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새벽 네 시 오십오 분. 시계는 다섯 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다.

문에 달린 종이 흔들린다.

첫 손님은 늘 그 남자다. 회색 코트, 마른 손가락. 이름은 모른다. 나는 그를 컵으로 기억한다. 그는 언제나 창가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아,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두 손으로 감싼 채 삼십 분을 버틴다.

"오늘도 진하게요."

"네."

잔을 내민다. 그가 두 손으로 받아 쥔다. 손끝이 잔에 닿는 순간, 내 손바닥에 낯선 온도가 스민다. 뜨겁다. 아주 뜨겁다. 그리고 뜨거운 잔일수록 문장은 선명하다.

*미안하다 말하고 싶었어.*

또렷했다. 마치 그가 방금 내 귀에 대고 속삭인 것처럼. 그 문장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나는 모른다. 알 수도 없다. 내가 읽는 건 미래도, 진심도 아니다. 오직 삼켜진 채 식어버린 말 한 문장뿐. 그는 자신이 무엇을 삼켰는지조차 모를 것이다. 손끝의 온도만이 정직하다.

남자는 잔을 감싼 채 창밖을 본다. 아직 어두운 골목. 가로등 하나가 깜빡인다. 그는 저 온도로 삼십 분을 버티다가, 컵이 식으면 일어나 아무 말 없이 나갈 것이다. 미안하다는 말은 오늘도 여기 남는다. 온도가 되어.

나는 시계를 5분 느리게 맞춰 두었다. 그러니 밖은 이미 다섯 시다. 첫차보다 먼저 불을 켜는 이 도시의 뒷골목에서, 온점은 늘 세상보다 5분 늦게 시간을 센다. 늦게 도착하는 온기를 매일 마주하려면, 시계쯤은 거짓말을 해줘야 하니까.

에스프레소 머신이 데워지는 소리가 홀을 채운다. 열두 개의 좌석. 창가 두 자리는 오늘도 비워 둔다. 원두는 세 종류, 메뉴판은 내 손글씨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대개 밤을 넘긴 사람들이다. 잠들지 못했거나, 누군가를 떠나보냈거나, 아직 못 한 말을 품은 채로.

나는 카운터로 돌아와 남은 에스프레소를 내 잔에 받는다. 방금 뽑은 것. 김이 오른다. 한 모금 삼킨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뜨거운지, 미지근한지, 식었는지. 구분되지 않는다. 혀에 닿는 감각은 있는데, 그게 어느 눈금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남의 잔은 문장까지 읽어내면서, 내 잔은 온도조차 모른다. 7년이다. 이 감각을 쓴 지. 처음엔 뜨거운 커피가 그냥 덜 뜨거운 정도였다. 지금은 기쁨과 슬픔의 온도가 같다. 설렘과 무료함이 한 눈금에 겹쳐 있다.

남의 마지막 말을 대신 느껴주는 만큼, 내 마음은 눈금을 잃는다. 세상에서 고백을 가장 많이 듣는 사람이, 자기 고백은 가장 못 하는 사람이 된다.

컵을 내려놓는다.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또 남 마음이나 읽고 있었냐."

명주 사장이 뒷문으로 들어온다. 손엔 원두 봉지 두 개. 앞치마를 대충 목에 건다. 나보다 열 살 위고, 이 카페의 이름을 지은 사람이다. 마침표이자, 따뜻할 온. 문장의 끝이자 온기.

"저 남자, 오늘도 미안하대요."

"누구한테."

"몰라요. 그건 안 읽혀요."

명주가 원두 봉지를 카운터에 던지듯 놓는다. 봉지끼리 부딪는 둔탁한 소리.

"넌 참 편하겠다. 남들 삼킨 말은 다 알아듣고."

"편하진 않아요."

"편하지." 명주가 나를 본다. 그 눈은 캐묻지 않는다. 이곳의 불문율이다. 여기서는 아무도 남의 삼킨 말을 대신 꺼내주지 않는다. 다만 잔이 식지 않게 데워줄 뿐. "남 잔은 그렇게 잘 데우면서."

명주가 마른행주로 카운터를 훔친다. 원을 그리듯 세 번. 그러다 손을 멈춘다.

"도현아."

"네."

"넌 언제 네 말을 할 거냐."

행주가 멈춘 자리에 물기가 번진다.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명주도 답을 기다리지 않는다.

"손님 온다."

명주가 턱으로 문을 가리킨다.

종이 흔들린다. 그 흔들림이, 평소와 다르다.

문이 밀린다. 겨울 새벽의 찬 공기가 먼저 들어오고, 그다음에 사람이 들어온다. 검은 코트. 목도리를 반쯤 풀어 놓은 채. 짧아진 머리. 7년이 지났는데, 걸음걸이만은 그대로다. 문지방을 넘을 때 오른발부터 딛는 버릇.

숨이 멎는다.

서하다.

7년 전 인사도 없이 떠난 사람. 나는 그날 '가지 마'라는 세 글자를 목 끝까지 밀어 올렸다가, 다시 삼켰다. 다음에 하자고. 다음에 하면 된다고. 그 다음은 오지 않았다. 그녀는 문 앞에서 한 번 멈칫했고, 나는 그 멈칫을 붙잡지 못했고, 문은 닫혔다.

그 문이 지금 다시 열렸다.

서하는 나를 알아본다. 그런데 놀라지 않는다. 마치 여기 내가 있을 걸 알고 온 사람처럼. 아니, 그냥 아무 표정도 짓지 않는다. 먼저 말을 꺼내는 법이 없는 사람이니까. 상대가 물어봐 주기를 기다리는 사람이니까. 그건 나와 똑같다. 우리 두 사람의 침묵은 언제나 완벽하게 맞물렸다.

"……어서 오세요."

내 목소리가 낯설게 들린다.

서하가 카운터 앞에 선다. 코트에서 찬 냄새가 난다. 밤을 넘긴 사람의 냄새.

"따뜻한 거로."

7년 만의 첫 문장이 그거다. 따뜻한 거로. 손이 먼저 움직인다. 드립을 내린다. 물줄기가 원두 위로 원을 그린다. 손이 떨린다. 이 떨림을 나는 온도로 느끼지 못한다. 그냥 물줄기가 흔들리는 걸 눈으로 볼 뿐이다.

잔에 커피가 찬다. 김이 오른다. 방금 내린 것. 분명히 뜨거운 것.

나는 잔을 내민다.

서하가 두 손으로 받아 쥔다.

손끝이 잔에 닿는 순간—

식어 있다.

방금 내린 커피인데. 김이 오르고 있는데. 그녀의 손을 거친 그 잔은, 내 감각 속에서 처음부터 식어 있다. 뜨거울수록 문장은 선명하고, 식은 컵일수록 오래 묵어 흐릿하다. 그녀의 컵은 아주 오래 묵었다. 문장이 뿌옇게, 안개처럼 번진다.

*그때…… 붙잡아주길…….*

흐릿하다. 끝이 뭉개진다. 나는 귀를 기울이듯 그 온도에 매달린다.

*그때 붙잡아주길 바랐다.*

목이 얼어붙는다. 7년 동안 삼킨 세 글자가 목 끝까지 밀려 올라온다. 가지 마. 가지 마. 지금 말하면 된다. 지금이면. 저 남자의 미안하다는 말도 또렷이 읽어냈으면서. 매일 남의 뜨거운 잔에서 튀어나오는 문장은 읽어내면서. 정작 눈앞의 이 사람에게는—

"……원두가."

내 입에서 나온 건 그거다.

"원두가 바뀌었어요. 예전보다 산미가 좀 있어요."

서하가 잔을 내려다본다. 입가가 아주 살짝 움직인다. 웃은 건지, 아닌 건지.

"그렇구나."

우리는 그렇게 서 있다.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그녀는 식은 잔을 쥐고, 나는 데울 방법을 모르는 채로.

서하가 창가로 간다. 창가에서 두 번째 자리. 미안하다는 남자가 방금 일어나 비운 그 자리. 그녀가 앉는다. 잔을 테이블에 놓는다. 두 손으로 감싸지도 않는다. 그냥 놓는다. 처음부터 식은 것을 데울 이유가 없다는 듯이.

명주가 내 옆으로 온다. 낮은 목소리로.

"아는 사람이냐."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온도가 어떤데."

"……식었어요. 처음부터."

명주의 손이 잠깐 멈춘다. 이곳에 오는 손님의 컵은 가장 뜨겁거나 가장 식어 있다. 가장 식은 컵을 쥐고 오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명주는 안다. 못 한 말이 가장 오래 묵은 사람. 그리고 곧 떠날 사람.

"데워줘라." 명주가 말한다. "네가 할 줄 아는 게 그거잖아."

나는 드립포트를 든다. 뜨거운 물. 서하의 테이블로 간다. 그녀가 나를 올려다본다. 눈이 마주친다. 7년 전 문 앞에서 멈칫하던 그 눈. 무언가를 기다리던.

지금이야. 붙잡아. 가지 마, 한마디면 돼.

포트를 기울이려는데, 손이 멈춘다. 물줄기가 나오지 않는다. 나는 포트를 도로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데울 자격이 없는 사람처럼.

서하가 식은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다. 표정이 없다. 그리고 잔을 도로 내려놓는다.

또각. 사기잔이 나무 테이블에 닿는 소리.

밖은 아직 어둡다. 가로등이 깜빡인다. 첫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골목 저편에서 들린다. 세상은 다섯 시가 지났고, 온점의 시계만 5분 뒤에서 그녀를 붙든다.

서하가 창밖을 본다. 오래. 나는 카운터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 옆에 못 박힌 듯 서 있다. 할 말은 목 안에 있는데, 그 말의 온도를 나는 모른다. 얼마나 뜨거워야 꺼낼 수 있는지, 얼마나 식으면 영영 못 꺼내는지.

한참 뒤, 서하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코트 자락이 스친다. 그녀가 잔을 든다. 반쯤 남았다. 마시지 않고, 카운터로 가져와 내려놓는다. 내 앞에.

식은 잔.

"잘 마셨어요."

7년 만에 돌아온 사람이, 존댓말을 쓴다. 예전엔 반말이었다. 그 거리가, 세 글자보다 멀게 느껴진다.

서하가 목도리를 다시 두른다. 그 아래로, 병원 팔찌 같은 얇은 밴드가 손목에 감겨 있다. 나는 그것을 보고도 못 본 척한다. 그녀가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오른발부터. 문 앞에서, 그녀가 멈칫한다. 7년 전 그날처럼. 딱 한 번.

나는 그 멈칫을 안다. 이번엔 안다. 저건 기다리는 거다. 누가 붙잡아주길. 지금 이름을 부르면. 지금 가지 마, 하면.

입술이 벌어진다. 숨이 나온다. 그런데 소리가 되지 못한다.

서하가 손잡이에 손을 얹는다. 그러다, 고개만 살짝 돌린다. 나를 보지는 않는다. 창밖 쪽을 본 채로 묻는다.

"내일도 이 시간에 여나요?"

"……네."

"그럼 됐어요." 그녀가 잠깐 숨을 고른다. "이번 주까지만, 이 도시에 있거든요."

식은 잔이 내 앞에서 천천히 온도를 잃어간다. 김도 오르지 않는다.

문이 닫힌다. 찬 공기가 한 번 더 밀려들었다가, 이내 홀의 온기에 삼켜진다. 나는 그 자리에 선 채, 이번 주가 며칠 남았는지 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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