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먼지 구름이 자욱하게 내려앉은 협곡의 틈새로 뇌성 같은 군마의 말발굽 소리가 지면을 흔들었다.

사공기는 부서진 암벽의 잔해를 짚고 서 있는 연조희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아 지탱했다. 불타버린 백화곡의 초입은 이미 인간이 만들어낸 철의 장막에 가로막혀 있었다. 은백색의 갑주를 조밀하게 맞춰 입은 천맹의 정규 무인 군단 수천 명이 무너진 언덕 저편을 가득 메운 채, 좁혀오는 포위망의 고삐를 죄고 있었다. 그들의 창끝이 반사하는 차가운 금속성이 백화곡의 짙은 음기와 부딪쳐 기괴한 안개를 만들어냈다.

사공기의 자안(紫眼)에 서서히 푸른 안광이 차올랐다. 단전을 가득 채운 묵정기법의 정순한 진기가 맥동할 때마다, 그의 눈동자는 심연의 밤하늘처럼 짙푸른 빛을 뿜어냈다.

"다치지 않았나."

짧고 건조한 물음이었으나, 연조희는 그 안에서 쇠붙이처럼 단단한 의지를 읽어냈다. 그녀는 흙먼지로 얼룩진 학창의 자락을 털어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몸의 목숨줄이 그리 가볍겠습니까. 그보다 저 앞을 보십시오. 제갈무신이 아주 단단히 작정을 한 모양입니다. 천맹의 본대 중에서도 가장 잔혹하다는 철갑수호대와 정천결계진의 핵심 진법가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공기를 가르는 이질적인 진동은 대지의 기운을 억누르며 무인의 내력을 고사시키는 정천결계진의 위력이었다. 쇠사슬이 얽히는 듯한 불쾌한 공명음이 발밑에서부터 타고 올라와 단전을 압박했다.

그 순간, 사공기가 쥔 묵검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것은 경고가 아니었다.

백화곡 깊은 곳, 무너진 비각의 심부에서 묵검의 공명에 반응하는 거대한 지맥의 고동이 요동치고 있었다. 백 년 동안 잠들어 있던 고대 묵검의 인과가 사공기가 성취한 푸른 영경의 광휘를 알아보고 깨어나는 진동이었다. 비각 벽면에 새겨져 있던 미완의 구절이 사공기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지정(至情)은 무정에 들고, 살인은 지인(持人)에 달했다.'

그 모순적인 구절의 의미가 뇌리를 때리는 찰나, 천맹의 철갑 군단 전면에서 묵직한 마차가 갈라지며 한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맹의 지휘관이자 제갈무신의 심복인 악양이었다. 그는 사공기를 내려다보며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검마의 잔당 사공기, 그리고 가문을 배신한 낙오자 남궁현. 감히 천맹의 대의를 거스르고 사악한 마공을 부려 백화곡을 더럽힌 죄, 오늘 이 자리에서 피로써 씻게 될 것이다!"

악양의 우렁찬 목소리가 협곡 전체를 울렸다. 철갑을 두른 수천 명의 하급 무인들이 일제히 창을 두드리며 군세를 과시했다. 그들의 눈빛에는 맹목적인 적개심과 정의를 집행한다는 위선적인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제갈무신이 주입한 거짓된 대의에 눈이 먼 어린 양들이었다.

사공기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으나, 딛는 자리마다 정천결계진의 푸른 사슬들이 비명을 지르며 부서져 나갔다. 푸른 안광을 머금은 그의 시선이 허공을 갈랐다.

남궁현이 피투성이가 된 청강검을 짚고 사공기의 곁으로 걸어왔다. 그의 전신은 상처투성이였지만, 기백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맑았다. 가문의 생존이라는 무거운 멍에 아래 제갈무신의 꼭두각시로 살아왔던 지난날의 굴레를 비로소 벗어던진 무인의 얼굴이었다.

"남궁 소협."

사공기가 낮게 불렀다. 남궁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부러진 청강검을 치켜들었다.

과거 사공기와의 일차 합화 중, 묵검의 예리한 검기에 반응해 미세한 균열을 일으켰던 남궁현의 도검. 그 틈새에서 흘러나오던 이질적이고 탁한 기운의 실체가 마침내 정판 전체의 눈앞에 드러날 차례였다.

사공기가 내력을 실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웅장한 대종(大鐘)의 울림처럼 협곡의 바람을 찢고 수천 군단의 귓전을 때렸다.

"천맹의 무인들이여, 너희가 쥐고 있는 무기가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똑똑히 보라!"

웅장한 음파에 실린 진기가 대기를 흔들자, 돌격하려던 하급 무인들이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사공기의 시선이 악양을 지나 군단의 심부를 꿰뚫었다.

"너희가 신봉하는 제갈무신은 대의라는 허울 뒤에 숨어 강호의 피를 빠는 거머리에 불과하다. 십 년 전 비운문의 멸문도, 얼마 전 융천상단을 도륙하고 그 재산을 군자금으로 착복한 것도 모두 제갈무신의 밀령을 받은 화산파 우진산의 소행이었다!"

"무슨 터무니없는 모함을!"

악양이 다급하게 소리쳤으나, 사공기의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증좌는 여기 있다."

사공기가 손가락으로 남궁현의 검을 가리켰다. 남궁현이 부러진 청강검의 자루를 꽉 쥐자, 검신에 가득했던 미세한 균열 사이로 시퍼런 독기와 함께 징그러운 고독의 사슬 형상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것은 천맹의 천재라 불리던 남궁현의 영혼과 심골을 옭아매고 조종하려 제갈무신이 심어두었던 독문 조종식의 실체였다.

"남궁세가의 후기지수마저도 제갈무신의 꼭두각시로 쓰기 위해 이토록 추악한 고독을 심어 조종하려 했다. 이미 남궁세가의 본가는 천맹에 의해 장악되었고, 그들은 마교의 흉계라는 거짓 격문으로 천하를 기만하고 있다. 너희는 지금 협의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한 정객의 사욕을 위해 형제들의 목을 베러 온 사냥개에 불과하다!"

진실이 담긴 외침은 가차 없이 심장을 파고드는 법이다. 천맹의 하급 무인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그게 정말인가?" "남궁 소협의 검에서 나오는 저 푸른 독기는 분명 제갈가의 독문 비기인 고독 조종식인데……." "우리가 속은 것인가?"

진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악양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군심이 완전히 와해될 판국이었다.

"닥쳐라! 마도의 혀에 놀아나지 마라! 저놈은 검마의 사악한 무공을 익힌 천하의 공적이다! 전군, 돌격하라! 저 마두들의 목을 가져오는 자에게는 백만 냥의 황금과 천맹의 장로직을 내릴 것이다!"

악양의 고함과 함께, 탐욕에 눈이 멀거나 명령에 굴복한 철갑 기병들과 하급 무인 수백 명이 함성을 지르며 사공기를 향해 쇄도했다. 수십 자루의 창과 검이 숲을 이루며 사공기의 전신을 꿰뚫을 듯 밀려들었다.

남궁현이 검을 고쳐 잡으려 하자, 사공기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물러서라."

사공기의 묵검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검신은 이제 피를 갈구하는 저주받은 검이 아니었다. 망자들의 원한을 포용해 성스러운 신광으로 승화시킨 묵검은 투명한 묵흑색과 짙푸른 영경의 광휘를 동시에 뿜어내고 있었다.

수백의 병장기가 코앞까지 들이닥친 절체절명의 순간, 사공기는 눈을 감았다.

'살인(殺人)은 지인(持人)에 달했다.'

해치기 위함이 아닌, 가로막고 구하기 위한 검. 묵정의 저주를 넘어선 극의가 그의 단전에서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스아아아악!

사공기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허공에 수십 가닥의 검푸른 잔상이 비단실처럼 펼쳐졌다. 그것은 강맹하기 그지없는 검풍이 아니라, 지극히 부드럽고 유려하게 흐르는 물결과도 같았다.

묵검의 칼날이 아닌 칼등과 검면이 허공을 가르며 하급 무인들의 무기 사이를 파고들었다.

캉! 카카캉!

기이한 파열음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사공기의 검은 단 한 명의 살도 베지 않았다. 오직 밀려오는 무인들의 손목 기혈을 정확히 타격해 일시적으로 마비시키고, 그들이 쥔 병장기의 결을 따라 내력을 흘려 넣어 무기만을 산산조각 내버릴 뿐이었다.

"어, 어라?" "내 검이……!"

돌격하던 천맹의 무인들이 허망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의 손에는 자루만 남은 부러진 병장기들이 들려 있었고, 손목은 기혈이 막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은 채, 수백 명의 공격세가 완벽하게 침묵했다.

이것은 살육이 아니었다.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압도적인 무위이자, 생명을 아끼는 구도의 검세였다.

사공기는 멈추지 않았다. 그의 신형이 철갑 기병들의 사이를 유령처럼 스쳐 지나갔다. 기병들이 탄 말들의 다리를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기수들의 안장을 지탱하는 가죽끈만을 검기로 정밀하게 끊어냈다.

우르르릉!

수십 명의 철갑 기병들이 말에서 미끄러져 부드러운 흙바닥 위로 굴러떨어졌다. 부상을 입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거대한 위압감과 자비심이 전장을 지배했을 뿐이다.

천맹의 무인들은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과거 강호를 피로 물들였던 검마의 후예라 하여, 잔혹무도한 괴물일 것이라 믿었던 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가 펼치는 무공은 그 어떤 정파의 절예보다도 정순했고, 그 어떤 협객의 행보보다도 자비로웠다. 자신들을 죽일 수 있는 수백 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사공기는 단 한 명의 목숨도 빼앗지 않았다.

"이것이…… 진짜 마두의 검이란 말인가?"

한 하급 무사가 부러진 검자루를 떨어뜨리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우리를 살려주었다. 전력을 다해 덤벼든 우리를……."

그 독백은 들불처럼 순식간에 수천 명의 군단 전체로 번져나갔다. 무인들의 눈빛에서 적개심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깊은 경외심과 부끄러움이 들어찼다.

창검을 쥐고 있던 손들이 느슨해졌다. 여기저기서 병장기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쇳소리가 들려왔다.

"칼을 거둬라." "우리는 위선자의 사냥개가 아니다."

수천 명의 대열이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지며 자발적으로 칼을 거두고 길을 열었다. 천맹의 무한 철갑 군대가 단 한 자루의 묵검, 그리고 그 검에 담긴 대협의 위의 앞에 송두리째 심지가 꺾여버린 것이다.

"이, 이 반역자 놈들! 당장 검을 들지 못할까!"

악양이 미친 듯이 소리쳤으나, 이미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군단의 붕괴는 순식간이었다. 사공기는 푸른 안광이 넘실거리는 눈으로 악양을 응시하며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 순간, 협곡 전체를 뒤흔드는 가공할 마기(魔氣)가 백화곡 입구의 단상 위에서 폭발했다.

"하하하하! 정말 눈물겨운 광경이구나, 사공기!"

하늘을 찢는 듯한 광소가 울려 퍼졌다.

당황한 천맹 장수들의 대열 뒤쪽, 짙푸른 마황(魔皇)의 외투를 두른 사내가 천천히 솟구쳐 올랐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정순한 천맹의 무공이 아닌, 심연의 밑바닥에서 길어 올린 듯한 파괴적인 마공의 기류였다.

제갈무신이었다.

그의 등장에 남궁현의 얼굴이 극도로 하얗게 질려갔다.

제갈무신의 등 뒤로, 쇠사슬에 묶인 채 피투성이가 된 수십 명의 인물들이 철장창에 꿰뚫린 채 단상 위에 매달려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남궁세가의 가주를 비롯한 본가의 핵심 인물들이었다.

"제갈무신……!"

남궁현이 피눈물을 흘리며 절규했다. 제갈무신은 매달린 인질들의 목덜미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사공기와 남궁현을 향해 기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것만큼 숭고한 일은 없지. 사공기, 그리고 남궁현. 너희가 세우려는 그 잘난 참도가, 이들의 목숨보다 무거운지 어디 한번 증명해 보아라."

제갈무신의 손끝에 짙푸른 마기의 불꽃이 피어오르며 남궁가 가주의 심장을 겨누었다. 사공기의 묵검이 다시 한번 거세게 공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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