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성벽 아래의 화약 연기가 칼바람에 흩어지며 매캐한 냄새를 사방으로 뿌렸다. 방금 전까지 치열한 사투가 벌어졌던 무산성 앞벌에는 깨진 목책과 왜군들의 시신이 널려 있었다. 조선 군사들의 광적인 함성이 성벽을 흔들었으나, 강우의 시선은 성문 안쪽 연병장으로 진입하는 붉은 빛깔 무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한양 조정의 권위를 상징하는 오색 찬란한 비단령을 두른 경기 군감의 행렬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들어섰다.

선두에 선 한필두의 심복이자 무산 몰수 정령 어사인 이경식이 말안장 위에서 오만한 눈빛으로 강우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뒤를 따르는 관군 오십 명은 날이 선 삼지창과 쇠사슬을 쥔 채 삼엄한 대형을 유지했다.

"함경도 무산의 하급 군관 박강우는 들으라!"

이경식의 목소리가 성벽의 흙먼지 사이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조정의 허가 없이 사사로이 군기를 개조하고, 국경의 초석을 밀무역하여 사리사욕을 채운 죄, 그리고 조정의 명령을 사칭하여 군영의 재정을 사사로이 유용한 죄를 물어 네놈을 압송하라는 어명이 떨어졌다! 당장 저 대역죄인 박강우를 포박하라!"

이경식이 붉은 인장이 선명한 교지를 높이 쳐들자, 관군 오십 명이 일제히 무기를 번뜩이며 성벽 계단을 향해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승전의 열기로 달아올랐던 성벽 위는 순식간에 차가운 침묵으로 얼어붙었다.

강우는 마비된 오른팔을 품 안으로 밀어 넣으며 차갑게 식어 가는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깨부터 손가락 끝까지 딱딱하게 굳어 버린 오른팔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단순히 감각이 없는 수준을 넘어, 뼛속 깊은 곳에 얼음 송곳을 박아 넣은 듯한 극심한 신경 마비의 통증이 척수를 타고 올라왔다. 오른쪽 안구 주변 역시 통제할 수 없는 미세한 경련으로 떨리고 있었다. 시야의 절반이 붉은 핏빛으로 물들어 흐릿했다.

이는 백동 지자총통의 미세한 분자 결합을 투과해 보고, 조악한 원료의 황과 초석 배합 비율을 홀로그램처럼 시각화하여 직관안을 극대로 가동한 대가였다. 턱 끝으로 흘러내린 식은땀이 매서운 북풍에 닿아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육체의 붕괴를 예고하는 신경계의 비명 속에서도 강우는 흐려지는 정신을 다잡았다.

터벅, 터벅.

관군들이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소리가 고요한 성벽에 울려 퍼졌다.

그 순간, 강우의 앞을 가로막는 그림자들이 생겨났다. 검게 그슬린 얼굴에 피가 묻은 가죽 앞치마를 두른 서태식이었다. 그의 손에는 주조용 쇠망치가 굳게 쥐여 있었다.

"어느 놈이 우리 군관님 몸에 손을 대려 하느냐!"

서태식의 일갈과 함께, 성벽 곳곳에서 부상을 입고 붕대를 감은 장인들과 화포수들이 일제히 창검과 포대를 움켜쥐며 강우의 주변을 에워쌌다. 왜군의 조총탄에 어깨를 뚫린 군사도, 화약 폭발에 얼굴을 덴 장인도 하나같이 이경식의 관군들을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변방의 칼바람 속에서 목숨을 걸고 화포를 구워내고 화약을 비벼낸 이들이었다. 그들에게 강우는 단순한 상관이 아니라, 자신들의 목숨을 구하고 조선의 화력을 증명해 낸 유일한 인도자였다.

이경식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고삐를 가볍게 당겼다.

"이 천한 장인 놈들이 대역죄인을 비호하며 감히 조정의 명을 거역하려 드는구나! 반역의 무리로 다스려 머리를 베어 버리기 전에 당장 길을 비켜라!"

"반역이라니, 뉘더러 반역이라 하는가!"

강우가 왼손으로 성벽 난간을 짚으며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으나, 연병장 전체를 무겁게 가라앉히는 힘이 있었다. 강우는 붉게 물든 오른쪽 눈으로 이경식을 응시하며, 성벽 아래에 널브러진 왜군의 잔해들을 가리켰다.

"네놈들이 한양의 대감 마님들 밑에서 이권을 노나 먹으며 허송세월하는 동안, 저 왜놈들은 이미 우리 군기의 발전 동향을 입수하고 철저히 대비하여 쳐들어왔다."

강우의 말에 이경식의 눈썹이 꿈틀했다.

실제로 방금 전 전투에서 왜군은 이전과 다른 변칙 전술을 구사했다. 조선의 개량 화포 정보를 선제 입수한 듯, 화포 공격을 비껴가게 설계된 특수 철갑 조립 차벽을 전면에 내세웠고, 사격 진형의 간격을 조기에 넓혀 화망의 피해를 최소화했다. 조선의 기술 도약에 상응하여 왜군의 전술 개량 속도 역시 비정상적으로 빨라진 역사의 자정 작용, 즉 인과의 역풍이 눈앞에서 실현된 것이었다.

한양의 밀정을 통해 함경도의 정밀 화약 정제 정보가 흘러 들어가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필두 일파가 군기 제조법을 빼앗기 위해 조장한 밀무역과 정보의 누출이 변방 군사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든 근원이었다.

강우는 왼손으로 품 안을 뒤적여 피와 그을음이 묻은 두꺼운 서책과 서류 뭉치를 꺼내 들었다.

"어사 이경식은 들으라."

강우가 서류 하나를 높이 치켜들며 낭독하기 시작했다.

"경국대전(經國大典) 병전(兵典) 군장조(軍裝條)에 이르기를, 변방의 성곽을 수호하는 군기는 현지의 지형과 적의 병종에 따라 즉시 개조 및 보수가 가능하며, 이를 방해하거나 사사로이 회수하려 드는 자는 군령을 어지럽힌 죄로 엄벌에 처한다 하였다. 또한, 국경 방어용 군기를 무단으로 회수하려는 행위는 '함경 군기 무단 회수 기소 죄'에 의거하여 즉각 영남 및 양서의 감찰국에 기소 처분하도록 율법에 명시되어 있다!"

이경식의 얼굴에서 오만한 기색이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다.

"하급 군관 놈이 감히 국법의 자구를 멋대로 해석하여 조정을 기만하려 드는가! 네놈이 사사로이 화약을 정제하고 군기를 주조한 죄는 덮어질 수 없다!"

"기만이라 했는가?"

강우가 싸늘하게 웃으며 또 다른 서류 뭉치를 도열장 앞 허공에 흩뿌리듯 털어 보였다. 가공되지 않은 한양의 서체와 붉은 인장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것은 서인의 거두 한필두 대감이 무산의 초석과 유황을 사재기하기 위해 가짜 장부를 만들어 조세를 횡령하고, 군기 제조에 쓰여야 할 공금을 가문의 사리사욕을 위해 공여한 가짜 기밀 장부의 원본 사본이다. 무산 수령의 밀실에서 확보한 것이지."

이경식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렸다. 사본의 겉장에 찍힌 한필두 가문의 비밀 인장이 그의 시야에 똑똑히 들어온 까닭이었다.

"이 장부에는 무산에서 정제된 양질의 초석이 어떤 경로로 한양의 사가로 흘러 들어갔는지, 그리고 그 대가로 한필두 대감의 가문이 무산 수령에게 약속한 관직의 명단이 낱낱이 적혀 있다. 이것이 네놈들이 말하는 조정의 법도인가, 아니면 일개 가문의 도둑질인가!"

연병장에 모인 오십 명의 관군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자신들이 든 삼지창이 조정의 명을 수행하는 무기가 아니라, 권세가의 비리를 덮기 위한 도구였음을 깨달은 자들의 동요였다.

강우는 멈추지 않고, 마지막으로 붉은 관인이 찍힌 관문 한 장을 넓게 펼쳐 보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것은 이미 오래전, 무산 부사와 공식 체결한 '무산 국경 수비대 기밀 정무 합의 계약 공문'이다."

강우의 낭랑한 목소리가 성벽을 타고 아래로 내리꽂혔다.

"변방의 신무기 및 조총 침입에 대비하여, 군관 박강우에게 무산 관할 내의 모든 군기 주조 및 화약 정제의 전권을 위임하며, 이를 국경 방어의 최우선 국책으로 삼는다는 조항이다. 함경도 관찰사의 승인까지 완료된 정식 계약이다!"

이경식은 이를 갈며 소리쳤다.

"변방의 부사와 관찰사가 사사로이 서명한 문서 따위가 한양 조정의 교지보다 앞설 수 없다! 당장 저놈의 입을 막고 포박하라!"

"앞설 수 없다고?"

강우가 성벽 계단을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어깨에서 늘어진 오른팔이 쓸쓸하게 흔들렸으나, 그의 왼손은 허리에 찬 환도의 자루를 굳게 쥐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은 이경식의 심장을 꿰뚫을 듯 매서웠다.

"경국대전 형전(刑典)에 명시되어 있다. 국경의 방비가 무너질 위기에 처했을 때, 이를 구제하기 위한 군기 보수를 방해하거나 강제로 압수하는 행위는 '직무 유기'를 넘어 적을 이롭게 하는 '국경 반역죄'에 해당한다! 지금 왜군의 시체가 성벽 아래에 즐비하고, 그들의 우회 선봉이 언제 다시 성문을 두드릴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이러한 시점에 화포를 압수하고 군관을 포박하려 드는 어사 네놈의 행위야말로, 조선의 국경을 왜놈들에게 열어주려는 반역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반역이다!"

성벽 뒤편, 포성과 총성에 몸을 숨기고 있던 무산의 백성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우리 목숨을 구한 군관님을 대역죄인으로 몰다니!"

"왜놈들이 쳐들어올 때는 코빼기도 안 보이던 한양 관리 놈들이, 싸움이 끝나니 공을 빼앗으려 드는구나!"

분노한 백성들의 외침이 파도처럼 번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성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무산 기병단 백여 명이 말머리를 돌려 연병장 안으로 진입했다. 철갑을 두른 마병들의 창끝이 일제히 이경식과 경기 관군들을 향해 겨누어졌다.

스륵, 스르릉.

쇠붙이가 스치는 차가운 소리가 연병장의 공기를 얼려 버렸다. 오십 명의 관군은 수천 명의 격앙된 백성들과 무산 기병단의 서슬 퍼런 위세에 밀려 사시나무 떨듯 떨며 뒤로 물러섰다. 창검의 숲이 그들을 촘촘히 에워쌌다.

이경식은 말의 고삐를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기병들의 살기 어린 눈빛과 강우가 제시한 명백한 법도의 논리, 그리고 백성들의 성난 목소리 앞에 그는 더 이상 디딜 땅이 없었다. 한양의 권세가 아무리 높다 한들, 당장 목숨이 날아갈 수 있는 국경의 현장에서는 한낱 종이조각에 불과했다.

강우의 차가운 시선이 이경식을 압박했다.

"어사 이경식. 당장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고, 국경 반역의 혐의에 대해 소상히 밝히겠는가. 아니면 이 자리에서 법도에 따라 참수되어 변방의 흙으로 돌아가겠는가."

철컥.

기병들의 창끝이 이경식의 목덜미 직전까지 전진했다. 창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가 그의 살갗을 아리게 했다.

쿵.

이경식은 결국 말에서 굴러떨어지듯 내려와 연병장의 차가운 흙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화려한 비단령이 무산의 흙먼지와 왜군의 핏물로 더러워졌다. 기고만장하던 한양의 어사가 법 조항의 엄엄한 논리와 백성들의 위세에 짓눌려 완전히 무력화된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경식은 굴욕 속에서도 독기를 잃지 않았다. 그는 흙바닥을 기며 뒤로 물러서면서도, 핏대를 세우며 강우를 향해 소리쳤다.

"박강우...! 네놈이 당장 여기서 나를 죽일 수는 있을지언정, 한양의 세는 피할 수 없다! 내 등 뒤엔 대감 마님 한필두와 조정 서인들의 대신직 수백 인이 버티고 있으니, 네놈이 한양에 다다르는 즉시 목숨이 붙어 있지 못할 것이다! 네놈과 이 천한 장인 놈들, 무산의 가솔들까지 모조리 삼족을 멸할 터이니 기필코 가만두지 않겠다!"

이경식은 광기에 가득 찬 눈으로 침을 뱉으며 마지막 악랄한 권세의 잔불을 내뿜었다. 동틀 녘의 붉은 햇살이 그의 일그러진 얼굴과, 마비된 오른팔을 쥔 채 묵묵히 서 있는 박강우의 실루엣을 길게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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