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빗물이 무진 타워 지하 4층의 콘크리트 바닥을 적셨다. 하수구에서 역류한 피비린내가 자욱한 밤안개와 섞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통신 차단. 단말기 화면은 붉은 노이즈만 뿜어낼 뿐이다.
철컥, 스르륵.
엘리베이터의 강철 문이 열리자마자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붉은 인광이 일제히 켜졌다. 그것은 생명체의 눈이 아니었다. 안개 속에서 정제된 굶주림 그 자체였다.
"시우 씨, 뒤로 빠져!"
우진철이 가죽 가방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가 사방이 막힌 주차장 벽면에 부딪혀 거칠게 울렸다.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첫 번째 형체는 인간의 골격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한 괴이였다. 맞춤형 정장을 입고 있었으나, 턱뼈가 양갈래로 찢어지며 점액질을 흘렸다. 율정 로펌의 외곽 경비를 담당하는 엘리트 가드들이었다.
백시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놈들의 목덜미에 고정되어 있었다. 감정이 거세된 아파티의 뇌에 오직 하나, 포식자의 살의만이 도파민을 강제로 주입하기 시작했다.
턱뼈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방에서 덮쳐오는 기괴한 정적.
시우는 품에서 검은색 원통형 금속을 꺼내 바닥으로 던졌다.
마정 섬광탄.
쾅!
지하 주차장이 순간적으로 백색의 안개와 함께 극도의 고주파음으로 가득 찼다. 단순한 빛이 아니었다. 괴이들의 마력을 일시적으로 교란하는 은빛 파동이 공기를 찢었다.
"크아아악!"
"눈이, 눈이 안 보여!"
앞열에 서 있던 가드들이 머리를 감싸 쥐고 바닥을 뒹굴었다. 율정이 자랑하는 정예 괴이들의 진형이 단 한 방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시우는 소총의 개머리판을 고쳐 잡았다. 조준경 너머로 비틀거리는 사냥감들의 머리가 선명하게 들어왔다.
손가락을 방아쇠에 걸었다.
그 순간, 손끝이 차갑게 굳어 들어갔다.
'시작됐군.'
입안 가득 얼음 조각을 씹은 듯한 한기가 들이쳤다. 혀끝이 마비되어 침조차 삼킬 수 없었다. 감각의 상실은 순식간에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검푸른 핏줄이 손등 위로 툭툭 불거지며 손가락 마디마디가 석고상처럼 단단하게 굳어갔다.
괴화 1단계의 부작용.
장부를 활성화한 대가가 육체를 갉아먹는 속도가 예상보다 빨랐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총의 무게가 천근만근으로 느껴지며 조준선이 흔들렸다.
"시우 씨! 총구 떨어져!"
우진철이 비명을 지르며 단축형 산탄총을 치켜들었다.
타앙!
벽을 타고 기어오르던 가드 한 놈의 상체가 핏방울이 되어 사방으로 비산했다. 붉은 파편들이 백색 안개 속에서 정교하게 가공된 보석처럼 흩뿌려졌다.
시우는 억지로 이성의 끈을 쥐어짜며 오른손을 왼손으로 움켜쥐었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힘을 주자, 멈췄던 혈액이 아주 미세하게 돌기 시작했다.
그는 비틀거리는 가드들의 목을 향해 단검을 뽑아 들고 돌진했다.
서늘한 쇠붙이가 가드의 가슴을 관통했다. 검은 피가 뿜어져 나와 시우의 뺨을 적셨지만, 체온이 극도로 떨어진 그에게는 그 피마저 미지근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순식간에 대여섯 명의 가드들이 바닥에 쓰러져 버둥댔다.
시우는 바닥에 고꾸라진 가드 한 놈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놈의 입 주위에 걸려 있는 기이하게 생긴 마스크가 눈에 들어왔다.
가죽과 특수 필터로 조잡하게 기워진, 그러나 지극히 기능적인 백색 안개 필터용 정화 마스크.
시우는 그것을 뜯어내 우진철에게 던졌다.
"이거."
우진철이 마스크를 받아들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손가락이 마스크 필터 표면에 새겨진 작은 음각 문양을 훑었다.
"……율정의 낙인이군. 그 공장지대에서 날뛰던 요괴 놈 주머니에서 나온 그것과 완전히 일치해. 이 마스크는 율정 로펌 실무진들만 독점 생산해서 착용하는 VIP 전용 장비야. 배후는 확실해졌네."
우진철이 마스크를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이빨을 드러냈다.
"연희 그 독사 같은 년, 지들이 대단한 신선이라도 된 줄 알고 우리를 가축 취급하더니만. 덜미가 잡혔어."
시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이미 엘리베이터 내부의 제어반을 향해 있었다.
"시간이 없다. 올라간다."
*
지하 4층에서 회장실이 위치한 최상층 33층까지는 단 20초가 걸렸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대리석으로 뒤덮인 광활한 로비가 나타났다. 천장에는 거대한 샹들리에가 불을 밝히고 있었으나, 감도는 공기는 무덤 속처럼 차가웠다.
회장실의 거대한 이중 목제 문 앞에는 최첨단 생체 인식 보안 장치가 붉은빛을 발하고 있었다.
우진철이 휴대용 단말기를 보안 패널에 연결하려 했지만, 화면에는 곧바로 '접근 거부'라는 경고등이 떴다.
"제길, 이건 외부 네트워크랑 완전히 차단된 단독 서보 시스템이야. 해킹 툴로는 몇 시간은 걸려. 홍채랑 지문 정보가 없으면 절대로 안 열려."
우진철이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냈다.
시우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목에 걸려 있던 은빛 펜던트가 가볍게 흔들렸다. 설아가 남긴 유일한 유품.
시우는 펜던트의 뒷면을 손톱 끝으로 강하게 눌렀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펜던트의 뚜껑이 열리며, 내부에 극도로 정밀하게 각인된 12자리의 숫자 나열이 드러났다.
"그게 뭐야?"
우진철이 물었다.
"설아가 남긴 좌표."
시우는 망설임 없이 보안 패널의 키패드를 눌렀다.
지문 인식기 아래의 수동 입력창에 12자리의 숫자를 차례대로 입력했다.
9. 4. 1. 2. 0. 8. 1. 1. 0. 3. 0. 7.
마지막 숫자를 누르는 순간, 붉은빛이던 보안 패널이 일제히 청록색으로 변했다.
띠리링.
[관리자 권한 우회 완료. 시스템을 개방합니다.]
기계적인 여성의 안내음과 함께 회장실의 거대한 문이 부드럽게 양옆으로 갈라졌다.
우진철의 입이 떡 벌어졌다.
"미친……. 설아가 어떻게 이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던 거지?"
"율정의 비밀 금고 좌표이자, 신선회의 은밀한 사냥 명부 좌표야."
시우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그는 그저 기계처럼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책상 뒤편, 거대한 동양화가 그려진 병풍을 젖히자 벽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강철 금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한 번 펜던트의 숫자를 입력하자, 무거운 합금 문이 유압식 실린더 소리를 내며 열렸다.
금고 내부는 의외로 단출했다.
몇 권의 가죽 장부와 함께, 푸른빛을 내뿜는 단 하나의 USB 비디오 칩이 거치대 위에 올려져 있었다.
시우는 장부를 펼쳤다.
수많은 인간들의 이름, 나이, 그리고 그들이 '도살'당한 날짜와 배정된 신선회 회원들의 이름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실황 사냥 명부였다. 법의 비호 아래에서 벌어진 합법적인 도살의 기록들.
그리고 시우는 USB 비디오 칩을 집어 들어 책상 위에 있는 노트북에 연결했다.
화면이 켜졌다.
화질은 기괴할 정도로 선명했다. 화면 속 장소는 낯익은 폐공장이었다.
묶여 있는 백설아.
그리고 그녀의 앞에 서서 미소를 짓고 있는 사내. 무진지검의 스타 검사이자 신선회의 지배자, 강태헌이었다.
"이 아이의 피가 밤안개의 농도를 바꿀 것이다. 도시의 경계가 무너지고, 우리는 영원한 지배자가 된다."
강태헌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그는 정교하게 제작된 의식용 단도를 들고 설아의 목덜미를 겨누고 있었다.
설아는 울지 않았다. 그녀는 카메라를, 아니, 미래의 오빠를 바라보듯 정면을 응시하며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
'오빠, 울지 마.'
소리 없는 목소리가 시우의 심장을 관통했다.
쾅!
시우의 주먹이 책상을 내리쳤다. 대리석 상판에 미세한 균열이 가며 그의 손가락 끝에서 검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그러나 그 통증조차 뇌에 도달하지 않았다.
단지 눈앞이 붉게 물들 뿐이었다. 살의. 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여야 한다는 원초적인 충동이 그의 전두엽을 마비시켰다.
"이게... 설아를 죽인 진짜 이유였어."
우진철이 노트북 화면을 보며 이빨을 갈았다.
"이 미친 요괴 새끼들……. 단순한 살인이 아니었어. 도시 전체를 지들의 사육장으로 만들려고 제물로 바친 거야."
*
바로 그 순간.
유리창 너머의 밤안개가 비정상적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회장실의 튼튼한 방화문이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날아왔다. 부서진 문짝이 벽면에 처박히며 엄청난 굉음과 먼지를 일으켰다.
"콜록! 뭐야?!"
우진철이 기침을 하며 산탄총을 겨눴다.
먼지 안개 너머에서 걸어 나오는 형체는 이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 있었다.
박연희.
율정 로펌의 대표 변호사이자 우아한 자태를 뽐내던 그녀의 육체는 흉포한 상급 요괴의 형상으로 뒤틀려 있었다. 가죽은 질긴 가죽처럼 변해 검은 비늘로 뒤덮였고, 척추뼈는 살을 뚫고 나와 등 뒤로 뾰족하게 돋아나 있었다.
"내... 내 금고를……."
그녀의 목소리는 두 명의 남녀가 동시에 말하는 듯한 기괴한 이중 협화음으로 울렸다.
"신선회에서 버림받은 쓰레기가 감히 어딜 넘봐!"
연희의 다리가 바닥을 박찼다. 그 속도는 인간의 눈으로 쫓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
"시우 씨, 피해!"
우진철이 몸을 날려 시우를 밀쳐냈다.
서걱!
기괴한 파열음과 함께 붉은 선혈이 허공에 호선을 그렸다.
"끄아아악!"
우진철의 비명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연희의 날카로운 손톱이 우진철의 가슴팍을 사선으로 완전히 찢어발겼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하얀 갈비뼈가 드러난 채, 우진철은 벽면에 거칠게 부딪힌 뒤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진철!"
시우가 굳어버린 왼손으로 단검을 쥐고 연희를 향해 휘둘렀다.
깡!
강철 단검이 그녀의 피부에 닿자 마치 금속끼리 부딪치는 듯한 불꽃이 튀었다. 연희는 비웃듯 시우의 가슴을 걷어찼다.
퍽!
강력한 충격과 함께 시우의 몸이 뒤로 날아가 회장실 유리창에 부딪혔다. 두꺼운 강화유리에 거미줄 같은 금이 갔다. 입안에서 비릿한 피가 역류했다.
"인간의 피를 이어받은 잡종 녀석들이 감히 신선의 영역을 탐해?"
연희가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시우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우진철의 피가 바닥의 카펫을 검게 물들였다.
우진철은 바닥에 쓰러진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시우의 시야가 흐려졌다.
그의 품 안에서 가죽 표지의 '잔혹의 장부'가 스스로 진동하며 차가운 냉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책장이 스스로 넘어가며, 새로운 거래를 제안하는 붉은 글씨가 허공에 떠올랐다.
[계약 체결을 원하는가?] [상급 요괴의 살의를 기록하는 대가는 무거울 것이다.] [남은 인간의 기억 중 가장 소중한 것을 회수한다.]
시우는 쓰러진 우진철을 바라보았다. 우진철의 흐려져 가는 눈동자가 시우를 향하고 있었다.
장부를 활성화해야 한다. 저 괴물을 죽이기 위해서는 더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기억 따위.'
시우는 마음속으로 장부의 계약서에 피 묻은 손장을 찍었다.
그 순간, 그의 뇌리를 강타하는 극심한 두통과 함께 머릿속의 무언가가 거칠게 뜯겨 나가는 감각이 들었다.
그것은 소리였다.
늘 자신을 부르던,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상냥했던 한 소녀의 목소리.
'오빠…….'
그 마지막 목소리의 주파수가, 그녀의 음색이, 머릿속에서 모자이크처럼 깨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설아가 어떤 목소리로 자신을 불렀는지, 그 음성이 기억나지 않았다.
완벽한 무(無)의 침묵이 그의 뇌를 지배했다.
시우의 눈동자에서 마지막 남아 있던 인간의 온기가 완전히 꺼지고, 오직 차갑고 푸른 괴이의 안광만이 번뜩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