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정의 변호사들이 네놈은 살려두라고 하더군. 쓸모가 있을지 모른다면서.
도살자가 거대한 갈고리를 거두며 기괴하게 웃었다. 비대한 신체가 안개 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진 직후, 공장 입구에서 다가오던 발소리의 주인이 안개를 찢고 모습을 드러냈다.
현장 감식반의 하얀 우비를 입은 사내였다.
사내는 바닥에 뒹구는 김명훈의 잘려 나간 팔을 구두굽으로 가볍게 밟고 지나갔다. 질척한 핏물이 하얀 우비 자락에 튀었으나 사내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마비되어 벽에 기대어 있는 시우의 코앞에 멈추어 섰다.
철컥.
차가운 금속성이 공기를 갈랐다. 감식반 우비 소매 사이로 뻗어 나온 손에 쥐어진 것은 경찰 제식 권총이었다. 검은 총구가 시우의 관자놀이에 단단히 밀착되었다.
"원망은 마라. 위에서 내린 오더다."
사내의 입꼬리가 가학적으로 뒤틀렸다. 우비 모자 그늘에 가려진 눈동자가 살의로 번들거렸다. 그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천천히 당기기 시작했다.
시우의 관자놀이에 닿은 총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괴화 1단계의 부작용으로 이미 전신이 얼어붙은 시우에게는 그 감각마저 무디게 느껴질 뿐이었다. 손끝은 검푸르게 죽어 있었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육체는 완벽한 무력 상태였다. 그러나 시우의 전두엽은 비정상적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관자놀이를 짓누르는 사내의 노골적인 살의. 그 가학적인 사념이 시우의 뇌세포를 자극하며 터질 듯한 도파민을 뿜어냈다.
공감할 수 없는 타인의 감정 중, 오직 살의만이 시우의 영혼을 깨우는 유일한 열쇠였다.
'…거래를 시작하지.'
시우가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그의 품안에서 보이지 않는 금단의 마도서, '잔혹의 장부'가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장부의 쇠사슬이 풀리는 소리가 시우의 귓가를 환각처럼 때렸다.
동시에 시우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갔다.
그것은 기억이었다. 여동생 설아와 함께 무진시의 허름한 놀이공원에서 먹었던 분홍색 솜사탕의 맛. 그날 하늘을 물들였던 노을의 따뜻한 오렌지 빛깔. 설아가 오빠를 보며 환하게 웃던 그 무해한 표정의 윤곽.
그 구체적이고 온기 어린 기억의 파편들이 거대한 지우개로 문지른 것처럼 하얗게 지워졌다. 머릿속의 영토 일부가 도려내 지는 듯한 지독한 두통이 시우의 미간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인간성의 상실. 그것이 장부를 펼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절대적인 대가였다.
[사념 자산 등재 완료.] [대상: 조형식 (무진남부경찰서 강력2반 경사)] [죄악 점수: 470] [주요 이력: 신선회 산하 로펌 '율정'으로부터 정기적 뇌물 수수. 살인 사건 현장 증거 인멸 12건. 괴이 범죄 묵인 및 피해자 가출 처리 주도.]
시우의 망막 위로 붉은색 글자들이 정교하게 인쇄되듯 떠올랐다. 조형식이라는 사내의 추악한 영혼의 명세서가 실시간으로 해독되어 시우의 뇌리에 내려앉았다.
조형식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마지막 한 칸 남겨두고 정지해 있었다. 그는 시우의 눈빛을 보고 있었다. 죽음을 앞둔 인간의 눈에서 마땅히 흘러나와야 할 공포나 절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우의 눈동자는 텅 빈 심연처럼 고요했다. 오히려 조형식의 살의를 탐닉하는 듯한 기괴한 희열마저 서려 있었다.
"눈깔이 왜 이래, 미친 새끼가……."
조형식이 불쾌한 듯 침을 뱉으며 방아쇠에 힘을 주려던 찰나였다.
"조형식 경사님."
시우의 입술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목소리는 지극히 차분하고 건조했다. 관자놀이에 총이 겨겨진 실낱같은 상황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평온한 어조였다.
조형식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네놈이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
"율정의 파트너 변호사 연희가 보낸 사냥개치고는 냄새가 너무 구리군요."
시우는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 대신, 장부에서 뻗어 나온 사념의 줄기를 조형식의 뇌 신경망에 직접 연결했다. 조형식이 일평생 저질러 온 악행의 기억과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심리적 결함이 시우의 손아귀에 쥐어졌다.
"당신이 인멸한 열두 개의 시체 중, 세 번째 시체 말입니다. 무도구 하수구에 버려진 여고생. 그 아이의 부모가 매일 경찰서 앞에서 1인 시위를 할 때, 당신은 뒤에서 웃으며 영안실 보존액을 마셨죠. 율정이 준 돈으로 산 외제차 시트에 그 아이의 피가 묻어 있다는 걸,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군요."
조형식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가셨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미친놈이! 닥쳐! 당장 닥치지 않으면 머통수를 날려버릴……!"
"쏘세요."
시우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당신의 휴대폰에 저장된 율정과의 통화 녹취록과 차명 계좌 내역이 무진지검 공안부와 언론사 템플릿으로 자동 전송되도록 설계해 두었습니다. 내가 죽으면, 당신도 정확히 3분 뒤에 사회적으로 도살당합니다."
물론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시우에게는 그런 장치를 해둘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잔혹의 장부를 통해 강제로 '체결'된 심리적 치명상은 조형식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거짓을 완벽한 진실로 믿게 만들었다.
조형식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려 하얀 우비 안쪽을 적셨다.
"거짓말 마……! 그럴 리가 없어. 네놈이 그걸 어떻게 알아!"
"모르겠습니까? 당신이 율정의 사냥개 노릇을 하는 동안, 그들은 당신을 언제든 버릴 꼬리로 생각했다는 걸. 김명훈이 왜 저렇게 죽었는지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군요."
시우의 시선이 바닥에 뒹구는 김명훈의 참혹한 시신을 향했다. 조형식의 시선 역시 자연스럽게 동료의 시체로 이어졌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쿵, 쿵, 쿵!
공장 외부의 철제 계단을 거칠게 뛰어 올라오는 발소리가 사방의 안개를 흔들었다. 수사관의 직감이 담긴, 지극히 올바르고 다급한 발소리였다.
"거기 누구 있습니까! 경찰입니다! 손 들어!"
두꺼운 안개를 뚫고 앙칼진 목소리가 폐공장 내부로 울려 퍼졌다. 마른 체구에 경찰 제식 점퍼를 입은 여형사, 한서윤이었다. 그녀는 양손으로 권총을 움켜쥔 채 경계 태세를 취하며 공장 안으로 난입했다.
조형식의 눈이 미친 듯이 사방을 굴렀다.
후배 형사의 난입은 그에게 구원이 아니라 최악의 파멸 시나리오였다. 현장 감식반으로 위장해 목격자를 살해하려던 현장을 동료에게 들킨 꼴이었으니까.
"조 경사님? 거기 조 경사님 맞습니까? 왜 감식반 옷을……?"
한서윤이 안개 속에서 조형식의 실루엣을 알아보고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시선이 바닥의 피비린내 나는 시체들과 쓰러진 백시우에게로 향했다.
시우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장부의 사념 게이지를 단숨에 소모하며 조형식의 뇌에 마지막 치명타를 가했다.
'환각을 보아라, 조형식.'
시우의 아파티 가득한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조형식의 시야가 급격히 뒤틀리기 시작했다. 공장 바닥을 가득 채운 안개가 푸른빛을 띠며 꿈틀거렸다. 바닥에 쓰러진 김명훈의 시체가 서서히 상체를 일으키는 환영이 그의 눈에 비쳤다. 잘려 나간 오른팔 대신 거대한 무쇠 갈고리를 단 김명훈이, 그리고 자신이 죽음으로 방치했던 열두 명의 무고한 피해자들이 안개 속에서 피를 흘리며 기어 나오고 있었다.
"어……? 어어? 저리 가! 오지 마!"
조형식이 허공을 향해 비명을 질렀다.
"조 경사님? 왜 그러세요? 어디 아프신 겁니까?"
한서윤이 당황하며 조형식에게 다가서려 했다.
"오지 마! 이 괴물 새끼들아!"
조형식은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그의 눈에는 한서윤 역시 자신을 해치러 다가오는 가죽이 벗겨진 괴물로 보였다.
탕! 타앙!
조형식이 비명을 지르며 허공에 권총을 난사했다. 총탄이 공장의 시멘트 기둥을 때리며 불꽃을 튀겼다. 한서윤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몸을 날렸다.
"으아아악! 날 만지지 마! 율정이 날 죽이러 왔다! 도살자가 온다!"
환각의 극치에 달한 조형식은 머리를 감싸 쥐고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의 발걸음은 공장 2층의 깨진 창문 쪽을 향하고 있었다. 유리가 깨져 나간 창틀 너머는 수십 미터 아래의 단단한 시멘트 바닥과 철근 더미가 도사린 낭떠러지였다.
"조 경사님, 뒤는 낭떠러지에요! 멈춰요!"
한서윤이 소리쳤지만, 조형식의 귀에는 그 목소리가 지옥의 망령들이 부르는 노래로 들릴 뿐이었다.
"죽기 싫어……! 사냥당하기 싫단 말이다!"
조형식은 광기에 찬 비명을 지르며, 제 발로 창틀을 딛고 허공으로 도약했다.
스스스스—
차가운 밤안개가 그의 몸을 집어삼켰다.
수초 후, 공장 아래에서 둔탁하고 무거운 파열음이 들려왔다.
퍽.
뼈가 사방으로 으스러지고 장기가 터지는 날것의 소리였다. 정적인 어둠 속에서 그 소리는 기묘할 정도로 정갈하고 선명하게 공명했다.
공장 안에는 다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시우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괴화 1단계의 한기가 조금씩 가라앉으며, 손가락 마디마디에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는 벽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시선은 조형식이 추락한 창문 너머를 향해 있었다.
단 한 번의 육체적 충돌도 없이, 오직 상대의 죄악과 공포를 이용한 가스라이팅만으로 완벽한 파멸을 이끌어냈다.
시우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타인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소시오패스적 뇌가, 이 지독한 지략전의 승리에 도파민을 뿜어내며 기뻐하고 있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조형식의 소지품으로 다가갔다. 조형식이 추락하기 직전 떨어뜨린 감식반 가방 내부를 헤집었다.
주머니 깊숙한 곳에서 투명한 비닐에 싸인 물건이 만져졌다.
꺼내어 보니, 그것은 일반적인 방진 마스크가 아니었다. 특수 가공된 섬유로 제작된, 은은한 광택이 도는 '백색 안개 필터용 정화 마스크'였다. 마스크의 필터 안쪽에는 율정 로펌의 로고가 미세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이것이 신선회 지배층들의 전유물인가.'
시우는 마스크를 품안에 깊숙이 밀어 넣었다. 신선회의 꼬리를 잡을 결정적 단서였다.
"……너."
등 뒤에서 낮게 가라앉은, 분노와 의혹이 뒤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우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한서윤이 권총을 양손으로 단단히 쥐고 시우를 겨누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지만, 총구만큼은 시우의 심장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바닥에 뒹구는 김명훈의 시체, 잘려 나간 팔, 그리고 방금 창밖으로 뛰어내려 즉사한 선배 조형식의 핏자국으로 이어졌다. 이 참혹한 도살장에 멀쩡히 살아남아 품속에 무언가를 챙기고 있는 백시우의 존재는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지?"
한서윤이 한 걸음 다가왔다. 그녀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조 경사님이 왜 갑자기 환각을 보고 뛰어내린 거야? 네가……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잖아!"
시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할 뿐이었다.
한서윤은 시우의 그 비인간적인 고요함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성큼성큼 다가와, 시우의 깃덜미를 한 손으로 거칠게 움켜잡았다. 다른 한 손에 쥔 권총의 총구가 시우의 턱밑을 강하게 밀어 올렸다.
"말해, 소시오패스 새끼야. 네가 죽인 거지?"
한서윤의 찌르듯 날카로운 눈동자가 시우의 눈빛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시우는 턱끝에 닿은 총구의 감촉을 느끼며, 서서히 입꼬리를 올려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텐션이 극도로 팽팽해진 안갯속 폐공장,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허공을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