 벌겋게 그슬리던 팽창 부위가 회황색의 도막 아래서 점차 빛을 잃으며 안정을 찾아갔다. 직관안에 표시되던 붉은색 균열 선들이 서서히 청색의 안정 선으로 내려앉았다.

"조치가 끝났다."

강우가 마른침을 삼키며 돌아섰다.

성벽 아래서는 왜군의 후방 대형이 다시금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선봉 침투조가 염분 유황 탄에 질식해 쓰러진 것을 본 적의 지휘관이 조총수들을 넓은 간격으로 배치하며 최후의 돌격을 준비하는 참이었다. 저들은 조선의 화포 재장전 시간을 정확히 계산하고 있었다.

"포구에 최종 탄환을 장전하라."

강우의 명령에 포수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번에는 단순한 살상 탄이 아니었다. 순도 높은 정제 유황과 흑색화약을 가득 채우고, 외벽을 쇳조각으로 촘촘히 두른 대형 비산 탄이었다.

"조준, 저들의 후방 지휘조가 모여 있는 목책 너머다."

마비된 오른팔을 쓸 수 없어, 강우는 왼손 손가락으로 적의 진형을 가리켰다. 안구의 통증은 머리 전체를 깨부술 것처럼 강해졌으나, 그의 시야는 그 어느 때보다 명징했다.

"발포하라!"

치이이익- 쾅!

폭음이 무산의 하늘을 뒤흔들었다.

염려하던 포신의 파열은 없었다. 강우가 도포한 이중 응력 소광 도료가 폭발의 충격파를 완벽하게 흡수해 낸 덕분이었다.

백동 지자총통의 포구를 떠난 비산 탄은 포물선을 그리며 왜군의 후방 진영 한가운데로 정확히 낙하했다.

쿠우우웅!

눈을 멀게 하는 적색의 화염이 대지를 집어삼켰다. 사방으로 비산한 수천 개의 미세한 무쇠 조각들이 왜군의 철갑 방패와 가죽 갑옷을 종잇장처럼 찢어발겼다. 비명 소리조차 폭풍에 묻혔다. 적의 후방 지휘조가 주둔하던 목책 일대가 단숨에 진흙과 핏물, 그리고 파괴된 무기더미로 변해 버렸다.

완벽한 승리였다.

"적들이 도망친다! 왜놈들이 깃발을 버리고 달아난다!"

성벽 위에서 조선 군사들이 무기를 치켜들며 광적인 함성을 질렀다. 서태식을 비롯한 장인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조선의 조악한 주조 기술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었던 화력의 극치가, 오직 계산과 정밀한 제어로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강우는 떨리는 왼손을 내려놓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오른팔의 마비는 여전했으나, 가슴을 짓누르던 현대인으로서의 도덕적 혐오감은 이미 북방의 칼바람 속에 흩어진 지 오래였다. 살상을 위한 화약을 만들고 적들을 도륙했다는 죄책감보다, 이 조그만 변방의 성벽을 지켜내어 무고한 백성들의 피 흘림을 막았다는 사실이 그의 안도감을 채웠다.

그러나 승전의 여운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성벽 아래의 화약 연기가 채 가시기도 전, 성문 안쪽에서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타다닥! 타다닥!

전투를 치른 군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성안의 연병장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무산의 군사들이 아닌, 한양 조정을 상징하는 붉은 오색 찬란한 비단령을 두른 경기 군감의 행렬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 선두에 선 인물은 화려한 관복을 걸치고 위압적인 기세를 풍기는 사내였다.

서인의 거두 한필두가 파견한 무산 몰수 정령 어사, 이경식이었다.

그의 뒤로는 날이 선 삼지창과 쇠사슬을 든 관군 오십 명이 삼엄한 대형을 유지하며 연병장을 메워 나갔다. 이경식은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안장 위에서 오만한 눈빛으로 성벽 위의 강우를 내려다보았다.

"함경도 무산의 하급 군관 박강우는 들으라!"

이경식의 쟁쟁한 목소리가 성벽의 흙먼지 사이를 파고들었다.

"조정의 허가 없이 사사로이 군기를 개조하고, 국경의 초석을 밀무역하여 사리사욕을 채운 죄, 그리고 조정의 명령을 사칭하여 군영의 재정을 사사로이 유용한 죄를 물어 네놈을 압송하라는 어명이 떨어졌다!"

이경식이 품 안에서 붉은 인장이 찍힌 교지를 꺼내 들었다.

"당장 저 대역죄인 박강우를 포박하라!"

관군 오십 명이 일제히 무기를 번뜩이며 성벽 계단을 향해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승전의 기쁨으로 가득 찼던 성벽 위가 순식간에 차가운 침묵과 새로운 긴장감으로 얼어붙었다. 강우는 마비된 오른팔을 움켜쥔 채, 차갑게 식어 가는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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