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비린내 가득한 백화곡(百花谷)의 밤바람이 무너진 비각의 석조 기둥 사이를 사납게 할퀴고 지나갔다.
허공을 가른 붉은 검광이 백색 도포를 찢고 사공기의 옆구리를 깊게 파고들었다. 자창(刺創)에서 뿜어져 나온 선혈이 차가운 흙바닥을 적셨다. 사공기는 비틀거리면서도 손에 쥔 부러진 철검을 고쳐 잡았다. 기혈이 뒤틀려 입안 가득 쇠맛이 감돌았으나, 그는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오직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만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그의 맞은편, 붉은 혈색의 검을 느긋하게 털어내며 다가오는 사내가 있었다. 마태윤(馬太潤). 과거 사공기와 생사를 함께했던 동료들을 가차 없이 학살하고, 문파의 비전을 통째로 적들에게 팔아넘긴 배신자였다. 그의 검날에는 아직 채 식지 않은 동료들의 원혼이 서려 있는 듯했다.
"겨우 이 정도였더냐, 사공기."
마태윤의 목소리에는 조소와 살기가 질척하게 묻어났다. 그는 마치 쥐새끼를 구석에 몰아넣은 고양이처럼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가문의 개들이 네놈을 쫓으라 명했을 때 조금은 긴장했다만, 이리도 허망하게 끝날 줄이야. 사형제들의 원수를 갚겠다며 큰소리치던 기세는 어디로 갔느냐? 네놈이 지키려던 그 고결한 도의라는 것이 겨우 이 차디찬 골짜기에서 개죽음을 당하는 것이었더란 말이냐."
사공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 왼손으로 상처를 움켜쥐자 손가락 사이로 뜨거운 피가 울컥울컥 배어 나왔다. 상처의 깊이보다 뼈아픈 것은 온몸의 내력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멸문지화의 그날, 홀로 살아남았다는 부채감은 매 순간 그의 심장을 짓눌렀다. 타인과 정을 나누지 않겠다며 스스로를 가두었으나, 눈앞의 원수를 마주한 순간 억눌렀던 분노가 단전 밑바닥에서부터 들끓어 올랐다.
마태윤이 검을 비스듬히 세우며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아지랑이 같은 검기가 주위의 가시덩굴을 시커멓게 태워 들어갔다. 철검문의 비전 신공을 사파의 독문 무공과 융합하여 얻어낸 추악하고도 강대한 기운이었다.
"끝이다. 네놈의 목을 가져가 가문 수뇌부들의 신임을 얻으면, 내 무림맹의 요직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겠지. 네놈은 그저 내 출세길의 제물이 되는 것이다."
사공기는 뒤로 물러섰다. 등 뒤에 닿는 것은 차갑고 거친 석벽이었다. 백화곡 깊숙이 자리한, 백 년 전 멸망한 비각의 붕괴된 벽면이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사방을 둘러싼 유독한 장기와 가시덩굴이 그를 옥죄어 왔고, 정면에는 가공할 살기를 뿜어내는 배신자가 서 있었다.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순간이었다.
그때였다. 사공기의 등이 석벽에 강하게 부딪히는 순간, 등 뒤에서 기묘한 진동이 일기 시작했다.
우우웅―.
단순한 돌의 울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잠들어 있던 거대한 짐승이 눈을 뜨며 내쉬는 거친 숨결과도 같았다. 사공기의 척추를 타고 차가운 기운이 번뜩이며 뇌리를 관통했다. 동시에, 석벽의 갈라진 틈새 사이로 칠흑 같은 묵색(墨色)의 빛무리가 가늘게 흘러나왔다.
"이것은...?"
마태윤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 역시 비각 심처에서 흘러나오는 이질적인 기운을 감지한 모양이었다.
사공기는 본능적으로 이끌리듯 뒤를 돌아보았다. 갈라진 석벽의 틈새, 그 깊은 어둠 속에 한 자루의 검이 박혀 있었다. 빛을 전혀 반사하지 않는, 마치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듯한 검은 칼날. 그것은 백 년 전 천하를 오만하게 오만하게 군림했던 검마 독고청의 절예가 깃든 유물, '묵검(墨劍)'이었다.
검이 박힌 벽면 위로, 빛바랜 붉은 글씨들이 기괴하게 일렁이며 사공기의 시야에 박혀왔다. 그것은 검마가 남긴 미완의 구절이자, 천하의 이치를 담은 구원무의 실마리였다.
[지정(至情)은 무정에 들고, 살인(殺人)은 지인에 달했다.]
지극한 정은 오히려 정이 없는 경지에 이르고, 사람을 죽이는 검은 도리어 사람을 살려 지키는 법에 달해 있다. 상반되고 모순된 기운이 얽힌 문장이 사공기의 뇌해를 거세게 흔들었다. 그 뜻을 가늠하기도 전에, 묵검의 자루가 그의 손바닥에 닿았다.
화아악!
그것은 선택이 아닌 강제였다. 묵검을 쥐는 순간, 차갑고도 무거운 묵정기법(墨情氣法)의 기운이 사공기의 손목을 타고 폭풍처럼 밀려들었다. 뒤틀리고 찢어졌던 경맥이 검은 내력에 쓸려 내려가며 순식간에 재배치되었다. 고통은 비명조차 지를 수 없을 정도로 극렬했으나, 그 고통의 이면에는 무한한 힘의 팽창이 존재했다.
"끄으윽...!"
사공기의 입에서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그의 눈동자가 칠흑 같은 어둠으로 가득 찼다. 단전 속에서 정체불명의 검은 기운이 소용돌이치며, 바닥났던 내력이 순식간에 채워졌다. 아니, 채워지는 수준을 넘어 사공기가 평생 겪어보지 못한 경지의 위압적인 공력이 그의 전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마태윤의 얼굴에 서려 있던 여유가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는 사공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음을 직감했다.
"무슨 수작이냐! 감히 잔꾀로 내 눈을 속이려 들다니!"
불안감을 지우려는 듯 마태윤이 먼저 몸을 날렸다. 그의 신형이 허공에서 세 갈래로 갈라지며 붉은 검막을 형성했다. 철검문의 비전 초식에 사파의 독기를 더한 '수라검식(修羅劍式)'의 정수, '수라혈풍(修羅血風)'이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붉은 검기가 비각의 석조 기둥들을 두부 썰듯 잘라내며 사공기의 전신을 향해 쇄도했다.
예전의 사공기였다면 결코 막아낼 수 없는, 죽음의 그물망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사공기는 달랐다. 그의 손에 쥔 묵검이 가볍게 떨렸다. 검은 칼날이 대기를 가르는 순간, 세상의 소음이 일시에 사라진 듯한 기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사공기는 그저 검을 들어 올렸다. 어떠한 화려한 초식도, 복잡한 보법도 없었다. 오로지 단 한 번의 정면 내려치기였다.
스으윽.
마치 붓에 먹물을 가득 묻혀 흰 화폭을 단숨에 그어 내리는 듯한 궤적이었다. 묵검의 끝에서 뿜어져 나온 칠흑 같은 검강(劍罡)이 반월을 그리며 뻗어 나갔다.
콰아아앙!
붉은 수라검식이 검은 묵강에 닿는 순간,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지워져 갔다. 사파의 독기와 마태윤의 강력한 내력이 검은 기운에 닿자마자 물거품처럼 사그라졌다. 아니, 사그라진 것이 아니었다. 마태윤의 검기가 묵검의 칼날 속으로 고스란히 흡수되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마태윤의 비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묵검의 검강은 그의 정면을 일도양단(一刀兩斷)하듯 내리꽂혔다.
붉은 혈우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마태윤의 몸이 좌우로 갈라지며 바닥으로 처참하게 쓰러졌다. 백화곡을 호령하던 일류 고수가, 단 한 번의 격돌 끝에 먼지처럼 사라진 순간이었다.
사공기는 제자리에 서서 묵검을 내려다보았다. 묵검의 검신을 타고 마태윤의 단전에 깃들어 있던 평생의 공력과 그가 익힌 수라검식의 정교한 깨달음이 묵정기법의 도관을 통해 사공기의 단전으로 고스란히 흘러 들어왔다. 단전이 터질 듯한 팽창감과 함께, 그의 경지가 한 단계 도약하는 배가(倍加)의 성취가 몸 서리치게 느껴졌다.
적의 힘을 빼앗아 내 것으로 만든다. 그것은 강호의 무인들이라면 누구나 꿈꿀 만한 절대의 골든핑거였다. 자신을 멸시하고 동료들을 죽였던 배신자를 단 일 초 만에 지워버린 힘. 가슴을 관통하는 압도적인 카타르시스가 사공기의 전신을 짜릿하게 물들였다.
그러나 기쁨은 찰나에 불과했다.
"아아아아악!"
마태윤의 육신이 숨을 거두는 그 찰나, 그의 잘려 나간 영혼이 품은 극도의 원한과 탐욕, 그리고 죽음 직전에 느낀 숨 막히는 공포가 묵검의 칼날을 역류하여 사공기의 뇌리로 폭풍처럼 밀려들었다.
'사공기... 네놈이 어찌... 어찌 이런 힘을...! 내가 가질 권력이었는데! 내가 얻을 부귀영화였는데! 네놈이 나를 죽여? 살려다오, 제발 살려... 아니, 죽어라! 나와 함께 지옥으로 가자!'
뇌리를 찢는 마태윤의 비명과 저주가 환청이 되어 사공기의 고막을 사정없이 때렸다. 눈앞이 붉게 물들었다가 이내 시커먼 먹물로 뒤덮였다. 단전에서 요동치던 검은 내력이 통제를 잃고 광폭하게 날뛰며 온몸의 기혈을 거꾸로 뒤흔들었다.
"크헉...!"
사공기는 가슴을 쥐어짜며 붉다 못해 검은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맥박이 미친 듯이 요동치고, 전신의 경맥이 바늘로 찌르는 듯한 극통에 휩싸였다. 검을 벨 때마다 상대의 원한과 심마를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 가혹한 등가교환. 묵정의 저주가 그의 영혼을 오염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사공기는 떨리는 다리로 버티려 했으나, 이내 통제력을 잃고 차가운 비각의 돌바닥 위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묵검이 바닥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시야가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가운데, 가시덩굴 너머 백화곡의 짙은 안개 속에서 또 다른 불길한 발소리가 서서히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바닥에 닿은 뺨으로 석판의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손가락 끝을 까딱이는 것조차 뜻대로 되지 않았다. 사공기는 쿨럭거리며 또다시 검은 피를 쏟아냈다. 왈칵 쏟아진 선혈은 마태윤의 시신에서 흘러나온 붉은 피와 뒤섞이며 기괴한 자색(紫色)의 웅덩이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었다. 단전 깊숙이 들어찬 마태윤의 공력이 기존의 내경과 거칠게 충돌하며 경맥을 사정없이 짓이기고 있었다.
우드득,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이것이... 묵정의 인과인가.'
귀를 찢는 비명과 환청은 멈추지 않았다. 마태윤에게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던 철검문 동문들의 절규, 그리고 마태윤 본인이 죽어가며 품은 추악한 집착이 뇌해(腦海)를 사정없이 헤집었다. 머리가 터져 나갈 듯한 격통에 사공기는 이가 부러질 정도로 어금니를 악물었다. 혈도를 타고 흐르는 공력은 거대한 자물쇠에 걸린 것처럼 굳어 버렸다. 묵정의 저주가 전신의 기혈을 완벽히 봉인해 버린 것이다.
스스스스―.
백화곡의 짙은 장기(瘴氣)를 뚫고, 서늘한 바람과 함께 불길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가시덩굴이 헤쳐지는 거친 파열음이 정적을 깨뜨렸다. 하나가 아니었다. 최소 셋, 혹은 그 이상.
사공기는 꺼져가는 의식을 붙잡으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흐릿해진 시야 사이로 세 개의 그림자가 안개를 가르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청색 도포에 매화나무 문양이 정교하게 수놓아진 의복을 입고 있었다. 화산파(華山派)의 하급 무사들이었다.
"이곳이 틀림없다. 마태윤의 흔적이..."
앞장서던 사내가 말을 맺지 못하고 우뚝 멈춰 섰다. 그의 시선이 바닥에 처참하게 이등분되어 널브러진 마태윤의 시신에 닿았다. 뒤따르던 자들의 얼굴 역시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이, 이럴 수가. 일류의 경지에 오른 마태윤이 단 한 격에 참살당하다니."
"검흔(劍痕)을 보십시오. 상처가 시커멓게 타들어 가 있습니다. 사파의 사검(邪劍)이 분명합니다."
그들의 검 차가운 눈빛이 마태윤의 시신을 지나, 석벽에 기대어 쓰러진 사공기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사공기의 떨리는 손에 쥐여 있는, 빛을 삼키는 칠흑의 검―묵검을 포착했다. 탐욕과 경계심이 그들의 눈동자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저 자다. 장로님께서 말씀하신 백 년 전 검마의 유물을 가로챈 마교의 첩자가."
"기운이 완전히 다했군. 전신의 기혈이 뒤틀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다."
서늘한 쇠붙이 소리와 함께 화산파 검수들의 검이 동시에 뽑혀 나왔다. 푸르스름한 검광이 사공기의 얼굴을 차갑게 비추었다.
사공기는 묵검을 쥔 손에 힘을 주려 했다. 그러나 손가락은 완전히 마비되어 감각조차 없었다. 단전은 불덩이처럼 뜨거웠지만, 그것을 끌어 올릴 기맥이 완전히 막혀 있었다. 적의 힘을 빼앗아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는 기연이었으나, 그 대가로 찾아온 마비는 그를 완벽한 무방비 상태로 몰아넣었다.
다가오는 화산파 검수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마교의 잔당을 척살하고 검마의 흉물을 회수한다. 이것으로 천맹에서의 우리 입지도 확고해질 것이다."
선두에 선 사내가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의 검 끝에 화산의 비전 검기가 매화 꽃잎처럼 푸르게 피어올랐다. 사공기의 목을 단숨에 베어버릴 기세였다.
의식이 점차 흐려지는 와중에도 사공기의 눈빛만은 꺾이지 않았다. 오직 서늘한 살기만이 검수를 쏘아보았다. 죽음이 코앞에 닥쳤음에도 그의 심장은 기묘할 정도로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스아아아―.
검날이 허공을 가르며 사공기의 목덜미를 향해 무자비하게 낙하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탁.
맑고 고요한 파열음이 무너진 비각의 공터를 울렸다. 그것은 검과 검이 부딪치는 쇠소리가 아니었다. 대나무로 만든 죽필(竹筆)의 끝이 묵직한 벼루를 가볍게 두드리는 듯한, 기묘하리만치 정갈한 소리였다.
낙하하던 화산파 검수의 검날이 허공에서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누구냐!"
검수가 식은땀을 흘리며 소리쳤다. 그들의 등 뒤, 짙은 안개 속에서 한 자락의 백색 학창의(鶴氅衣)가 나풀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한 손에는 두꺼운 지서(紙書)를, 다른 한 손에는 가느다란 붓을 쥔 기묘한 형상의 인물. 얼굴을 반쯤 가린 삿갓 아래로, 호선(弧線)을 그리며 휘어지는 입꼬리가 보였다.
"진시(辰時) 삼각. 백화곡의 무명 무사, 검마의 절예를 얻었으나 들개들의 이빨에 뜯겨 요절하다... 라고 적기에는 먹물이 아깝군요."
바람을 타고 흐르는 목소리는 능글맞으면서도 뼈가 시릴 만큼 날카로웠다. 사공기의 흐려지는 시야 속으로, 낯선 이의 기이한 안광이 번뜩이며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