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윤의 목덜미를 꿰뚫었던 묵검(墨劍)이 거두어지는 찰나, 사공기의 단전이 요동쳤다.
쿠우우웅!
귓가를 때리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뇌전이었다. 검을 타고 역류한 것은 단순한 내력만이 아니었다. 배신자로 살아가며 마태윤이 품었던 탐욕, 종국에 직면한 죽음의 공포, 그리고 사공기를 향해 쏟아낸 저주의 염원이 검은 먹물처럼 그의 기맥을 타고 뇌리로 치솟았다.
"커헉...!"
사공기의 입술 사이로 검은 피가 울컥 쏟아졌다. 바닥을 짚은 손가락 끝이 흙바닥을 파고들며 사정없이 떨렸다. 전신의 기혈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역류하기 시작했다. 기경팔맥이 사정없이 뒤틀리는 고통은 뼈를 깎고 살을 저미는 도검의 상처보다 참혹했다.
뇌리에서는 마태윤의 비명 섞인 환청이 이명처럼 울렸다.
- 네놈도 결국 나와 같은 괴물이 되어 파멸하리라! 천하가 너를 침뱉고, 네가 지키려던 도의는 네 손으로 찢어발기게 될 것이다!
묵정(墨情)의 저주. 타인의 공력을 빼앗아 제 것으로 삼는 절대의 마공이자, 벤 자의 원념을 고스란히 짊어져야 하는 등가교환의 굴레였다. 인과를 청산하지 못한 망자의 원한이 사공기의 영혼을 잠식하려 이빨을 드러냈다.
사공기는 이를 악물었다. 어금니가 맞부딪치며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는 마음속에 굳게 새겨진 멸정무정(滅情無情)의 구결을 도창하듯 읊조렸다.
"무정(無情)에 들어 모든 인(因)을 끊고..."
허공에 흩어지는 목소리는 차갑다 못해 얼어붙어 있었다. 타인과 정을 맺지 않겠다는 고독의 맹세, 과거 동료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부채감이 거꾸로 그의 정신을 무장시키는 단단한 껍질이 되었다. 슬픔도, 분노도, 두려움도 허상에 불과하다. 심장의 박동을 억누르고, 흐려지는 의식을 강제로 잡아끌어 단전의 심연으로 가라앉혔다.
그때, 허물어진 비각의 입구 너머로 서늘한 쇠붙이 소리가 고요를 깨트렸다.
"저 자다! 장로님께서 말씀하신 검마의 전승자가 확실하다!"
"마교의 첩자 놈이 마태윤과 동귀어진한 모양이군. 기운이 완전히 다했다."
거친 발자국 소리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들이닥쳤다. 화산파 우진산 장로가 파견한 추격대였다. 그들의 검날에 서린 푸르스름한 검기가 어두운 비각 내부를 차갑게 비추었다.
선두에 선 화산파 검수의 안광에 탐욕이 서렸다. 쓰러진 사공기는 그들에게 있어 그저 공을 세우기 위한 제물에 불과했다.
"마교의 잔당을 척살하고 검마의 흉물을 회수한다. 화산의 대의를 위해 이 자의 목을 베어라!"
사공기는 묵검을 쥔 손에 힘을 주려 했다. 그러나 손가락은 마비되어 감각조차 없었다. 단전은 끓는 기름처럼 뜨거웠지만, 그것을 운용할 경맥이 완전히 막혀 있었다.
적들의 발걸음이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지면을 타고 전해지는 진동이 사공기의 신경을 날카롭게 자극했다. 죽음의 문턱이 코앞이었다. 그러나 사공기의 안광은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심연보다 깊은 고요가 그의 눈동자에 깃들었다.
스아아아―.
검날이 허공을 가르며 사공기의 목덜미를 향해 낙하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탁.
맑고 고요한 파열음이 비각의 공터에 퍼졌다. 그것은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아니었다. 단단한 대나무 붓대를 벼루에 가볍게 두드리는 듯한, 기묘하리만치 정갈한 소리였다.
낙하하던 화산파 검수의 검날이 허공에서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검을 쥔 자의 손목이 보이지 않는 기류에 막힌 듯 허공에서 미미하게 떨렸다.
"누구냐!"
검수가 식은땀을 흘리며 소리쳤다. 그들의 등 뒤, 자욱한 안개 속에서 한 자락의 백색 학창의(鶴氅衣)가 나풀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한 손에는 두꺼운 지서(紙書)를, 다른 한 손에는 가느다란 모필을 쥔 기묘한 형상의 여인. 얼굴을 반쯤 가린 삿갓 아래로 호선을 그리며 휘어지는 입꼬리가 어렴풋이 보였다. 연조희였다.
"진시(辰時) 삼각. 백화곡의 무명 무사, 검마의 절예를 얻었으나 들개들의 이빨에 뜯겨 요절하다... 라고 적기에는 먹물이 아깝군요."
바람을 타고 흐르는 목소리는 능글맞으면서도 뼈가 시릴 만큼 날카로웠다. 사공기의 흐려지는 시야 속으로 그녀의 기이한 안광이 번뜩이며 파고들었다.
"네년은 또 어떤 년이냐! 감히 화산의 공무에 끼어들다니, 목숨이 여러 개라도 되는 모양이구나!"
화산파 검수들의 이목이 일제히 연조희에게 쏠렸다. 그들이 내뿜는 살기가 비각 내부의 공기를 가차 없이 짓눌렀다.
연조희는 태연하게 들고 있던 모필을 가볍게 털어내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공무라니요. 저는 그저 강호의 숨겨진 진실을 기록하는 미천한 사관일 뿐입니다. 명색이 천하의 화산이라 자부하는 정파의 일원들이, 기혈이 뒤틀려 쓰러진 무사 하나를 두고 떼거리로 몰려들어 검을 뽑는 광경이 참으로 눈부셔 그리 적었을 뿐이지요. 아, 신경 쓰지 마시고 계속하시지요. 저는 그저 이 훌륭한 '대의'의 현장을 먹 한 방울 아끼지 않고 상세히 기록할 테니까요."
"이런 요망한 년이...!"
검수들의 얼굴이 수치심과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 정파의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그들에게 있어, 연조희의 빈정거림은 뼈아픈 조롱이었다.
그 대치의 틈을 타, 사공기는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흩어진 내력을 끌어모았다.
'기맥이 막혔다면, 강제로 뚫는다.'
그것은 상식을 벗어난 자학적인 운기법이었다. 뒤틀린 통로로 내력을 강제로 밀어 넣는 행위는 경맥이 파열될 위험을 동반했다. 하지만 사공기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타인에게 의지하여 살아남는 구차함은 그의 도의에 어긋났으며, 마음의 빚을 지는 것 또한 그가 스스로에게 내린 계율에 위배되었다.
우드득!
사공기의 몸 안에서 뼈가 어긋나는 듯한 기괴한 마찰음이 울렸다. 단전에 갇혀 날뛰던 묵정의 기운이, 사공기의 강박적인 의지에 굴복하여 억지로 길을 만들며 뿜어져 나왔다. 전신의 모공에서 미세한 혈안개가 피어올랐다.
"죽여라! 잔당이든 사관이든, 이곳에 발을 들인 자는 살려 보내지 않는다!"
화산파의 검수 세 명이 동시에 사공기를 향해 짓쳐들었다. 검 끝에서 일어난 푸른 검기가 매화 꽃잎처럼 흩날리며 사공기의 전신을 난도질하려 압박해 들어왔다. 화산파가 자랑하는 삼재검진(三才劍陣)의 기세였다.
그 순간, 바닥에 쓰러져 있던 사공기의 신형이 탄자처럼 솟구쳤다.
그의 오른손에 쥐인 묵검이 호선을 그리며 허공을 갈랐다. 가라앉은 묵빛의 검기가 사방으로 뿜어지며 비각 내부의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스아아아―!
사공기가 펼친 검초는 화산파의 정통 검법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검마의 절예도 아니었다. 그것은 방금 전 그가 베었던 배신자 마태윤의 비전, '수라검식(修羅劍式)'의 첫 초식인 '수라현신(修羅現身)'이었다.
"이, 이 검초는...!"
돌진하던 화산파 검수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마태윤의 수라검식은 사파의 사악하고 음산한 기운을 담아내는 초식이다. 화산파 검수들은 마태윤의 배신을 추적하며 그 검식의 궤적을 뼈에 사무치도록 익히고 있었다. 그러나 사공기가 구현해 낸 수라검식은 마태윤의 그것보다 훨씬 더 예리하고, 압도적으로 빨랐다.
묵검이 적의 내력을 흡수하여 완벽하게 제 것으로 환원한 결과였다. 사공기의 손끝에서 재현된 수라검식은 사악함을 넘어, 마치 천하를 심판하는 신벌과도 같은 묵직함을 담고 있었다.
콰아아앙!
푸른 매화 검기가 검은 수라의 형상에 부딪혀 무력하게 부서져 나갔다.
사공기의 묵검은 멈추지 않았다. 유체의 흐름처럼 부드럽게 꺾인 검날은 이내 강체의 파괴력으로 화산파 검수의 가슴을 향해 쇄도했다.
"정파의 대의를 부르짖는 자들이, 정작 사파의 검초 하나를 막지 못해 목숨을 잃는구나. 참으로 고결한 종말이다."
사공기의 서늘한 조롱이 비각 안에 울려 퍼졌다.
"말도 안 되는...!"
검수가 비명을 지르며 검을 세워 막으려 했으나, 묵검에 실린 도도한 내력은 그의 검날을 두 조각으로 부러뜨리며 심장을 그대로 관통했다.
푸학!
선혈이 비각 벽면에 붉은 묵화처럼 뿌려졌다.
사공기는 검을 뽑아내며 신형을 회전시켰다. 연이어 쇄도하던 다른 두 검수의 목덜미를 향해 묵검이 잔인할 정도로 간결한 궤적을 그렸다. 수라검식 제이초, '악귀참(惡鬼斬)'.
검은 검광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는 오직 뿜어져 나오는 피 분수와 단절된 비명만이 남았다.
"사, 사파의 괴물 놈...!"
남은 화산파 고수들이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들의 자부심은 이미 물리적으로 완전히 분쇄되어 있었다. 자신들이 경멸해 마지않던 배신자의 초식에, 화산의 이름 높은 검수들이 단 한 합도 버티지 못하고 도륙당한 것이다. 이보다 더한 수치는 없었다.
"괴물이라."
사공기는 피가 흘러내리는 묵검을 비스듬히 겨누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눈동자는 붉은 핏발과 칠흑 같은 먹색이 혼재되어 기괴한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위선을 정의라 부르는 너희와, 생존을 위해 검을 쥐는 괴물 중 누가 더 추악한가."
바닥을 딛는 사공기의 발걸음에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었다.
"대답할 필요는 없다."
스스슥!
묵검이 다시 한번 허공을 가르며 어둠 속을 질타했다. 비각 안은 순식간에 화산파 고수들의 찢어지는 비명과 살점이 터지는 소리로 가득 찼다. 사공기의 검세는 마태윤의 초식을 완벽하게 농락하며, 그들의 자부심과 육체를 차례로 짓밟았다.
마침내 마지막 검수가 목을 부여잡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투스스...
비각 안을 채우던 검기가 서서히 가라앉으며, 사방에는 시체들이 내뿜는 비린내와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사공기는 묵검을 바닥에 짚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전신의 기혈이 다시 한번 요동치기 시작했다. 방금 베어 넘긴 화산파 검수들의 원념이 또다시 그의 뇌리를 두드렸기 때문이다.
"커흑...!"
그는 가슴을 움켜쥐고 무릎을 꿇었다. 시야가 붉게 물들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벨 때마다 주어지는 힘,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인과의 고통. 묵정의 저주는 그를 잠시도 가만두지 않았다.
그가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바닥을 내려다보았을 때, 마지막으로 쓰러진 화산파 검수의 품에서 은은한 붉은빛이 새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사공기는 떨리는 손을 뻗어 그 사내의 가슴팍을 뒤적였다. 그의 손끝에 걸린 것은 차갑고 단단한 물체였다.
품에서 꺼내 올린 그것은, 피비린내로 얼룩진 '붉은 마노 비녀'였다.
그것을 손에 쥔 순간, 사공기의 뇌리에 이전과는 다른 강렬한 환청이 뇌성처럼 내리쳤다.
- 살려주세요... 제발... 장로님,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여인의 처절한 비명. 피눈물을 흘리며 허공을 향해 손을 뻗는 한 시녀의 얼굴이 환영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슬픔과 억울함이 마노 비녀를 타고 사공기의 전신으로 흘러들어왔다.
'설아...'
그 이름이 뇌리에 박혔다. 화산파의 우진산 장로가 저지른 추악한 음모의 제물이자,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여인의 원혼이었다. 묵검이 이 비녀에 깃든 인과를 가리키며 사공기의 심장을 옥죄어 왔다.
이 한을 풀어주지 않는다면, 그의 기맥은 영원히 뒤틀린 채 파멸할 것이 분명했다.
사공기는 비녀를 움켜쥐고 품속에 깊이 밀어 넣었다. 그의 입술에서 흘러내린 피가 비녀의 붉은 마노를 더욱 붉게 물들였다.
"후우... 후우..."
사공기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묵검을 버팀목 삼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전신이 상처투성이였고, 내력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비각 내부에서, 밤안개처럼 고요하고 소리 없는 인기척이 그의 등 뒤로 다가왔다.
사공기의 척추를 타고 서늘한 전율이 흘렀다. 언제 다가왔는지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스아아...
백색 학창의 자락이 사공기의 어깨 너머로 가볍게 스쳤다.
그의 귀밑머리를 스치는 서늘한 감각과 함께, 날카로운 모필(붓)의 끝이 사공기의 목덜미를 정확히 가리키며 멈추어 섰다. 붓끝에 묻은 검은 먹물이 사공기의 살결에 닿을 듯 말 듯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삿갓 아래로 드러난 연조희의 입꼬리가 기묘한 호선을 그렸다.
"검마의 업을 짊어지고 사파의 검으로 정파를 베는 무사라. 참으로 흥미로운 기록표로군요."
그녀의 목소리가 사공기의 귓가를 차갑게 파고들었다. 목덜미를 겨눈 붓끝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방금 전 화산파 고수들이 뿜어냈던 그 어떤 검기보다 매섭고 예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