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하다.
손끝에 닿은 잔의 온도가, 7년 만에 처음으로 온도였다. 미지근함이 아니라 열. 도현은 그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지금이었다. 지금 말해야 했다. 목에 박힌 세 글자가 처음으로 목젖 아래까지 밀려 올라왔다.
"서하야."
부르려고 벌린 입에서, 소리는 절반쯤 나오다 말았다.
문가에서 서하가 멈춰 섰다. 늘 그랬다. 떠날 때는 뒤도 안 돌아보면서, 문 앞에서만은 한 번 멈칫하는 버릇. 회색 목도리가 문틈으로 새어드는 새벽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도현은 그 등을 보았다. 등이 무슨 말을 기다리는지, 컵의 온도로 읽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런데도 입이 열리지 않았다.
"…내일 봐요."
서하가 말했다. 짧게. 존댓말로. 그리고 문을 밀었다. 종이 딸랑, 하고 울렸다. 검은 코트 자락이 문틈으로 빠져나가고, 새벽의 찬 공기가 잠깐 들어왔다가 문이 닫히며 잘렸다.
도현의 손은 여전히 잔 위에 있었다. 손끝의 열은 아직 남아 있는데, 정작 그 열로 무엇을 하려 했는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입 밖으로 나온 건 없었다.
'가지 마.'
문이 닫힌 뒤에야, 세 글자가 소리 없이 입술을 스쳤다. 언제나 그랬다. 문틈으로 새어 사라졌다. 그는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뜨거웠다. 오늘은 정말 뜨거웠다. 그런데 그 뜨거움이,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인지 알 수 없었다.
*
새벽 여섯 시가 가까웠다. 첫차가 큰길을 지나가는 소리가 골목까지 밀려왔다.
명주가 주방에서 나오며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그녀는 서하가 앉았던 자리를, 그리고 그 옆 창가의 비어 있는 첫 자리를 번갈아 보았다.
"커튼."
명주가 턱짓했다. 창가 첫 자리에는 아직 반쯤 걷다 만 커튼이 늘어져 있었다. 어젯밤 도현이 손을 대다 만 채로 둔 것이었다.
도현은 걸레를 내려놓고 그 자리로 갔다. 낡은 커튼 고리가 레일 위에서 삐걱 소리를 냈다. 그는 커튼을 끝까지 밀었다. 새벽의 회색 빛이 창을 통해 들어와, 오래 비어 있던 의자 등받이 위에 내려앉았다.
"7년 됐지."
명주가 카운터에 팔꿈치를 괴고 말했다.
"그 자리, 네가 손도 못 대게 한 거."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의자 등받이의 나뭇결을 손으로 쓸었다. 먼지가 손끝에 묻어났다.
"여기 앉았어요. 서하가."
처음이었다. 소리 내서 인정한 건. 7년 동안 그 자리를 비워두면서도, 왜 비워두는지 스스로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 저기 앉아서 내가 커피 내리는 걸 봤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 나도 아무 말 안 하고. 그게…" 도현은 말을 끊었다. "그게 좋았어요."
명주가 짧게 코웃음을 쳤다. 비웃는 게 아니라, 오래 삼켜온 말을 뱉기 직전의 소리였다.
"도현아."
"네."
"너, 손님 잔은 백 번도 더 데워주지."
명주가 걸어와 커튼 고리를 마저 정리하며, 도현을 보지 않고 말했다.
"식은 잔 들어오면 두 말 안 하고 새로 내려주고. 손님이 컵 오래 쥐고 있으면 슬쩍 다시 채워주고. 그거 하나는 이 도시에서 네가 제일 잘해."
"…"
"근데 넌 남 잔만 데워."
명주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네 잔은 한 번도 안 데운다고. 7년째."
도현은 창밖을 봤다. 골목 끝 가로등이 아직 켜져 있었다. 벽시계가 5분 느리게 가고 있었다. 그가 일부러 그렇게 맞춰둔 시계. 늦게 오는 것에 조금이라도 관대해지고 싶어서.
"다음에요."
도현이 말했다.
명주가 그 말에 멈칫했다. 그러곤 아주 낮게, 혼잣말처럼 뱉었다.
"그 '다음에'가 너를 여기까지 데려온 거야. 네 손끝 온도, 아직 남아 있을 때 써. 그거 다 식으면… 이한처럼 된다."
명주는 더 말하지 않았다. 주방으로 들어가며 문을 조금 세게 닫았다.
*
여섯 시 반. 종이 딸랑 울렸다.
소은이었다. 스무 살 언저리의, 늘 같은 시간에 오는 단골. 그녀는 오늘도 두 잔을 주문했다. 하나는 자기 것, 하나는 이 자리에 오지 않는 사람의 것.
"따뜻한 걸로 두 개요."
도현은 라떼 두 잔을 내렸다. 한 잔을 소은 앞에, 한 잔을 맞은편 빈자리 앞에 놓았다. 소은은 맞은편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언니의 몫이었다. 작년 겨울에 세상을 떠난 언니.
"오늘은 왜 두 잔을 시키냐고 안 물어보시네요."
소은이 잔을 쥔 채 웃었다.
"안 물어보잖아요, 여기선."
"맞다. 그게 이 카페 규칙이랬죠."
소은은 언니의 잔을 자기 손으로 감쌌다. 잔의 온기를 자기 손바닥으로 옮기려는 사람처럼. 도현은 그 손을 보았다. 그녀의 손안에서 잔이 천천히 식어가는 게 보였다. 김이 잦아들고 있었다.
"사장님이 그러셨어요. 언니한테 못 한 말 있으면, 언니 몫 잔 데워두라고. 언니가 올 것처럼."
소은은 언니의 잔을 조금 밀어 창가 쪽으로 옮겼다.
"근데요, 아저씨."
도현이 걸레질을 멈췄다.
"말은 식기 전에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잔의 김이 마지막으로 한 줄기 올라오다 사라졌다.
"저는 언니가 살아 있을 때 '고마웠어' 이 말을 못 했거든요. 맨날 다음에 하자고. 다음 주에, 다음 달에. 근데 언니한테 다음 달이 안 왔어요."
소은은 눈을 깜빡였다. 울지 않으려고. 도현은 그 애가 울지 않으려 애쓰는 걸 보며, 목에 박힌 세 글자가 안쪽에서 긁히는 걸 느꼈다. '가지 마.' 소은의 문장이 그 세 글자를 건드렸다.
"그러니까 아저씨는요," 소은이 식은 잔을 도현 쪽으로 내밀었다. "저처럼 되지 마세요."
도현은 그 잔을 받았다. 데워달라는 뜻이었다. 늘 하던 대로 새 우유를 스팀에 데우고, 잔을 다시 채웠다. 뜨거운 잔을 소은 앞에 놓았다. 그녀는 그것을 다시 창가 언니의 자리로 옮겼다.
남 잔만 데운다. 명주의 말이 귓속에서 다시 울렸다.
*
일곱 시. 골목에 아침이 들기 시작할 무렵, 종이 울렸다.
이한이었다. 회색 정장, 표정 없는 얼굴. 그는 카운터로 곧장 걸어와 서류 봉투를 유리 위에 내려놓았다.
"재계약서요."
목소리에 감정이 없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완벽하게 평평한 목소리.
"이번 달 안에 답 주세요. 안 주면 자동으로 내 뜻대로 갑니다."
"커피 한 잔 하고 가시죠."
도현이 말했다. 이한 같은 사람에게도 그는 늘 커피를 권했다.
"됐어요."
이한은 잠깐 카운터에 손을 짚었다. 손이 잔 근처를 스쳤다. 도현은 반사적으로 그 온도를 읽으려 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온도도, 문장도, 미완의 말도. 이한의 손끝에서는 어떤 것도 읽히지 않았다. 텅 비어 있었다. 뜨거운 사람은 문장이 선명하고, 식은 사람은 흐릿하다. 그런데 이한은—흐릿한 게 아니라 아예 없었다. 삼킨 말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삼킬 감정이 애초에 없는 사람.
"윤 사장."
이한이 문 쪽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난 후회 안 해요. 살면서 말 안 한 거, 단 한 번도."
그는 도현을 보지 않고 말했다.
"그게 얼마나 편한지 알아요? 아무것도 안 느끼면, 아무것도 안 아파요. 당신도 이 일 계속하면 언젠가 그렇게 돼요. 남 마음 읽어주는 거, 그거 공짜 아니잖아."
종이 울리고, 이한이 나갔다.
도현은 봉투 위에 손을 올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손바닥 아래 종이가 차가웠다. 방금 그 텅 빈 손끝을 읽으려던 자기 손가락 끝에도, 이한의 것과 똑같이 아무 눈금이 없었다. 그는 유리에 비친 자기 얼굴을 봤다. 이한과 닮은 무표정이 거기 있었다. 7년째 남의 온도를 읽으며 자기 온도를 조금씩 팔아온 손이, 카운터 위에서 미동도 없이 놓여 있었다.
*
아침 여덟 시. 손님이 모두 빠지고, 카페엔 도현 혼자였다.
명주는 장 보러 나갔다. 홀은 조용했다. 큰길의 소음도 이 시간엔 한 겹 멀었다. 도현은 오랜만에 자기 잔을 내렸다. 손님용이 아니라, 자기가 마실 커피를. 세 종류뿐인 원두 중 가장 오래 볶은 것으로.
핸드드립. 물줄기가 원두 위로 천천히 원을 그렸다. 갓 내린 커피의 김이 얼굴로 올라왔다. 그는 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소은이 언니의 잔을 감쌌던 것처럼.
늘 미지근했다. 자기가 내린 잔은 언제나. 뜨겁게 내려도 손끝엔 밋밋한 감각만 남았다. 감정의 온도차를 잃은 사람의 손. 기쁨도 슬픔도 같은 온도인 손.
그런데 오늘은—
손바닥에 열이 있었다.
도현은 숨을 멈췄다. 착각인가 싶어 잔을 놓았다가 다시 쥐었다. 여전히 있었다. 미세하지만 분명한 열. 손금을 따라 번지는, 아주 작은 온기. 서하의 따뜻한 잔에 손을 뻗었을 때 느꼈던 그 온도가, 지금 자기가 내린 잔에서도 났다.
그는 잔을 오래 쥐고 있었다. 김이 사그라들고, 커피 표면에 옅은 막이 지고, 온기가 식어가는 그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손바닥으로 따라갔다. 뜨거움에서 미지근함으로 넘어가는 그 경계를, 오늘은 손끝이 읽어냈다.
역행하고 있었다. 아주 미세하게. 되돌릴 수 없다던 대가가, 손톱만큼 뒤로 물러서 있었다.
명주 말이 옳았다. 남 잔만 데우던 손에, 자기 온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도현은 잔을 내려놓고 벽시계를 올려다봤다. 5분 느린 시계. 늦게 오는 것에 관대하려고 그렇게 맞춰둔 시계. 늦은 온기, 늦은 말, 늦은 사람에게 너무 오래 너그러웠던 자신.
그는 의자를 끌어와 시계 아래 섰다. 손을 뻗어 유리 덮개를 열었다. 분침 끝에 손가락을 댔다. 5분을 앞으로 돌리면—정시가 된다. 늦지 않게, 제시간에.
'다음에'가 아니라 '지금'으로.
손가락에 힘을 주려는 순간.
창밖에서 무언가 유리에 비쳤다.
골목을 지나가는 두 사람. 나란히. 하나는 검은 코트, 하나는 회색 코트. 서하의 목도리와, 재원의 회색 어깨가 아침 햇살 속에서 겹쳤다 멀어졌다. 두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서하가 고개를 조금 숙였고, 재원이 그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도현의 손가락이 분침 위에서 멈췄다.
내일이 서하의 마지막 새벽이라 했다. 그런데 그 마지막 새벽에, 그녀는 혼자 오지 않을지도 몰랐다.
분침은 여전히 5분 느린 채로, 째깍, 하고 움직였다.
유리에 겹쳤던 두 실루엣이 골목 끝으로 사라졌다.
도현은 의자 위에 선 채였다. 분침에 댄 손가락에서 힘이 빠졌다. 유리 덮개가 제 무게로 닫히며, 딸깍, 하고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시계는 여전히 5분 느렸다.
*
그는 의자에서 내려왔다. 창가로 갔다. 유리엔 이제 아무도 없었다. 아침 햇살만 큰길 쪽으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서하가 지나간 방향과 재원이 몸을 기울인 각도만 잔상으로 남았다.
무슨 이야기였을까.
도현은 자기 잔이 놓인 카운터로 돌아왔다. 아까 오래 쥐고 있던 잔. 이제 완전히 식어 있었다. 그는 그 잔을 다시 두 손으로 감쌌다.
없었다.
손금을 따라 번지던 그 미세한 열이, 흔적도 없이 빠져나가 있었다. 다시 미지근함조차 없는 밋밋한 감각. 몇 번을 고쳐 쥐어도 잔은 그저 식은 도자기였다.
그는 자기 손바닥을 오래 들여다봤다. 온기가 돌아온 게 아니었다. 잠깐 빌린 거였다. 서하의 따뜻한 잔에서 옮아온 열이 손금에 며칠 머물다 간 것뿐. 자기 손으로 데운 온도가 아니었다. 되돌릴 수 없다던 대가는, 손톱만큼도 물러서지 않았다. 잠깐 그렇게 보였을 뿐이었다.
도현은 식은 잔을 개수대에 비웠다. 검은 물이 배수구로 내려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
정시로 돌리려던 손가락을 다시 봤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손.
'지금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던 게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서하가 문 앞에서 멈칫하던 그 반 박자. 그 사이에 세 글자를 밀어 넣었어야 했다. 밀어 넣지 못했다. 문틈으로 새어나간 건 아무 소리도 없는 입김뿐이었다.
*
명주가 장바구니를 들고 들어온 건 아홉 시가 다 되어서였다.
"아직 여기 있네."
명주는 봉투 하나를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이한이 두고 간 재계약 서류였다. 도현이 그걸 오전 내내 봉투째 두었다는 뜻이었다.
"열어는 봤어?"
"아니요."
"열어봐."
도현은 봉투를 밀어냈다. 명주가 도로 밀었다. 봉투가 카운터 위에서 오갔다. 명주는 결국 손을 뗐다.
"윤도현."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 이름을 부를 때는, 행동으로 안 되는 걸 확인했다는 뜻이었다.
"그 여자, 7년 전에 저 창가에 앉았었지. 지금은 커튼 걷은 자리. 너 그거 오늘 아침에 나한테 처음 인정했어. 근데 왜 하필 오늘 걷었어? 왜 7년 동안 닫아뒀다가, 그 여자가 떠난다는 날에서야 걷었냐고."
우유팩 하나가 명주 손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걸 카운터에 세워뒀다.
"보고 싶어서 닫아둔 거잖아. 그 자리 비어 있는 거 보기 싫어서. 근데 이제 진짜로 비게 생기니까, 그제야 걷은 거고."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명주의 말이 정확했다.
"넌 늘 그래. 잃기 직전에야 움직여. 그게 능력 탓이라고? 아니야. 그건 그냥 네가 미루는 사람이라 그런 거고, 능력은 핑곗거리 하나 더 준 것뿐이야."
*
정오가 지나 명주가 다시 나갔다. 오후엔 카페 문을 닫아둔다. 온점은 새벽에만 여는 가게였다.
도현은 홀 청소를 시작했다. 열두 개의 좌석을 하나씩 닦았다. 창가 첫 자리에 이르자 손이 멈췄다. 커튼을 걷어둔 자리. 아침 햇빛이 의자 등받이에 닿아 나무결이 드러났다.
7년 전, 서하는 이 자리에서 늘 창밖을 봤다. 도현이 카운터에서 커피를 내리는 동안, 그녀는 첫차가 지나가는 걸 세었다. 말이 없었다. 도현도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의 침묵은 어긋난 적이 없었다. 그게 문제였다. 완벽하게 맞물린 침묵은, 아무도 먼저 깨지 않았다.
그녀가 떠나던 날도 도현은 카운터에 있었다. 서하는 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문 앞에서 한 번 멈칫했다. 늘 그렇듯이. 그때 도현의 목엔 세 글자가 박혀 있었다. 가지 마. 그는 대신 물을 올렸다. 데워줄 잔도 없는데, 그냥 손이 그리로 갔다.
그날 서하는 뒤도 안 보고 나갔다. 7년이 지나 다시 문을 밀고 들어올 때까지, 그 세 글자는 도현의 목에서 식지도 사라지지도 않았다.
*
도현은 의자에 앉았다. 서하가 앉던 자리에. 처음이었다. 7년 동안 이 자리엔 아무도 앉히지 않았고, 자기도 앉지 않았다.
창밖으로 큰길이 보였다. 낮의 도시는 시끄러웠다. 새벽과 달랐다. 새벽 손님들이 두고 간 침묵이 낮의 소음에 밀려 어디론가 흩어졌다.
그는 아침에 지나간 두 코트를 다시 떠올렸다. 서하가 고개를 숙이던 각도. 재원이 몸을 기울이던 방향. 재원의 컵에선 늘 선명한 문장이 읽혔다. '미안하다'였다가, 다음 날엔 다른 문장이었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을 그 자리에서 다 뱉는 사람이었다. 삼키지 않는 사람. 그래서 그의 컵은 늘 뜨거웠다.
서하가 재원과 함께 떠난다면.
혹은 재원이 서하를 붙잡는 데 성공한다면.
도현은 그 상상 앞에서 자기 온도를 확인해봤다. 질투여야 할 자리였다. 조바심이거나, 두려움이거나. 그런데 손끝에도 가슴에도 아무 눈금이 없었다. 이한의 평평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아무것도 안 느끼면 아무것도 안 아파요.
그의 손이 무릎 위에서 천천히 오그라들었다. 놓칠까 봐가 아니었다. 놓쳐도 아무렇지 않을 자신. 그 얼굴이 유리에 비친 무표정과 겹쳤다.
*
그는 카운터로 돌아가 봉투를 열었다. 재계약 서류. 이한의 이름과 조건이 적혀 있었다. 임대료 인상. 계약 종료 유예. 한 페이지 아래에 서명란이 비어 있었다.
도현은 펜을 들지 않았다. 대신 봉투 뒷면 여백에, 손글씨로 무언가를 적었다. 메뉴판을 쓰던 그 손글씨로. 세 글자였다.
가지 마.
그는 그걸 오래 봤다. 종이에 적힌 글자엔 온도가 없었다. 읽히지도 않았다. 자기가 쓴 것이니까. 능력은 남의 삼킨 말만 읽었다. 자기 것은 끝까지 자기 몫이었다.
도현은 그 종이를 접어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내일 새벽, 서하가 마지막으로 문을 밀고 들어오면. 그때 이 세 글자를 종이가 아니라 입으로 낼 수 있을지. 서하가 문 앞에서 멈칫하는 그 반 박자 안에, 이번엔 밀어 넣을 수 있을지.
*
새벽 네 시 오십오 분. 도현은 온점의 불을 켰다.
정시보다 5분 이르게. 시계는 여전히 5분 느렸으니, 시계상으론 딱 다섯 시였다. 그는 물을 올렸다. 원두를 갈았다. 세 종류 중 가장 오래 볶은 것. 아침에 자기가 마셨던 그 원두로, 잔 하나를 미리 내렸다. 서하의 몫이었다.
7년 전 그날, 그는 데워줄 잔이 없어서 물만 올렸다. 오늘은 잔이 있었다. 뜨겁게. 서하의 컵은 늘 처음부터 식어 있었으니, 이번엔 자기 손으로 따뜻한 걸 내밀어볼 셈이었다.
잔을 창가 첫 자리에 놓았다. 커튼을 걷어둔 자리. 김이 창유리에 옅게 서렸다.
도현은 카운터로 돌아와 문 쪽을 봤다. 종소리가 울리기를 기다렸다. 5분 느린 시계가 째깍, 째깍 갔다.
다섯 시 이 분. 골목 끝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한 사람이 아니었다.
유리 너머로 검은 코트가 보였다. 회색 목도리. 서하였다. 그 옆에—
회색 코트가 나란히 다가오고 있었다.
두 실루엣이 온점의 유리에 겹쳐 들었다. 하나는 문 쪽으로, 하나는 그 곁으로. 도현의 손이 카운터 위에서 굳었다. 앞치마 주머니 속 종이의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세 글자.
5분 느린 시계가, 째깍, 다섯 시 삼 분을 가리켰다.
문고리 위에 손이 올라가는 그림자가, 유리에 크게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