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시 심연계 무도구. 밤이 되면 이곳의 안개는 가로등 불빛마저 삼켜버릴 만큼 짙어진다. 폐쇄된 정밀기계 공장 내부로 스며든 안개는 기름때와 쇠비린내를 머금은 채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백시우는 노란색 폴리스 라인을 걷어 올렸다. 구두 굽이 시멘트 바닥에 부딪히며 건조한 마찰음을 냈다. 사방은 기괴할 정도로 고요했다. 현장을 보존해야 할 정식 감식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희뿌연 안개 너머로, 달빛이 깨진 천장 유리창을 통과해 떨어지는 단 하나의 지점만이 선명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 빛의 중심에, 백설아가 있었다.
시우는 걸음을 멈췄다. 동생의 사지는 기계 부품처럼 정교하게 분해되어, 공장 바닥의 커다란 톱니바퀴 위에 대칭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었다. 잘려 나간 단면에서는 피가 흘러내려 톱니의 홈을 따라 정밀한 기하학적 도형을 그리고 있었다. 고통으로 뒤틀렸어야 할 얼굴은 기묘하게도 평온했다. 마치 정성스럽게 가공된 밀랍 인형처럼, 정적인 아름다움마저 풍기고 있었다.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이 순간 비명을 지르거나 주저앉아 통곡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우의 눈동자는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했다. 눈물샘은 메말라 있었고, 가슴을 짓눌러야 할 슬픔이나 상실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선천적인 아파티(Apathy).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그의 뇌는 동생의 참혹한 죽음 앞에서도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대신, 다른 것이 움직였다.
척수 최하단에서부터 시작된 짜릿한 진동이 등뼈를 타고 뇌간으로 치솟았다. 그것은 도파민의 폭발이었다.
오직 범죄자가 현장에 남겨둔 지독하고 순수한 ‘살의’의 사념에만 반응하는 그의 기형적인 뇌가 미친 듯이 춤추기 시작했다. 공기 중에 떠도는 보이지 않는 사념의 입자들이 시우의 호흡기를 타고 들어와 신경계를 자극했다. 범인이 설아의 목을 가르고 사지를 해체하며 느꼈을 가학적인 희열, 그 지독한 흥분이 시우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만 같았다.
"너였군."
시우의 입술 사이로 낮게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것은 동생을 잃은 오빠의 슬픔이 아니었다. 극상의 자극제를 마주한 중독자의 신음이자, 포식자의 사냥감을 향한 집착이었다. 뇌가 터질 것처럼 흥분해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그의 이성은 차갑게 번득였다.
시우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설아의 오른손이 놓여 있는 톱니바퀴 옆, 바닥에 고여 있는 붉은 혈흔으로 손을 뻗었다. 아직 완전히 굳지 않은, 진득하고 따뜻한 피였다.
손가락 끝이 붉은 액체에 닿는 순간.
스스스스.
공장 내부의 안개가 급격히 요동치며 시우의 손끝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서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안개와 연기가 뒤섞이며 시우의 눈앞에 거대한 환영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책이었다.
인간의 가죽으로 제본된 듯한 누런 표지, 그 위에 검붉은 피로 조잡하게 쓰인 글씨들이 살아 움직이는 뱀처럼 꿈틀거렸다. 책의 정중앙에는 기괴하게 일그러진 눈동자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잔혹의 장부(Ledger of Cruelty)]**
머릿속을 울리는 이질적인 목소리와 함께 장부가 천천히 펼쳐졌다.
"흡……!"
그 순간, 시우는 숨을 들이켰다. 입안 가득 얼음 조각을 처넣은 듯한 극렬한 한기가 폐부까지 들이닥쳤다. 단순히 추운 느낌이 아니었다. 영혼의 온도가 영하로 떨어지는 듯한 감각. 손가락 끝이 딱딱하게 굳어가며 감각이 마비되기 시작했다. 손톱 밑이 검푸르게 변해가는 것이 실시간으로 보였다.
괴화(怪化) 1단계의 전조 증상이었다.
장부는 허공에서 피비린내를 풍기며 첫 페이지를 펼쳐 보였다. 그곳에는 설아를 죽인 범인이 현장에 남긴 가학적 살의의 깊이와 죄악이 숫자로 환산되어 기록되고 있었다.
**[자산(Asset) 등재 완료: 신선회 하급 요괴의 살의 — 1,200 포인트]** **[권능을 활성화하겠습니까? 대가는 당신의 '존재적 기억'입니다.]**
시우는 망설이지 않았다. "체결해."
쩌적, 하며 머릿속에서 무언가 균열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시우의 기억 보관함에서 가장 빛나던 조각 하나가 강제로 뜯겨 나갔다.
*‘오빠, 이것 봐. 내가 오빠 일기장 써왔어. 여기 오빠 착한 점 엄청 많이 적어놨다?’*
여덟 살의 설아가 커다란 눈망울을 빛내며 자신에게 삐뚤빼뚤한 글씨가 적힌 공책을 내밀던 기억. 그 아이가 지어 보이던 햇살 같던 미소와 살을 맞대었을 때 느껴지던 어린아이 특유의 온기. 그 모든 장면이 순식간에 회색 재로 변해 바람에 흩날려 사라졌다.
기억이 소멸한 자리에는 오직 텅 빈 공동(空洞)과, 그곳을 채우는 장부의 차가운 마력이 남았다. 눈물샘은 여전히 작동하지 않았지만, 시우의 눈동자는 이제 인간의 것이라 부를 수 없을 만큼 깊고 어두운 심연의 색을 띠고 있었다.
스스스.
장부의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가며, 설아가 숨을 거두기 직전의 풍경을 시우의 뇌리에 강제로 주입하기 시작했다.
*어두운 공장 구석. 가죽 장화를 신은 거구의 사내가 설아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있었다. 사내의 얼굴은 가려져 있었지만, 그의 목덜미에 새겨진 푸른색 뱀 문신이 선명하게 보였다. 사내는 품에서 정교하게 가공된 백색 마스크를 꺼내 쓰며 기괴하게 웃었다.*
*“신선회의 정화 마스크다. 이 안개 속에서 숨 쉬려면 이게 필수거든. 꼬맹아, 네 오빠한테 전해라. 우리 구역에 함부로 냄새 피우지 말라고.”*
*사내의 손에 들린 거대한 도축용 칼이 번뜩였다.*
시우는 눈을 떴다. 그의 입술이 비틀려 올라갔다. 범인의 정체, 그리고 그가 착용하고 있던 마스크의 정체. 단서가 뇌리에 박혔다. 대가를 치르고 얻어낸 확실한 수확이었다.
하지만 여운을 즐길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바스락.
등 뒤, 안개 속에서 아주 미세한 발소리가 들렸다. 시우는 몸을 움직이지 않은 채 눈동자만 굴려 주변의 공기 흐름을 살폈다. 안개가 불규칙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발소리의 주인공은 아주 익숙한 걸음걸이로 다가오고 있었다. 폴리스 라인을 지키고 있어야 할 현장 감식반의 하얀 방진복을 입은 사내였다.
그러나 그가 뿜어내는 기운은 경찰의 그것이 아니었다. 피비린내. 그리고 지독한 적의.
사내가 천천히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는 모습이 시우의 시야 가장자리에 걸렸다.
철컥.
금속성의 마찰음과 함께 차가운 총구가 시우의 오른쪽 관자놀이에 닿았다.
"동생 시신 앞에서 아주 넋이 나갔군, 백 프로파일러."
가면 같은 방진복 모자 아래로 비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현장 감식반으로 가장한, 신선회의 사주를 받은 부패 형사였다. 그의 눈동자에는 사냥감을 몰아넣은 사냥개의 가학적인 희열이 가득 차 있었다.
사내의 손가락이 천천히 권총의 방아쇠를 마디마디 조여 가기 시작했다.
"여동생 뒤를 바로 따라가게 해 주지. 무덤에서 둘이 사이좋게 지내라고."
찰나의 침묵. 사내의 검지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시우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올라갔다.
사내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1밀리미터 당겼다. 금속 부품들이 맞물리며 일어나는 미세한 진동이 시우의 관자놀이 뼈를 타고 뇌막까지 전달되었다.
시우의 시선은 바닥에 고인 붉은 피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동공이 좌우로 빠르게 움직였다. 사내의 구두 굽에 묻은 흙의 성분, 방진복 소매 사이로 드러난 손목의 미세한 흉터, 그리고 불규칙하게 떨리는 호흡의 간격.
모든 것이 하나의 데이터로 치환되어 그의 머릿속에 입력되었다.
"김명훈 경사."
시우가 낮게 읊조렸다. 사내의 손가락이 굳었다. 방진복 모자 너머로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뭐?"
"올해로 근속 12년 차. 서부서 강력 3반. 지난달 네 살짜리 딸의 난치병 수술비로 3억 원의 사채를 썼지."
시우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저 눈동자만을 옆으로 굴려 사내의 실루엣을 담았다. 그의 입술은 건조하게 갈라져 있었지만, 목소리에는 단 한 줌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 돈을 해결해 준 것이 대형 로펌 율정의 대외협력팀장. 맞나."
"이 새끼가…… 무슨 개소리를."
"너는 오늘 이곳에 감식반보다 먼저 도착해 현장을 훼손하고, 침입자를 사살한 뒤 정당방위로 꾸미라는 지시를 받았다. 네 품에 들어 있는 미등록 권총이 그 증거지."
사내의 호흡이 급격히 가빠졌다. 관자놀이를 누르는 총구의 압력이 미세하게 약해졌다. 사내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시우의 머릿속에서 장부가 다시 한번 요동쳤다.
**[자산(Asset) 추가 등재: 김명훈의 공포와 살의 — 400 포인트]** **[누적 자산: 1,600 포인트]** **[권능을 추가로 체결하시겠습니까? 대가는 당신의 '감각적 기억'입니다.]**
'체결해.'
시우는 속으로 뇌까렸다.
쩌적.
머릿속 깊은 곳에서 얼음이 깨지는 듯한 파열음이 다시 한번 울렸다. 이번에는 미각과 후각의 기억이었다.
어머니가 끓여주던 된장찌개의 구수한 냄새. 비가 내린 뒤 흙 비린내가 나던 초등학교 운동장의 공기. 동생과 함께 나누어 먹던 싸구려 아이스크림의 단맛.
그 모든 감각의 데이터가 순식간에 표백되어 사라졌다. 시우의 입안에서는 이제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혀끝을 마비시키는 차가운 쇠비린내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그 대가로, 김명훈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치명적인 비밀이 시우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체결 완료: 대상의 심리적 결함 '딸의 생명선']**
시우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총구가 그의 관자놀이를 긁으며 미끄러졌지만, 사내는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사내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식은땀이 방진복 내부로 스며드는 소리가 정적 속에서 크게 들렸다.
"율정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시우가 사내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생명력이 배제되어 있었다. 오직 차가운 유리알 같은 무감각함만이 사내를 압도했다.
"그들은 네 딸의 수술비를 지급하지 않았어. 병원 전산망에는 여전히 미납 경고등이 떠 있지. 네가 나를 죽이는 순간, 그들은 너를 살인범으로 몰아 꼬리를 자를 것이다. 네 딸은 차가운 병실에서 쫓겨날 거고."
"거짓말 마! 그분들이 그럴 리가 없어!"
사내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그의 검지가 다시 금속 방아쇠를 압박했다.
하지만 이미 주도권은 넘어간 뒤였다. 시우는 사내의 불안과 공포를 정확히 읽고 있었다. 그는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총구가 그의 이마 한가운데를 깊게 눌렀지만, 시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쏘아라."
시우가 속삭였다.
"쏘고 나서 네 딸의 시신을 보러 가라. 율정이 네 딸의 심장을 어떤 용도로 쓸지,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
"아, 아아……."
사내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동공이 풀리고, 총을 쥔 손이 눈에 띄게 아래로 처졌다. 시우의 목소리에 담긴 기괴한 확신과 비인간적인 냉정함이 사내의 정신을 완벽하게 붕괴시키고 있었다. 가스라이팅. 사내는 자신이 거대한 심연의 아가리 앞에 서 있음을 직감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쉬이이익—!
공장 바닥을 기던 짙은 안개가 갑자기 사납게 소용돌이쳤다. 기름때 묻은 공기가 일시에 차갑게 얼어붙으며, 정밀 기계들의 표면에 하얀 서리가 내앉기 시작했다.
쿵.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폐공장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졌다. 단순한 인간의 발소리가 아니었다. 쇠가죽을 바닥에 쓸며 걷는 듯한 기괴하고 둔탁한 소리.
김명훈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그, 그놈이다…… 그놈이 왔어……."
사내가 공포에 질려 총구를 허공으로 돌렸다.
안개 너머에서 거대한 실루엣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신장 2미터가 넘는 거구. 그의 상체는 비정상적으로 비대했고, 양손에는 정육점에서나 쓸 법한 거대한 도축용 갈고리가 들려 있었다. 그의 목덜미에는 시우가 장부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푸른색 뱀 문신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여동생 백설아를 도살한 신선회의 사냥개. '도살자'였다.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라고 했을 텐데, 쥐새끼가 말이 많군."
도살자의 목구멍에서 쇠를 긁는 듯한 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착용하고 있는 백색 정화 마스크의 필터가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히익!"
김명훈이 비명을 지르며 도살자를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
타앙—!
공기 중을 가르는 화약음과 함께 총탄이 날아갔다. 하지만 도살자는 피하지 않았다. 총탄은 그의 비대한 어깨 가죽에 박혔으나, 피 한 방울 흘러내리지 않았다. 괴이는 상처를 어루만지지도 않은 채, 그저 거대한 갈고리를 가볍게 휘둘렀다.
스각.
"끄아아악!"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김명훈의 오른팔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잘려 나간 단면에서 뿜어져 나온 선혈이 안개 속으로 흩뿌려졌다. 김명훈은 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질렀지만, 도살자는 자비 없이 그의 목덜미를 거대한 발로 짓밟았다.
두둑.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김명훈의 비명이 뚝 끊겼다.
공장 안은 다시 기괴한 정적에 휩싸였다. 도살자는 발밑의 시체를 가볍게 걷어차 치워버린 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시우를 바라보았다. 마스크 너머의 붉은 안광이 시우의 얼굴을 집요하게 훑었다.
"네놈이 그 계집애의 오빠인가."
도살자가 거대 갈고리를 바닥에 끌며 다가왔다. 쇳소리가 시우의 귀를 찢을 듯 울렸다.
시우는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건.'
시우는 자신의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손가락 마디마디가 검푸르게 변해 있었고, 관절은 얼어붙은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는 괴화 1단계의 부작용이 그의 전신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손끝의 감각이 완전히 사라져, 바닥에 떨어진 김명훈의 권총을 집어 들 수조차 없었다.
도살자가 시우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가 치켜든 거대 갈고리 끝에서 김명훈의 신선한 피가 뚝, 뚝 떨어졌다.
"율정의 변호사들이 네놈은 살려두라고 하더군. 쓸모가 있을지 모른다면서."
도살자가 기괴하게 웃으며 갈고리를 시우의 목덜미로 가져갔다.
"하지만 내 손가락이 미끄러진다면 어떨까?"
얼어붙은 손가락. 시우의 뇌는 여전히 도파민으로 가득 차 터질 듯 흥분하고 있었지만, 그의 육체는 완벽한 무력 상태에 빠져 있었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시우의 눈동자가 도살자의 목덜미에 있는 뱀 문신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그때, 공장 입구 쪽에서 거친 안개를 뚫고 또 다른 발소리가 빠르게 접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