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덜미를 겨눈 붓끝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침잠하면서도 서늘했다. 살을 에듯 차가운 밤안개 속에서, 사공기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등 뒤에 선 여인, 백색 학창의를 걸친 연조희는 마치 어둠 속에서 피어난 환영처럼 소리 없이 미소 짓고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사공기의 척추를 타고 극도의 긴장감이 번져 나갔다. 검마의 흔적을 쫓는 무명의 사학자라 칭하기엔, 그녀가 쥔 모필 끝의 예기는 화산파의 정예 검수들이 뿜어내던 검막보다도 예리하고 단단했다.
"검마의 업을 짊어지고 사파의 검으로 정파를 베는 무사라. 참으로 흥미로운 기록표로군요."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는 맑았으나 뼈가 있었다. 사공기는 묵검의 자루를 쥔 손가락에 서서히 힘을 주었다. 기혈이 뒤틀려 전신이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서도, 그의 안광은 밤고양이처럼 번뜩였다.
"길을 잘못 들었군. 무덤을 기록하고 싶다면 다른 곳을 알아보아라."
사공기의 음성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호의든 적의든, 타인과의 관계는 그에게 독이자 파멸의 지름길일 뿐이었다. 멸정무정(滅情無情)의 계율을 어기는 순간, 뇌리를 옥죄는 망자들의 비명이 온몸의 경맥을 찢어놓을 터였다.
연조희는 가볍게 콧방귀를 꼈다.
"죽어가는 이의 고집치고는 제법 매섭군요. 하지만 그 뒤틀린 기혈을 방치했다간 다음 각을 넘기지 못하고 전신 뇌일혈로 절명할 텐데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의 소맷자락이 허공을 갈랐다. 파공음조차 없는 기괴할 정도로 신속한 손짓이었다. 연조희의 손끝에서 은빛 실선 세 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인간의 기혈을 다스리고 잠재우는 일등 가문들의 비전, 금침(金針)이었다. 침끝은 사공기의 목뒤에 위치한 아문혈(啞門穴)과 풍부혈(風府穴)을 정확히 지향하고 있었다. 기도를 강제로 열어 뒤틀린 내력을 진정시키려는 의도였다.
시전자의 의도는 선의였을지언정, 사공기 천생의 육체와 그 안에 깃든 검마의 마공은 타인의 기운이 침입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우웅-!
사공기의 단전 깊은 곳에서 검은 기류가 폭발하듯 솟구쳤다. 묵정기법(墨情氣法)의 자가방어 기제였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묵색의 진기가 끈적한 장막을 형성하며 대기를 짓눌렀다.
콰아아앙!
은밀하게 날아들던 세 대의 금침이 사공기의 몸에 닿기도 전에 흑색 진기와 충돌했다. 쇠로 만들어진 침들이 마치 뜨거운 화로에 던져진 얼음처럼 순식간에 녹아내리며 검은 가루가 되어 바닥으로 흩어졌다. 연조희가 디디고 있던 지면마저도 흑색 내력의 여파로 쩍쩍 갈라져 나갔다.
"이런... 괴물이 따로 없군요."
연조희는 급히 신형을 뒤로 세 걸음 물리며 학창의 자락을 정돈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자신의 자금침이 일격에 먼지가 되어 사라질 줄은 미처 예상치 못한 듯했다. 압도적인 무학의 격차였다. 비록 사공기가 부상을 입고 내력이 흐트러진 상태라 해도, 묵정기법의 절대적인 파괴력은 일개 학자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사공기는 천천히 몸을 돌려 연조희를 응시했다. 묵검의 끝이 대지를 향해 비스듬히 내려져 있었으나, 그가 뿜어내는 살기는 백화곡의 안개보다 짙었다.
"내 몸에 두 번 다시 손을 대지 마라. 다음은 네 목을 거두겠다."
"살려주려던 사람에게 참으로 가혹한 처사로군요. 하지만 사공 소협, 내 침을 거부한 대가는 뼈아플 텐데요?"
연조희는 붓을 소매 안으로 밀어 넣으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녀는 사공기의 살기등등한 기세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기상을 지니고 있었다.
"내 이름을 어찌 아는가."
"천하의 숨겨진 진실을 기록하는 백각(百閣)의 서생이 그 정도도 모를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백 년 전 강호를 피로 물들였던 검마 독고청의 절예, 그리고 벨 때마다 망자의 원혼을 짊어져야 하는 가혹한 인과의 검. 사공 소협, 당신은 지금 제 발로 파멸의 구렁텅이로 걸어가고 있는 겁니다."
사공기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묵정기법의 비밀을 이토록 정확히 꿰뚫고 있는 자를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연조희는 사공기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품속에서 낡은 죽간 하나를 꺼내 들었다.
"당신이 품에 넣은 그 붉은 마노 비녀. 그것이 누구의 물건인지 알고는 있습니까?"
사공기는 대답 대신 품속의 비녀를 손끝으로 느꼈다. 여전히 차갑고 단단한 감각이었지만,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원념의 파동은 그의 심장을 쥐어짜고 있었다.
- 살려주세요... 제발... 장로님...!
머릿속에서 가냘픈 여인의 비명이 이명처럼 울렸다. 기혈이 요동치며 입안 가득 비린 피가 고였다. 사공기는 억지로 피를 삼키며 연조희를 쏘아보았다.
"말해라."
"그 비녀의 주인은 '설아'라는 이름의 여인이었습니다. 화산파 지부의 시녀였지요. 그녀는 우진산 장로가 정파의 명예 뒤에서 저지르고 있던 추악한 비밀 거래를 목격했다는 이유만으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우진산은 그 범죄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또 다른 학살을 준비하고 있지요."
연조희의 목소리가 낮고 무거워졌다. 평소의 능글맞은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오직 역사관의 준엄함만이 서려 있었다.
"또 다른 학살이라니."
"융천상단(融天商團)입니다. 그곳은 겉으로는 평범한 상단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강호의 핍박을 피해 모여든 무고한 백성들과 갈 곳 없는 하급 무인들이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피난처나 다름없는 곳이지요. 우진산은 자신이 사파와 결탁해 무기를 밀매해 온 장부를 감추기 위해, 그 상단 전체를 사파의 첩자로 몰아 몰살하려 합니다. 정사맹약의 이면을 가리기 위한 핏빛 제물로 삼으려는 것이지요."
연조희의 폭로는 가차 없었다. 정파의 명숙이라 불리는 화산파의 장로가 자신의 치부를 덮기 위해 수백 명의 민초를 도륙하려 한다는 사실은, 강호의 도의를 믿는 자들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사공기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지? 정파의 위선과 사파의 잔혹함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는 검을 거두며 몸을 돌려 백화곡의 출구를 향해 걸음을 옮기려 했다. 타인의 은원에 깊게 관여하는 것은 멸정무정의 계율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묵정의 저주를 더욱 깊게 만들 뿐이었다. 그에게는 오직 제 한 몸 보존하여 도의의 검을 닦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이었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채 세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멈춰 섰다.
두근! 두근!
품속에 있는 붉은 마노 비녀가 마치 살아 숨 쉬는 심장처럼 강렬하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뇌리 속에서 잠들어 있던 망자들의 원혼이 일제히 깨어나 절규했다.
- 피를... 피를 흘리게 한 자들에게 복수를...! - 우진산의 목을 베어라! 그자의 피로 나의 한을 씻어다오! - 가야 한다... 융천상단으로 가야 해...!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이 사공기를 덮쳤다. 그의 눈가가 붉게 충혈되었고, 전신의 경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묵정의 저주였다. 비녀의 주인인 설아의 원한이, 그리고 그녀와 연관된 융천상단의 비극이 사공기의 인과를 옥죄고 있었다. 이 인과를 현실에서 풀어주지 않는다면, 그의 내력은 폭주하여 전신 골육이 파괴될 것이 분명했다.
기연으로 얻은 가공할 힘의 대가는 이토록 가혹하고 무거웠다.
사공기는 이를 악물었다. 그의 입가로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렸다.
"크윽..."
연조희가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며 말했다.
"그 검은 공짜가 아닙니다, 사공 소협. 억울하게 죽어간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않는다면, 그 검이 먼저 당신의 영혼을 갉아먹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묵검의 인과론이지요. 가기 싫어도 가야만 할 겁니다. 당신의 목숨을 위해서라도."
사공기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묵검의 자루를 꽉 쥐었다. 손가락뼈가 하얗게 드러날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결코... 선의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그의 목소리는 스스로를 다잡는 다짐과도 같았다. 타인에 대한 온정이나 동정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이 빌어먹을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기맥을 보존하기 위해 움직일 뿐이었다. 감정을 철저히 배제한 무정의 길. 그것만이 그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상관없습니다. 결과가 진실을 증명할 테니까요."
연조희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소매를 펄럭였다.
"동행해 드리지요. 백각의 서생으로서, 이 거대한 위선이 깨지는 순간을 똑똑히 기록해야 하니까요."
밤새도록 내리던 이슬비는 어느덧 굵은 빗줄기로 변해 강호를 적시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어둠을 뚫고 융천상단이 위치한 황량한 계곡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
융천상단으로 향하는 길은 험난했다. 사공기는 빗줄기를 가르며 묵묵히 달렸으나, 내면의 전쟁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귀를 찢는 듯한 망자들의 환청. 체온을 빼앗아 가는 차가운 빗물. 그리고 전신을 타고 흐르는 뒤틀린 진기.
사공기는 질주하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내력을 통제하려 애썼다. 묵정의 저주로 오염된 진기는 그의 통제를 벗어나 폭주하려 들었으나, 사공기는 매 순간 이성을 벼려내며 기혈을 억눌렀다.
'나는 검이다. 감정이 없는 차가운 쇠붙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다. 과거,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동료들을 지키지 못하고 전멸시켰던 그 참혹한 기억이 심연에서 고개를 들려 할 때마다, 그는 더 깊은 무정의 나락으로 자신을 밀어 넣었다. 타인과 정을 나누는 것은 파멸의 지름길이다. 오직 고독 속에서 홀로 서 있을 때만이 검은 가장 날카롭게 빛날 수 있었다.
옆에서 나란히 신형을 무형하게 놀리며 달리는 연조희는 그런 사공기의 고독한 옆모습을 묵묵히 관찰했다. 그녀는 사공기가 짊어진 부채감과 슬픔의 깊이를 짐작하고 있었으나, 감히 위로의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그것이 방랑검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 시진을 쉬지 않고 달렸을까. 마침내 두 사람의 눈앞에 거대한 목책과 보루로 둘러싸인 융천상단의 전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상단의 풍경은 평화롭지 않았다.
쉬이이익- 콰아아앙!
어둠을 뚫고 솟구친 불화살들이 상단의 가옥 지붕에 내리꽂히고 있었다. 거센 빗줄기 속에서도 기름을 먹인 불길은 쉽게 꺼지지 않고 붉은 혀를 턍턍히 놀리며 피어올랐다. 매캐한 연기가 사방으로 진동했고, 사위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지옥도로 변해갔다.
"이미 시작되었군요."
연조희의 목소리에 전에 없던 긴장감이 서렸다.
목책 너머로 검은 복면을 쓴 무인들이 무차별적인 살육을 자행하고 있었다. 그들의 검 끝에는 화산파의 독문 검식인 '칠십이파검(七十二波劍)'의 흔적이 미세하게 남아있었다. 화산파의 기치를 가렸으나, 그들의 검로와 신법은 명백히 정파의 명숙들이 지닌 그것이었다.
"장로님의 명령이다! 단 하나의 생명도 살려두지 마라! 이곳은 사파의 거점이며, 정파의 이름으로 단죄한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그의 외침 뒤로 억울하게 쓰러지는 민초들의 비명과 절규가 계곡을 가득 메웠다. 정파의 명분이라는 허울 좋은 위선 아래, 무고한 피가 대지를 적시고 있었다.
사공기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고개를 돌려 이 사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은원이었고, 굳이 이 위선자들의 싸움에 끼어들어 피를 묻힐 이유는 없었다. 멸정무정의 계율은 그에게 방관자가 되라 속삭였다.
그러나.
두근! 두근! 두근!
사공기의 가슴속에 품은 붉은 마노 비녀가, 그리고 그의 심장에 박힌 묵검이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진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억울하게 죽어간 수많은 영혼들이 사공기의 심장을 손톱으로 긁어대며 절규하는 듯한 격렬한 요동이었다.
- 저들을 살려다오! - 위선자들의 목을 베어라! - 사공기...!
심장의 박동이 빨라질 때마다, 사공기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묵기가 비에 젖은 대지를 검게 물들였다.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묵검은 이미 전장을 향해 피를 갈구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엄마! 엄마, 일어나 봐...! 제발..."
불길이 치솟는 보루의 잔해 너머로, 어린 민초녀 한 명이 쓰러진 어머니의 시신을 붙잡고 울부짖고 있었다. 그녀의 뒤로 검은 복면을 쓴 화산파의 자객 세 명이 검을 번쩍이며 다가섰다.
"사파의 싹은 잔뿌리까지 모두 뽑아내야 하는 법."
냉혹한 음성과 함께 자객의 검 끝이 허공을 갈라 소녀의 목덜미를 향해 내리꽂히는 순간이었다.
사공기는 고개를 돌려 외면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이미 묵검의 자루를 움켜쥐고 있었다. 심장의 고동은 이제 폭발적인 굉음이 되어 그의 전신을 뒤흔들고 있었다.
스아아아아-
검은 묵기가 빗줄기를 거스르며 사공기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의 안광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마침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묵검이 미친 듯이 박동하며, 피할 수 없는 인과의 서막을 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