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화광(火光)이 밤안개를 피빛으로 물들였다.

백화곡을 철옹성처럼 감싸고 있던 비전(秘傳)의 원시 안개가 일순간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제갈무신이 직속으로 부리는 암살단, 천멸대(天滅隊)와 사파의 타락한 무사들이 가시덩굴 방벽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놓은 탓이었다. 마른나무가 타들어 가는 매캐한 냄새와 함께, 검붉은 불길이 어둠을 집어삼키며 솟구쳤다.

파지직, 파직!

불꽃이 튀는 소리 사이로 수십 조의 살기 어린 안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칠흑 같은 야행의를 걸치고 얼굴을 가린 천멸대의 무사들이 쇠사슬과 구치도를 치켜든 채 무리 지어 쇄도했다. 그들의 발걸음은 은밀했으나, 대지를 밟는 기세에는 일말의 자비도 없었다. 백화곡의 고요는 그렇게 한순간에 파멸의 전장으로 변모했다.

사공기는 타오르는 불길을 등진 채 서 있었다. 그의 손에 쥔 묵검(墨劍)이 검은 안개를 뿜어내며 미세하게 진동했다.

"침입자들이다!"

연조희가 장포자락을 휘날리며 사공기의 뒤편으로 물러섰다. 그녀의 손에는 이미 천맹의 비사를 기록할 지필묵이 들려 있었으나,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사공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묵검을 비스듬히 내려 잡았을 뿐이다. 그의 안광은 밤하늘보다도 깊고 어두웠다.

타락한 무사 중 세 명이 먼저 바람을 가르며 날아올랐다. 그들의 도 끝에서 뿜어지는 백색의 도강이 사공기의 전신을 맹렬하게 덮쳐왔다. 삼재합격진(三才合擊陣)의 예리한 변화가 가미된, 빈틈없는 살수였다.

사공기의 발끝이 가볍게 지면을 스쳤다.

스스스스-!

그의 신형이 무형의 유체(流體)처럼 흐려지는가 싶더니, 묵검이 반월을 그리며 허공을 갈랐다. 새로이 터득한 흑련검의(黑蓮劍意)가 어둠 속에서 피어났다. 검끝에서 일어난 수십 송이의 검은 연꽃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것은 단순한 초식이 아니었다. 기경팔맥을 타고 흐르는 묵정기법의 정수가 검의(劍意)라는 무형의 날붙이가 되어 허공을 난도질하는 형상이었다.

푹! 푸학!

검은 연꽃잎이 스쳐 지나간 자리마다 무사들의 목덜미와 가슴에서 붉은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세 명의 무사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 순간, 사공기의 미간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으아아아!' '살려다오, 내 자식들이...'

벨 때마다 고스란히 뇌리를 파고드는 망자들의 마지막 단말마. 묵정의 저주가 단전을 타고 역류하며 그의 이성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차가운 얼음 송곳이 뇌수를 뚫는 듯한 극통이었으나, 사공기는 어금니를 사려 물며 그 고통을 기혈 밑바닥으로 눌러 내렸다. 멸정무정(滅情無情)의 심법이 그의 정신을 강제로 고립시켰다. 슬픔도, 분노도 용납지 않는 철저한 고독의 성벽이 그의 자아를 붙들었다.

"한 걸음도 비켜설 수 없다."

사공기의 목소리는 밤바람처럼 서늘했다.

그가 다시 검을 치켜드는 순간, 불길로 가득 찬 연기 속에서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천멸대의 무사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길을 터주었다.

그 길의 끝에서, 푸른 대도포를 입은 청년이 걸어 나왔다.

남궁현이었다.

그러나 그의 상태는 온전치 못했다. 그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충혈되어 있었고, 오른손에 쥔 남궁세가의 보검, 청강검(靑鋼劍)은 기괴하게 뒤틀린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4화에서 사공기의 묵검과 맞부딪치며 생겼던 미세한 균열. 그 보이지 않던 틈새를 따라 끈적하고 시커먼 기운이 마치 살아 있는 고독(蠱毒)처럼 기어 나와 그의 손목과 팔뚝을 무자비하게 감싸 쥐고 있었다.

"남궁... 현."

사공기가 낮게 읊조렸다.

남궁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자아는 제갈무신이 심어놓은 독문 조종식의 어둠 속에서 필사적으로 소리치고 있는 듯했다. 가문을 살려야 한다는 강박, 아우와 아버지를 인질로 잡힌 절박함이 그 독기와 융합하여 가공할 광기로 폭주하고 있었다.

"사공... 기... 네놈을 죽여야... 가문이 산다...!"

남궁현의 목구멍에서 쇠가 긁히는 듯한 괴성이 터져 나왔.

스으으으-!

남궁현의 전신에서 청색의 가문 비전 내력과 흑색의 독기가 뒤엉키며 폭발적인 기세로 솟구쳤다. 대지가 가라앉고 주위의 잡목들이 무자비하게 꺾여 나갔다. 이미 생사경(生死境)의 문턱을 두드리는 극렬한 기세였다.

"남궁 소협! 제정신을 차리시오! 그 검에 깃든 것은 가문의 영광이 아니라 위선자의 추악한 사슬이오!"

뒤에서 지켜보던 연조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조종식에 지배당한 남궁현에게는 그 어떤 외침도 닿지 않았다.

콰아아앙!

남궁현이 대지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의 신형이 번개처럼 짓쳐 들며 청강검을 내리찍었다. 남궁세가의 절예,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의 정수가 폭주하는 내력과 더해져 사공기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사방 수십 장의 공간이 검풍에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사공기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묵검을 수직으로 세워 적의 강맹한 검세를 받아냈다.

깡-!

철검과 철검이 맞부딪치며 고막을 찢는 듯한 금속음이 백화곡을 뒤흔들었다. 두 사람의 발밑 대지가 사방으로 갈라지며 깊은 구덩이가 파였다.

강체(剛體)와 강체의 격돌. 남궁현의 검세가 태산처럼 무겁게 사공기를 내리눌렀다. 독기에 잠식된 그의 완력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 있었다. 사공기의 무릎이 미세하게 꺾이는가 싶더니, 묵검의 검신을 타고 남궁현의 탁한 기운이 밀려 들어왔다.

'이것은...'

사공기는 느낄 수 있었다. 남궁현의 검 끝에서 전해지는 정서적 고통. 몰락해가는 명문가를 홀로 짊어져야만 하는 처절한 책임감, 그리고 제갈무신의 꼭두각시가 되어 무고한 자를 베어야 하는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검날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묵정기법이 그 원한과 회한을 흡수하려 들었다. 단전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기혈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사공기의 입가로 한 줄기 검은 피가 흘러내렸다.

"아아아아!"

남궁현은 광소하며 검을 더욱 세차게 밀어붙였다. 균열이 간 그의 청강검 틈새로 검은 독액이 더욱 거세게 뿜어져 나와 사공기의 옷소매를 적셨다.

사공기는 눈을 부릅떴다.

'무정(無情)에 들되, 정(情)을 외면하지 않는다.'

백화곡 석벽에서 보았던 구절이 뇌리를 스쳤다. 망자들의 원해를 억누르는 것만이 답이 아니다. 그들의 한과 고통을 온몸으로 껴안아 검력으로 환원하는 것. 그것이 참된 법도이자 묵검의 극의였다.

사공기의 단전에서 굳어 가던 내력이 유체처럼 부드럽게 흐르기 시작했다. 거칠고 사나운 강(剛)의 흐름을 부드러운 유(柔)의 흐름으로 흘려보내는 묘리.

스으윽.

사공기는 묵검의 각도를 미세하게 비틀었다. 남궁현의 청강검이 사공기의 어깨를 스치며 허공을 갈랐다. 초식이 빗나간 순간, 사공기는 신형을 회전시키며 묵검의 자루로 남궁현의 손목을 강타했다.

탁!

남궁현의 손아귀가 느슨해진 틈을 타, 사공기는 정밀하게 정돈된 묵정기력을 손가락 끝에 모아 남궁현의 청강검 날을 정확히 튕겼다.

손가락 끝이 검날의 미세한 균열에 닿는 순간이었다.

"파(破)!"

사공기의 묵직한 외침과 함께, 그가 주입한 기력이 청강검 내부의 독문 조종식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파아아앙-!

귀를 찢는 듯한 폭음이 백화곡을 흔들었다. 남궁세가의 가보이자 신검이라 불리던 청강검이 사공기가 흘려보낸 정밀한 기력에 버티지 못하고 수천 개의 파편으로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흩날렸다.

그리고, 그 깨진 검날의 중심부에서 기괴한 광경이 펼쳐졌다.

치이이익!

검의 중심 기둥 역할을 하던 철심 안쪽에서, 시커멓고 걸쭉한 액체가 부글거리며 지면으로 쏟아져 내렸다. 지면에 닿은 액체는 풀과 흙을 까맣게 태우며 지독한 악취를 풍겼다. 그것은 가문의 비전 철 야금술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천맹의 막후 제갈무신만이 제조할 수 있는 독문 고독(蠱毒)의 원액이었다.

"이, 이것은...!"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천멸대의 무사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었다. 그들 역시 제갈무신의 수하들이었으나, 명문 남궁세가의 신검 안에 이런 추악한 조종식독이 심어져 있었을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연조희가 그 광경을 놓치지 않고 소리 높여 외쳤다.

"보아라! 이것이 너희가 숭상하는 천맹과 제갈무신의 실체다! 명문가의 천재를 꼭두각시 개로 부리기 위해, 가문의 신검 속에 저독을 심어 대대로 종속시키려 한 추악한 음모가 마침내 천하에 드러났다!"

그녀의 목소리는 내력이 실려 백화곡 전체를 쟁쟁하게 울렸다.

"아... 아아..."

검이 부서짐과 동시에 조종식의 속박에서 풀려난 남궁현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눈동자에 서서히 이성이 돌아왔다.

그는 바닥에서 부글거리며 끓고 있는 검은 독액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신의 오른팔을 옭아매고 있던 검은 사슬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가슴을 쥐어짜듯 숨을 몰아쉬었다.

"이럴... 리가 없다... 우리 가문의 신검에... 어찌 이런..."

남궁현의 목소리가 처참하게 갈라졌다.

"제갈무신은 그대의 아우와 부친의 수명을 옥죄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사공기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의 검 끝은 여전히 대지를 향해 있었으나, 그 위엄은 태산과 같았다.

"너를 완벽한 사냥개로 만들기 위해, 너희 가문의 상징마저도 독으로 더럽힌 것이다. 네가 가문을 수호하기 위해 휘두른 검이, 실상은 네 가문의 목을 죄는 밧줄이었다."

"아아아아아-!"

남궁현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었다.

명문가 가주로서의 자부심, 가문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버텨온 그의 고결한 신념이 제갈무신의 추악한 기만 앞에 완전히 조각나 버린 순간이었다. 그의 두 손이 흙바닥을 움켜쥐었다. 손톱 밑으로 피와 흙이 뒤섞여 들어갔으나,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사공기는 무릎 꿇은 남궁현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 과거 동료들을 지키지 못해 고립을 자처했던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러나 사공기는 흔들리지 않는 어조로 쐐기를 박았다.

"일어나라, 남궁현. 주저앉아 우는 것은 법도를 세우는 무인의 자세가 아니다. 가문의 업보를 끊고 싶다면, 검을 쥔 손으로 그 배후의 목을 베어라."

남궁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사공기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망울에 눈물과 함께, 제갈무신을 향한 뼈를 깎는 분노가 서서히 깃들기 시작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적대감은 이제 거대한 위선을 향한 공동의 은원으로 치환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쓸모없는 폐물 놈들이 결국 일을 그르쳤구나!"

백화곡 입구를 메우고 있던 천멸대의 무사들 뒤편에서, 고막을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

천멸대의 대장, 독안(獨眼)의 노고수 적무영(赤無影)이 어둠 속에서 솟구치듯 나타났다. 그의 한쪽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백화곡의 온도마저 얼려버릴 듯 차가웠다.

적무영은 남궁현이 전의를 상실하고 사공기와 뜻을 합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이빨을 드러내며 잔인하게 웃었다.

"제갈 가주님의 안배를 망친 대가는 오직 죽음뿐이다. 백화곡과 함께 모두 지옥으로 가거라!"

그가 품속에서 기괴하게 붉은 광채를 뿜어내는 수십 개의 침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암기가 아니었다. 백화곡 지맥 깊숙이 묻어둔 벽력탄(霹靂彈)의 신관을 자극하여 일거에 지반을 붕괴시키고 화공(火攻)을 극대화하는 파괴 화공 침(破壞火工針)이었다.

"안 돼! 지맥이 무너지면 이 곡 전체가 매몰된다!"

연조희가 경악하며 외쳤다.

그러나 적무영의 손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붉은 침들이 가공할 속도로 대지를 뚫고 백화곡의 심부를 향해 박혀 들어갔다.

쿠쿠쿠쿠쿵-!

발밑의 대지가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갈라진 지 틈새로 붉은 화염의 기운이 부글거리며 솟구쳐 올랐다. 동귀어진(同歸於盡)의 대폭발이 일보 직전이었다. 사공기는 묵검을 꽉 쥐며 솟구치는 화염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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