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단상 위에서 떨어지는 제갈무신의 광소는 백화곡의 가파른 절벽을 타고 기괴한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쇠사슬에 묶인 채 철장창에 꿰뚫린 남궁세가의 가솔들이 흘리는 핏방울이 단상 아래의 마른 흙바닥을 붉게 적셨다. 그들의 신음은 사공기의 고막을 짓누르고, 단전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망자들의 원념을 거칠게 흔들었다.

"제갈무신……!"

남궁현의 목구멍에서 핏빛 울음이 터져 나왔다. 검을 쥔 그의 손끝이 하얗게 질린 채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가문의 대의라는 허울 아래 평생을 헌신했던 천맹의 맹주가, 정작 가문의 가주와 숙부들을 고기방패로 내세우는 광경을 마주한 자의 절망이었다. 가슴골을 찌르는 배신감에 남궁현의 안색은 이미 산 자의 것이 아니었다.

제갈무신은 피투성이가 된 남궁세가 가주의 머리채를 움켜쥐며 미소 지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오는 짙푸른 마기는 정파의 기도가 아닌, 심연에서 길어 올린 잔혹한 살기 그 자체였다.

"무릎을 꿇어라, 사공기."

제갈무신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는 단상 아래에 도열한 수천 명의 천맹 무인들과 사공기를 번갈아 내려다보며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그 잘난 묵검을 내려놓고 머리를 조아린다면, 이 어리석은 자들의 목숨만은 살려주마. 천하의 도의를 논하던 네놈이, 이 무고한 이들의 피 위에서 정의를 부르짖을 수 있겠느냐?"

기괴하게 요동치는 푸른 마기가 단상 전체를 휘감았다. 사공기는 묵묵히 제갈무신을 응시했다. 은은하게 빛나는 그의 푸른 안광은 심연의 호수처럼 깊고 가라앉아 있었다. 묵검이 손안에서 낮게 웅웅거리며 울었다. 벨 때마다 상대의 원한을 삼켜야 하는 저주받은 검. 하지만 지금 사공기의 뇌리를 스치는 것은 백화곡 석벽에서 보았던 고대 묵검의 미완성 구절이었다.

'지정(至情)은 무정(無情)에 들고, 살인(殺人)은 지인(持人)에 달했다.'

타인을 향한 극도의 자비는 오히려 무정함으로 나타나고, 검을 들어 사람을 죽이는 것은 결국 사람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모순된 진리. 사공기는 비로소 그 구절의 참뜻을 온몸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타인과 정을 맺는 것을 거부해 온 고독의 굴레 속에서, 역설적이게도 이 억울한 자들을 구하기 위해 검을 쥐어야 하는 숙명.

사공기는 천천히 묵검을 비스듬히 내리깔았다. 검 날을 따라 흐르는 투명한 묵흑색의 신광이 대지를 무겁게 내리눌렀.

"대의(大義)라 하였는가."

사공기의 입술이 열리자, 바람조차 숨을 죽였다. 그의 나직한 음성은 거대한 내력에 실려 백화곡 전체를 징처럼 울렸다.

"약자를 짓밟고 일군 평화는 위선이며, 동도를 제물로 바쳐 세운 맹약은 기만이다. 천맹이 부르짖는 법도란 결국 네놈 한 자의 탐욕을 가리기 위한 피 묻은 가면에 불과하거늘, 어찌 감히 도의를 입에 올리는가."

쩌렁쩌렁 울리는 사공기의 일갈에 수천 명의 천맹 무인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부러진 검을 쥐고 무릎을 꿇었던 군소 방파의 무인들이 눈을 들어 단상 위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빛에는 위선적인 동맹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환멸과 분노가 서서히 차오르고 있었다.

그 순간, 대열의 후방에서 사락거리는 옷자락 소리와 함께 연조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평소의 능글맞은 미소를 지워버린 채, 극도로 가라앉은 눈빛으로 품에서 백색의 사초를 꺼내 들었다. 그녀의 손에 쥔 붓 끝이 먹물을 머금고 거침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슥, 사각.

"천맹주 제갈무신, 사리사욕을 위해 남궁세가의 가솔을 인질로 잡고 사직을 겁박하다. 방랑검신 사공기, 단 한 자루의 묵검으로 그 위선을 만천하에 드러내니……."

연조희는 붓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적어 내려가는 한 자 한 자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천맹이 그토록 감추려 했던 추악한 백 년의 역사를 대낮의 햇살 아래 강제로 끌어내는 준엄한 단죄의 서(書)였다.

"기록해라, 연 소저."

사공기가 차갑게 읊조렸다.

"이곳에 모인 무인들의 눈이 곧 역사요, 네 붓끝이 곧 천하의 공도(公道)가 될 것이다."

제갈무신의 안색이 거칠게 일그러졌다. 자신의 지략이 일낱의 방랑 무사와 서생의 붓끝에 의해 철저히 부정당하는 굴욕은 그의 자존심을 짓밟기에 충분했다.

"하찮은 주둥이로 천명을 논하는구나! 죽고 싶다면 그리해주마!"

제갈무신이 손가락을 튕기자, 인질들의 목덜미를 잡고 있던 천맹의 심복 수뇌부들이 칼날을 바짝 들이댔다.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사공기의 눈은 이미 남궁현을 향해 있었다.

위이이잉.

묵검의 끝자락에서 정밀하게 통제된 묵정기력의 파동이 실바람처럼 퍼져나갔다. 오직 남궁현의 귀에만 들리는 미세한 공명음이었다.

'좌측 울타리다. 가솔들의 고삐를 잡은 자들의 기혈을 내가 묶겠다. 너는 가문을 구하라.'

남궁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사공기가 자신을 믿고 기회를 만들어주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의 심장 속에서 굳어 있던 긍지가 뜨겁게 요동쳤다.

더욱이, 사공기의 묵정기력이 남궁현의 전신을 스치고 지나가는 찰나, 남궁현이 쥐고 있던 청강검(靑鋼劍)이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징-!

그것은 단순한 공명이 아니었다. 청강검의 검신 전체에 거미줄 같은 미세한 균열이 가기 시작하더니, 그 틈새로 이질적이고 탁한 자색의 독기가 안개처럼 뿜어져 나왔다. 과거 사공기와의 첫 대결 때부터 검 깊숙이 숨겨져 있던, 제갈무신의 독문 조종식(독기 사슬)의 실체였다.

"이, 이것은……!"

단상 아래의 정파 무인들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남궁 소협의 검에서 뿜어 나오는 저 탁한 기운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제갈무신의 독기다! 천맹주가 남궁세가의 후기지수를 꼭두각시로 조종하려 도검에 사악한 고독을 심어두었던 것이다!"

진실이 대낮의 햇살 아래 명백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가문의 영광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남궁현이 사실은 제갈무신의 장난감에 불과했다는 가혹한 증거가 만천하에 까발려졌다. 남궁현의 눈에서 핏물이 섞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제갈무신…… 네놈이 정녕 우리 가문을 이토록 유린했단 말이냐!"

남궁현의 청강검이 완전히 부서져 내리며, 옭아매고 있던 조종의 사슬이 완벽하게 박살 났다. 영혼의 구속에서 완전히 해방된 남궁현의 이마에 푸른 힘줄이 돋아났다. 그의 기혈을 흐르는 내력은 이제 더 이상 억압받지 않는 정순한 남궁의 검기로 가득 찼다.

"지금이다."

사공기의 나직한 음성이 떨어짐과 동시에, 그의 신형이 제자리에서 아지랑이처럼 흐려졌다.

스윽-!

소리도 없었고, 광풍도 없었다. 오직 검은 묵색의 궤적만이 허공을 일직선으로 갈랐을 뿐이다.

"커억!"

단상 위에서 인질들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던 제갈무신의 심복 세 명의 목덜미에서 일제히 붉은 선이 그어졌다. 사공기가 찰나의 순간에 절예 '묵정보(墨情步)'를 전개하여 공간을 건너뛴 것이다. 기혈이 정확하게 뚫린 수뇌부들은 비명 한 마디 지르지 못한 채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동시에 좌측 울타리를 돌파한 것은 폭풍과도 같은 남궁현의 신형이었다.

"가주님!"

남궁현은 제갈무신의 손길이 남궁세가 가주에게 닿기 직전, 자신의 온몸을 던져 가솔들을 묶고 있던 쇠사슬을 끊어냈다. 뇌전처럼 뿜어져 나온 남궁의 벽력 신공이 철장창을 산산조각 냈다.

"현아……!"

"말씀하지 마십시오. 가문을 욕보인 죄는 이 손으로 씻겠나이다!"

남궁현은 가솔들을 등 뒤로 감싸 안으며 제갈무신을 향해 칼날을 겨누었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방황하는 소년의 것이 아니었다. 가문의 생존이라는 무거운 멍에를 벗어던지고, 오직 협의를 위해 검을 쥔 진정한 무인의 참모습이었다.

완벽한 역전극이었다. 제갈무신이 자랑하던 오만한 인질 책략은 사공기와의 정밀한 호흡, 그리고 기어이 조종식의 쇠사슬을 끊어낸 남궁현의 각성 앞에 단 한 번의 살수도 쓰지 못하고 무력화되었다.

"오냐, 가소로운 놈들……!"

제갈무신의 안색이 극도로 흉포하게 일그러졌다. 인질을 잃고 비장의 조종식마저 깨어진 그의 눈에 광기 어린 살의가 들끓었다. 정파의 맹주라는 위선적인 가죽이 완전히 벗겨진 자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내 너희를 이곳에서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

제갈무신이 광소를 지으며 자신의 가슴팍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의 손아귀 속에서 짙은 흑색의 빛을 발하는 옥판(玉板)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파각-!

제갈무신이 망설임 없이 가슴팍의 흑옥 혈판을 한 손으로 쥐어짜 부러뜨렸다.

그와 동시에, 백화곡 전체가 지진이 일어난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궁!

"이, 이게 무슨 소리냐!"

"땅바닥이 붉게 물들고 있다!"

무인들이 경악하며 소리쳤다. 백화곡의 사방 절벽과 마른 흙바닥의 틈새마다 핏빛처럼 붉은 광류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백 년 동안 이곳에서 죽어간 원혼들의 피와 원망을 동력 삼아 매장되어 있던 천맹의 금기 진법, '원망의 혈신진(血神陣)'이 기동한 것이다.

피어오르는 붉은 결계는 순식간에 백화곡 전체를 집어삼키며 하늘로 솟구쳤다. 먹구름이 가득했던 하늘이 핏빛 피구름으로 완벽하게 뒤덮였고, 대지는 기괴한 원혼들의 울부짖음으로 가득 찼다. 숨이 막힐 듯한 살기와 탁한 피비린내가 곡 전체를 가득 메웠다.

사공기는 거세게 요동치는 묵검을 꽉 쥐며,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향해 차가운 안광을 던졌다.

진정한 사투의 서막이 열리고 있었다.

붉은 안개가 지면에서 분수처럼 뿜어져 나와 무인들의 발목을 감싸 안았다. 차가운 뱀의 혀가 살결을 핥는 듯한 음습한 기운에, 방금 전까지 무기를 내려놓았던 천맹의 하급 무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살가죽이 타들어 가듯 붉은 반점이 돋아나고, 단전의 진기가 역류하여 목구멍으로 검붉은 선혈이 울컥 쏟아졌다.

"이것은…… 단순한 진법이 아니다! 산 자의 정혈을 말려 죽이는 마공(魔功)이다!"

남궁현이 가솔들을 뒤로 밀쳐내며 외쳤다. 그의 손에 쥔 호신검의 검날이 붉은 안개에 닿자마자 치직 소리를 내며 검게 부식되어 갔다. 공기마저 썩어 들어가는 독랄한 기운이었다.

제갈무신은 단상 위에서 양팔을 넓게 벌린 채, 혈신진의 붉은 광류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의 전신을 두른 짙푸른 마황의 외투가 핏빛으로 물들어가며 기괴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의 동공은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초점 없는 붉은 귀안(鬼眼)이 사공기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백 년 전, 검마 독고청이 이곳 백화곡에서 수천의 무인을 도륙했을 때 흘러내린 피가 어디로 갔겠느냐."

제갈무신의 목소리가 겹겹이 겹쳐지는 마령(魔靈)의 음색으로 변해 사방에서 울렸다.

"그들이 흘린 원한과 핏물이 이 백화곡의 지맥 깊숙한 곳에 스며들어 거대한 혈맥을 이루었다. 나는 단지 그 잠든 원념의 봉인을 풀었을 뿐이다. 사공기, 네놈이 쥔 묵검이 아무리 망자의 한을 삼킨다 한들, 이 만겁(萬劫)의 원한을 모두 감당할 수 있겠느냐!"

쿠구구구구-!

대지가 다시 한번 크게 뒤틀렸다. 백화곡의 웅장한 가시덩굴 벽면들이 무너지며, 그 사이로 거대한 핏빛 해골의 형상을 한 기류들이 솟구쳐 올랐다. 그 기류가 스치고 지나가는 곳마다 풀과 나무가 순식간에 재가 되어 흩어졌다.

사공기는 흔들리는 대지 위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푸른 안광은 혈신진이 만들어내는 붉은 폭풍 속에서도 홀로 맑게 빛나고 있었다.

가슴 밑바닥에서 찌르르한 통증이 올라왔다. 묵검이 삼켰던 우진산과 마태윤, 그리고 수많은 망자들의 원념이 혈신진의 공명에 호응하여 그의 단전을 거칠게 갉아먹기 시작한 것이다. 맥박이 터질 듯 요동치고,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차갑게 식어갔다.

'지정(至情)은 무정(無情)에 들고, 살인(殺人)은 지인(持人)에 달했다.'

사공기는 단전의 요동을 억누르며 묵검의 자루를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손등의 핏줄이 터질 듯 불거졌다.

그가 걷고자 하는 참도(眞道)는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는 온정이 아니었다. 천하의 모든 위선을 베어내고,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의 원한을 온전히 제 몸으로 받아내어 법도를 바로 세우는 고독한 구원의 길. 그것은 스스로를 지옥의 업화 속에 던져 넣는 무정(無情)이자, 동시에 천하 만민을 살리고자 하는 지극한 지정(至情)이었다.

"남궁현."

사공기가 낮게 읊조렸다.

"가솔들을 이끌고 계곡 밖으로 퇴각하라. 이곳은 이제 산 자가 머물 곳이 아니다."

남궁현은 부러진 검자루를 던져버리고, 바닥에 떨어진 장창 한 자루를 움켜잡았다. 그의 전신에서 일어나는 청색의 남궁 검기가 혈신진의 붉은 마기와 격렬하게 충돌하며 불꽃을 튀겼다.

"방랑검신. 내 어깨에 얹힌 가문의 업보는 내 스스로 풀겠다 하였소. 저 위선자를 단죄하는 길에, 남궁의 검이 등 뒤를 보이는 일은 없을 것이오."

남궁현의 눈빛에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가문의 몰락이라는 절망 속에서 찾아낸 새로운 신념이 그의 창끝에서 서슬 푸른 광망으로 화해 타오르고 있었다.

"기록해라, 연 소저."

사공기가 신형을 반쯤 돌리며 연조희를 바라보았다. 연조희는 붉은 마기가 옷자락을 적시는 와중에도 붓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백색 사초 위로 붉은 핏빛 안개가 서서히 스며들어 글자들이 기이하게 요동쳤다.

"이 싸움의 시작과 끝을, 단 한 자도 빠짐없이 천하에 알리거라."

"걱정 마쇼."

연조희가 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으나, 붓끝만큼은 대지를 꿰뚫을 듯 단단하게 서 있었다.

"천맹의 백 년 위선이 무너지는 순간을, 이 연조희의 눈과 붓이 똑똑히 증명할 테니까."

제갈무신이 허공으로 천천히 떠올랐다. 그의 전신을 감싼 붉은 혈류가 거대한 고치를 형성하더니, 이내 파해지며 반인반마(半人半魔)의 흉포한 형상을 드러냈다. 그의 등 뒤로 뿜어져 나오는 마기의 촉수들이 백화곡 전체를 짓누르는 압도적인 중압감으로 변해 쏟아져 내렸다.

"어리석은 필부들이여, 모두 이 붉은 제단 위에 피와 살을 바치거라!"

제갈무신이 손을 내리뻗자, 허공에 뭉쳐져 있던 거대한 혈뢰(血雷) 수십 줄기가 사공기와 남궁현의 머리 위로 일제히 내리꽂혔다. 대기가 찢어지는 굉음과 함께 세상이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쿠웅-! 쿠웅-!

혈신진의 폭발적인 마기 속에서, 전혀 이질적인 거대한 진동이 백화곡 깊숙한 밑바닥에서부터 치솟아 올랐다.

그것은 지진의 흔들림이 아니었다. 거대한 심장이 고동치는 듯한, 대지 자체가 살아 숨 쉬는 듯한 웅장하고도 묵직한 울림이었다. 10화에서 사공기가 묵검의 신광을 완성했을 때 반응했던, 백화곡 무너진 비각 심부의 미지의 존재가 혈신진의 극독한 마기에 자극받아 마침내 깨어난 것이다.

지하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황금빛의 정순한 기운이 붉은 대지의 틈새를 찢고 우후죽순처럼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사공기가 쥔 묵검이 이전에 본 적 없는 기괴한 공명음을 내며 그의 손안에서 요동쳤다. 검신에 새겨진 백 년 전의 비전 조각들이 황금빛과 묵색의 광채를 동시에 뿜어내며 거칠게 날뛰었다.

"이 진동은……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허공의 제갈무신마저 하늘을 뒤흔드는 거대한 기운의 역류에 안색을 굳혔다.

붉은 혈신의 진법과, 대지 깊은 곳에서 깨어난 황금빛의 거대한 동력,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두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사공기의 묵검. 세 개의 거대한 흐름이 가파른 백화곡의 협곡 안에서 격돌하며, 천지를 송두리째 삼켜버릴 거대한 폭풍의 눈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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