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취조실 벽이 어둠에 물들며, 신선회의 절대군주 강태헌의 검은 실루엣이 가상 홀로그램 통신을 통해 시우의 앞에 기괴하게 나타났다.

지지직거리는 붉은 광선이 허공을 찢어발기며 사내의 형상을 빚어냈다. 빳빳하게 풀이 죽지 않은 슈트 깃,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빗어 넘긴 머리칼. 가상으로 투사된 형체임에도 불구하고 사방을 압도하는 비린내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피 냄새가 아니었다. 법정의 판결문 뒤에 숨겨진, 합법적 도살자들의 썩은 아취였다.

바닥에 쓰러진 연희는 턱을 덜덜 떨며 기어갔다. 그녀의 손끝목바가 강태헌의 구두 끝자락을 향해 뻗었으나,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살려 주십시오, 검사님…… 저놈이, 저놈이 제 장부를……."

강태헌은 연희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그의 날카로운 안광은 오직 한 곳, 백시우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백시우 경위."

스피커 진동판이 찢어질 듯한 기계음이 고막을 긁었다.

"제법이군. 율정의 가장 쓸모 있는 사냥개를 이토록 처참하게 망가뜨려 놓다니."

시우는 눈을 감지 않았다. 눈꺼풀을 깜빡이는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 시선은 강태헌의 미간을 꿰뚫고 있었다. 검게 물든 그의 우안이 붉은 홀로그램 빛을 받아 기괴하게 번뜩였다.

"네놈이 내 동생을 찢은 진범이군."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취조실 바닥을 굴렀다. 분노도, 끓어오르는 증오도 없었다. 오직 대상을 해체하기 직전의 도살자가 내뱉는 건조한 확신뿐이었다.

강태헌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기괴하게 일렁이는 홀로그램 속에서 그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찢었다라. 단어 선택이 다소 야만적이군. 합법적인 용도 폐기였다고 해 두지. 하지만 그것보다 더 흥미로운 건 네 상태야."

그가 시우의 검게 타들어 간 오른손을 가리켰다. 손목을 넘어 전완근까지 뻗어 나간 검은 괴화의 흔적.

"그 장부를 열 때마다 영혼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기분은 어떤가? 이미 네 머릿속에서 동생의 목소리는 사라졌겠지? 얼굴은? 그 아이가 좋아하던 색깔은 기억하나?"

강태헌의 냉소가 귓전을 때렸다.

"네놈은 복수를 원하는 게 아니다. 그저 뇌가 망가져 살의에 굶주린 괴물이 되어갈 뿐이지. 네 동생의 이름조차 가물거리는 껍데기 주제에, 감히 누구를 단죄하겠다는 건가?"

시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뇌리를 스치는 설아의 얼굴이 흐릿한 안개 뒤로 숨는 느낌이 들었다. 기억의 단편들이 모래알처럼 흘러내렸다. 설아가 웃을 때 보였던 보조개의 위치가 어디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이유는 잊어도 목적은 남는다. 뇌 뒤편에서 폭발하는 살의의 도파민이 시우의 심장을 강제로 박동시켰다.

그 순간, 취조실의 두꺼운 철제 문이 안쪽으로 거대하게 휘어졌다.

쿵!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쇠못이 튕겨 나갔다.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신선회의 하급 괴이들이 문을 부수기 시작한 것이었다.

"시간이 다 되었군."

강태헌의 홀로그램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기다리고 있으마, 백시우. 네가 완전히 괴물이 되어 내 앞에 엎드릴 그날을."

치익, 소리와 함께 붉은 광선이 꺼졌다. 취조실은 다시 암흑 속에 잠겼다.

"시우 씨! 문이 무너져요!"

한서윤이 권총을 쥔 채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그녀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식은땀이 뺨을 타고 턱끝에 맺혔다.

시우는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글록 17의 차가운 감촉을 느끼며 방아쇠 울에 손가락을 걸려 했다.

체온 30.1도.

그 순간, 입안 가득 얼음 조각을 씹은 듯한 극도의 한기가 휘몰아쳤다.

손가락 끝이 굳어 있었다. 검푸르게 변한 손끝은 감각이 완전히 거세되어 마네킹의 플라스틱 손가락처럼 빳빳하게 굳어 버렸다. 미세한 근육의 수축조차 불가능했다. 방아쇠를 당기기는커녕, 총을 집어 올리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장부를 첫 활성화했을 때 보았던 괴화 1단계의 전조 증상. 그것이 이 결정적인 순간에 시우의 육체를 완벽한 마비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쿵!

철제 문이 찢어지며 괴이의 거대한 앞발이 틈새로 들이쳤다. 썩은 가죽 냄새가 진동했다.

"젠장, 비켜요!"

한서윤이 시우의 앞을 가로막으며 총신을 겨눴다.

탕! 탕!

두 발의 총성이 취조실 내부를 잘게 쪼갰다. 괴이의 비명이 울려 퍼졌으나, 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기세를 멈추기엔 역부족이었다.

시우는 마비된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강하게 내리찍었다. 감각이 죽어가는 다리에 억지로 자극을 주며, 그는 한서윤의 덜덜 떨리는 어깨를 밀쳐냈다.

"뒤로 빠져."

"하지만 손이……!"

"이것들에겐 총알이 통하지 않아."

시우는 입술을 깨물어 피를 흘렸다. 비린 혈향이 혀끝을 적시자, 뇌 속의 살의가 다시 한번 마비를 억누르며 신경계통을 강제로 연결했다. 극도의 흥분 상태가 가져온 일시적인 기적이었다.

시우는 왼손으로 취조실 구석의 고압 가스 배관 밸브를 힘껏 돌렸다. 부식된 금속이 비명을 지르며 열렸고, 자욱한 질소 가스가 뿜어져 나왔다.

"서윤 씨, 불을 켜."

한서윤은 망설임 없이 벽면의 수동 비상 발전기 레버를 올렸다.

스파크가 튀었다.

퍼엉!

밀폐된 공간을 가득 채운 가스가 스파크와 만나 소규모 분진 폭발을 일으켰다. 거대한 화염이 찢어진 문틈으로 밀려들던 괴이들을 집어삼켰다. 비명과 함께 타들어 가는 고기 냄새가 진동했다.

시우는 그 아수라장 속에서 흐느끼는 연희의 멱살을 움켜쥐고 한서윤을 이끌며 배기구를 향해 몸을 던졌다.

* * *

무도구의 후미진 골목, 덧창이 굳게 닫힌 검은 건물 지하.

사설 부검의이자 블랙마켓 정보상인 우진철의 아지트는 포르말린 냄새와 녹슨 철 냄새가 섞여 있었다.

"미쳤어? 미친 게 분명해."

우진철이 담배를 입에 문 채 수술용 메스로 시우의 검게 변한 전완근을 긁어내며 투덜댔다. 칼날이 살을 파고들었지만, 시우의 눈동자에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고통을 느끼는 신경마저 괴화에 잠식당했기 때문이었다.

"경찰서 취조실을 날려 먹고 여기까지 기어들어 와? 그것도 강력계 형사 년을 꼬리에 달고?"

구석의 소파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고 있는 한서윤을 힐끗 보며 우진철이 혀를 찼다.

"그녀는 쓸모가 있어."

시우가 건조하게 대답했다. 그의 손끝은 여전히 검푸른 빛을 띠며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쓸모? 네 목숨줄이 먼저 끊어지게 생겼는데 쓸모를 따져? 체온이 30도 밑으로 떨어지면 네 심장도 얼어붙어. 장부를 쓸 때마다 영혼을 팔아넘기는 짓거리는 이제 그만두라고."

우진철이 메스를 쟁반에 툭 던지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신선회를 일격에 소탕할 수 있는 무기가 필요해. 율정의 본거지로 들어간다."

시우의 말에 우진철이 담배 연기를 길게 뿜었다. 그는 잠시 시우를 응시하다가, 한숨을 쉬며 작업대 아래의 무거운 철제 궤짝을 끌어올렸다.

철커덕.

잠금장치가 풀리며 궤짝이 열리자, 그 안에서 푸른빛을 띠는 특수 탄환들과 기괴한 문양이 새겨진 수류탄 형태의 마정 섬광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수 성분을 농축해 은 도금 탄두에 주입한 물건이야. 신선회 요괴 놈들의 가죽도 이걸 맞으면 두부처럼 으깨지지. 마정 섬광탄은 놈들의 시야를 멀게 할 뿐만 아니라 마력을 순간적으로 교란해."

우진철이 탄창에 탄환을 채워 넣으며 툴툴거렸다.

"죽지 마라, 백시우. 네가 죽으면 내 탈출 자금은 어디서 구하냐? 무진시의 이 개 같은 안개 구덩이에서 벗어나려면 네가 살아서 신선회의 금고를 털어줘야 해."

말은 험하게 뱉었지만, 그의 손길은 정교하고 빨랐다. 시우의 마비된 오른손에 딱 맞는 특수 보조 지지대를 장착해 주며 총을 쥘 수 있도록 고정해 주기까지 했다.

시우는 품 안에서 붉은 피가 얼룩진 물건 하나를 꺼내 작업대 위에 올려놓았다.

공장지대 요괴의 주머니에서 획득했던, 정교하게 가공된 정화 마스크였다.

"이거, 어디서 보던 물건 아닌가?"

우진철이 돋보기를 눈에 대고 마스크의 필터 부분을 살폈다. 이내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율정 로펌이군."

"확실한가?"

"필터 안쪽에 각인된 미세한 문양을 봐. 율정의 로고야. 신선회 직속 로펌 실무진들이 밤안개 속에서 사냥을 참관할 때 착용하는 VIP 전용 장비지. 시중에선 절대로 구할 수 없는 물건이야."

배후는 명확했다. 여동생 설아를 찢어발긴 도살자의 뒤에 율정이 있었고, 그 율정의 꼭대기에는 강태헌이 앉아 있었다.

시우는 목에 걸려 있던 설아의 유품, 은색 펜던트를 풀었다.

펜던트 뒷면에 정밀하게 음각된 의문의 숫자 나열.

[37.4982, 126.9274 - 0x7F4A]

"이 좌표를 해독해."

우진철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모니터를 응시했다. 수십 개의 지도 데이터와 무진시의 지하 설계도가 교차하며 깜빡였다.

"단순한 지리적 위도가 아니야."

우진철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무진 타워 율정 로펌 회장실. 그 최내부에 존재하는 생체 인식 금고의 시스템 식별자다. 이 숫자가 없으면 금고의 위치조차 찾을 수 없고, 접근하는 순간 고압 전류와 독가스가 방출되게 설계되어 있어."

"설아가 이 좌표를 가지고 있었다는 건……."

"네 동생은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었어. 율정의 비밀 금고를 열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열쇠를 쥐고 탈출하려 했던 거지. 그래서 놈들이 그토록 잔혹하게 도살한 거고."

시우의 심장 부근이 찌릿하게 아려왔다. 인간의 온기를 잃어가는 가슴속에서, 설아의 마지막 얼굴이 흐릿한 잔상으로 일렁였다.

'오빠, 꼭 보여줄게. 무진시의 안개가 다 걷힌 하늘을.'

그녀가 남긴 마지막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시우는 무기 가방을 열어젖혔다.

철컥, 철커덕.

어둠 속에서 소총의 노리쇠가 후퇴했다가 전진하는 경쾌한 마찰음이 울렸다. 은빛 탄환들이 탄창으로 밀려 들어가는 금속성 소리가 부검실의 정적을 깨뜨렸다.

방어망을 치고 숨어 있던 사냥감들의 목덜미를 겨눌 무기들이 하나씩 정비되었다. 공권력의 비호 뒤에 숨어 법을 유희로 삼던 괴이들을 향한, 가장 사적이고 철저한 처형 준비였다.

한서윤이 자리에서 일어나 시우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눈빛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법의 한계를 깨달은 자의 서늘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가요."

그녀가 권총을 고쳐 쥐었다.

시우는 왼손으로 장비를 챙겨 어깨에멨다.

"사냥을 시작하지."

* * *

밤 23:45. 무진 타워 지하 4층 주차장.

두꺼운 밤안개가 환기구를 타고 들어와 지하 공간을 자욱하게 채우고 있었다. 시우와 우진철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율정 로펌 전용 엘리베이터 입구로 접근했다.

주변의 열 감지 센서와 CCTV 화면을 우진철이 해킹한 단말기로 무력화시키는 순간이었다.

우르릉.

하늘이 무너질 듯한 천둥소리가 지하 주차장 전체를 흔들었다.

단순한 천둥이 아니었다.

지상에서부터 시작된 기이한 폭우가 지하 배수구를 타고 피비린내를 풍기며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붉은빛이 감도는 빗물이 주차장 바닥을 적셨다.

지지직!

우진철이 쥐고 있던 해킹 단말기의 화면이 붉은 노이즈로 가득 차더니 이내 꺼져 버렸다.

"뭐야? 전산 시스템이 완전히 마비됐어! 외부 신호가 차단된다!"

우진철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무진 타워의 비상 전등마저 차례로 점멸하기 시작했다. 통신 기기의 안테나는 단 한 칸도 뜨지 않았다. 무진시 전체를 집어삼키기 시작한 피비린내 나는 폭우가, 도시의 모든 전자적 신경망을 완벽하게 마비시켜 자르고 있었다.

안개 너머, 엘리베이터의 문이 스르륵 열렸다.

어둠뿐인 엘리베이터 통로 내부에서, 수십 개의 붉은 안광이 일제히 번뜩이며 시우 일행을 향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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