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끄덕인 손끝이 아직 저릿했다.
그 끄덕임을 받고 서하는 문을 밀었다. 유리에 매달린 종이 짧게 울었다. 나는 그녀가 남긴 식은 잔을 오래 바라봤다. 잔벽에 붙은 온기 없는 문장이 흐릿하게 번지고 있었다. 그때 붙잡아주길 바랐다. 7년 묵은 문장은 손으로 만지면 바스러질 것처럼 얇았다. 자음 하나가 벌써 뭉개져 있었다. 지워지는 중이었다.
그 문장이 다 사라지면, 그녀는 이 도시에서 사라진다.
나는 아직 그걸 몰랐다.
그리고 다음 새벽 다섯 시.
벽시계가 4시 55분을 가리킬 때, 나는 이미 원두를 갈고 있었다. 시계는 5분 느리다. 내가 그렇게 맞춰뒀다. 늦게 도착하는 것들에게 조금 더 관대해지려고.
종이 울렸다.
검은 코트, 회색 목도리. 서하는 어제와 같은 자리, 창가에서 두 번째 좌석에 앉았다. 창가 첫 자리는 늘 비워둔다. 오지 않을 사람의 몫이라고 명주 사장이 말한 적 있다.
"뭐 드릴까요."
"아무거나요. 도현 씨가 고르는 걸로."
'도현 씨.' 7년 전엔 그냥 도현아, 였다. 그 사이에 낀 '씨' 한 글자가 겨울 유리창처럼 서늘했다.
나는 에티오피아를 내렸다. 산미가 밝은 원두다. 뜨거운 물이 필터를 통과하는 소리가 홀을 채웠다. 잔을 내려놓자 그녀가 두 손으로 감쌌다.
"오늘은 좀 춥네요."
"영하로 떨어진대요. 새벽엔 더."
"그쪽 원두는 늘 이렇게 신가요."
"이건 신 편이에요. 진한 것도 있고요."
"그럼 다음엔 진한 걸로."
다음. 그 말이 우리 사이에 놓였다. 나도 그녀도 그 단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다음에 하자, 다음에 물어보자, 다음에. 그렇게 미룬 것들이 7년이 됐다.
나는 카운터 뒤에서 그녀의 잔을 봤다.
방금 뜨거운 물로 내린 커피였다. 그런데 그녀가 손에 쥔 순간, 온도가 이상했다. 잔은 따뜻했지만 그 안에 담긴 문장은 어제보다 더 흐렸다. 뜨거운 잔을 쥐어도 그녀 안의 무언가가 이미 식어버린 것처럼. 문장이 물에 번진 잉크 같았다.
그때 붙잡아…… 바랐…….
읽히지 않았다. 어제는 그래도 뼈대가 잡혔는데, 오늘은 자음과 모음이 흩어졌다. 온도 감응의 규칙 둘째. 뜨거울수록 선명하고, 식을수록 흐리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뜨거운 잔을 쥐고 있다.
식은 건 잔이 아니라 그녀였다.
이건 곧 떠나는 사람의 온도다. 마음을 이미 접어 짐가방에 넣은 사람의 손끝. 나는 그 사실을 손목이 아니라 명치로 알았다.
"도현 씨."
"네."
"여기, 예전이랑 똑같네요."
"바꿀 이유가 없어서요."
"벽시계도 여전히 느리고."
그녀가 시계를 올려다봤다. 5분 느린 시계. 그녀는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7년 전에도 나는 저 시계를 늦춰뒀고, 그녀는 매번 진짜 시간을 몰라 약속에 늦곤 했다. 그때 나는 진짜 시간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녀가 조금 더 오래 여기 앉아 있길 바라서.
말할 수 있었다. 지금.
시계 이야기 뒤에 붙여서, 자연스럽게. 그때 네가 늦게 오길 바라서 시계를 늦춰뒀어. 지금도 그래. 네가 조금만 더 있었으면 해서.
입을 열었다.
목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온도가 잡히지 않았다. 내 감정의 눈금이. 이 말을 하고 싶은 건지, 하기 싫은 건지, 지금 내 마음이 뜨거운지 미지근한지, 나는 알 수 없었다. 7년째다. 남의 온도를 읽을수록 내 온도는 눈금을 잃었다. 기쁨과 무료함이 같은 온도가 됐다. 설렘과 체념이 구분되지 않았다.
나는 남의 삼킨 말은 다 읽으면서, 정작 내 것은 내 손 안에서도 못 찾는다.
"…그쪽 자리, 햇빛 잘 들어요. 조금 있으면."
내가 겨우 뱉은 건 그거였다. 햇빛. 그녀가 옅게 웃었다.
"알아요. 예전에 도현 씨가 그랬잖아요. 저 자리는 6시쯤 해가 든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나보다 그녀가 나를 더 많이 기억하고 있었다.
종이 다시 울렸다.
들어온 건 이한이었다. 회색 정장, 검은 서류가방. 새벽 다섯 시 반에 정장을 입은 사람은 밤을 새운 사람이거나, 이 시간을 무기로 쓰는 사람이다. 이한은 후자다.
"영업 중이었네."
"앉으시겠어요."
"커피는 됐고."
이한은 절대 잔을 쥐지 않는다. 나는 저 사람의 컵을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다. 읽을 게 없어서다. 감정을 완전히 봉인한 사람의 손끝에선 어떤 문장도 나오지 않는다. 텅 빈 잔벽. 나는 그를 볼 때마다 거울을 본다. 이대로 능력을 계속 쓰면 도착하는 곳.
"저번에 보낸 계약서, 봤나."
"아직요."
"아직." 이한이 그 단어를 혀끝에서 굴렸다. "윤도현 씨는 늘 아직이지. 아직 안 봤고, 아직 결정 못 했고."
"검토할 시간이 필요해서요."
"시간." 그가 서류가방을 카운터에 올렸다. "이 건물, 다음 달에 재계약이야. 나는 이 자리에 다른 걸 넣을 사람이 있어. 임대료 두 배를 내겠다는 사람. 당신네 사장한텐 그 절반도 버거울 거고."
명주 사장은 아직 출근 전이다. 이 사람은 그걸 알고 이 시간에 왔다.
"결정을 미루면," 이한이 나를 똑바로 봤다. 그의 눈엔 온도가 없었다. "이 자리도 잃어. 세상은 미루는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거든. 나는 그걸 아주 오래전에 배웠지."
"…무슨 뜻이에요."
"나도 예전엔 뭔가를 기다렸어. 말하려고, 붙잡으려고. 그러다 다 놓쳤지. 그다음부터는 미루지 않기로 했어. 대신 후회도 안 하기로 했고." 그가 서류가방을 톡톡 두드렸다. "당신, 나랑 닮았어. 근데 나보다 늦었지. 나는 봉인이라도 했는데, 당신은 그냥 얼어붙는 중이잖아."
너도 결국 나처럼 될 거야.
그 말이 목소리 없이 들렸다. 카운터 뒤에서 내 손이 잔을 꽉 쥐었다. 방금 내가 데워둔 물이 담긴 잔이었다. 뜨거워야 했다.
나는 그 온도를 느끼지 못했다.
손바닥이 붉어지도록 쥐고 있는데도, 뜨거운지 미지근한지 알 수 없었다. 이게 대가다. 자기 손으로 내린 커피의 온도조차 못 느끼는 단계. 나는 7년 동안 이 자리에 서서 수천 개의 잔을 데웠고, 정작 그 온기를 한 번도 내 것으로 삼킨 적이 없다.
그때, 창가 자리에서 소리가 났다.
서하가 잔을 내려놓는 소리. 그녀는 대화를 다 들었을 것이다. 이한이 힐끗 그쪽을 보더니 코트 깃을 여몄다.
"생각 잘 해. 이번 주 안에 답 줘. 아니면 나는 다음 사람이랑 계약할 거고." 그가 문으로 향했다. "미루면 잃는다. 그건 커피에도 똑같지."
종이 울리고, 그가 나갔다.
홀이 조용해졌다. 에스프레소 머신의 낮은 진동만 남았다.
미루면 잃는다. 그건 커피에도 똑같지.
그 문장이 내 안에서 이상한 각도로 꺾였다. 이한은 카페 얘기를 한 거였다. 그런데 그 말은 카페를 넘어서 내 명치를 정통으로 찔렀다. 나는 7년을 미뤘다. 서하를 잃었다. 그 사이 내 감정의 온도까지 잃었다. 이한은 후회 안 하기로 했다지만, 나는 후회로만 가득 찬 채 얼어붙는 중이다.
가장 나쁜 쪽이다. 잃고, 후회하고, 그런데도 여전히 미루는.
"저 사람, 무서운 말 하네요."
서하였다. 그녀가 잔을 들고 카운터로 왔다. 두 걸음 앞에 섰다.
"…신경 쓰지 마요. 늘 저래요."
"도현 씨."
"네."
"저 사람 말, 맞아요?"
"뭐가요."
"미루면 잃는다는 말." 그녀가 잔을 카운터에 올렸다. 온기가 이미 절반은 빠진 잔이었다. "저는요, 그 말이 좀 늦게 온 것 같아요. 저한테는."
나는 그녀의 손을 봤다. 잔에서 막 떨어진 손가락. 거기 묻은 온도를 읽으려 했다. 그때 붙잡아주길 바랐다. 어제보다 흐리고, 방금보다 더 흐렸다. 문장이 지워지고 있었다. 그녀가 떠날 준비를 마칠수록, 그 문장은 옅어진다. 다 지워지면, 그녀는 이 도시에서 사라질 것이다.
말해야 했다. 지금.
가지 마. 세 글자. 7년 동안 목에 박혀 있던.
입을 열었다.
"…원두, 진한 거. 내일 준비해둘게요."
또 미뤘다. 나는 또 잔을 데우는 걸로 말을 대신했다. 그녀가 잠깐 나를 봤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눈이었다. 어제도 그랬고, 7년 전에도 그랬다. 그녀는 늘 내가 물어봐 주길, 붙잡아주길 기다린다. 먼저 말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라서.
우리는 완벽하게 맞물린 침묵이었다. 그게 우리를 끝냈다.
"…고마워요. 그럼 내일."
그녀가 목도리를 다시 감았다.
문 앞으로 두 걸음.
거기서, 명주 사장이 어제 던진 말이 되살아났다. 마감하고 문 잠글 때, 사장은 카운터를 닦으며 나를 보지 않고 말했다. 너는 남 잔만 데운다. 도현아, 넌 언제 네 말을 할 거냐. 나는 그때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계를 5분 더 늦출까 생각했다. 세상 시간을 늦추면 미룸이 미룸처럼 안 보일까 봐.
아니다.
시계를 늦춰도 서하는 떠난다. 문장은 지워진다. 잔은 식는다. 이한 말이 맞다. 미루면 잃는다. 나는 이미 한 번 그렇게 잃었고, 그 대가로 내 온도까지 내줬다. 두 번은 안 된다.
내일. 내일은 반드시 말한다.
나는 그렇게,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 못 박았다. 마감 후 시계를 늦추는 대신, 나는 창가 첫 자리를 향해 걸어가 커튼을 걷을 것이다. 오지 않을 사람의 자리에 처음으로 햇빛을 들일 것이다. 그리고 내일 새벽, 그녀가 오면, 나는 커피가 아니라 말을 내릴 것이다.
내가 이 다짐을 손끝으로 겨우 붙잡았을 때.
서하가 문 앞에서 멈칫했다. 늘 그 자리에서 한 번 멈추는 사람. 그녀가 뒤돌지 않은 채 말했다.
"도현 씨."
"…네."
"나, 이번 주에 이 도시 떠나요."
담담했다. 날씨 이야기 같은 말투였다. 진한 원두를 내일 준비하겠다는 내 말에 붙일 수 있는, 그런 온도의 문장.
"내일이 마지막일 것 같아요. 진한 거, 그날 마실게요."
그녀가 문을 밀었다. 종이 울렸다. 겨울 새벽 공기가 문틈으로 밀려들었다.
내 손이, 처음으로, 카운터 위 따뜻한 잔을 향해 뻗었다.
내일이 아니라 지금. 미루면 잃으니까.
손끝에 잔이 닿았다. 그 순간—
나는 온도를 느꼈다.
7년 만에, 처음으로, 내 손 안의 잔이 뜨거웠다.
그런데 종은 이미 울린 뒤였고, 문은 닫혀 있었다. 뜨거움이 내 손을 데우는 동안, 그 온기가 닿을 사람은 벌써 겨울 밖으로 걸어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