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붉은 경보등이 회색 콘크리트 벽면을 피처럼 적시며 회전했다.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제3부검실의 차가운 공기를 찢어발기는 가운데, 문턱을 넘어선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거대한 장벽처럼 사방을 가로막았다. 사법 연수원장 출신의 거물 변호사들을 대동하고 걸어 들어오는 한지태의 발소리는 규칙적이었고, 그래서 더 가학적이었다.

"거기까지 하십시오, 서은우 검사."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부 부장검사 임형택이 지휘서를 서은우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종이 끝이 은우의 뺨을 칠 듯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송우석 전임의에 대한 체포 영장 및 명성병원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은 금시로 집행 정지 및 취소되었습니다. 대검찰청의 직권에 의해, 이 사건은 특별수사부로 이첩되며 백강현 법의관의 제3부검실은 국가 안보 및 의료 기밀 유출 혐의로 즉시 봉쇄 조치합니다."

"뭐라고요?!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은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녀의 손이 허리춤의 서류 가방을 꽉 쥐었지만, 임형택의 뒤에 선 수사관들이 그녀의 앞을 거칠게 가로막았다.

한지태는 그런 은우를 흘낏 보더니, 이내 시선을 돌려 부검대 옆에 서 있는 강현에게로 다가왔다. 그의 이탈리아제 고급 수트에서 풍기는 은은한 향수 냄새가 포르말린의 역한 체취와 섞여 기괴한 불쾌감을 자아냈다.

"백강현."

한지태가 강현의 귓가에 얼굴을 대고 낮게 속삭였다. 그의 입술 끝이 비열하게 호선을 그렸다.

"네가 시체들과 노닥거리는 동안, 이 나라의 법은 내 장인어른의 손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다는 걸 잊었나 보군. 메스를 쥔 법의관이 아니라, 감옥에 갇힌 범죄자로 박제해 주지."

강현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한지태의 어깨 너머, 부검대 위에 누워 있는 시신에 고정되어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귓가에서 이명이 터져 나왔다. 삐 소리와 함께 눈앞의 시야가 급격히 흐려졌다. 조금 전까지 무리하게 가동했던 '망자의 부검 대장'의 잔존 대가가 비로소 그의 육체를 잠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요동쳤다. 분당 맥박수가 140회를 넘어서며 가슴뼈 안쪽이 무거운 둔기로 얻어맞은 듯 뻐근해졌다.

'윽…….'

강현은 신음을 삼키며 부검대 가장자리를 한 손으로 짚었다. 그러나 이내 왼쪽 팔의 감각이 사라졌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차가운 석고처럼 딱딱하게 굳어 들어갔다. 신경이 마비되는 지독한 동기화 통증이었다.

"백 부장님?"

은우가 이상함을 눈치채고 소리쳤지만, 강현의 몸은 이미 제어력을 잃고 있었다. 다리의 힘이 풀리며 무릎이 바닥을 향해 꺾였다.

쿵!

강현의 신형이 타일 바닥으로 쓰러졌다. 입술이 파랗게 질렸고, 거친 호흡이 가슴속에서 맴돌 뿐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폐포 하나하나가 접착제로 붙어버린 것처럼 숨이 쉬어지지 않는 극심한 산소 결핍이 전신을 덮쳤다.

한지태는 바닥에 쓰러져 버둥거리는 강현을 내려다보며, 마치 더러운 오물을 본 것처럼 바지춤을 털어냈다.

"쯧, 여전하군. 몸뚱이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부전증 환자가 무슨 법의학을 하겠다고. 치워라."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강현의 몸으로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어허! 이 양반들이 누굴 만지려고 들어? 손 안 치워?!"

익살맞으면서도 뼈가 서린 목소리가 부검실 구석에서 튀어나왔다.

오덕팔이었다. 그는 평소의 능글맞은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사나운 기세로 수사관들의 손을 쳐내며 강현의 앞을 막아섰다.

"비켜 봐요! 우리 소장님 지병 도진 거 안 보여? 사람 잡을 일 있어? 소장님은 가만 계셔! 내가 해결할 테니까!"

덕팔은 소리를 지르며 강현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의 손이 신속하게 강현의 낡은 가운 안주머니와 품속을 뒤지는 척했다. 하지만 그의 진짜 목적지는 따로 있었다.

덕팔의 시선이 강현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장난기라곤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진지했다.

사실 덕팔은 이미 알고 있었다. 며칠 전, 강현의 서랍 깊숙한 곳에서 몰래 발견했던 '베라파밀 유도체'와 특수 심근 안정제의 빈 용기들. 강현이 남몰래 겪고 있던 극심한 신체 붕괴와 그 대가를, 덕팔은 묵묵하게 지켜보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대비하고 있었다.

덕팔의 넓적한 손바닥 안에서 은밀하게 빛나는 유리 앰플과 1회용 주사기가 나타났다.

"이 고집쟁이 영감태기 같으니라고…… 내 비상금 다 털어서 구해온 거니까, 나중에 연봉 협상 때 허튼소리 하기만 해봐요."

덕팔은 신속하고 능숙한 솜씨로 주사기 끝을 강현의 목덜미, 경정맥 부근에 밀어 넣었다.

따끔한 통증과 함께 차갑고 강렬한 약물이 혈관을 타고 뇌로 치솟았다.

화끈거리는 열감이 마비되었던 왼쪽 팔의 신경을 타고 내려갔다. 석고처럼 굳었던 손가락 끝에 미세한 온기가 돌며 감각이 돌아왔다. 쪼그라들었던 폐가 다시 확장되며 산소가 허파 깊숙이 밀려 들어왔다.

허억!

강현이 크게 숨을 들이켜며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탁기가 순식간에 걷히고, 얼음처럼 차가운 이성이 다시 그 자리를 채웠다.

강현은 덕팔의 어깨를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몸을 지탱하는 다리는 아직 미세하게 떨렸으나, 그의 눈빛만큼은 그 누구보다 단단했다.

"고맙군, 오 선생."

"말만 고맙다 하지 말고, 퇴근하고 소고기나 사쇼."

덕팔이 툴툴거리며 강현의 가운 깃을 털어주었다.

강현은 정면을 바라보았다. 한지태와 그의 뒤에 선 법률 대리인단, 그리고 임형택 부장검사가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명성병원 측 수석 변호사인 김태섭이 헛기침을 하며 서류 봉투를 흔들었다.

"백강현 씨. 몸 상태도 정상이 아니신 것 같은데, 이만 물러나시지요. 송우석 전임의의 과실치사 혐의는 이미 명성병원 자체 사인 규명 위원회와 학회의 공인된 소견에 의해 '불가항력적 심근경색'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더 이상의 부검이나 증거 수집은 사법 절차를 방해하는 불법 행위일 뿐입니다."

김태섭의 목소리에는 확신과 오만이 가득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구축한 카르텔의 방어벽이 완벽하다고 믿고 있었다.

강현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가만히 서서 김태섭을 바라보았다. 그의 침묵은 무거웠고, 부검실의 공기를 가라앉혔다.

10초. 20초. 30초.

시간이 흐를수록 변호인단의 기세등등하던 정적이 미묘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강현의 흔들림 없는 눈빛과 깊은 침묵은, 오히려 상대로 하여금 자신들의 논리에 빈틈이 있는지를 스스로 의심하게 만드는 기묘한 압박감을 발휘했다.

"왜…… 대답이 없으십니까? 우리의 법적 주장에 반박할 서류라도 있습니까?"

김태섭이 침을 삼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방조된 침묵 속에서 그들의 불안감이 스스로 자라나고 있었다.

그때, 강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질문 하나 하지."

그의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다. 마치 대학 강의실에서 학생을 대하는 노련한 교수처럼.

"명성병원에서 제출한 피해자의 최종 임상 기록에 따르면, 사망 직전 투여된 약물은 일반적인 심폐소생용 에피네프린과 아미오다론뿐이라고 되어 있더군. 맞나?"

"그렇습니다. 공식 기록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김태섭이 기다렸다는 듯 외쳤다.

"그렇다면."

강현이 부검대 옆의 정밀 촉매 분석기로 걸어갔다. 그의 길고 곧은 손가락이 유리 슬라이드 글라스를 집어 올렸다. 슬라이드 위에는 아주 미량의 투명한 액상이 묻어 있었다.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건가?"

강현이 슬라이드를 분석기 광원 아래에 밀어 넣었다. 모니터에 거대한 분자 구조식과 함께 붉은색 경고등이 점멸했다.

"이것은 1화에서 돌연사로 처리되었던 명성병원 환자의 위벽 주름 틈새에서 채취한 잔류 액상 성분이다. 위벽은 사후에도 위산의 영향으로 음압이 걸리며 미세한 주름 사이에 약물이 잔류하지. 일반적인 부검의라면 놓쳤을 0.03밀리리터의 미량이다."

한지태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강현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이 약물의 성분명은 '아티카인-D(Articaine-D)'. 국내에서는 심각한 부정맥 유발 부작용으로 인해 수입 및 처방이 전면 금지된 희귀 마취 촉매제다. 일반 마취제에 비해 마취 도입 속도가 빠르다는 이유로 일부 몰지각한 외과의들이 은밀히 사용하곤 하지."

강현의 시선이 한지태의 얼굴에 꽂혔다.

"이 아티카인-D가 투여되면 환자는 외견상 완벽한 '급성 심근경색'의 증상을 보이며 사망한다. 부검을 하더라도 심장 자체에는 허혈성 변화만 남기 때문에, 단순 돌연사로 위장하기 가장 좋은 독극물이지. 하지만 위벽 주름 틈에 고착된 이 잔류 성분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강현은 분석기의 버튼을 눌렀다. 특수 촉매 시약이 슬라이드 위에 떨어지자, 투명했던 액상이 순식간에 짙은 푸른빛으로 변하며 형광을 발했다.

"촉매 분석 결과, 아티카인-D의 고유 화학적 지문이 검출되었다. 그리고 이 약물의 고유 유통 코드를 추적한 결과……."

강현이 모니터 화면을 그들의 방향으로 돌렸다.

"명성병원 소아외과, 그리고 한지태 부원장의 개인 연구실로 청구된 비공개 수입 약품 리스트와 일치하더군. 단순 심근경색 환자의 위장에서 왜 당신들의 독점 수입 약물이 나왔는지, 법정에서 어떻게 설명할 생각이지?"

부검실 안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김태섭 변호사는 입을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손에 들린 서류 뭉치가 바르르 떨렸다.

한지태의 얼굴에서 여유로운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의 턱관절이 단단하게 맞물리며 이빨 갈리는 소리가 들릴 듯했다.

침묵으로 방조하고, 물증으로 압박하며, 완벽한 메디컬 팩트로 막타를 날리는 강현의 '침묵핍공'이 한지태의 카르텔을 정면으로 관통한 순간이었다.

"백강현…… 너는 끝까지 내 앞길을……."

한지태가 이성을 잃고 강현의 덜미를 잡으려 발을 내딛는 찰나였다.

띠리리리링!

임형택 부장검사의 품 안에서 요란한 진동음이 울렸다. 임 검사는 굳은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한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예, 이사장님. 예…… 지금 제3부검실에…… 예? 아, 알겠습니다. 즉시 집행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임 검사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한지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 뒤, 강현을 향해 돌아섰다.

그의 손에는 방금 전송된 법원과 행정안전부의 직인이 찍힌 전자 공문서가 들려 있었다.

"백강현 법의관."

임 검사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자비도 없었다.

"보건복지부 및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원장의 초법적 행정 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귀하는 금시로 '국가 의사 면허 효력 정지' 및 '법의관 임용 자격 취소' 처분을 받았습니다. 더 이상 당신은 법의학적 판단을 내릴 권한이 없는 민간인입니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오덕팔이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나섰지만,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그를 거칠게 밀쳐냈다.

"또한."

임 검사가 뒤를 돌아보며 수사관들에게 손짓했다.

"국과수 제3부검실을 국가 보안 구역 위해 지역으로 규정한다. 전원 퇴거시키고, 이 시간부로 이 공간을 전면 봉쇄한다."

수사관들이 노란색의 두꺼운 봉쇄 테이프를 꺼내 들었다. '출입 금지'와 '사법 통제 구역'이 적힌 테이프가 제3부검실의 철문과 부검대 사방을 겹겹이 두르기 시작했다.

강현의 손때가 묻은 메스 상자 위에도, 진실을 밝혀내던 정밀 분석기 위에도 차가운 노란색 테이프가 엑스(X)자로 가로막혔다.

"백 부장님……."

은우가 주먹을 쥐고 강현을 바라보았으나, 강현은 그저 묵묵히 그 광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한지태는 다시금 차가운 미소를 되찾으며, 가운을 벗어 던져야 하는 강현의 옆을 지나쳐 걸어 나갔다.

"패자는 영안실 밖으로 나가는 법이지, 백강현. 결국 진실을 말할 입을 잃은 건 너다."

문이 닫히고, 제3부검실의 불빛이 하나둘 꺼지기 시작했다. 완전히 차단된 어둠 속에서, 강현은 서서히 조여오는 새로운 음모의 사슬을 느끼며 주먹을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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