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우진산의 기억 속에 떠오른 원한의 독기가 사공기의 혈도를 막아선 순간, 남궁현은 무너진 가문의 중압감을 어깨에 짊어진 처절한 눈빛을 뿜으며 자신의 갈라진 검 끝을 사공기의 단전 정면으로 조준해 들어왔다.

빗줄기는 일말의 자비도 없이 사공기의 뺨을 때렸고, 그의 전신은 얼어붙은 강물처럼 굳어 있었다. 우진산이라는 악인이 평생 쌓아 올린 추악한 인과와 그가 도륙한 망자들의 곡소리가 사공기의 단전을 사정없이 헤집어 놓은 탓이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뼈가 부서지는 듯한 극통이 밀려왔다.

남궁현의 청색 검기가 어둠을 찢으며 일직선으로 쇄도했다. 그 기세는 화려하지 않으나 지극히 무거웠다. 가문의 흥망을 어깨에 짊어진 자만이 펼칠 수 있는, 한 치의 타협도 없는 필살의 일격이었다.

"이것이 네놈이 택한 길의 끝이다."

남궁현의 나지막한 음성이 빗소리에 묻혀 사공기의 귓가를 때렸다. 그의 검 끝이 사공기의 옷자락을 찢고 단전의 표피에 닿기 직전이었다.

사공기의 입술 사이로 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의 눈빛만큼은 밤바다처럼 깊고 고요했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사공기는 단전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이질적인 힘을 강제로 일깨웠다. 그것은 조금 전 우진산의 숨통을 끊으며 흡수했던, 화산파 고유의 순수하고 정대한 정파의 내력이었다.

정상적인 무인이라면 타인의 내력을 제 몸에서 함부로 운용하지 못한다. 하물며 그것을 역방향으로 터뜨리는 짓은 자폭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사공기가 익힌 무공은 백 년 전 천하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검마의 묵정기법(墨情氣法)이었다.

‘순(順)이 아니면 역(逆)으로 다스린다.’

사공기는 전신맥을 타고 흐르는 우진산의 정기(正氣)를 강제로 거꾸로 뒤집었다. 정순하던 화산의 기운이 찰나의 순간에 폭렬하는 마기로 변모하며 그의 경맥을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극심한 고통에 눈앞이 붉게 물들었으나, 사공기는 이를 악물고 그 폭발적인 반동을 묵검의 검신으로 밀어 넣었다.

쿠구구궁!

사공기의 발밑에서부터 검은 아지랑이가 폭풍처럼 피어올랐다. 이윽고 그의 묵검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뇌풍(雷風)이 사방을 뒤흔들며 폭발했다.

"나를 막아서지 마라."

사공기의 싸늘한 일갈과 함께, 검은 번개가 빗줄기를 뚫고 남궁현의 쇄도하는 검세를 정면으로 타격했다.

콰아아앙!

정파 무공의 극의인 창궁무애지(蒼穹無碍指)의 이치를 역이용한 일격이었다. 기를 모아 찌르는 남궁현의 손끝과 검날의 접점에, 거꾸로 뒤틀린 화산의 내력이 정확히 맞물려 들어갔다. 빈틈없는 기의 흐름을 역방향으로 흐트러뜨리는 파극(破極)의 검세였다.

남궁현의 안색이 급변했다. 검 끝에서부터 시작된 기괴한 진동이 그의 손목을 타고 올라와 어깨뼈를 뒤흔들었다. 정대한 정파의 힘이 이토록 추악하고도 압도적인 폭력으로 환원되어 자신을 덮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 이 무슨...!"

남궁현의 필살 지풍은 형편없이 분쇄되었고, 그의 신형은 뒤로 대여섯 걸음이나 밀려났다. 그를 호위하던 남궁세가의 정예 무사들 역시 사방으로 비산하는 검은 뇌풍의 여파에 휩쓸려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빗속에 홀로 우뚝 선 남궁현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가문의 명예를 걸고 펼친 일격이 단 한 번의 기괴한 반격에 무참히 무너진 순간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깊은 허탈감과 부정할 수 없는 패배감이 번져갔다.

그러나 사공기 역시 온전할 리 없었다. 역맥을 도발한 대가로 전신의 혈도가 터져 나가는 듯한 충격이 고스란히 그를 덮쳤다. 입안 가득 고이는 비릿한 피를 삼키며, 사공기는 대지를 박차고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그의 신형은 검은 안개처럼 빗속으로 녹아들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남궁현은 멀어지는 사공기의 잔상을 바라보며 검을 꽉 쥐었다. 추격하려 발을 내딛으려 했으나, 묵검의 여파로 뒤틀린 내력이 단전을 압박해 입가로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소가주님! 추격해야 합니다!"

수하의 외침에 남궁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의 시선은 사공기가 사라진 어두운 숲을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멈춰라. 이미 기세를 잃었다. 그리고... 저자의 검은 단순한 마공이 아니다."

남궁현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처절함과 묵직한 의문이 서려 있었다.

***

빗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대신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수천 명의 망자가 내지르는 비명과 통곡이었다.

사공기는 젖은 흙바닥을 구르며 신음했다. 우진산의 사념은 끈질기게 그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다. 살해당한 민초들의 억울한 눈빛과 우진산이 품었던 비열한 탐욕이 뒤엉켜 사공기의 뇌리를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전신이 얼음물에 담긴 것처럼 차갑게 식어갔다. 묵정의 저주가 임계점에 도달한 상태였다.

"이보시오! 정신 차리시오!"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푸른 학창의를 걸친 여인, 연조희였다. 그녀는 사공기의 무너지는 몸을 부축하려 힘겹게 무릎을 꿇었다.

"손... 치우라고 했을 텐데."

사공기는 갈라진 목소리로 밀어내려 했으나,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타인과 온기를 나누는 순간, 멸정무정(滅情無情)의 계율이 깨지고 묵검에 깃든 원혼들이 비집고 들어올 터였다. 그는 철저히 고독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운명이었다.

"염려 놓으시오. 빚쟁이가 죽으면 밀린 이자는 어디서 받겠소?"

연조희는 평소처럼 능글맞게 대꾸하면서도, 그녀의 손길만큼은 조심스럽고도 신속했다. 그녀는 사공기를 짊어지고 빗속을 헤치며 미리 준비해 둔 은밀한 거처로 향했다.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을 때, 사공기가 마주한 것은 차가운 돌벽과 은은하게 타오르는 촛불이었다. 축축한 지하 석굴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으윽..."

낮은 신음과 함께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몸이 통째로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피부 위로 허연 서리가 돋아나 있었다. 묵검의 저주가 기혈을 동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때, 따뜻한 온기가 그의 손목을 감싸 쥐었다.

연조희가 그의 곁바닥에 걸터앉아 침묵 속에 그의 맥을 짚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평소의 장난스러움은 간데없고, 오직 깊은 우려와 진지함만이 감돌았다.

"맥이 이토록 뒤틀리다니... 도대체 어떤 괴물과 싸우고 온 것이오?"

그녀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자신의 내력을 사공기의 손목을 통해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녀의 내력은 정파의 정순함도, 사파의 음독함도 아닌, 마치 따스한 봄바람처럼 부드럽고 온화한 기운이었다.

"그만둬라. 내 안의 기운이 네놈을 삼킬 것이다."

사공기가 이가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 타인의 선의를 받아들이는 순간, 마음에 작은 틈이라도 생기는 날에는 단전에 갇힌 원념들이 폭발할 것이 뻔했다. 과거, 자신의 방관과 오만으로 인해 처참하게 죽어갔던 옛 동료들의 얼굴이 환영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 부채감이 다시금 그의 심장을 옥죄었다.

그러나 연조희는 손을 떼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힘주어 그의 손을 잡았다.

"삼켜지든 말든, 내 알 바가 아니오. 다만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붓만 굴리는 역사는 도리에 어긋나니까."

그녀의 따스한 내력이 사공기의 차가운 경맥을 타고 완만하게 흘러들었다. 그 기운은 얼어붙은 핏줄을 부드럽게 녹여내며, 묵검의 흉포한 박동을 서서히 잠재웠다. 기이하게도 그녀의 온기가 닿을 때마다, 뇌리를 찢던 망자들의 비명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사공기는 가슴 깊은 곳에서 정체 모를 괴로움을 느꼈다. 이 따스함이 두려웠고, 동시에 이 온기에 의지하고 싶어지는 자신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그는 질끈 눈을 감으며 스스로를 더욱 깊은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

어둠 속에서, 우진산의 기억 조각들이 마침내 완전히 해체되며 하나의 거대한 그림을 완성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융천상단 참극의 무대 뒤에서 독선적인 그림자를 흔들며 정사를 지휘하는 맹약의 지배자의 정체였다.

"제갈... 무신..."

사공기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우진산의 영혼이 남긴 마지막 잔상은 명백히 가리키고 있었다. 융천상단을 멸문시키고 그 막대한 자금을 천맹의 군자금으로 세탁하려 했던 자. 정파와 사파의 갈등을 조율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군소 방파들을 소모품으로 던져 제 사리사욕을 채우는 천맹의 지략가.

그 위선자의 이름이 묵검에 삼켜진 혼령들의 피 맺힌 합창을 통해 사공기에게 완벽하게 도해되었다. 천맹의 명분론이라는 화려한 비단 뒤에 숨겨진 추악한 진실이 마침내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정신이 좀 드시오?"

연조희의 목소리에 사공기는 서서히 눈을 떴다. 몸을 덮고 있던 서리는 어느새 녹아내려 물방울이 되어 있었다.

연조희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은 사공기의 품바닥에서 떨어져 나온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붉은 마노 비녀였다.

사공기가 융천상단에서 회수했던, 그리고 숨을 거둔 시녀 설아의 한이 서려 있는 물건.

연조희가 조심스럽게 그 비녀를 집어 들어 촛불 가까이에 가져갔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비녀의 은제 세공 부분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녀의 영민한 눈동자가 이채를 띠며 격렬히 흔들렸다.

"이 문양... 역시 내 짐작이 맞았구려."

"무슨 소리냐."

사공기가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연조희는 비녀를 사공기의 눈앞으로 내밀며, 세공된 은 장식의 가장 안쪽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일반적인 장인들이 새기지 않는, 극히 미세하면서도 정교한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여인의 장신구가 아니오. 십 년 전, 천맹의 배후 세력에 의해 흔적도 없이 멸문당했던 '비운문(悲運門)'의 독문 표식이오. 그리고 이 은사(銀絲) 세공의 기법은 오직 비운문의 가주 직속 시녀들에게만 허락되던 것이지."

연조희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그녀는 사공기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이 비녀의 주인이었던 설아라는 시녀... 그녀가 죽기 직전까지 품고 있던 비밀이 무엇인지 아시오? 비운문이 멸문당할 당시, 가문의 비전 무공과 영토를 통째로 집어삼킨 막후의 인물이 누구인지 증명하는 밀서의 위치였소."

사공기의 묵검이 미세하게 공명하듯 웅웅 거렸다.

연조희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 밀서를 사주하고, 비운문을 마교의 세작으로 몰아 도륙한 자. 그리고 우진산을 시켜 이 비녀를 추적하게 만든 자... 그가 바로 천맹의 군사이자, 정사맹약의 설계자인 제갈무신(諸葛無臣)이오."

석굴 내부의 공기가 순식간에 동결된 듯 차갑게 가라앉았다. 제갈무신이라는 거대한 위선의 그림자가 사공기의 눈앞에 마침내 그 실체를 완전히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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