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철제 대검의 묵직한 날끝이 석벽의 먼지를 가르며 사공기의 심장부를 가리켰다. 구리기둥이 내려앉으며 내뿜은 자욱한 흙먼지 사이로, 청색의 서슬 퍼런 검기가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남궁세가의 가주이자 정파 최고의 천재로 칭송받는 남궁현의 안광은 처절하리만치 투명했다. 그 투명함 속에는 가문의 몰락을 막아야 한다는 무거운 생존의 멍에가 쇠사슬처럼 단단히 얽혀 있었다.

"사공기. 네 놈이 지닌 묵검의 사악한 인과와 천맹의 영을 거역한 죄, 오늘 이곳에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

남궁현의 목소리는 지하 밀실의 차가운 정적을 깨뜨리며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그의 검 끝이 미세하게 떨릴 때마다 푸른 내력의 파동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그러나 사공기의 안광은 흔들리지 않았다. 사공기는 남궁현의 대검 아래로 흐르는 청색 기운의 이면에 잠겨 있는, 제갈무신의 독문 조종식이 심어놓은 이질적이고 탁한 자줏빛 기운을 똑똑히 보았다. 그것은 숙주의 의지를 갉아먹으며 가문을 위한다는 위선 어린 사슬로 그를 옭아매고 있었다.

사공기의 손가락이 묵검의 검자루를 지그시 움켜쥐었다.

"남궁의 천재가 결국 위선자의 사냥개가 되기로 자처했는가."

낮고 메마른 음성이 사공기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감정을 철저히 배제하려는 '멸정무정'의 심법이 그의 전신을 타고 흐르며 차가운 극음의 공력으로 굳어졌다.

그 순간, 굳게 닫힌 구리기둥 뒤편의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발소리가 일제히 일어났다. 사방의 석벽 틈새와 그늘진 통로에서 푸른 무복을 입은 남궁세가의 정예 고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손에는 저마다 푸른 광채를 발하는 보검이 들려 있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그들의 보법은 남궁세가의 비전 진법인 '제왕창해진(帝王滄海陣)'의 전조였다.

"가주를 보좌하라! 마두를 포위해라!"

남궁세가의 장로급 무사가 외치자, 수십 명의 무인이 일제히 사공기와 그의 뒤에 선 연조희를 겹겹이 에워쌌다. 공기가 얼어붙듯 무거워졌다. 사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기가 거대한 밀실의 천장을 짓눌렀다.

연조희는 품에 안은 장부를 필사적으로 움켜쥐며 사공기의 등 뒤로 바짝 밀착했다. 그녀의 호흡이 가빠졌으나, 사공기의 등은 마치 거대한 태산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사공기, 조심해라. 저들의 진법은 남궁세가가 자랑하는 창해의 거친 파도와 같다. 한 번 휩쓸리면 빠져나올 구멍이 없어."

연조희의 경고에도 사공기는 묵묵히 묵검을 반쯤 뽑아 들었을 뿐이다. 검신이 칼집을 빠져나오며 스산한 묵색의 검광이 밀실 바닥을 누볐다. 백화곡에서 얻은 극음의 무학이 그의 단전에서 소용돌이쳤다.

이들을 모두 베어 넘기면 간단할 터였다. 하지만 묵검의 저주는 가혹했다. 검에 닿아 목숨을 잃은 자들의 원한과 가문의 집착, 그리고 죽어가는 순간의 비명이 고스란히 사공기의 뇌리로 역류할 것이다. 그것은 다시금 그의 기혈을 뒤틀어놓고 심마의 늪으로 밀어 넣을 독약이었다.

'지정(至情)은 무정(無情)에 들고, 살인(殺人)은 지인(持人)에 달했다.'

백화곡 비각 벽면에서 읽었던 미완성의 묵검 구절이 사공기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살인을 하되 사람을 살리는 법을 취한다. 살생을 배제한 완벽한 억압. 그것이야말로 묵정기법의 역류를 막고 저들의 위선을 깨부술 유일한 길이었다.

"어리석군."

사공기가 묵검을 완전히 뽑아 들었다. 칠흑 같은 검신이 허공을 가르자, 남궁현의 눈빛이 매섭게 좁혀졌다.

"진(陣), 기(起)!"

남궁현의 호령과 함께 남궁세가의 정예들이 일제히 검을 휘두르며 쇄도했다. 수십 자루의 보검이 만들어낸 푸른 검막이 거대한 파도처럼 사공기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사방이 푸른 내력으로 가득 차 한 치의 틈동 서지 않는 절체절명의 형세였다.

사공기의 신형이 유령처럼 흐려졌다.

그는 정면으로 다가오는 파도를 피해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파도의 가장 거센 중심부를 향해 몸을 던졌다. 묵검이 허공에서 기묘한 반원을 그리며 묵색의 궤적을 남겼다.

첫 번째 초식, 묵적동류(墨迹同流).

사공기는 날카로운 검날 대신 넓적한 검면을 눕혀 사용했다. 쇄도하던 첫 번째 무사의 검날이 사공기의 검면에 닿는 순간, 쇠와 쇠가 부딪치는 굉음이 아닌 진흙에 돌이 빠지는 듯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적의 검세가 사공기의 묵검으로 그대로 흘러들어 흡수되었다.

"윽?!"

무사는 자신의 내력이 허공으로 증발해 버린 듯한 기괴한 감각에 경악했다. 사공기는 지체하지 않고 검자루를 가볍게 비틀었다. 묵검의 검날이 아닌 검등이 무사의 오른쪽 어깨관절을 정확히 내리쳤다.

콰드득!

어깨뼈가 어긋나는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무사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뒹굴었다. 살생이 아니었다. 경맥의 흐름을 차단하고 관절을 어긋나게 하여 무기를 쥘 힘만을 완벽히 빼앗는 정밀한 타격이었다.

"흩어지지 마라! 진법을 유지해라!"

남궁세가의 고수들이 소리치며 다시금 검망을 좁혀왔다. 세 명의 무인이 좌우와 후방에서 동시에 사공기의 요혈을 노리고 검을 찔러왔다. 검 끝에서 뿜어지는 창해검기가 사공기의 살죽을 찢어발길 듯한 기세였다.

사공기는 한 걸음 내딛으며 몸을 회전시켰다. 그의 발끝이 바닥의 먼지를 쓸며 둥근 궤적을 그렸다.

두 번째 초식, 천라지망(天羅地網).

묵검에서 뿜어져 나온 묵색의 내력이 그물망처럼 뻗어 나가 무사들의 보검을 휘감았다. 검과 검이 얽히며 발생하는 불꽃 속에서 사공기는 유려하게 신형을 꺾었다. 그의 손끝이 번개처럼 뻗어 나가 찔러 들어오는 무사들의 손목 관절을 정확히 짚었다.

탁! 탁! 탁!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세 고수의 손목이 그대로 꺾이며 보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공기는 멈추지 않고 그들의 무릎 관절을 차례로 걷어찼다.

"아악!"

무릎 뼈가 탈골되는 고통에 세 무인이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단 한 명의 목숨도 빼앗지 않았으나, 그들의 전투 능력은 완전히 상실되었다. 남궁세가가 자랑하던 제왕창해진이 단 두 초식 만에 사방으로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남궁현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정파 최고의 천재라 불리며 수많은 전장을 누벼온 그였으나, 이토록 정교하고 자비 없는 무력은 생전 처음 마주하는 것이었다. 적을 죽이지 않으면서도 수십 명의 정예 고수들을 단숨에 무력화하는 검술. 그것은 단순한 살인귀의 검이 아니었다. 무학의 극의에 닿은 자만이 펼칠 수 있는 신화적인 압도였다.

"이 괴물 같은 놈...!"

남궁현이 대검을 양손으로 움켜쥐며 도약했다. 그의 전신에서 청색의 내력이 광포하게 폭발했다. 제갈무신의 독문 조종식이 그의 단전을 자극하자, 남궁현의 눈동자가 잠시 자줏빛으로 물들며 가공할 파괴력을 내뿜었다.

"창해파공참(滄海破空斬)!"

하늘을 가르고 바다를 찢을 듯한 일격이 사공기의 머리 위로 낙하했다. 대검의 무게와 남궁현의 전 공력이 실린 가공할 초식이었다. 밀실의 석벽이 대검의 풍압만으로도 균열을 일으키며 무너져 내렸다.

사공기는 피하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에 남궁현의 절박함과 그 뒤에 숨겨진 추악한 지략가의 손길이 비쳤다.

'가문의 구원이라 믿는 것이 결국 파멸의 밧줄임을 모르는가.'

사공기는 묵검을 비스듬히 세웠다. 세 번째 초식, 묵정환원(墨情還元).

남궁현의 파괴적인 대검이 사공기의 묵검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쾅-!

밀실 전체가 무너질 듯한 폭발음이 일어났다. 그러나 사공기는 한 걸음도 뒤로 밀려나지 않았다. 오히려 남궁현의 대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포한 창해공력을 묵검의 검신으로 고스란히 흡수해 들였다. 묵검이 검은 빛을 발하며 남궁현의 내력을 빨아들였다.

그와 동시에 남궁현의 대검 날에 미세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지난번 대결에서 사공기가 심어두었던 균열이었다. 그 균열 틈새로 제갈무신이 남궁현의 기혈에 심어두었던 이질적이고 탁한 독기가 검은 안개처럼 흘러나왔다.

"이, 이것은...?"

남궁현이 자신의 검에서 흘러나오는 기괴한 탁기를 보며 눈을 부릅떴다. 그의 단전이 뒤틀리며 극심한 통증이 가슴을 짓눌렀다.

사공기는 흡수한 공력을 그대로 남궁현의 대검으로 되돌려 보냈다. 그러나 살상력이 배제된, 순수한 충격파였다.

투웅-!

남궁현의 신형이 허공에서 뒤로 날아가 석벽에 거칠게 부딪쳤다. 대검이 그의 손에서 벗어나 바닥에 꽂히며 쟁그랑 소리를 냈다. 남궁현은 가슴을 움켜쥔 채 붉은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커흑...!"

그의 호흡이 거칠게 떨렸다.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이미 모두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단 한 명의 살생도 없이, 단 세 초식 만에 천맹 최고의 천재와 남궁가의 정예가 완벽하게 제압당한 것이다. 밀실 안에는 쓰러진 무인들의 밭은 신음만이 가득했다.

사공기는 천천히 남궁현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검은 무복자락이 먼지 날리는 바닥을 쓸었다. 남궁현은 짓밟힌 자존심과 가문을 구하지 못했다는 절망감에 휩싸여 사공기를 노려보았다.

"죽여라... 차라리 나를 죽여라.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고 살아남을 수는 없다."

남궁현의 목소리에는 뼈를 깎는 듯한 수치심이 서려 있었다.

사공기는 대답 대신 품속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연조희가 전해주었던 비밀 장부의 사본과, 제갈무신이 남궁세가를 꼭두각시로 쓰기 위해 작성했던 위선적인 계약 증명서를 꺼냈다.

사공기가 무심히 손을 뿌리자, 장부와 서류들이 남궁현의 품 안으로 툭 떨어졌다.

"가문의 생존을 위해 몸을 던진 대가가 무엇인지 똑똑히 보아라."

사공기의 어조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남궁현은 본능적으로 품에 떨어진 종이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장부의 첫 장에 닿는 순간, 그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장부에는 제갈무신이 융천상단을 멸문시키고 그 재산을 어떻게 천맹의 군자금으로 세탁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남궁세가를 부추겨 방패막이로 삼으려 했던 모든 음모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심지어 남궁세가의 장로 중 일부가 제갈무신에게 매수되어 가주인 남궁현을 감시하고 조종하려 했다는 밀약서까지 첨부되어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제갈맹주께서... 우리 가문을 위해..."

남궁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가문을 구원할 유일한 줄기라 믿었던 천맹의 손길이, 사실은 남궁세가를 완전히 파멸시키고 자신들의 꼭두각시로 만들기 위한 올가미였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고결함을 자부하던 그의 영혼에 수치심과 동요가 폭풍처럼 몰아쳤다. 자신이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행했던 모든 일들이 실상은 위선자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광대극에 불과했다는 진실이 그의 가슴을 찢어발겼다.

"믿고 싶지 않다면 그 종이를 찢어버려라.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다면 가문의 몰락과 함께 위선의 무덤으로 들어가는 것도 방법이겠지."

사공기는 등을 돌렸다. 그가 내뱉은 무정한 언사는 남궁현의 심장에 칼날처럼 박혔다.

남궁현은 장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종이가 구겨지며 그의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피가 배어 나왔다. 분노와 배신감, 그리고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자괴감이 그를 집어삼키려 했다.

그가 피를 토하듯 신음을 내뱉으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쉬이이익-!

밀실 입구의 구리기둥 너머, 짙은 어둠 속에서 불길한 파공음이 지하실의 공기를 갈랐다.

사공기의 안광이 매섭게 빛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연조희의 어깨를 잡아 자신의 등 뒤로 끌어당겼다.

화약 타는 냄새가 매캐하게 밀실 내부로 스며들었다. 어둠 속에서 붉은 안광을 번뜩이는 형체들이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손에는 정파의 무인들이 결코 사용하지 않는, 사악하고 파괴적인 화약 무기인 ' 벽력탄(霹靂彈)'과 철제 화통이 쥐어져 있었다.

천맹이 은밀히 고용한 피에 굶주린 무자비한 도살 침투조, 바로 '사악의 무리'들이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사공기를 제압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제갈무신이 배치해 둔 사냥개들이었다.

사악의 무리 중 대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기괴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흐흐흐... 남궁세가의 천재도 결국 쓸모없는 폐품이 되었군. 가주님, 그리고 사공기. 제갈 맹주님의 뜻에 따라 이곳을 너희들의 거대한 무덤으로 만들어주마."

철제 화통의 총구가 사공기와 쓰러진 남궁현을 향해 일제히 조준되었다. 화통 끝에서 붉은 불꽃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피할 곳 없는 비좁은 밀실 안에서 화약 병기가 폭발한다면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위선자들의 진짜 발톱이 마침내 그 무자비한 실체를 드러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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