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눈이 골목을 채우고 있었다.
도현의 손에 쥔 커피는 여전히 김을 피워 올렸다. 세 시간을 뛰었다. 새벽 다섯 시에 뜨거운 잔을 들고 나간 후, 명주의 카페를 나가 골목 어귀에서, 그리고 다시 돌아와 서하를 찾아 이 자리까지. 손가락이 화끈거렸다. 진짜 따뜻함이 아니라 열기였다.
서하가 십 미터 앞에 서 있었다.
재원은 없었다. 코트 깃을 세운 채 홀로 돌아선 그녀의 얼굴은 도현이 일곱 해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니, 본 적이 있다. 떠나던 그날 밤이었다. 그때는 뒷모습이었지만, 지금은 정면이었다.
"왜 나왔어."
서하가 먼저 말을 꺼냈다. 존댓말이 아니었다. 일곱 해 만에 처음으로 반말이 나왔다.
도현은 한 발 내디뎠다. 발바닥이 젖은 눈 위에 빠져 들었다. 첫눈이 벌써 녹고 있었다. 계절이 그렇게 빠를 리 없었다. 도현의 시간만 그렇게 빠른 것이었다.
"이거 받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손으로 커피를 내밀었다.
서하는 움직이지 않았다. 눈동자만 떨렸다. 그녀의 시선이 도현의 손에서 커피로, 다시 도현의 얼굴로 돌아왔다. 무언가를 재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시선 속에서 도현은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지 읽을 수 있었다. 삼십 초가 넘게 흘렀다. 첫눈이 그의 어깨에 소복이 내려앉았다.
"받아."
도현이 다시 말했다. 이번엔 목소리가 떨렸다.
서하가 한 발을 내디뎠다. 그 다음, 또 한 발. 거리가 줄어들었다. 도현의 심장이 귀에서 울렸다. 손이 더 떨렸다. 커피 잔이 흔들렸다. 흘릴까 봐 손가락에 힘을 줬다. 그 순간 손가락이 더 화끈거렸다. 진짜 화끈거림이었다. 일곱 해 동안 느낀 적 없는 그 열기였다.
서하가 손을 내밀었다.
도현은 커피를 놓쳤다. 아니, 건넸다. 잔의 손잡이가 서하의 손가락에 닿는 순간, 도현의 온몸이 경직됐다. 능력이 울렸다. 그것은 능력이 아니라 감각이었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팔뚝까지, 온 팔이 불타올랐다.
—이제라도 붙잡아 줘서 고마워, 하지만 이건 너의 선택이 아니어야 했다.
미완의 문장이 완성됐다. 서하가 쥔 잔의 온도에서 도현은 마지막 말을 읽어냈다. 일곱 해가 지난 지금, 그 온도는 뜨거웠다. 처음처럼. 아니, 처음보다 더 뜨거웠다. 왜냐하면 이제 그 온도가 미완이 아니라 완성이었기 때문이었다. 서하가 스스로 그 말을 품고 있었고, 도현은 그것을 읽어냈다.
그런데.
도현의 손이 더 뜨거웠다.
자신이 내린 잔을 통해 자신의 온도가 되돌아왔다. 손가락이 아파서 손가락이 아니라 온 손이 타오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일곱 해 동안 느낀 적 없는 그 고통이 돌아왔다. 그것이 자신의 감정이었다. 자신이 내린 커피의 온기에서 자신의 온도를 읽은 것이었다. 역설이었다. 능력의 대가로 잃었던 감정을, 능력을 역으로 써서 되찾은 것이었다.
서하가 잔을 들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도현만 떨린 게 아니었다. 그녀도 떨리고 있었다. 입술이 움직였다.
"나도 붙잡혀야 했다는 걸 이제 알았어."
목소리가 부서져 있었다. 일곱 해 만에 처음으로 서하가 먼저 온전한 말을 꺼냈다. 도현을 붙잡으라는 말이 아니라, 자신이 붙잡혀야 했다는 말. 자신의 미룬 말을 스스로 완성하는 소리였다.
그 말이 서하 자신에게 미치는 무게를 도현은 느낄 수 있었다. 잔의 온도를 통해 읽어낸 것이 아니라, 그녀의 떨리는 손가락과 부서진 목소리로. 서하는 자신이 얼마나 오래 미뤄왔는지, 그 미룸이 얼마나 깊은 상처였는지를 이제 깨닫고 있었다. 완성된 문장이 그녀 자신을 짓누르고 있었다.
도현은 입을 열었다.
"그래도 늦지 않았어."
말이 나갔다. 자신의 목소리가 누군가 다른 사람 것처럼 들렸다. 일곱 해 만에 자신의 감정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타인의 온도를 읽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온도로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둘 다 알고 있었다. 그것이 바람이라는 것을. 현실이 아니라 바람이라는 것을.
도현의 눈이 서하의 눈을 찾았다. 그 안에서 자신과 같은 깨달음을 읽었다. 늦은 말도 말이라는 것, 하지만 그 말이 현실을 바꾸지는 못한다는 것. 서하의 눈빛이 한 번 떨렸다. 도현도 눈을 감았다 떴다. 그 짧은 침묵 속에서 모든 것이 전해졌다. 말보다, 온도보다 명확하게.
첫눈이 더 내려앉았다. 서하의 어깨에, 도현의 머리에, 그들 사이의 공기에. 골목이 하얀 침묵으로 가득 찼다. 서하가 들고 있는 잔의 온도가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다. 도현은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잔의 온도가 떨어질수록, 그 안에 담긴 말도 흐릿해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간이 모든 것을 식혀버렸다. 온도도, 말도, 감정도.
서하가 잔을 내려놨다. 손가락이 계속 떨렸다.
"이제는 어디로 가?"
물음이 나왔다. 도현이 대답하려는 순간, 뒷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한이 남긴 재계약서를 꺼내려던 것이었다. 손가락이 종이의 모서리에 닿았다. 카페 철거 통지가 적힌 그 서류. 하지만 도현은 그것을 끝까지 꺼내지 않았다. 손을 멈췄다. 그리고 다시 주머니에서 손을 빼냈다.
서하가 도현의 움직임을 지켜봤다. 무언가를 말하려다 멈춘 그 손가락을 본 것이다. 그 순간, 도현은 깨달았다.
온점이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다음 달이라는 것을. 그렇다면 이 새벽이 마지막 새벽일 수도 있다는 것을.
"가지 마."
입으로 나온 말이 아니라, 손끝의 온도로 전해지는 말이었다. 도현의 손이 여전히 화끈거리고 있었으니까. 그것이 능력의 역설이었다. 타인의 말을 읽는 자가, 결국 자신의 말은 못 한다는 것. 하지만 이제 도현은 알았다. 말을 못 해도 온도는 말한다는 것을. 그 온도가 진짜 감정이라는 것을.
첫눈이 멈추지 않고 내렸다.
서하가 도현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질문이 있었다. 무엇을 기다리는 건가. 왜 종이를 꺼내다 멈췄는가.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내밀었다. 떨리는 손이었다. 서하의 손을 잡은 게 아니라, 그녀가 들고 있는 잔을 함께 감싸 안은 것이었다. 따뜻했다. 여전히 따뜨거웠다. 손끝이 아파서 눈이 맺혔다.
"모르겠어. 지금은 여기가 있으니까 여기 있고, 없어지면 그때 생각할 거야."
말이 끝나고 나서 도현은 그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았다. 이미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내일 아침이 올 수 있을지, 올 수 있다면 무슨 말을 할지. 서하가 올까, 아니면 이번이 정말 마지막 새벽일까. 그런 생각들이 새벽 내내 자신을 깨워뒀다.
첫눈이 그들의 어깨에 소복이 내려앉았다. 도현의 머리에도, 서하의 코트에도. 골목의 온도가 내려갔다. 잔의 온도도 내려갔다.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도현은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능력자로서, 그리고 이제는 감정 있는 누군가로서.
"명주는 어떻게 했어?"
서하가 갑자기 물었다. 도현은 한 번 더 깜빡였다. 명주는 지금 카페 안에 있을 것이었다. 창밖을 통해 그들을 보고 있을 거였다. 도현은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현실이 더 명확해질 것 같았다.
"몰라. 안 물었어."
"그 사람도 미루는 거야?"
서하의 질문에 도현은 웃음이 나올 뻔했다. 미룬다. 그 단어가 이제 자신의 이름처럼 느껴졌다. 윤도현이 아니라 '미루는 남자'. 타인의 온도로 말을 읽되 자신의 말은 식힐 때까지 기다리는 남자. 그런데 이제 손끝이 화끈거렸다. 그것이 변화의 신호였을까.
"응. 우리 둘 다."
말을 마치고 도현은 자신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은 잔을 바라봤다. 온도가 내려가고 있었다. 빠르게. 골목의 기온이 낮아서일까, 아니면 시간이 흐르기 때문일까. 그 차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결과는 같았다. 따뜻한 것도, 뜨거운 것도, 모두 식어간다. 그것이 이 세계의 법칙이었다.
서하가 도현의 손에서 잔을 천천히 빼냈다. 그 순간 도현의 손끝이 더 화끈거렸다. 더 이상 열을 받지 못하니까. 그 고통이 일곱 해 동안 느끼지 못했던 자신의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타인의 온도를 느끼려고 자신의 온도를 포기했던 그 시간들. 그 모든 것이 손끝에 쌓여 있었다.
"이제 들어가."
서하가 말했다. 도현을 보지 않고 말했다. 고개를 떨어뜨린 채. 그 목소리에서 도현은 또 다른 미완의 문장을 읽어낼 수 있었다. 말하지 않은 말. 이 새벽 이후로 언제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말. 혹은 더 이상 만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 그런 모든 것들이 그 음성에 담겨 있었다.
도현은 고개를 들어 서하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이 젖어 있었다. 첫눈 때문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도현은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타인의 온도를 읽는 것도 지겹고, 이제는 그냥 눈앞의 것만 보고 싶었다. 눈물이 떨어지는 것 자체만.
"응."
도현이 대답했다. 그것도 한 글자였다. 타인의 말을 읽는 데는 능했지만 자신의 말은 여전히 짧았다. 하지만 손끝이 화끈거렸다. 그것이 증명이었다. 그 한 글자 안에 얼마나 많은 온도가 담겨 있는지를.
서하가 돌아섰다. 도현과 반대 방향으로. 골목의 어두운 쪽으로. 첫눈이 그녀의 어깨에 소복이 내려앉았다. 도현은 그 뒷모습을 봤다. 일곱 해 전과 같은 방식으로. 뒤도 안 보고 떠나는 여자. 하지만 이번엔 다른 점이 있었다. 그녀의 걸음이 느렸다. 멈춰 있을 것 같은 속도로.
그리고 그녀는 멈췄다.
문 앞에서, 어둠과 첫눈이 만나는 곳에서. 서하의 몸이 한 번 경직됐다. 도현을 돌아보려는 듯 어깨가 움직였다. 하지만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떠나지도, 돌아오지도 않은 채. 첫눈이 그녀를 천천히 덮어갔다.
도현이 한 발 앞으로 나갔다. 그러려다가 멈췄다. 발을 내디디지 않았다. 손에 들려 있던 빈 잔을 바라봤다. 온도가 완전히 내려가 있었다. 미지근해졌다. 거의 실온에 가까워졌다. 그 안에 담겼던 말도 이제 흐릿할 것이었다. 도현은 그 잔을 들고 돌아갔다. 카페 쪽으로. 명주가 있는 곳으로.
창문 안에서 명주가 보였다. 카운터 앞에 서 있었다. 도현과 눈이 마주쳤다. 말이 오갈 필요는 없었다. 명주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고생했어', '잘했어', '그리고 또 다른 미룸이 시작되겠지'라는 모든 것을.
도현은 손에 들린 잔을 카운터에 내려놨다. 그리고 앞치마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한이 남긴 종이가 여전히 거기 있었다. 다음 달. 카페 철거. 그 다음은 어디로 갈 것인가. 도현은 그 물음을 한 번 더 미루기로 했다. 지금은 현재만 남아 있었으니까.
대신 손을 꺼내 물을 데웠다. 새로운 커피를 내렸다. 보통 손님들처럼. 그 손끝이 여전히 화끈거렸다. 그것이 자신의 온도라는 것을 이제 알았으니까.
"명주."
도현이 말했다.
"응?"
"내일도 문을 열어?"
명주가 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다음 달까지는 문을 열지."
그 대답 속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다음 달까지는, 이 자리가 있을 때까지는 문을 열겠다는 뜻. 그리고 그 이후는 모르겠다는 뜻. 모든 것이 불확실해진다는 뜻.
도현은 내린 커피를 바라봤다. 아직 뜨거웠다. 김이 피어올랐다. 그 온도가 내려가는 데 얼마나 걸릴까. 그 동안 얼마나 많은 말들이 그 안에 담길까. 그리고 그 말들이 과연 누군가에게 전해질까.
창밖으로 서하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제 거의 보이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첫눈이 점점 더 내려앉으면서 그녀를 덮어가고 있었다. 도현은 그것을 지켜봤다. 타인의 온도를 읽는 것처럼. 하지만 이제는 다른 감정으로. 자신의 감정으로.
손끝이 여전히 화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