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이것은 단순한 여인의 장신구가 아니오."

연조희의 목소리가 석굴 안의 깊은 정적을 갈랐다. 촛불 한 자락에 의지한 어둠 속에서, 그녀의 손가락 끝이 가리킨 붉은 마노 비녀의 은사 세공이 가늘게 명멸했다. 슬픔을 머금은 듯한 붉은빛이 사공기의 무표정한 얼굴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십 년 전, 천맹의 배후에 의해 멸문당한 비운문(悲運門). 그리고 그 가주의 직속 시녀였던 설아. 우진산이 그토록 이 비녀를 쫓았던 이유가 마침내 맞춰지는구려."

사공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품 안에서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던 묵검의 검신이 미세하게 공명하는 것을 느꼈다. 검 끝에서 전해지는 것은 단순한 진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억울하게 명을 달리한 자의 끊어질 듯한 비명이었고, 단전을 짓누르는 차가운 납덩이 같은 저주의 무게였다. 우진산을 벨 때 흘러들어온 망자의 기억이 그의 기혈을 꽉 막고 있었다. 전신이 굳어가는 고통 속에서도 사공기의 눈빛은 여전히 칼날처럼 차가웠다.

"제갈무신."

사공기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이름은 낮고 무거웠다. 천맹의 군사이자, 정사와 사패의 균형을 조율한다는 허울 좋은 명분 뒤에 숨은 거대한 위선자. 그 이름이 석굴의 벽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졌다.

연조희는 비녀를 소중히 감싸 안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눈동자에 서린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역사를 기록하는 자로서의 서슬 퍼런 의지였다.

"제갈무신이 비운문을 지우고 가로챈 군자금의 행방, 그리고 그 추악한 장부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소. 화산파의 영내 깊숙한 곳, 지부의 지하 밀실이 바로 그 장소요. 우진산이 죽었으니 지금이 적기요. 그곳의 방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야 하오."

사공기는 묵묵히 몸을 일으켰다. 기해(氣海)가 막혀 평소의 반절도 쓰지 못하는 신형이었으나, 그의 걸음걸이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타인과 정을 맺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 그리고 과거 동료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부채감이 고독한 어깨 위에 무겁게 얹혀 있었다.

"길을 인도해라."

단 한 마디의 말만을 남긴 채, 사공기는 묵검을 쥐고 석굴 밖의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

밤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화산파 지부의 외곽. 장원의 뒤편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맞닿아 있어 인적이 드물었다. 그러나 음습한 기운이 감도는 바위 절벽의 틈새로 미세하게 새어 나오는 등불의 흔적이 보였다.

연조희는 바위 뒤에 몸을 숨긴 채 손가락으로 절벽 하단을 가리켰다.

"저기요. 겉보기에는 평범한 창고 같지만, 저 바위 틈새로 이어지는 지하 통로가 화산파가 감춰둔 제갈무신의 비밀 밀실이오. 평소라면 화산파의 정예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겠지만, 지금은 우진산의 급사로 인해 경비가 어수선하오."

사공기의 눈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그의 시선 끝에 창고 입구를 지키는 무인 세 명의 움직임이 걸려들었다. 비록 내력이 온전치 못하나, 백 년 전 검마의 절예를 이어받은 그의 감각은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있었다.

스스슥.

소리도 없이 사공기의 신형이 안개 속으로 녹아들었다. 가볍고도 빠른 신법은 마치 밤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그림자와 같았다. 경비를 서던 무인들이 기척을 느끼고 검자루에 손을 올리기도 전에, 사공기의 손가락이 그들의 기혈을 정확히 짚고 지나갔다.

탁, 탁, 탁.

세 명의 무인은 비명 한 자락 지르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사공기는 쓰러지는 이들의 신형을 가볍게 받아 땅바닥에 뉘어놓았다. 불필요한 살생은 피한다. 그것은 묵검의 저주를 덜기 위함이기도 했으나, 그가 고집스럽게 고수하는 협(俠)의 방식이기도 했다.

"손이 참으로 빠르구려."

연조희가 소리 없이 다가와 창고의 무거운 목문을 밀었다. 문이 열리자 쾌쾌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지하로 이어지는 돌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어둠을 헤치고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 밀실은 생각보다 넓고 음산했다. 사방의 벽면에는 천맹의 상징인 청천문(靑天紋)이 선명하게 음각되어 있었으나, 바닥에 뒹구는 궤짝들과 먼지 쌓인 집기들은 이곳이 추악한 거래의 온상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사공기는 걸음을 멈추었다. 밀실 가장 깊은 곳, 썩어가는 짚더미와 부서진 가구들이 뒤엉킨 구석에서 이질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의 뇌리를 찌르는 날카로운 비명. 우진산을 벨 때 들었던 그 가녀린 여인의 울부짖음이 다시금 이명처럼 고막을 때렸다. 단전이 뒤틀리며 극심한 통증이 엄습하자, 사공기는 가슴을 움켜쥐고 비틀거렸다.

"사공 소협!"

연조희가 걱정스러운 듯 다가서려 했으나, 사공기는 검자루를 쥔 손을 들어 그녀의 접근을 막았다.

그는 천천히 짚더미로 다가갔다. 먼지와 오물 속에 반쯤 묻혀 있는 백골이 보였다. 가늘고 작은 뼈마디. 십 년의 세월 동안 차가운 지하 바닥에서 잊혀 간 가련한 혼백, 비운문의 시녀 설아의 유골이었다.

그녀의 뼈는 처참하게 뒤틀려 있었다. 죽기 직전까지 가해진 고문과 핍박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고골(枯骨)이었다. 사공기는 무릎을 꿇었다.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형언할 수 없는 무거운 감정이 솟구쳤다. 동료들을 지키지 못했던 과거의 기억이 이 가련한 백골 위에 겹쳐 보였다.

사공기는 품 안에서 피비린내 나는 붉은 마노 비녀를 꺼냈다. 우진산의 품에서 회수했던, 그리고 이 불행한 여인이 죽는 순간까지 움켜쥐려 했던 유일한 증표.

"늦어서 미안하구나."

사공기의 목소리는 낮고 낮았다. 감정을 끊어내야 하는 멸정무정의 계율을 따르고자 했으나, 억울한 자의 눈물을 외면하지 못하는 그의 본성이 비녀를 쥔 손끝을 타고 흘러내렸다.

사공기는 조심스럽게 붉은 마노 비녀를 백골의 손가락뼈 사이에 쥐여주었다.

그 순간이었다.

윙-!

석벽 전체가 공명하듯 거대한 울림이 지하 밀실을 가득 채웠다. 묵검이 제 스스로 검집에서 반쯤 빠져나오며 찬연한 묵색의 광채를 뿜어냈다. 동시에 백골에 닿은 비녀로부터 투명하고 푸른 기운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살기 어린 원념이 아니었다. 십 년 동안 갇혀 있던 원한이 마침내 제 자리를 찾고 해원(解冤)되는 순간의 숭고한 맑음이었다.

스아아아-.

설아의 원혼이 사공기의 머리맡을 감싸 안듯 허공을 맴돌았다. 귀를 찢던 비명 환청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맑고 고요한 바람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원혼은 묵검의 검신으로 서서히 스며들었다.

검마의 저주받은 무공, 묵정기법은 벨 때마다 망자의 심마를 떠안아야 하는 가혹한 굴레였다. 그러나 지금, 사공기가 행한 진심 어린 구원과 법도는 저주의 법칙을 완전히 뒤흔들었다. 망자의 원념이 해소되자, 묵검에 깃들어 있던 탁기가 순식간에 정화되며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깊은 극음(極陰)의 공력으로 화했다.

쿠구구구!

사공기의 단전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기해를 꽉 막고 있던 우진산의 탁기가 극음의 조화로운 기세에 밀려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막혀 있던 혈도가 넓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전신의 경맥이 폭포수를 만난 가뭄의 대지처럼 급격히 팽창했다.

"음...!"

사공기의 입에서 묵직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전신의 피부가 투명하게 비치며 검은 기류와 푸른 기류가 교차했다. 단전의 크기가 두 배 이상 커지며 내력이 폭발적으로 증폭되었다. 이른바 역이전권(逆移轉權). 망자의 은원을 풀어줌으로써 그 인과를 자신의 순수한 무력으로 치환하는 묵정기법의 참된 극의가 실현된 것이다.

두 단계 이상의 급격한 무학 격상. 사공기는 몸을 관통하는 압도적인 힘의 흐름을 느꼈다. 굳어 있던 손끝에 생기가 돌았고, 눈동자는 한층 더 깊고 그윽한 심연을 담아냈다. 묵검의 저주가 가져다준 고통이, 그의 도의적인 행동을 통해 절대적인 힘의 축복으로 돌아온 카타르시스적인 순간이었다.

연조희는 그 장엄한 광경에 압도되어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사공기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두텁고 날카로웠다.

"이것은..."

"원혼이 길을 열었다."

사공기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흐려져 있지 않았다. 묵검은 검집 속에서 완전히 침묵을 지키며 더욱 예리한 검력을 품고 있었다.

사공기는 백골을 향해 가볍게 묵도를 올린 뒤, 벽면으로 다가갔다. 공력이 격상되자 그의 감각은 벽 뒤에 숨겨진 미세한 공간까지 완벽하게 파악해 냈다.

그가 손을 뻗어 벽면의 특정 음각을 가볍게 누르자, 쿠르릉 소리와 함께 돌벽의 일부가 뒤로 밀려나며 은밀한 밀실이 나타났다. 그 안에는 먼지 하나 묻지 않은 고급스러운 비단 상자가 놓여 있었다.

상자를 열자, 수십 권의 장부와 밀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갈무신이 군소 방파들을 어떻게 멸문시키고 그 재산을 천맹의 군자금으로 세탁했는지 기록된 불법 장부였다. 천맹의 도덕적 실체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는 치명적인 무기였다.

"찾았구려!"

연조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장부를 집어 들었다. 그녀의 손끝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이것만 있으면 제갈무신의 위선을 천하에 폭로할 수 있소. 정파라는 이름 뒤에 숨은 추악한 괴물의 얼굴을..."

"서둘러라. 오래 머물 곳이 아니다."

사공기는 장부를 연조희의 품에 안겨주며 차갑게 말했다. 힘을 얻었으나 그의 경계심은 늦춰지지 않았다. 오히려 공력이 높아진 만큼, 지상에서 전해져 오는 불길한 기운이 더 생생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들이 장부를 챙겨 비밀 밀실의 출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쿵-!

지하 밀실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굉음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출구 쪽의 양옆을 지탱하고 있던 거대한 구리기둥 두 개가 육중한 쇠사슬 소리를 내며 아래로 내려앉았다. 통로가 완전히 차단되며 퇴로가 막혀버렸다.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가운데, 어둠 저편에서 차갑고도 날카로운 내력의 파동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청색의 예리한 기운. 그것은 사공기가 이전에 마주했던 정파 최고의 천재가 지닌 독문 내력이었다.

사공기는 묵검의 검자루를 잡았다. 전신을 감도는 정화된 극음의 내력이 검신으로 유려하게 흘러들었다.

자욱한 먼지 안개를 뚫고, 한 사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단정하게 묶어 올린 머리칼, 처절함과 고결함이 동시에 깃든 눈빛, 그리고 양손으로 쥐고 있는 거대한 철제 대검. 남궁세가의 가주이자 정파 최고의 후기지수, 남궁현이었다.

그의 대검 끝에서는 푸른 검기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푸른 내력의 밑바닥에는 사공기의 눈에만 보일 듯한, 제갈무신의 독문 조종식이 심어놓은 이질적이고 탁한 기운이 사슬처럼 얽혀 있었다. 가문의 구원과 생존이라는 무거운 멍에를 짊어진 채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천재의 모습이었다.

남궁현이 사공기를 바라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거역할 수 없는 가문의 명운과, 사공기를 베어야만 가문을 살릴 수 있다는 처절한 의지가 실려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가문의 명예를 짓밟고 천맹의 장물을 훔치려 하다니. 사공기, 더 이상은 묵과할 수 없다. 여기서 너의 대죄를 묻겠다."

남궁현의 철제 대검이 바닥을 긁으며 검붉은 불꽃을 일으켰다. 퇴로가 차단된 밀실 내부의 공기가 터질 듯 팽팽하게 당겨졌다.

사공기는 묵묵히 묵검을 반쯤 뽑아 들었다. 이제 막 격상된 그의 극음공력과, 가문의 생존을 위해 온몸을 던진 남궁현의 파멸적인 검세가 좁은 지하실에서 충돌하기 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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