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야연(夜宴)이 시작되려나 보네……."

우진철의 메마른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혼잣말이 붉은 안개 속으로 흩어졌다. 율정 타워의 꼭대기에서부터 폭포처럼 쏟아져 내린 피의 밤안개는 무진시의 마천루들을 차례로 집어삼키며 하강하고 있었다. 붉은 여과지를 덧댄 듯, 가로등 불빛이 흐릿한 선홍색으로 번졌다.

스스스스.

빌딩 숲 사이를 관통하는 바람을 타고 가죽이 쓸리는 듯한 기분 나쁜 마찰음이 밀려왔다.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었다. 안개 속에서 사념의 냄새가 났다. 살을 찢고 뼈를 분쇄하며 쾌락을 느끼는 자들의 지독한 악취. 백시우의 머릿속에서 ‘잔혹의 장부’가 보이지 않는 진동을 일으켰다. 타인의 살의에만 비정상적으로 뇌가 흥분하는 그의 감각 장애가 맥박을 빠르게 뛰게 만들었다.

"시우 씨! 당장 차에 타요!"

골목 모퉁이에 세워둔 오래된 세단의 조수석 문이 거칠게 열리며 한서윤이 소리쳤다. 그녀의 한 손은 이미 허리춤의 권총 손잡이에 가 닿아 있었다. 공조를 시작한 이래 그녀가 보여준 형사 특유의 직감이 위험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시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우진철의 어깨를 짚고 안개 너머를 응시했다.

안개가 지면에 닿는 순간, 도로의 가로등들이 차례로 터져 나갔다. 팍, 팍, 파각! 비산하는 유리 파편들 사이로 검은 그림자들이 솟아올랐다. 고양이의 그것처럼 세로로 찢어진 눈동자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척추가 비정상적으로 구부러진 괴이들이었다. 신선회의 사냥개들. 야연의 시작을 알리는 하급 괴이 군단이 안개의 장막을 헤치며 도로 위로 쏟아져 나왔다.

"진철 씨는 빠져."

시우가 나직하게 아포리아 같은 목소리를 뱉었다.

"어? 어, 그래! 난 이런 난장판에는 안 끼어든다!"

우진철은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려 사라졌다.

시우는 길바닥에 고인 붉은 안개를 밟으며 세단으로 걸어갔다. 한서윤은 이미 운전석에 타려 하고 있었다. 시우는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아 조수석 쪽으로 밀어 넣었다.

"비켜. 내가 운전하지."

"무슨 소리예요! 지금 저것들이 뭔지 보이지도 않……."

"살고 싶으면 닥치고 타."

시우의 어조는 얼음송곳처럼 차가웠다. 한서윤은 그의 감정이 거세된 눈동자를 마주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이 남자는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그 사실이 주는 기묘한 압박감이 그녀를 압도했다.

철컥.

시우가 운전석에 앉아 문을 닫자마자, 전면 유리창 위로 무언가 쾅 하고 떨어졌다.

키히히힉!

찌그러진 보닛 위에 엎드린 괴이의 얼굴이 보였다. 입가 찢어진 틈새로 침을 흘리는 사냥개였다. 짐승의 발톱이 유리창을 긁어내리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시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키를 돌렸다. 엔진이 굉음을 내며 깨어났다.

"꽉 잡아."

기어를 후진으로 꺾고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았다. 세단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미끄러졌다. 보닛 위에 있던 괴이가 균형을 잃고 아스팔트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시우는 그대로 핸들을 꺾어 차체를 180도 회전시킨 후, 가속 페달을 다시 짓밟았다.

부아아앙!

차가 앞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도로는 이미 신선회의 사냥개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안개 속에서 붉은 눈동자들이 수십 개, 수백 개씩 켜지며 차를 향해 달려들었다.

쿵! 콰직!

차체 전면이 괴이의 육체들과 충돌하며 기분 나쁜 타격음이 이어졌다. 와이퍼가 움직일 때마다 유리창에 흩뿌려진 검붉은 피가 길게 번졌다.

"이게 대체……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 거예요!"

조수석의 한서윤이 총을 뽑아 들며 비명을 질렀다. 경찰학교에서도, 강력계에서도 배운 적 없는 지옥도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신선회의 유희."

시우는 전방을 주시하며 건조하게 말했다.

"그들은 밤을 지배하지. 법의 테두리 바깥에서 인간을 도살하는 게 그들의 취미야. 지금 우린 그 사냥터의 한복판에 있는 거고."

그때, 거대한 충격과 함께 차의 우측면이 크게 기울었다. 덩치가 곰만 한 하급 괴이 하나가 주행 중인 차량의 측면을 들이받은 것이다. 찌그러진 문짝 틈새로 차가운 밤안개가 밀려들었다.

동시에 시우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시작됐군.’

입안 가득 얼음 조각을 머금은 듯한 극도의 한기가 차올랐다. 혀끝이 마비되며 피 맛이 감돌았다. 손끝에서부터 온기가 빠른 속도로 빠져나갔다.

1화에서 장부를 처음 활성화했을 때 느꼈던 괴화 1단계의 전조 증상이었다.

그때보다 강도가 훨씬 강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검푸른 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감각이 완전히 사라졌다. 손끝이 굳어 가며 가죽 운전대를 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스르륵.

손가락이 미끄러지며 핸들이 제멋대로 돌아갔다. 차체가 크게 휘청이며 도로 변의 콘크리트 가드레일을 향해 돌진했다.

"시우 씨! 핸들 잡아요! 뭐 하는 거예요!"

한서윤이 경악하며 조수석에서 손을 뻗어 핸들을 잡으려 했다.

시우의 시야가 흐려졌다. 단순한 시각 장애가 아니었다. 뇌 속의 신경세포들이 하나씩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이성의 끈이 가늘어지며, 오직 살의를 갈구하는 괴이의 본능이 빈자리를 채우려 요동쳤다.

‘장부를 써야 한다.’

그는 마음속으로 품고 있던 검은 가죽의 마도서를 불러냈다. 머릿속에서 ‘잔혹의 장부’가 거칠게 펼쳐졌다. 지금까지 축적된 살의와 공포의 사념 자산들이 붉은 활자가 되어 허공에 명멸했다.

대가는 지불될 것이다. 이번에는 또 어떤 기억이 지워질 것인가. 여동생 설아의 웃음소리? 아니면 그녀와 함께 먹었던 마지막 식사의 온기?

시우는 망설이지 않았다. 복수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영혼 따위는 얼마든지 갈아 넣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념 자산 소모: 150포인트] [계약 체결: 차량의 전면 범퍼에 물리적 파괴 사념을 투영한다.]

머릿속에서 웅장한 가죽 책이 닫히는 환청과 함께, 시우의 전신에서부터 타오르는 듯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의 손끝에서 시작된 기괴한 서리가 운전대와 대시보드를 덮쳤다.

콰아아앙!

세단의 전면 범퍼에서 보이지 않는 장막 같은 충격파가 뿜어졌다. 순식간에 차량 전체가 마치 수십 톤짜리 장갑차라도 된 것처럼 묵직한 마력을 띠기 시작했다.

"돌파한다."

시우가 굳어버린 손가락을 억지로 꺾어 운전대를 고정했다.

앞을 가로막고 있던 세 마리의 괴이들이 세단과 충돌하는 순간, 그들의 육체는 충격을 흡수하지 못하고 그대로 폭발하듯 사방으로 찢겨 나갔다. 콰과과광! 뼈가 부서지고 살점이 비산하는 소리가 사방을 메웠다.

차량 범퍼에 깃든 잔혹한 사념은 괴이들의 방어력을 무력화하고 그들을 고기반죽으로 만들었다.

"이, 이게 무슨……."

한서윤은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차 안을 가득 채운 온도는 영하 이하로 떨어져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하얀 김이 흘러나왔다. 옆자리의 백시우를 바라보자, 그의 피부는 시체처럼 창백하게 변해 있었고, 운전대를 잡은 그의 손등에는 성에가 하얗게 피어나 있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명백한 초자연적인 공포, 괴이들의 그것과 아주 닮아 있었다.

하지만 시우는 흔들림이 없었다. 전방에서 거대한 괴이 하나가 도로 중앙의 가로등을 뽑아 들고 차를 향해 휘두르려 하자, 시우는 오히려 가속 페달을 더 깊게 밟았다.

쾅!

가로등이 차체를 강타하기 직전, 범퍼에서 뿜어진 무형의 사념 장벽이 쇠기둥을 가볍게 튕겨냈다. 반동으로 괴이의 상체가 뒤로 젖혀진 틈을 타, 시우는 차체를 가볍게 꺾어 놈의 하반신을 그대로 깔고 뭉갰다.

쿠두둑!

바퀴 아래에서 뼈가 으스러지는 가혹한 감각이 핸들을 통해 시우의 마비된 손끝으로 전달되었다. 오직 살의의 파동만이 그의 뇌를 흥분시켰다.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어렴풋이 피어올랐다.

한서윤은 공포에 질려 몸을 움츠렸다.

그녀가 아는 경찰의 수칙, 인간의 도덕률은 이 차 안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옆에 앉은 남자는 괴물을 잡기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묘한 감정이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서 싹텄다.

방금 전, 거대한 가로등이 차를 덮치려 했을 때 시우는 본능적으로 차체를 조수석 반대 방향으로 틀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비록 그의 눈빛은 감정이 거세된 소시오패스의 그것이었지만, 그의 행동은 그녀를 살려두겠다는 명확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 남자는…… 날 버리지 않았어.’

동료들의 배신 속에서 홀로 남겨졌던 그녀에게, 이 냉혹한 살인마 프로파일러의 비인간적인 보호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단단한 동아줄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뒤편 안개 속에서 네 발로 기어오는 거대한 실루엣들이 빠른 속도로 거리를 좁혀왔다. 그들의 속도는 시속 100킬로미터가 넘는 세단의 주행 속도를 압도하고 있었다.

"더는 못 버텨요! 뒤에서 세 마리가 붙었어요!"

한서윤이 창밖으로 총을 겨누며 소리쳤다.탕! 타앙! 몇 발의 총성이 안개를 뚫었지만, 괴이들의 두꺼운 가죽을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놈들이 차 뒷유리를 향해 도약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빠아아앙!

귀를 찢는 듯한 경적 소리와 함께, 안개 너머에서 거대한 쇳덩어리가 돌진해 왔다.

두꺼운 철판을 덧대고 전면에 날카로운 가시 범퍼를 장착한 개조 덤프트럭이었다. 트럭은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 차 뒤를 쫓던 괴이들을 측면에서 그대로 들이받았다.

콰아아앙!

트럭의 무게와 가속도에 짓눌린 괴이들이 도로 바닥에 피떡이 되어 뭉개졌다. 트럭의 운전석 창문이 내려가며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우진철이었다.

"야! 이 미친 새끼들아! 내 뒤를 따라와!"

우진철이 덤프트럭의 운전대를 쉴 새 없이 돌리며 소리쳤다. 그의 트럭이 앞장서며 안개 속에 갇힌 괴이들의 대열을 무자비하게 헤집고 나갔다.

시우는 말없이 가속 페달을 밟아 트럭의 뒤를 바짝 쫓았다.

피의 안개를 뚫고, 그들은 마침내 율정 타워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무도구의 어두운 외곽 도로로 접어들었다. 붉은 안개는 더는 쫓아오지 못하고 저 멀리 도심 중심부에 고여 있었다.

* * *

무도구의 버려진 폐차장.

덤프트럭과 세단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시우는 시동을 끄고 운전대에서 손을 떼려 했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은 이미 핸들의 가죽 커버와 함께 얼어붙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쩍, 하는 소리와 함께 살점이 찢기며 겨우 손을 떼어냈다. 손등에는 퍼런 멍과 같은 괴화의 흔적이 깊게 남아 있었다.

"하아…… 하아……."

한서윤은 조수석에 기댄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시우를 바라보았다.

차 안의 라이트가 꺼지고, 희미한 달빛만이 시우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감정이 배제된 석고상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이 그의 목덜미에 닿는 순간, 한서윤은 숨을 들이켰다.

시우의 셔츠 깃 사이로 드러난 목덜미.

그곳에 인간의 피부 대신, 기괴하게 빛나는 푸른색 비늘들이 돋아나 있었다. 안개의 미세한 움직임에 반응하듯, 비늘들이 미세하게 들썩였다. 그것은 방금 전 그들을 습격했던 신선회의 사냥개들에게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무늬였다.

한서윤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춤의 권총 손잡이로 손을 가져갔다.

"너……."

그녀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잘게 흔들렸다.

"너, 진짜 인간 맞아?"

시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푸른빛의 안개가 아주 미세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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