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첫눈이 유리문에 부딪혀 소리 없이 녹았다.

이한은 카운터 앞에 서서 그 광경을 등지고 있었다. 눈은 그의 관심 밖이었다. 검은 장갑을 낀 손이 재계약서 대신 다른 종이 한 장을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철거 통지서였다. 도장 자리가 붉었다.

"다음 달 셋째 주."

그는 날짜를 손끝으로 짚었다. 짚은 자리를 다시 한 번 짚었다.

"서명은 오늘까지 받으면 돼. 위약금 없이 나가는 조건이야. 나쁘지 않지."

도현은 앞치마 주머니 안에서 종이를 만졌다. 접힌 재계약서 여백에 적어둔 세 글자가 손끝에 걸렸다. 가지 마. 볼펜이 깊게 눌린 자국이 손톱에 닿았다.

"아직 안 정했습니다."

"정할 게 있나."

이한이 고개를 돌렸다. 창밖 눈을 한 번, 도현의 얼굴을 한 번. 표정은 움직이지 않았다.

"자네, 아까 그 여자한테 뭐라고 했지. 골목에서 들리던데."

"…들었으면 됐죠."

"가지 마, 였나."

이한이 장갑 낀 손을 접었다 폈다. 손가락 마디가 천천히 움직였다.

"그런데 갔잖아. 봐. 붙잡아도 가. 안 붙잡아도 가. 결과는 똑같은데 붙잡은 쪽만 아파. 나는 그걸 오래전에 정리했어. 아무것도 안 느끼면, 안 아파."

그는 카운터에 놓인 서하의 잔을 흘낏 보았다. 반쯤 남은 커피. 표면에 얇은 막이 앉기 시작한 잔.

"식은 커피가 제일 정직해. 아무 말도 안 하거든."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 잔으로 손을 뻗었다.

---

잔은 미지근했다. 손바닥에 닿는 순간, 온도가 아니라 문장이 먼저 왔다.

7년간 도현은 남의 잔에서 삼킨 말을 읽어왔다. 뜨거우면 선명하고, 식으면 흐렸다. 서하의 잔은 처음 왔던 새벽부터 흐렸다. 이미 식어서 온 사람. 오래 묵은 말은 글자가 뭉개져 앞부분만 겨우 잡혔었다.

이제라도 붙잡아 줘서—

거기서 늘 끊겼다. 뒷말이 안개처럼 지워져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손끝이 뜨거웠다. 어제 자기가 내린 잔에서 7년 만에 열을 느낀 그 감각이, 아직 손에 남아 있었다. 봉인이 벌어진 자리로 온도가 새어들었다. 흐렸던 뒷말이 천천히 초점을 맞췄다.

이제라도 붙잡아 줘서—고맙지만, 나는 나부터 데워야 했어.

도현의 손가락이 잔 손잡이에서 미끄러졌다. 잔이 받침에 부딪혀 짧게 울렸다.

붙잡지 못한 게 실패라고 생각했다. 7년 전에도, 어제도. 다음에, 라는 말로 밀어놓은 순간마다 자기가 놓친 거라고. 그런데 잔은 다른 걸 말하고 있었다. 서하는 붙잡히길 기다린 게 아니었다. 붙잡히면 안 되는 걸 알면서 문 앞에서 멈칫했던 거다.

고맙지만.

그 두 글자가 목에 걸렸다. 그녀는 그의 온기를 원했고, 동시에 그 온기로부터 도망쳐야 했다. 두 개가 한 문장 안에 들어 있었다. 붙잡지 못한 것은 도현의 미룸이 아니라, 서하의 선택이었다.

"뭘 그렇게 봐."

이한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컵을."

"거기 뭐 써 있어?"

도현은 잔을 내려놓았다. 손바닥에 온기가 남았다.

"아무것도요. 사장님 말이 맞네요. 식은 커피는 정직해요."

거짓말이었다. 처음으로 자기가 읽은 문장을 남에게 넘기지 않았다.

---

같은 시각, 골목.

눈이 서하의 회색 목도리 위에 앉았다가 스몄다. 재원이 반보 뒤에서 걸었다. 그의 손엔 아직 온기가 남은 종이컵이 들려 있었다. 온점에서 나올 때 도현이 마지막으로 내려준 잔. 김이 아직 올랐다.

"저기."

재원이 입을 뗐다. 그는 말이 앞서는 사람이었다. 하고 싶은 말은 그 자리에서 뱉는 게 그의 방식이었다.

서하가 걸음을 멈췄다. 뒤돌지는 않았다.

"저 사람, 아까. 붙잡았잖아요."

"…들었어요?"

"들으라고 한 소리 아니었어요? 그런 건 원래 다 들리게 말하는 거잖아."

서하가 목도리를 조금 끌어올렸다. 김 오르는 재원의 컵을 곁눈으로 보았다.

"뜨거운 거 좋아해요?"

"네?"

"그 커피요. 뜨거울 때 마셔요."

재원은 컵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다시 서하의 옆얼굴을 봤다. 그는 여기서 말을 해야 한다고 알고 있었다. 서하가 떠나기 전에, 지금, 자기 마음을. 며칠을 벼르던 문장이 혀끝까지 올라와 있었다.

서하가 먼저 걸음을 뗐다.

"그 사람 커피는 항상 딱 좋은 온도예요. 내가 마시고 싶은 온도가 아니라, 자기가 좋은 온도. 7년 전에도 그랬어요. 나한테 맞춰준 게 아니라, 자기 잔이랑 똑같이 내려준 거였어요."

재원의 손안에서 컵이 조금 기울었다. 커피가 뚜껑 틈으로 새어 손등에 떨어졌다. 뜨거웠다. 그런데 그는 손을 털지 않았다.

"그래서 두고 왔어요, 그때. 그 온도 안에 있으면, 계속 그 사람 온도로만 데워지니까."

말끝이 눈 속으로 흩어졌다.

재원은 입을 다물었다. 처음으로, 뱉으려던 뜨거운 말을 삼켰다. 그는 알았다. 서하가 방금 한 말은 그에게 하는 대답이기도 했다는 걸. 자기 온도로 데워질 사람이 아니라는 걸. 삼킨 말은 손안의 컵으로 흘러들어갔다. 컵이 식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다시 걸었다. 눈이 발자국을 지웠다.

---

카페.

이한이 여전히 카운터 앞에 있었다. 그의 앞에 놓인 컵은 도현이 관성으로 따라준 것이었다. 이한은 손대지 않았다.

도현은 그 컵을 봤다. 손님이 직접 쥐어야 문장이 읽힌다. 이한은 한 번도 자기 컵을 쥔 적이 없었다. 오늘도 컵은 그대로 놓여 있고, 거기서는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도 자체가 지워진 무(無).

7년 뒤의 자기 모습이 거기 있었다. 남의 온도를 다 읽고 나면, 마지막엔 자기 컵에서조차 아무 문장도 안 나오는 사람. 이한은 그걸 자랑처럼 말했다. 안 느끼면 안 아프다고.

도현의 시선이 벽시계로 갔다.

5분 느리게 맞춰뒀던 시계. 늦게 도착하는 온기에 관대하려고, 매일 5분 늦게 살던 시계. 어제 명주가 그걸 정시로 돌려놓았다. 지금 시계는 다섯 시 삼 분을 가리켰다. 밖에서 본 실제 시각과 같았다.

정시. 미룰 5분이 사라진 시간.

도현은 앞치마 주머니에서 접힌 서류를 꺼냈다. 가지 마, 라고 눌러 쓴 재계약서. 그걸 카운터에 폈다. 이한이 눈으로 그것을 훑었다. 여백의 세 글자를 봤다. 장갑 낀 손이 아주 잠깐, 반 마디쯤 움찔했다. 그리고 다시 멈췄다.

"서명 안 할 거면 그거 돌려줘. 낙서한 서류는 안 받아."

"안 해요."

"철거는 확정이야. 자네가 뭘 해도."

"압니다."

도현이 펜을 집었다. 이한의 시선이 펜 끝을 따라왔다. 도현은 서명란을 지나쳤다. 여백에, 가지 마 옆에, 한 줄을 더 적었다.

그리고 그걸 소리 내어 읽었다. 7년 만에, 자기 마음의 온도를 남에게.

"나는 아직 아프고 싶어요."

이한의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카운터를 짚은 그의 손이, 짚은 채로 아주 천천히 손가락을 오므렸다. 반쯤 오므리다 폈다. 그 동작을 그는 스스로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뭐?"

"안 느끼면 안 아프다고 하셨죠. 그거, 저도 거의 다 왔었어요. 제 잔 온도도 못 느끼는 데까지. 그런데요."

도현은 서하가 남긴 잔을 다시 봤다. 표면의 막이 조금 더 두꺼워졌다.

"아픈 걸 못 느끼는 거랑, 아플 게 없는 거랑은 달라요. 저는 아직 앞쪽이라. 되돌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이한이 장갑을 벗었다. 처음이었다. 맨손이 드러났다. 그는 자기 앞의 식은 컵을 잠깐 내려다봤다. 쥐지는 않았다. 손끝을 컵 표면 가까이 가져갔다가, 닿기 직전에 거뒀다. 그 손끝이 짧게 떨렸다. 아주 오래전 어딘가에서 뜨거운 걸 쥐어본 사람처럼, 무언가를 기억해내려다 그만둔 얼굴이었다. 그는 다시 장갑을 꼈다.

"마음대로 해."

그가 통지서를 카운터에 남기고 문으로 향했다.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그는 문 앞에서 멈추지 않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서하와는 다르게.

문이 닫혔다.

도현은 서하가 걸어간 골목 쪽 창을 봤다. 커튼을 걷어둔 창가 첫 자리. 오지 않을 사람의 몫으로 비워둔 자리. 그 위에 뜨겁게 내려뒀던 커피는 이미 식어 있었다. 김이 오르지 않았다.

늦었다. 온기는 늘 늦게 도착한다.

그런데 이번엔 그 늦음이 아프게 느껴졌다. 아픈 게 느껴진다는 게, 도현은 이상하게 다행이었다.

---

"도현아."

주방 쪽에서 명주가 나왔다. 손에 원두통을 들고 있었다. 가장 오래 볶은 원두가 담긴, 카운터 안쪽 맨 아래 통. 서하 몫으로 늘 그것만 쓰던 통이었다.

"청소하다 바닥에서 이게 걸렸어."

명주가 원두통을 내려놓았다. 통 옆으로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원두 부스러기가 묻은, 오래 눌려 모서리가 닳은 봉투 한 장. 봉해진 채였다. 봉투를 내미는 명주의 눈이 도현의 얼굴을 지나쳐 창밖 눈발에 가 닿았다.

"7년 됐네. 그 애가 처음 왔던 날. 네가 화장실 간 사이에 카운터에 두고 갔어. 나보고 너한테 전해주라고. 그날 밤에 너 표정이 하도 그래서, 못 줬어. 다음에, 다음에 하다가."

명주가 봉투를 카운터에 올렸다. 서하의 잔 옆에.

"뜯어."

도현이 봉투를 집었다. 손끝에 온도가 왔다. 종이인데, 온도가 있었다. 7년을 눌려 있던 봉인의 가장자리에, 그가 손톱을 걸었다.

봉인이 벌어졌다.

봉투 안쪽에서 종이 한 장이 나왔다. 반으로 접힌 편지지. 오래되어 접힌 선을 따라 누렇게 바랜 자국이 나 있었다. 도현은 그것을 폈다. 손끝이 떨렸다. 능력을 회복한 손끝이, 종이의 온도까지 읽으려 했다.

읽히지 않았다. 편지에는 온도가 아니라 글자가 있었다.

서하의 글씨였다. 7년 전보다 조금 더 둥글고, 조금 더 서툴렀다. 스물넷의 서하가 카운터에 엎드려 급하게 쓴 흔적. 몇 군데 잉크가 번져 있었다.

「도현아.

나는 네가 나를 붙잡을 줄 알았어. 붙잡아 주길 바랐고. 그런데 오늘 너 얼굴을 보고 알았어. 너는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나를 읽고 있더라.

너는 내가 무슨 말을 삼켰는지 다 알잖아. 내 컵만 봐도. 그런데 왜 한 번도 먼저 물어봐 주지 않았어? 왜 늘 잔만 다시 채워줬어? 나는 채워지고 싶었던 게 아니라 물어봐 주길 바랐는데.

그래서 나 갈게. 네가 나를 읽는 사람 말고, 나한테 말 거는 사람이 되면. 그때 다시 올게.

식기 전에 읽어줘. 이 편지 온도로 읽지 말고, 그냥 눈으로 읽어줘.

—서하」

도현은 편지를 두 번 읽었다. 세 번째는 소리 내어 읽으려다 목이 막혔다.

식기 전에 읽어줘.

7년. 이 문장은 7년을 식었다. 봉인된 채, 원두통 바닥에서, 그가 가장 오래 볶은 원두 아래에서. 매일 아침 그가 서하 몫으로 그 통을 열 때마다, 편지는 그 아래 눌려 있었다. 도현은 매일 그 위에서 원두를 펐다. 그 아래 문장이 식어가는 줄도 모르고.

"명주 씨."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거, 그날 줬으면… 저 붙잡았을까요."

명주가 행주로 카운터를 닦았다. 손님이 울면 캐묻지 않고 잔을 데우던 그 손이, 지금은 닦을 것도 없는 자리를 닦았다.

"몰라. 근데 그게 중요해?"

"…"

"7년 전에 받았어도, 너는 다음에 하자고 했을 애야. 그때 넌 능력이 한창 무르익던 때였고. 남 잔은 다 읽으면서 이건 안 뜯었을 거다. 무서워서."

명주가 행주를 내려놨다.

"지금은 뜯었잖아. 그거면 됐어."

도현은 편지를 접었다. 접힌 자국을 손끝으로 눌렀다. 종이가 손끝을 데웠다. 아니, 손끝이 종이를 데웠는지도 몰랐다. 이제 어느 쪽인지 구분이 갔다. 그 구분이 돌아온 게, 능력의 회복보다 무서웠다.

그는 서하가 걸어간 골목을 봤다. 첫눈이 굵어져 있었다. 창밖 가로등 불빛 아래로 눈이 사선으로 쏟아졌다.

7년 전 서하는 물어봐 주길 바랐다. 오늘 아침 서하는 나부터 데워야 했다고 했다. 두 문장 사이에서 서하는 자랐다. 도현이 남 잔만 데우는 동안, 서하는 스스로 자기 잔을 데우는 법을 배워 떠났다.

늦었다. 편지는 늦었고, 붙잡음도 늦었다. 온기는 늘 늦게 도착한다.

그런데.

도현은 편지 아래쪽을 다시 봤다. 서하의 글씨 밑, 여백에 무언가 더 있었다. 편지를 쓸 때는 없던 것. 잉크 색이 달랐다. 훨씬 나중에, 다른 펜으로.

그는 편지를 눈앞으로 당겼다.

여백에, 오늘 아침 서하의 필체로, 급하게 눌러 쓴 한 줄이 있었다.

「(오늘 아침, 네가 화장실 간 사이 다시 뒀어. 명주 언니한테 부탁하고.)」

도현의 숨이 멎었다.

7년 전 편지가 아니었다. 아니, 7년 전 편지가 맞았다. 다만 서하가 오늘 아침, 그것을 다시 카운터에 두고 갔다. 명주에게 부탁해서. 원두통 바닥에.

명주가 청소하다 우연히 걸린 게 아니었다.

도현이 명주를 봤다. 명주는 이미 그를 보고 있었다. 그 눈이 아주 오래된 미안함으로 젖어 있었다. 아까 창밖으로 시선을 피하던 이유가, 이제야 도현의 안으로 내려앉았다.

"명주 씨. 이거… 방금 전에."

"그 애가 재원이랑 나가기 전에. 너 잔 내리느라 등 돌린 사이에. 나한테 이걸 쥐여주면서 그러더라. 언니, 이번엔 진짜 다음에 하지 말고, 지금 줘요. 근데 나는 또—"

명주의 목이 막혔다. 이 카페에서 삼킨 말을 가장 많이 데워준 사람이, 자기 말은 이제야 꺼냈다.

"나도 또 미뤘어. 이한이 들어오는 거 보고, 저 사람 가면 주자고. 그래놓고 저 사람이 나가니까 또, 네가 편지 표정 무너지는 게 무서워서. 다음에. 조금만 있다가."

명주가 카운터를 짚었다. 아까 이한이 손가락을 오므렸던 그 자리였다.

"이 카페에서 제일 오래 남 잔 데운 게 난데. 나도 너랑 똑같은 병이었나 봐. 미안해, 도현아. 이 편지, 지금 준다. 늦었지만."

도현은 편지를 쥔 손을 봤다. 서하가 오늘 아침 쥐었던 종이. 온기가 아직—

손끝에 왔다. 미지근한 온도. 사람 손이 조금 전까지 쥐고 있던, 딱 그만큼의 온도. 식어가는 중이었지만, 아직 완전히 식지는 않은.

읽혔다.

7년 전 편지의 글자가 아니라, 오늘 아침 이 종이를 쥔 서하의 삼킨 말이. 회복된 손끝이 그 마지막 한 문장을 길어 올렸다. 흐릿하지 않았다. 뜨겁지도 않았다. 딱 사람 체온만큼 선명한 문장.

『이번엔 네가 늦지 않았으면 해서, 두 번 뒀어.』

도현이 문을 봤다. 종이 걸린 문. 정시로 돌아간 시계는 다섯 시 육 분을 가리켰다. 서하가 나간 지 십 분이 채 안 됐다. 재원과 함께 걷는 걸음. 첫눈. 골목 끝 큰길까지, 뛰면.

그는 편지를 앞치마에 넣었다. '가지 마'와 '나는 아직 아프고 싶어요'가 적힌 재계약서 옆에. 그리고 처음으로, 자기 손으로 내린 커피를 챙겼다. 서하 몫으로 비워둔 창가 자리의 식은 잔이 아니라, 방금 새로 내린 뜨거운 잔을.

명주가 그를 봤다.

"뛸 거야?"

"늦었을지도 몰라요."

도현이 앞치마 끈을 풀었다.

"근데 이번엔, 식기 전에 갈래요."

문을 밀었다. 종이 울렸다. 새벽 공기가 뜨거운 잔 위로 훅 끼쳐 들었다. 김이, 사선으로 쏟아지는 눈발 속으로 흩어졌다.

그가 골목으로 한 발 내디뎠을 때—

큰길 쪽에서, 회색 목도리가 다시 골목 안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혼자였다. 재원은 없었다. 서하의 손엔 종이컵이 들려 있지 않았다. 어디에 두고 왔는지, 재원이 그것을 마저 들고 돌아섰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는 자기 온도로 돌아오고 있었다.

서하가 걸음을 멈췄다. 십 미터 앞. 눈 속에서.

두 사람 사이, 도현이 든 잔에서 김이 올랐다. 아직, 식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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