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수사관들의 구두 뒤축이 법정 대리석 바닥을 찍어 누르는 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송우석 변호사가 치켜든 붉은 직인의 서류가 허공에서 승전보처럼 펄럭였다. 피고인석의 최형섭 과장은 안도와 비열함이 뒤섞인 숨을 내쉬며 슬그머니 허리를 폈다.

숨이 막혀 왔다.

강현은 허파 깊숙한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 망자의 부검 대장이 강제로 주입하는 동기화의 대가였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는 비린 피비린내를 침과 함께 삼켰다.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느리게 뛰며 뇌로 가는 산소를 차단하려 했다. 눈앞에 떠다니는 백색 소음 같은 불꽃들을 지워내기 위해, 강현은 오른손 끝으로 안경테를 천천히 밀어 올렸다.

그리고 주머니 속에서 차가운 유리 슬라이드 하나를 꺼내 들었다.

"제대로 수면 위로 올라왔군요."

갈라졌으나 칼날처럼 예리한 목소리가 법정의 소란을 단숨에 베어냈다. 강현의 시선이 수갑을 들고 다가오던 수사관들을 거쳐, 송우석 변호사와 최형섭의 얼굴에 차례로 꽂혔다.

"의료법 위반과 사체손괴라. 명성대학병원의 법무팀이 짜낼 수 있는 가장 진부하고도 신속한 가림막이군요. 하지만 재판장님, 이 영장의 집행에 앞서 법의관으로서 본 사건의 결정적 물증을 먼저 상정하고자 합니다."

"백강현 선생! 지금 피의자 신분으로……!"

송우석이 다급하게 제지하려 했지만, 강현은 이미 슬그머니 다가온 서은우 검사에게 슬라이드를 넘긴 뒤였다. 서은우는 기다렸다는 듯 그것을 법정 실물화상기 위에 올려놓았다.

법정 정면의 대형 스크린에 붉고 푸른빛이 복잡하게 얽힌 현미경 확대 사진이 투사되었다. 세포의 배열조차 무너진, 기괴하게 일그러진 조직의 단면이었다.

"이것은 1화에서 본 법의관이 직접 부검을 집도했던 변사체, 즉 피고 최형섭이 수술했던 망자의 위벽 조직입니다."

강현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는 스크린의 특정 부위를 레이저 포인터로 가리켰다.

"망자의 공식적인 사인은 심근경색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위벽의 점막 주름, 정확히는 유문부 인근의 미세 주름 틈새를 300배율로 확대한 결과입니다. 이 틈새에 고착되어 남은 백색의 미세 액상 성분이 보이십니까?"

법정 안의 모든 이들이 스크린으로 고개를 돌렸다. 최형섭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성분의 화학적 정밀 분석 결과는 '에스-알티카인(S-Articaine)'의 고농도 잔류물입니다. 국내에는 정식 수입되지 않는, 오직 유럽 일부 학회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는 초속효성 국소마취제죠. 일반적인 마취제와 달리 심장 전도계에 직접적인 억제 작용을 일으켜, 과다 투여 시 흔적도 없이 심정지를 유발할 수 있는 치명적인 물질입니다."

강현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가슴을 짓누르는 통증이 갈비뼈를 부러뜨릴 것처럼 강해졌다. 망자가 죽기 직전 느꼈던, 전신이 마비되며 심장이 멈춰가던 가혹한 감각이 그의 신경망을 타고 흘렀다. 하지만 강현은 법대를 짚은 손가락 끝에 힘을 주며 버텨냈다.

"최형섭 과장님. 심근경색으로 급사한 환자의 위벽 깊숙한 곳에서, 왜 주사제로만 쓰이는 이 희귀 마취제 성분이 고착된 채 발견되었을까요? 그것도 사망 직전의 급격한 역류 현상으로 인해 위점막에 강제로 주입된 형태로 말입니다."

최형섭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이마에서 땀 한 방울이 흘러내려 턱끝에 맺혔다.

"그, 그것은…… 환자가 개인적으로 복용했거나, 다른 경로로 유입된 것일 수……."

"이 약물은 경구 투여로는 흡수되지 않고 위산에 의해 즉시 분해됩니다."

강현은 그의 말을 매섭게 잘라냈다.

"오직 정맥을 통해 주입된 후, 심정지가 오기 직전 극심한 구토를 일으키며 위벽으로 역류했을 때만 가능한 잔류 형태입니다. 즉, 누군가 수술실에서 이 약물을 환자의 혈관에 직접 주입했다는 뜻입니다."

그때, 피고인석 옆에 서 있던 서은우 검사가 서류 뭉치를 재판대를 향해 강하게 내리쳤다. 쿵, 하는 둔탁한 파열음이 법정의 긴장감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피고 측의 알리바이를 완전히 무너뜨릴 추가 증거를 제출합니다."

서은우의 목소리는 법정을 꽉 채울 만큼 카랑카랑했다.

"식품의약품안전처 및 관세청으로부터 송달받은 '명성대학병원 특수 약물 독점 수입 내역서'와 당시 '수술실 마약류 및 전문의약품 처방 대장'의 대조 명세입니다. 재판장님, 명성대학병원은 반년 전 연구용이라는 명목으로 이 '에스-알티카인'을 단독 수입했습니다. 그리고 피해자가 사망한 당일 수술실의 처방 기록에는 이 약물의 사용 흔적이 전혀 기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서은우가 최형섭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하지만 당일 마취과 내부 전산망의 임시 로그를 복구한 결과, 최형섭 과장의 개인 ID로 해당 약물이 단 1병 반출된 기록이 확인되었습니다. 공식 처방전에는 누락된 채 말입니다! 이것은 명백한 의도적 은폐이자 기만입니다!"

"거, 거짓말입니다! 저는 그런 약을 반출한 적이 없습니다! 누군가 제 ID를 도용한 겁니다!"

최형섭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비명을 질렀다. 그의 호흡이 비정상적으로 가빠지기 시작했다.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시늉을 내며 억지 곤경을 연출하려 했지만, 그의 눈빛은 이미 퇴로를 잃은 짐승의 그것과 같았다.

강현은 그런 최형섭을 가만히 응시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단 10초간의 침묵.

법정 내의 모든 소음이 소각된 듯한 그 정적 속에서, 최형섭은 제풀에 겨워 헐떡였다. 침묵은 가장 잔인한 압박이었다. 변명하려 할수록 자신의 모순이 드러난다는 것을 깨달은 최형섭의 얼굴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침묵은 긍정입니까, 최 과장님."

강현이 마침내 무거운 입을 열었다.

"당신은 수술 중 발생한 자신의 치명적인 동맥 파열 실수를 덮기 위해, 의도적으로 환자의 심장을 멈추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연스러운 심근경색으로 위장하려 했지. 수술을 중단했던 그 15분 동안, 당신이 수술실에서 무엇을 했는지 이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강현의 손끝이 부검 대장의 이능을 매개하는 공중을 향했다. 그의 대뇌 속에서 복원된 가상 홀로그램 시뮬레이션의 정밀 데이터가 법정 스크린의 의료 영상 장치와 동기화되었다.

화면이 전환되며 3D로 재구성된 수술실의 가상 시뮬레이션이 시작되었다.

환자의 혈압이 급격히 떨어지는 순간, 당황한 최형섭의 손떨림이 마이크로 미터 단위로 재현되었다. 메스가 동맥을 건드려 혈액이 뿜어져 나오는 장면, 소독포로 다급하게 피를 닦아내며 마취의에게 은밀한 눈빛을 보내는 순간이 정량적 수치와 함께 스크린에 가차 없이 그려졌다.

"오후 2시 14분, 동맥 손상 발생. 2시 18분, 지혈 실패로 인한 저혈량성 쇼크 징후 감지. 그리고 2시 21분……."

강현의 목소리가 법정의 공기를 얼려버릴 듯 차갑게 내려앉았다.

"당신은 지혈을 포기하고 에스-알티카인을 정맥 라인에 주입했습니다. 환자의 심장 박동수가 급격히 감소하며 완전히 정지할 때까지 걸린 시간은 단 3분 42초. 이것이 당신이 집도한 수술의 진실입니다."

"아, 아아……."

최형섭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의 무릎이 꺾이며 피고인석 의자 아래로 문드러지듯 주저앉았다.

"재판장님!"

서은우 검사가 쐐기를 박았다.

"피고인 최형섭은 자신의 의료 과실을 은폐하기 위해 미승인 약물을 무단 투여하여 환자를 살해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과실치사가 아닌,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입니다! 지금 즉시 피고인을 현행범으로 긴급 체포할 것을 청구합니다!"

판사의 의사봉이 법대를 무겁게 두드렸다. 세 번의 둔탁한 타격음이 최형섭의 의학적 사망 선고처럼 울려 퍼졌다.

"피고인 최형섭에 대한 살인 및 증거인멸 혐의를 인정하여, 본 법정에서 긴급 체포를 허가합니다. 아울러 백강현 법의관에 대한 행정 영장은 그 절차적 정당성과 물증의 신빙성이 입증되었으므로 즉각 기각합니다."

법정 뒤편에 대기하고 있던 경위들이 최형섭에게 다가갔다. 차갑게 빛나는 금속 수갑이 그의 손목을 사정없이 조여드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이건 음모야! 한지태 부원장님이…… 병원에서 다 책임져 준다고 하셨단 말입니다! 나한테 이러면 안 돼!"

최형섭이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지만, 사법의 손길은 단호했다. 송우석 변호사는 이미 서류 가방을 챙겨 시선을 피한 뒤였다. 완벽한 메디컬 팩트의 지옥 속에서, 그들이 설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폭풍 같은 공판이 끝나고, 소란스러운 법정 안에서 강현은 조용히 메스를 쥐었던 손을 내렸다. 가슴의 통증은 여전했지만, 망자의 억울한 숨결이 아주 조금은 가벼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법정 밖 차가운 복도로 걸어 나왔을 때였다.

수사관들에게 양팔을 붙잡힌 채 호송되던 최형섭이 강현의 앞을 지나치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광기에 젖은 눈동자가 강현을 응시했다.

최형섭이 강현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오직 강현에게만 들릴 만큼 낮고 섬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백강현…… 네가 이긴 것 같지?"

강현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했다.

"착각하지 마라. 한지태 부원장은 꼬리 하나 잘린 걸로 멈출 사람이 아니야. 이제 그 사람은…… 네가 가장 아끼는 진짜 목숨을 앗아갈 거다. 네 주변의 살아있는 것들부터 차례대로 말이지."

최형섭의 일그러진 입꼬리가 기괴한 미소를 그렸다. 경위들이 그를 거칠게 끌고 가며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순간까지도, 그 섬뜩한 웃음소리는 복도의 차가운 벽면에 부딪쳐 끈질기게 맴돌았다.

강현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주머니 속의 손을 꽉 쥐었다.

불길한 예감이 그의 등줄기를 타고 서늘하게 흘러내렸다.

귀를 찢는 듯한 이명이 고막을 타고 뇌척수액까지 흘러드는 감각에 강현은 눈을 감았다.

허파 꽈리마다 모래알이 가득 차오른 것처럼 숨이 가빴다. 최형섭의 육체가 겪었던 심정지 직전의 고통이, 부검 대장의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신경 마비 증상이 뒤늦게 그의 전신을 헤집고 있었다. 손끝이 굳어 가며 의지와 상관없이 미세하게 떨렸다.

"백 선생!"

법정 문을 나선 서은우가 서류 가방을 품에 안은 채 다급히 다가왔다. 그녀의 구두 굽 소리가 불안정한 박자로 복도를 울렸다. 강현의 파리하게 질린 안색과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발견한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얼굴색이 왜 이래요? 어디 아픈 겁니까? 당장 응급실로……."

"오지 마십시오."

강현은 벽을 짚은 손에 힘을 주며 그녀의 접근을 거부했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그의 몸짓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단호했다. 타인에게 자신의 약점을 보이는 것도, 누군가에게 빚을 지는 것도 그의 생리에는 맞지 않았다. 죽은 자들의 고통은 오롯이 제 몫이어야 했다.

"단순한 이정표적 피로일 뿐입니다. 검사님은 안으로 들어가 잔여 피의자 호송 절차나 확인하시죠."

"하지만……."

서은우가 입술을 깨물며 손을 뻗으려던 찰나, 둔탁한 발소리와 함께 거친 손길이 강현의 어깨를 단단히 지탱했다.

"에이, 검사님! 우리 백 선생 고집 아시면서 왜 이러실까."

어느새 대기실에서 나와 상황을 살피던 오덕팔이었다. 그는 큼지막한 몸집으로 서은우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가로막으며, 강현의 겨드랑이 사이로 억센 팔을 밀어 넣었다.

"공판 한 번 치르고 나면 기가 쏙 빠져서 이 지랄병이 도지는 양반입니다. 내가 알아서 모실 테니까, 검사님은 그 잘난 서류 정리나 깔끔하게 끝내 주쇼. 가자고, 백 선생."

덕팔은 강현이 반발할 틈도 주지 않고 그를 반쯤 부축하다시피 하여 엘리베이터 방향으로 이끌었다. 강현은 그의 손을 뿌리치려 근육에 힘을 주었지만, 이내 손가락 끝부터 시작된 마비 감각이 어깨관절까지 타고 올라와 스르륵 힘이 풀렸다. 결국 덕팔의 단단한 어깨에 체중을 실을 수밖에 없었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 사방이 거울로 둘러싸인 밀폐된 공간에서 강현의 거친 숨소리만이 벽면을 타고 반사되었다.

덕팔은 말없이 품 안에서 낡은 보온병을 꺼내 뚜껑을 돌렸다. 달콤하면서도 알싸한 향이 좁은 공간 안으로 퍼져 나갔다.

"마셔 둬요. 아주 찐하게 탔으니까."

덕팔이 건넨 컵에는 따뜻한 꿀물이 담겨 있었다. 강현은 굳어 가는 손으로 겨우 컵을 받아 쥐었다.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스며들자, 비로소 굳어 가던 미세혈관들이 조금씩 이완되는 느낌이 들었다.

덕팔은 강현의 옆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강현의 낡은 가운 주머니, 그 깊숙한 곳에 숨겨진 비밀을 향하고 있었다. 며칠 전 강현의 서랍 깊은 곳에서 발견했던, 라벨이 뜯겨 나간 심장 조절 신약의 빈 용기들이 덕팔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저 남자가 제 수명을 깎아 먹으며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덕팔은 어렴풋이 짐작하면서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곁을 지키는 것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의리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최형섭이 마지막에 한 말…… 신경 쓰이지 않소?"

덕팔이 넌지시 물었다. 엘리베이터의 층수 표시판이 지하 2층을 가리키며 붉은 빛을 토해냈다.

"한지태가 이제 살아있는 사람들 목숨을 건드릴 거라니. 그 새끼, 완전히 미친놈처럼 짖어대던데."

강현은 꿀물을 한 모금 삼키며 타들어 가는 식도를 진정시켰다.

"궁지에 몰린 사냥개가 짖는 비명일 뿐입니다. 신경 쓸 가치도 없습니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강현의 심장은 기분 나쁜 불협화음을 내며 요동치고 있었다. 최형섭의 눈빛은 단순한 허세가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거미줄의 실 한 가닥이 끊어졌을 때, 거미집 깊은 곳에 숨어 있는 포식자가 보낼 법한 차가운 살의였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주차장의 서늘한 공기가 두 사람의 뺨을 스쳤다.

강현이 덕팔의 부축을 거부하고 스스로 걸음을 내딛으려던 그때, 그의 양복 주머니 안에서 날카로운 진동음이 울렸다.

징-. 징-.

강현은 걸음을 멈추고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액정 화면에는 발신번호 제한 표시와 함께 하나의 멀티미디어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손가락 끝의 감각을 억지로 깨우며 스크린을 터치했다.

화면에 재생된 것은 10초짜리 짧은 동영상이었다.

영상의 첫 화면을 본 강현의 호흡이 완전히 멎었다.

배경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제3부검실이었다. 평소 시신 냄새를 지우고 강현의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켜두었던 온열기들이 붉은 광륜처럼 어둠 속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온열기 바로 앞, 차가운 부검대 옆에 낯익은 물건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강현이 명성대학병원에서 쫓겨난 이후에도 유일하게 치료를 지원하며 보살펴 온, 과거 의료 사고 피해 유가족이자 이번 한지태의 불법 장기이식 혐의를 입증해 줄 핵심 증인의 휠체어였다.

하지만 휠체어 위는 텅 비어 있었다.

대신 가죽 시트 위에는 정체 모를 검붉은 액체가 기괴한 웅덩이를 이루며 바닥으로 뚝, 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핏빛 웅덩이 한가운데, 젖어 든 채 놓여 있는 하얀 종이 한 장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명성대학병원 기획조정실장 한지태]

카메라가 그 명함을 클로즈업한 순간, 영상은 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뚝 끊겼다.

"백 선생? 왜 그래? 뭔데?"

덕팔이 강현의 굳어 버린 얼굴을 보며 다급하게 물었다.

강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휴대전화를 쥔 그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동강 날 것처럼 강한 힘으로 조여들었다.

이것은 경고가 아니었다. 이미 시작된 사냥의 신호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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