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빗줄기가 사납게 대지를 두들겼다. 타오르는 불길은 폭우 속에서도 기세를 잃지 않고 붉은 혀를 틔워 융천상단의 보루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자객의 검날이 어린 민초녀의 목덜미를 향해 무정하게 내리꽂히는 순간이었다. 소녀의 절규가 빗소리에 묻혀 사그라지려 했다.

사공기의 품속에 깊이 박혀 있던 붉은 마노 비녀가 기이한 맥동을 일으켰다. 가슴뼈를 뚫고 들어올 듯한 격렬한 떨림이었다. 심장 안쪽에 잠들어 있던 묵검이 그에 호응하듯 피를 갈구하며 요동쳤다.

외면하려 했던 고개는 이미 정면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감정을 끊어내야 하는 멸정무정(滅情無情)의 계율과, 전신을 타고 흐르는 묵정기법(墨情氣法)의 파괴적인 충동이 단전에서 격렬하게 충돌했다.

그 충돌의 틈바구니에서 뿜어져 나온 것은 오직 하나, 타협 없는 검은 기류뿐이었다.

스아아아아!

대지를 적시던 빗방울이 사공기의 전신에서 발산된 묵기에 밀려 허공에서 증발했다. 검은 안개가 비구름보다 더 짙게 피어오르는 찰나, 그의 신형이 제자리에서 사라졌다.

쉬익!

자객의 검날이 소녀의 목덜미에 닿기 직전, 칠흑 같은 검선(劍線) 하나가 허공을 수평으로 갈랐다. 소리도 없고 기척도 없는, 오직 죽음만을 목적으로 뻗어 나간 무음의 검세였다.

"억...!"

자객의 목에서 피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검을 쥐고 있던 사내의 신형이 단 한 치의 반동도 없이 바닥으로 무너졌다. 목덜미를 가른 검은 상처에서는 피조차 검게 물들어 비에 씻겨 내려갔다.

동료의 급작스러운 죽음에 다른 두 자객이 반사적으로 검을 치켜세웠으나, 사공기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걸음은 느린 듯했으나 매 걸음마다 보루의 잔해를 사정없이 짓밟으며 공간을 좁혔다. 축지(縮地)에 가까운 기묘한 신법이었다.

"어떤 놈이냐!"

자객 하나가 검을 세워 사공기의 가슴을 겨냥하고 찔러 들어왔다. 화산파의 독문 검식인 칠십이파검의 변식이었다. 검 끝이 수십 개의 꽃잎처럼 갈라지며 사공기의 전신 혈도를 노렸다. 기세는 웅장했으나, 사공기의 눈에는 그저 조잡한 몸부림에 불과했다.

사공기는 검을 크게 휘두르지 않았다. 왼손에 쥔 묵검의 검집 끝으로 쇄도하는 검날의 측면을 가볍게 툭 쳤을 뿐이다. 강(剛)함을 유(柔)함으로 흘려보내는 유체(流體)의 극의였다.

콰아아앙!

무거운 파열음과 함께 찔러 들어오던 자객의 검이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사내의 손목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선명하게 울렸다. 사공기는 튕겨 나간 자객의 가슴팍을 향해 오른손에 쥔 묵검을 그대로 밀어 넣었다.

푸학!

묵검의 검신이 사내의 흉판을 관통해 등 뒤로 돋아났다. 심장을 관통당한 자객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탁해졌다. 그와 동시에 묵검의 검신을 타고 차갑고 끈적한 기운이 사공기의 손목을 타고 역류해 들어왔다. 자객이 품고 있던 죽음에 대한 공포와, 위선적인 임무에 대한 맹목적인 신념이 의념의 형태로 뇌리를 때렸다.

'심마(心魔)인가.'

사공기는 이를 악물며 몰려드는 원념을 단전 밑바닥으로 눌러 내렸다. 그의 안광이 한 층 더 짙은 칠흑으로 물들었다. 검을 뽑아내자 사내의 몸은 낙엽처럼 바닥에 나뒹굴었다.

마지막 남은 자객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채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정파의 명숙이라 자부하던 자들의 기세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괴물을 마주한 짐승의 공포만이 그들의 얼굴을 지배했다.

사공기는 도망치려는 자객의 등 뒤로 검을 가볍게 뿌렸다. 검은 묵기가 빗줄기를 뚫고 화살처럼 날아가 사내의 척추를 관통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사내가 고꾸라졌다.

단 세 걸음.

세 명의 화산파 자객을 도륙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세 번의 호흡에 불과했다.

"누구냐! 정파의 대업을 방해하는 마교의 잔당이냐!"

보루 중앙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화산파의 지부장, 우진산이 사공기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그의 안색은 이미 하얗게 질려 있었다. 자신이 거느린 정예 자객들이 단숨에 목숨을 잃는 광경을 똑똑히 목격했기 때문이다.

사공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묵검의 끝에서 떨어지는 피가 빗물과 섞여 바닥에 검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그의 시선은 우진산을 지나, 그 뒤편 어둠 속에서 조용히 걸어 나오는 한 사내에게 머물렀다.

푸른 도포를 걸치고, 허리에는 남궁세가의 상징인 황금색 검집을 찬 젊은 무인.

남궁세가의 차기 가주이자 천맹 최고의 천재라 불리는 남궁현이었다. 그의 수려한 이목구비에는 가문의 운명을 양어깨에 짊어진 자 특유의 무겁고도 처절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남궁현은 차갑게 식은 화산파 무인들의 시신을 한번 훑어본 뒤, 사공기를 향해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검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청색의 검기는 화산파 무인들의 그것과는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장엄하면서도 흔들림 없는 제왕의 기세였다.

"무고한 자들의 피를 흘리며 정파의 대의를 논하는 자가 있군."

사공기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가라앉아 있어 빗소리 속에서도 또렷하게 고막을 파고들었다.

남궁현은 검을 비스듬히 내리며 대답했다.

"강호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때로 작은 희생이 불가피한 법. 사도를 걷는 자가 대의를 논하는 것만큼 가소로운 일은 없다."

"대의라."

사공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 대의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무고한 이들이 거름이 되었는가. 너희 남궁세가가 짊어진 그 잘난 가문의 명예도 결국 이 추악한 피 위에 세워진 탑이 아니더냐."

남궁현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사공기의 말은 가문의 몰락을 막기 위해 천맹의 더러운 뒤처리를 감수해야만 하는 그의 아픈 구석을 정확히 찌르고 있었다. 하지만 남궁현은 이내 마음을 다잡으며 검기를 폭발시켰다.

"닥쳐라. 네놈의 궤변에 흔들릴 가문이 아니다!"

스아아앙!

남궁현의 신형이 허공을 가르며 쇄도했다. 창천남궁세가의 비전, 제왕검형(帝王劍形)의 첫 초식인 '창천벽력(蒼天霹靂)'이 사공기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청색의 검류가 폭포수처럼 쏟아지며 사방의 공기를 찢어발겼다.

사공기는 피하지 않았다. 묵검을 비스듬히 치켜세우며 정면으로 맞받아쳤다.

콰아아앙!

두 검이 격돌하는 순간, 보루 전체가 뒤흔들리는 듯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몰아쳤다. 빗방울들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안개처럼 흩어졌다. 남궁현의 검에 실린 묵직한 가문의 생존 압박이 사공기의 검을 타고 전해졌다. 그것은 단순한 무공의 위력이 아닌, 처절하게 발버둥 치는 한 인간의 생(生)의 의지였다.

하지만 사공기의 묵정기법은 그 모든 것을 흡수하고 환원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남궁현의 청색 검기가 사공기의 검은 묵기에 부딪히는 순간, 서서히 그 빛을 잃고 흡수되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두 검이 팽팽하게 맞물려 살을 맞대고 있을 때, 사공기의 감각이 남궁현의 검날 깊은 곳에 숨겨진 이질적인 기운을 포착했다.

청색의 맑은 내력 밑바닥에 교묘하게 숨겨진, 탁하고 끈적한 녹색의 기운. 그것은 기혈을 미세하게 얽어매고 시전자의 의지를 조종하려는 독문 조종식(毒門 操縱式)의 흔적이었다. 남궁현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으나, 그의 검이 격돌할 때마다 미세한 균열 사이로 그 이질적인 독기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이것은... 천맹의 막후에서 심어둔 족쇄인가.'

사공기의 안광이 좁혀졌다. 남궁세가의 천재라 불리는 자조차 제갈무신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광대에 불과하다는 증거였다. 남궁현의 검 끝이 떨리고 있는 것은 가문의 중압감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를 갉아먹고 있는 정체불명의 독기 때문이기도 했다.

"네놈의 검에는 주인의 것이 아닌 사슬이 채워져 있군."

사공기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무슨 소리를...!"

남궁현이 이를 갈며 공력을 더 끌어올렸다. 청색의 검광이 더욱 거세게 타올랐으나, 이미 검의 흐름을 읽어낸 사공기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사공기는 남궁현의 검세를 유체처럼 가볍게 받아넘기며, 신형을 오른쪽으로 급격히 회전시켰다. 그의 목표는 처음부터 남궁현이 아니었다. 이 추악한 학살을 지휘하고 있는 원흉, 우진산이었다.

"장로님! 조심하십시오!"

수하의 비명이 들렸으나 이미 늦었다.

사공기는 대지를 박차고 도약했다. 그의 신형이 검은 번개가 되어 빗줄기를 뚫고 우진산의 본진 우측을 파고들었다. 우진산은 급히 화산파의 절예인 '칠십이파검'의 방어 초식을 펼치려 검을 가로막았으나, 사공기의 검세는 이미 그의 검막을 관통하고 있었다.

스윽.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사공기의 묵검이 우진산의 가슴뼈를 뚫고 들어가 심장에 박혔다.

우진산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그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왔다.

"네... 네놈은..."

그 순간, 묵검을 타고 우진산의 기억이 폭풍처럼 사공기의 뇌리로 흘러들기 왔다.

그것은 추악함의 극치였다.

화산파의 지부장이라는 명예를 지키기 위해 군소 방파의 자금을 갈취하고, 그들의 입을 막기 위해 사파의 소행으로 위장해 학살을 자행했던 기억들. 제갈무신의 밀령을 받고 융천상단을 멸문시켜 그들의 재산을 천맹의 군자금으로 상납하려 했던 음모. 그리고 자신을 믿고 따르던 수하들을 방패막이로 삼아 살아남으려 했던 비겁한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커헉...!"

사공기는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을 느끼며 검을 뽑아냈다. 우진산의 시신이 힘없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한 명의 악인을 처단했으나, 묵검의 저주는 고스란히 사공기의 몫이었다.

우진산이 평생 동안 쌓아 올린 추악한 원한과, 그에게 희생당한 수많은 망자들의 비명이 사공기의 전신 혈도를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아아악...!"

사공기는 자신도 모르게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기혈이 뒤틀리고 단전이 터져 나갈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전신의 내력이 순간적으로 봉인당한 것처럼 혈도가 딱딱하게 굳어갔다. 한 걸음조차 제대로 움직이기 힘든 절체절명의 상태였다.

빗속에서 우진산의 피를 머금은 묵검이 검붉은 광채를 발하며 불길하게 박동했다.

그때, 무거운 침묵을 깨고 남궁현이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는 동료를 잃은 슬픔보다, 가문의 생존을 위해 이 괴물을 반드시 처단해야만 한다는 처절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남궁현은 사공기의 기색이 급격히 쇠락했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남궁현이 검을 치켜세웠다. 갈라진 검 끝이 빗물을 가르며, 사공기의 굳어버린 단전 정면을 고정하듯 겨누었다.

"이것이 네놈이 택한 길의 끝이다."

남궁현의 목소리에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오직 처절한 의지만이 빗속을 가르고 사공기를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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