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섬광이 대지의 척추를 꿰뚫었다.
적무영의 손끝을 떠난 수십 개의 파괴화공침이 백화곡의 지맥 심부로 박혀드는 순간, 발밑의 암반이 비명을 지르며 뒤틀렸다. 땅의 호흡이 멈추고, 이윽고 고막을 찢는 파열음이 심연으로부터 터져 나왔다.
"크하하핫! 제갈 가주님의 대업을 가로막는 무지몽매한 도적놈들! 이 곡과 함께 영원히 매몰되거라!"
적무영의 광기 어린 조소가 화염 속으로 흩어졌다.
지반이 뒤흔들리는 충격 속에서, 사공기의 매서운 시선은 꿇어앉은 남궁현의 도검으로 향했다. 남궁현의 손에 쥐어진 검, 가문의 영광을 상징하던 청강검의 검신 표면에 거미줄 같은 미세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단순히 지맥의 폭발 여파 때문이 아니었다. 사공기가 뿜어낸 묵검의 공명과 충돌하며, 은밀하게 숨겨져 있던 이질적인 기운이 마침내 임계점에 도달한 탓이었다.
콰아아앙!
검신의 균열 틈새로 시퍼런 연기 대신, 끈적끈적하고 탁한 검붉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 그것은 정파의 정순한 내력과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기괴한 형상이었다. 지네의 형상을 한 검붉은 사슬이 남궁현의 손목을 타고 올라가 그의 심골(心骨)을 옭아매고 있었다.
"이, 이것은……?"
남궁현이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가문의 안위를 위해 천맹의 사도(使徒)가 되기를 자처했으나, 정작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제갈무신이 심어놓은 독문 조종식인 고독(蠱毒)의 사슬에 영혼까지 저당 잡혀 있었던 것이다.
"제갈무신, 네놈이 기어이 내 신념마저 장난감으로 삼았단 말이냐!"
남궁현이 피눈물을 흘리며 포효했다. 가문의 생존이라는 명분 아래 숨겨진 추악한 위선이, 그의 살을 파고드는 가시밭길이 되어 돌아온 순간이었다.
사공기는 주저하지 않고 묵검을 휘둘렀다.
검풍이 허공을 가르며 남궁현의 팔뚝을 스쳤다. 살점을 베지 않고 오직 기에 깃든 이물만을 걷어내는 극의의 초식이었다. 묵정기법의 어둠이 독붉은 기운을 집어삼키며, 남궁현의 영혼을 옥죄던 보이지 않는 사슬이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끊어져 나갔다.
"큭!"
남궁현이 바닥에 쓰러지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이마에서 검은 땀방울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마침내 제갈무신의 꼭두각시 노릇에서 벗어났으나, 그 대가는 너무도 참혹했다. 가문의 긍지는 조각났고, 그가 믿어온 대의는 한낱 거품에 불과했음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그 절망을 위로할 시간조차 대지는 허락하지 않았다.
쿠쿠쿠쿠쿵-!
백화곡을 감싸고 있던 거대한 석산의 밑동이 통째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지맥 깊숙이 묻혀 있던 벽력탄들이 연쇄적으로 폭발하며, 수십 톤에 달하는 거대한 낙석과 흙더미가 폭포수처럼 사공기 일행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사공 소협! 피해얏!"
연조희가 비명을 지르며 학창의 자락을 움켜쥐었다.
사공기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퇴로는 이미 무너진 암석으로 막혔고, 머리 위에서는 산의 절반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사공기는 연조희의 어깨를 낚아채 제 등 뒤로 밀쳐내고, 쓰러진 남궁현의 덜미를 잡아채 발밑에 두었다. 그리고 한 자루 묵검을 치켜들며 전신의 내력을 끌어올렸다.
"흐읍!"
무거운 침묵을 깨는 기합과 함께, 사공기의 발밑이 반 자 이상 내려앉았다.
콰아아앙!
머리 위로 쏟아진 첫 번째 거대한 암괴가 사공기의 검끝에서 폭발하듯 부서져 나갔다. 파편들이 뺨을 스치며 붉은 선혈을 남겼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산사태는 거대한 해일이 되어 그들의 시야를 완전히 차단했다.
암흑이 내려앉았다.
사공기는 전신으로 쏟아지는 수십 톤의 흙더미와 돌덩이들을 묵검 한 자루와 자신의 육신으로 막아섰다. 척추가 부러질 듯한 압박이 전신을 짓눌렀다. 뼈마디가 비명을 지르고, 입안 가득 비린 혈향이 차올랐다.
바로 그 순간, 가혹한 천재지변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내면의 악마가 깨어났다.
- 사공기, 네놈이 감히 누구를 지키려 드느냐.
뇌리를 찌르는 환청이었다. 그것은 백화곡의 저주, 묵검이 삼킨 망자들의 한 서린 울부짖음이자, 과거 그가 지키지 못하고 차가운 시신으로 마주해야 했던 옛 동료들의 원혼이었다.
- 네놈의 얄팍한 의협심이 우리를 죽였다. 너만 살아남아 대도를 논하려 하느냐! - 혼자 살아남은 자여, 이곳이 너의 무덤이다. 함께 저승으로 가자!
눈앞에 붉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가던 동료들의 환영이 떠올랐다. 그들의 썩어 문드러진 손이 흙더미 속에서 뻗어 나와 사공기의 발목을 잡고 심연으로 끌어내리려 했다.
육체는 수만 근의 돌덩이에 짓눌리고, 정신은 수천 명의 원망에 찢기는 외뢰내마(外雷內魔)의 극독 같은 고비였다.
"커헉!"
사공기의 입에서 한 움큼의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마음을 닫아야만 했다. '멸정무정'의 계율에 따라 일체의 감정을 끊어내고 고독의 성벽 뒤로 숨어야만 이 심마의 역류를 막을 수 있었다. 타인에게 마음을 내어주는 순간, 이 저주는 시전자의 영혼을 완전히 파멸시킬 터였다.
하지만 등을 맞댄 연조희의 가쁜 숨소리와, 발밑에서 가문의 몰락에 신음하는 남궁현의 거친 호흡이 사공기의 옷자락에 닿아왔다.
'정에 얽매이지 마라. 고독해야만 살아남는다.'
머릿속에서 독고청의 차가운 경고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사공기의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반발심이 고개를 들었다.
정을 끊고 홀로 살아남아 천하제일이 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억울한 자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검을 뽑았으면서, 정작 제 곁에 있는 이조차 지키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찌 참된 법도라 할 수 있겠는가.
그 순간, 백화곡 비각 석벽에 새겨져 있던 묵검의 미완성 구절이 그의 심안(心眼)을 스쳐 지나갔다.
'지정(至情)은 무정(無情)에 들고, 살인(殺人)은 지인(持人)에 달했다.'
그 모순된 문장의 진의가 벼락처럼 사공기의 뇌리를 때렸다.
"……아아."
사공기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동료들을 잃은 죄책감에 스스로를 가둔 무정(無情)의 벽. 그것은 세상을 향한 증오가 아니었다. 다시는 소중한 이를 잃고 싶지 않다는, 그 누구보다 절절하고 참된 사랑인 지정(至情)의 잔인한 이면이었던 것이다.
상대의 원한과 회한을 밀어내고 억누르려 했기에 그것이 저주가 되어 자신을 갉아먹었다. 망자들의 한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아픔을 온전히 제 어깨에 짊어지고 나아가겠다는 대도의 의지.
살인이 아닌 사람을 살리는 지인(持人)의 검.
"내 비록 고독할지언정, 도의마저 버리지는 않는다."
사공기가 묵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의 눈동자가 깊고 그윽한 무공의 영경(靈境)으로 침잠했다. 닫혀 있던 마음의 빗장을 열어젖히자, 날뛰던 원혼들의 비명이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그들의 한이, 슬픔이, 사공기의 가슴속에서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 융합되기 시작했다.
저주는 더 이상 저주가 아니었다.
그것은 천하의 모든 억울한 자들을 대변하는 성스러운 신광(神光)으로 승화되고 있었다.
지잉-!
묵검의 검신이 투명하리만치 맑은 묵흑색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단전에서 휘몰아치는 기류는 이전의 파괴적인 탁기가 아니었다. 만물을 포용하고, 동시에 위선을 징치하는 절대자의 기세였다.
"일어나라, 묵검이여."
사공기의 나지막한 독백이 진동하는 천지 사이에 고요히 울려 퍼졌다.
콰르르릉!
일순간, 사공기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묵흑색 내력이 거대한 용오름이 되어 하늘을 향해 승천했다.
그것은 인간의 무위라고는 믿기 힘든 천재지변급의 위력이었다. 사공기를 누르고 있던 수십 톤의 석산 잔해와 토사가, 그 묵흑색 기둥에 닿는 순간 단 한 조각의 파편도 남기지 않고 고운 먼지가 되어 비산했다.
폭풍이 백화곡 전체를 휩쓸었다.
사공기를 짓누르던 모든 어둠과 억압이 단 한 번의 기세로 완전히 소멸하는 순간이었다. 하늘을 가렸던 먼지구름이 묵검의 검풍에 쪼개어지며, 희뿌연 달빛이 무너진 곡의 잔해 위로 쏟아져 내렸다.
천지를 뒤흔드는 신적 포효가 가라앉고, 고요가 찾아왔다.
"……소협."
연조희가 흙먼지 속에서 겨우 눈을 뜨며 사공기를 바라보았다.
사공기는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그의 전신은 피와 흙으로 얼룩져 있었으나, 그 기세만큼은 하늘에 닿을 듯 웅장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연조희의 어깨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의 눈동자 가득, 투명하고도 푸른 안광(眼光)이 신비롭게 일렁이고 있었다. 묵정기법의 극의를 깨달아 외뢰내마의 한계를 타파한 자만이 지닐 수 있는 신검(神劍)의 눈빛이었다.
남궁현 역시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빛에는 더 이상 방황이나 굴종은 없었다. 비록 가문의 검은 부러졌으나, 그의 마음속에 새로운 신념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승리의 여운을 느낄 시간은 지극히 짧았다.
사공기가 시선을 돌려 무너진 언덕 너머를 응시했다. 그의 푸른 안광이 밤하늘의 어둠을 뚫고 저 멀리 외곽을 포착했다.
"……!"
연조희의 숨이 턱 막혔다.
무너진 백화곡의 입구와 절벽 위, 달빛을 받아 차갑게 번뜩이는 청철색 갑주들의 물결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진을 치고 있던 자들. 그들은 천멸대와 같은 음지의 무리가 아니었다. 정파 무림맹의 정예 중의 정예, 천맹의 정규 무인 군단이었다. 그 수가 족히 수천에 달했다.
철갑을 두른 군마들의 거친 숨소리와 창검이 맞부딪치는 쇳소리가 백화곡을 포위하듯 옥죄어 왔다.
제갈무신은 처음부터 백화곡을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사공기와 남궁현, 그리고 진실을 아는 모든 자들을 이곳에서 한꺼번에 매장하기 위해 대군을 동원한 터였다.
수천 명의 창끝이 일제히 사공기를 향해 정렬했다.
바람조차 숨을 죽인 적막 속에서, 거대한 군단의 장막이 서서히 걷히며 또 다른 위협이 그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말발굽 소리가 대지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군단의 전면이 좌우로 갈라지며, 백마를 탄 백발의 노인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천맹의 집법장로이자 제갈무신의 최측근인 사도(司徒) 악양(岳陽)이었다. 그의 양옆으로는 천맹의 정예 철갑위대(鐵甲衛隊)가 삼엄한 기세로 호위하고 있었다.
"남궁현."
악양의 목소리는 밤바람을 타고 건조하게 퍼졌다. 그의 시선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없었다.
"가문의 명예를 저버리고, 마교의 잔당과 결탁하여 천맹의 대업을 망치려 들다니. 남궁세가의 백 년 가업이 너 한 놈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참혹한 핏빛으로 물들게 되었구나."
그 가혹한 언사에 남궁현의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부러진 검을 쥔 그의 손끝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위선자들……!"
남궁현이 이빨을 악물며 소리쳤다.
"제갈 가주가 뒤에서 어떤 추악한 짓을 벌였는지 내 똑똑히 보았다! 나와 사공 소협을 죽인다 한들, 역사의 눈을 가릴 수 있을 것 같으냐!"
그 외침에 악양이 나직하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는 강호의 비정한 생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역사란 살아남은 자의 붓끝에서 태어나는 법이다. 이미 중원 천하에는 남궁세가가 마교의 흉계에 빠져 멸문지화를 당했으며, 천맹이 그 원수를 갚기 위해 백화곡을 토벌했다는 격문이 돌고 있다."
"무어라……?"
남궁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가문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그의 노력이, 시작도 하기 전에 제갈무신의 손안에서 철저히 파멸당해 있었던 것이다. 이미 남궁세가의 본가는 천맹의 군사들에 의해 장악되었음이 자명했다.
연조희가 분노로 붓을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사리사욕을 위해 일류 세가를 통째로 제물로 삼다니, 이것이 천맹이 말하는 협의란 말인가!"
"시끄러운 계집이구나."
악양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사공기를 주시했다. 전신에서 묵흑색의 기류를 뿜어내며 서 있는 사공기의 존재감은, 수천 대군 앞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그가 쥔 묵검에서 흘러나오는 기세가 철갑마들을 뒤흔들고 있었다.
"사공기. 네놈이 아무리 검마의 절예를 얻었다 한들, 이 수천의 철갑과 진법을 홀로 감당할 수는 없다. 순순히 검을 내려놓는다면, 고통 없는 죽음만은 약속하마."
사공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악양이 이끄는 군단의 진형 너머, 백화곡의 입구를 에워싼 거대한 진법의 진원(陣源)을 향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포위망이 아니었다. 대지의 기운을 억누르고 무인의 내력을 고사시키는 천맹의 비전 진법, '정천결계진(定天結界陣)'이었다.
새롭게 깨달은 묵정기법의 공력이 전신을 타고 흐르고 있었으나, 지맥이 무너진 여파와 결계의 압박이 동시에 사공기의 단전을 조여왔다.
'시간이 없다.'
남궁현의 가문은 이미 벼랑 끝에 섰고, 제갈무신의 음모는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이곳을 돌파하지 못한다면 참된 법도를 세우는 길은 영원히 묻히게 될 터였다.
사공기가 묵검을 비스듬히 내려 잡았다. 검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안광과 검은 기류가 대지를 쓸어내렸다.
"협(俠)을 참칭하는 무리치고, 그 끝이 온전한 자를 보지 못했다."
사공기의 차가운 음성이 전장에 내려앉았다.
"너희가 세운 거짓의 성벽을, 오늘 이 검으로 무너뜨리겠다."
그 오만한 선언에 악양이 손을 들어 올렸다.
"어리석은 마두 놈. 쏴라!"
그의 손이 내려가는 순간, 하늘을 뒤덮는 가공할 소음이 울렸다. 천맹의 정예 궁수들이 일제히 쏘아 올린 수천 발의 강궁(强弓)이 비구름처럼 허공을 메웠다. 그 화살촉 끝마다 정순한 강기가 맺혀 있어, 스치는 것만으로도 바위를 가루로 만들 기세였다.
동시에, 사공기의 발밑에서 정천결계진의 푸른 사슬들이 대지를 뚫고 솟구쳐 올라 그의 사지를 묶으려 들었다.
사면초가의 절체절명.
하늘에서는 화살 비가 쏟아지고, 땅에서는 내력을 억압하는 사슬이 조여오는 순간, 사공기의 묵검이 거대한 반원을 그리며 허공을 갈랐다.
그러나 그 찰나, 사공기의 심장 내부에서 예상치 못한 이질적인 고동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백화곡 깊은 곳, 무너진 비각의 심부에서 묵검의 공명에 반응하는 거대한 무언가가 깨어나는 진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