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연희의 입술이 아주 가늘게 호선을 그렸다.

“네 여동생, 자지러지게 비명을 지를 때 참 고왔는데. 오빠를 부르며 울부짖는 그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돌아.”

귓가에 닿은 숨결은 체온을 지니고 있었으나, 전해지는 문장은 얼음 송곳과 같았다.

시우의 안구가 순식간에 암흑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흰자위의 경계선이 무너지며 칠흑 같은 어둠이 홍채를 삼켰다. 이성의 임계점이 끊어지는 소리가 고막 안쪽에서 진동했다.

동시에 폐부 깊은 곳에서부터 얼음 같은 한기가 치밀었다.

입안 가득 차오르는 비린 쇠맛과 함께 손끝이 급격하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손가락 끝마디의 모세혈관이 수축하며 피부가 검푸르게 죽어갔다. 괴화 1단계의 전조 증상이었다.

체온 31.2도.

상실된 온기는 손목을 타고 올라와 팔꿈치까지 마비시켰다. 철제 책상 위에 놓인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관절을 굽히려 할 때마다 유리가 깨지는 듯한 통증이 신경망을 타고 뇌로 전달되었다.

시우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감정이 거세된 아파티(Apathy)의 얼굴 위로, 오직 가학적인 살의에 반응하는 뇌의 도파민만이 비정상적인 열기로 치솟았다.

마비된 오른손을 억지로 움직였다. 가죽 코트 안감 안쪽, 서늘한 감촉의 가죽 표지를 지닌 책이 손날에 닿았다.

‘잔혹의 장부.’

책장을 넘기는 손길에는 감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기계적인 인과율만이 작동할 뿐이었다.

스르륵.

취조실의 공기가 순식간에 고정되었다. 형광등의 미세한 떨림조차 멈춘 정적 속에서, 시우가 장부의 보이지 않는 페이지를 넘겼다.

[보유 사념 자산: 1,200 포인트] [대상: 연희] [소모 자산: 500 포인트 — 심리 치명상 체결 및 범죄 사념 실시간 증명]

머릿속에서 무언가 떨어져 나가는 감각이 일었다. 여동생 설아가 초등학교 졸업식 날 제 손으로 직접 접어 주었던 종이비행기의 색깔, 그 따스했던 노란색의 기억이 안개처럼 분해되어 장부의 아가리 속으로 사라졌다.

그 대가로, 연희의 머리 위로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 내려앉았다.

“박연희. 율정 로펌 파트너 변호사.”

시우의 목소리는 낮고 평평했다. 쇠가죽을 긁는 듯한 건조함이 서려 있었다.

“2018년 4월 12일, 무진시 청공구 자택에서 발생한 여대생 실종 사건. 당시 당신은 피의자인 대기업 서자의 알리바이를 조작했지. 알리바이를 증명한 것은 가짜 안개 필터 유통 장부였고.”

연희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굳었다.

“2021년 9월 3일, 무도구 하수처리장 사체 유기 사건. 사체의 위장 속에서 검출된 마취제 성분은 오직 율정 로펌의 전용 의료 재단에서만 처방할 수 있는 특수 약물이었다.”

시우는 주머니에서 조심스럽게 물건 하나를 꺼냈다. 손가락 끝의 감각이 죽어 있어 두 손가락으로 간신히 집어 올린 물건이었다.

탁.

철제 테이블 위로 떨어진 것은 백색의 필터가 달린 정화 마스크였다.

“무진시 공장지대에서 사살된 요괴의 주머니에서 나온 물건이다. 특수 가공된 백색 안개 필터용 정화 마스크.”

시우가 마스크의 안쪽 이음새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거기에는 육안으로 간신히 보일 만큼 미세한 은색 실선으로 율정(律廷)의 문양이 각인되어 있었다.

“이것은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물건이지. 오직 밤안개 속에서 사냥을 즐기는 신선회의 상류층들과, 그들의 뒤처리를 담당하는 율정 로펌의 실무진들만이 독점 생산해 착용하는 VIP 전용 장비다.”

“…….”

“마스크 내부 필터에 잔류한 타액의 DNA 검사 결과가 방금 전 국과수 사설 서버로 전송되었다. 박연희 변호사, 당신의 비서실장인 강민우의 것이더군.”

연희의 턱밑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시선이 테이블 위의 마스크와 시우의 검푸르게 죽어가는 손끝을 번갈아 닿았다.

시우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목걸이 체인에 걸린 은색 펜던트를 꺼내 보였다. 동생 설아가 남긴 마지막 유품이었다.

스틸 재질의 펜던트 뒷면에는 아주 미세한 바늘로 긁어 만든 듯한 숫자들이 정밀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37.498, 126.927 — 0802]

“이 숫자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겠지.”

시우의 눈동자가 연희의 동공 깊숙한 곳을 꿰뚫었다.

“율정 로펌 본관 지하 3층, 생체 인식 밀실 금고의 좌표다. 그리고 뒤의 네 자리는 매달 2일 08시에 갱신되는 신선회의 사냥 명부 데이터베이스 접근 코드.”

“그걸…… 네가 어떻게…….”

연희의 목소리에서 방금 전까지의 가학적인 여유가 씻겨 내려갔다. 그녀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가슴팍이 불규칙하게 오르내렸다. 분당 호흡수 28회. 전형적인 공황 상태의 지표였다.

“장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시우가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당신이 법망 뒤에서 웃으며 은폐해 온 범죄자들의 사념이, 이 장부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으니까.”

장부가 붉은 빛을 뿜어내며 연희의 영혼에 물리적인 압박을 가했다. 그녀의 어깨가 보이지 않는 무게에 짓눌리듯 아래로 꺾였다.

바스락.

연희의 무릎이 꺾였다. 그녀의 세련된 정장 바지가 더러운 취조실 바닥에 닿았다. 철제 의자가 뒤로 밀려나며 요란한 쇳소리를 냈다.

“아악! 흐, 윽……!”

연희는 머리를 감싸 쥐고 바닥을 뒹굴었다. 그녀의 뇌리로 장부가 강제로 주입한 역대 피해자들의 마지막 절망과 공포의 사념들이 쏟아져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사지가 찢겨 나가던 이들의 비명, 안개 속에서 숨이 끊어지며 흘렸던 피의 냄새가 그녀의 감각을 마비시켰다.

“이건 법적 효력이 없어! 일개 형사 주제에…… 이런 조작된 자료 따위로 날 구속할 수 있을 것 같아? 율정의 변호인단이 오면 너희 경찰서 전체를 쓸어버릴 거야!”

연희가 침을 흘리며 바닥에서 발악했다. 그녀의 단정한 머리칼이 땀과 먼지로 뒤엉켜 얼굴에 달라붙었다.

시우는 흘러내리는 침방울을 건조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법적 효력?”

시우가 가볍게 입꼬리를 올렸다. 미소였으나 온기는 전혀 없었다.

“내가 당신을 법정에 세우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나?”

시우가 오른손을 들어 매직 미러를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철컥.

취조실 한쪽 벽면을 채우고 있던 거대한 매직 미러의 불이 켜졌다. 반대편 방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곳에는 강력계 신입 형사 한서윤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삼각대 위에 얹힌 거대한 방송용 카메라와 마이크를 든 사내가 서 있었다.

카메라의 빨간색 녹화 등(Tally Light)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공영방송 무진 24시, 실시간 스트리밍 현장 검증.”

시우의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당신이 흘린 범죄 사실과 신선회의 사냥 일지, 그리고 율정 로펌의 마스크 증거물까지. 전부 실시간 생중계로 무진시 전역에 송출되고 있다. 동시 접속자 수 42만 명.”

“뭐……? 너, 너 미쳤어? 이건 불법 채증이야! 피의 사실 공표죄라고!”

연희가 비명을 지르며 카메라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두꺼운 방음 유리 너머의 카메라는 묵묵히 그녀의 추태를 렌즈에 담아낼 뿐이었다.

“내가 말했을 텐데.”

시우가 바닥에 쓰러진 연희의 머리채를 거칠게 움켜잡아 들어 올렸다. 검푸르게 마비된 손가락이었지만, 괴화의 힘이 더해진 악력은 뼛속을 으스러뜨릴 듯 강했다.

“난 당신을 법정에 세울 생각이 없다.”

연희의 눈동자에 진정한 공포가 서렸다.

그녀는 깨달았다. 법망을 주무르며 살아온 자신들에게 법은 무기였으나, 법을 무시하는 소시오패스 프로파일러 앞에서는 아무런 방패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신선회가 가장 싫어하는게 뭔지 아나?”

시우가 연희의 귓가에 차갑게 속삭였다.

“자신들의 존재가 빛 아래로 드러나는 것. 통제 불가능한 변수가 생기는 것.”

그 순간, 연희의 품속에 있던 스마트폰이 미친 듯이 울려 대기 시작했다. 화면에 표시된 발신인은 ‘율정 로펌 회장실’이었다.

진동 소리가 취조실의 적막을 날카롭게 긁었다.

연희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지 못했다.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꼬리 자르기.

신선회의 지배층들에게 통제력을 잃고 대중 앞에 정체를 드러낸 사냥개는 더 이상 가치가 없었다. 오직 처분 대상일 뿐이었다.

웅성웅성.

취조실 외부 복도에서 불길한 소음이 들려왔다.

철제 문 너머로 무거운 발소리들이 접근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경찰들의 군화 소리가 아니었다. 질척거리고, 뼈마디가 부딪히는 기괴한 마찰음이었다.

신선회가 보낸 청부 요괴들이 경찰서 내부로 진입하고 있었다.

“서윤아, 문 잠가.”

시우가 매직 미러 너머를 향해 차분하게 명령했다.

한서윤은 사색이 된 얼굴로 취조실 안쪽으로 뛰어 들어와 두꺼운 철제 문을 걸어 잠갔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권총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백 경위님, 밖의 공기가…… 이상해요. 밤안개가 경찰서 내부까지 들어오고 있어요.”

환풍구를 통해 검고 눅눅한 안개가 번지기 시작했다. 안개 속에서 고릴라의 울음소리와 흡사한 짐승의 포효가 복도를 울렸다.

연희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분들이 오셨어…… 날 죽이러 오신 거야…….”

시우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오른손은 이제 완전히 검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괴화가 손목을 넘어 전완근까지 잠식해 가고 있었다.

체온 30.1도.

심장이 멈추지 않는 것이 기적일 정도의 저체온이었다. 하지만 시우의 가슴속에서는 여동생을 죽인 진범을 향한 살의의 도파민이 폭발하며 그를 억지로 지탱하고 있었다.

스산한 바람이 취조실 내부를 휩쓸었다.

지지직.

천장의 형광등이 완전히 꺼졌다. 비상 전력조차 작동하지 않는 완전한 암흑이 찾아왔다.

오직 생중계를 진행하던 카메라의 작은 모니터 화면만이 푸르스름한 빛을 뿜어내며 공간을 밝히고 있었다.

그때였다.

지익, 지지직.

먹통이 된 취조실 내부의 대형 모니터 화면이 스스로 켜졌다. 화면 가득 붉은색 노이즈가 폭발하듯 잔상을 남겼다.

이윽고, 노이즈 너머로 검은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칼, 빳빳하게 날이 선 고급 슈트, 그리고 차가운 메스를 연상케 하는 날카로운 안광.

무진지검의 스타 검사이자 신선회의 설계자, 강태헌이었다.

화면 속의 강태헌은 가상 홀로그램처럼 취조실 공중에 입체적인 형상으로 투사되었다. 그의 실루엣이 기괴하게 일렁이며 시우를 내려다보았다.

“백시우 경위.”

스피커가 찢어지는 듯한 기계음 섞인 목소리가 취조실을 가득 채웠다.

“제법이군. 율정의 가장 쓸모 있는 사냥개를 이토록 처참하게 망가뜨려 놓다니.”

강태헌의 시선이 바닥에 쓰러져 흐느끼는 연희에게 닿았다가, 이내 흥미롭다는 듯 시우의 검게 변한 오른손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그 대가로 네 녀석의 영혼도 썩어 문드러지고 있군. 괴물의 힘을 빌려 괴물을 잡겠다니, 전형적인 비극의 주인공이 아닌가.”

시우는 검게 물든 눈동자로 강태헌의 홀로그램을 응시했다.

“강태헌.”

시우의 목소리에는 분노도, 증오도 없었다. 오직 차가운 확신만이 서려 있었다.

“다음은 네 차례다.”

강태헌이 나지막하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취조실 진동판을 타고 흘러나와 시우의 고막을 때렸다.

“기다리고 있으마, 백시우. 네가 완전히 괴물이 되어 내 앞에 엎드릴 그날을.”

그 순간, 쿵! 하고 취조실 철제 문이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바깥의 요괴들이 문을 부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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