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턴! 당장 해명하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면허 정지와 수사 의뢰를 집행하겠다!"
대회의실의 높은 천장을 때리는 한태오 기획조정실장의 고함은 이미 이성을 잃은 자의 비명에 가까웠다. 그의 손바닥이 마호가니 단상을 쿵 치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려 퍼졌다. 붉게 충혈된 눈망울이 백강혁을 찢어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회의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징계위원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눈치를 살폈다.
강혁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끄러운 공기 속에서 홀로 차분하게 숨을 골랐다.
쿵. 쿵. 쿵.
강혁의 가슴 깊은 곳에서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거세게 요동쳤다. 사흘 전, 철근 관통 환자를 살리기 위해 생명 구원 장부의 포인트를 전량 지출하며 가동했던 이중 안정화 버프의 잔재였다. 가슴을 짓누르는 둔탁한 압박감과 함께, 그의 왼손 끝이 미세하게 떨려 왔다.
‘또 시작이군.’
강혁은 가운 주머니 속에서 왼손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의지와 상관없이 검지와 중지가 안쪽으로 비틀리며 딱딱하게 굳어 들어갔다. 장부의 치명적인 과부하 동조가 남긴 후유증이었다. 신경이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저림이 손목을 타고 올라왔으나, 강혁은 단 한 표정의 변화도 허용하지 않았다. 이런 가벼운 경련 따위에 흔들릴 그가 아니었다.
강혁은 굳어 가는 왼손 대신, 오른손을 천천히 뻗어 의자 옆에 두었던 가죽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지퍼가 열리는 서늘한 마찰음이 정적을 깨뜨렸다.
“백인턴, 내 말이 장난처럼 들리나? 당장 그 입으로 소명하지 못한다면—”
“소명이라뇨.”
강혁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한태오의 말을 잘랐다.
“질문의 방향이 틀렸습니다, 기조실장님. 지금 이 자리에서 소명을 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닙니다.”
강혁의 오른손이 가방 속에서 묵직한 서류철 하나를 꺼내 들었다. 단순한 인쇄물이 아니었다. 겉면에 가온의료재단 기획조정실의 공식 인장이 찍힌, 그리고 불에 그슬려 가장자리가 시꺼멓게 탄 종이 뭉치였다.
탁.
강혁은 서류철을 회의실 탁자 한가운데로 던졌다.
빛바랜 종이 조각들이 마호가니 상판 위를 미끄러지며 한태오의 태블릿 PC 바로 앞에 멈춰 섰다.
그것은 5화 당시, 본원 청소용 폐지 수거함의 폐기 대상 문서들 사이에서 강혁이 회귀 전의 기억을 더듬어 직접 찾아내 확보했던 비밀 문서였다. 한태오와 차민혁이 사적으로 주고받았던 원본 합의서의 파편들과 완전한 유착 증거물들.
한태오의 눈동자가 그 종이 조각들에 닿는 순간, 그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이, 이것은…….”
“가온 메디컬 뷰티 리조트 설립 및 부지 확보 계획안.”
강혁이 한 자씩 또박또박 읊조렸다.
“그리고 그 뒷장에 첨부된 이면 계약서. 외상구역을 의도적으로 고사시켜 폐쇄한 후, 해당 부지를 뷰티 리조트 개발업체에 무상 양도하는 조건으로 지분율을 나누기로 약속하셨더군요. 기획조정실장 한태오 15퍼센트. 외과 과장 차민혁 10퍼센트.”
회의실 안이 찬물을 끼얹은 듯 괴괴해졌다.
징계위원으로 참석한 원로 교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태오와 차민혁에게로 쏠렸다.
차민혁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입을 벌린 채 얼어붙어 있었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려 돋보기안경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이, 이건 조작이야! 일개 인턴 놈이 감히 어디서 이런 허접한 위조 서류를 들이밀어!”
차민혁이 삿대질을 하며 비명을 질렀다. 목청을 높일수록 그의 목에 선 핏대가 흉하게 도드라졌다.
“위조라고 하시기엔 서명란의 필적이 너무나 선명하군요, 과장님.”
강혁이 차갑게 받아쳤다.
“가온의료재단 직인이 찍힌 정식 문서 번호까지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감사실이나 외부 수사 기관에 대조를 의뢰하면 10분도 걸리지 않아 진위가 밝혀질 겁니다. 두 분이 리조트 시행사 대표와 만났던 날짜, 그리고 그날 결제된 법인카드 내역까지 모두 이 서류 뒤에 첨부해 두었으니까요.”
차민혁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사정없이 흔들렸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곁에 서 있던 치프 레지던트 송민우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평소의 능글맞은 미소는 온데간데없고, 매서운 안광만이 번뜩였다. 송민우는 바지 주머니에서 낡은 가죽 수첩을 꺼내 들었다. 그 수첩 안에는 그가 오랫동안 다져온 정재계 특수 인맥들의 연락처와 가온대학병원의 권력 구도를 흔들 수 있는 패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어이쿠, 과장님. 위조라고 발뺌하시기엔 판이 너무 커졌습니다.”
송민우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안 그래도 이 징계위원회가 열리기 직전에, 재단 내에서 한 실장님의 리조트 사업에 반대하시던 주주 분들 몇 분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그분들도 참 궁금해하시더라고요. 왜 멀쩡한 외상구역의 예산과 혈액 팩을 묶어 두고 환자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는지. 그 이유가 겨우 리조트 지분 몇 퍼센트 때문이었는지를 말입니다.”
송민우가 액정을 가볍게 터치했다. 스피커폰으로 연결된 통화 신호음이 고요한 회의실에 울려 퍼졌다.
두 번의 신호음 끝에, 묵직하고 권위 있는 노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온의료재단의 사외이사이자 반 한태오 파의 수장인 김 원로 이사였다.
[- 송 선생인가? 지금 징계위원회 현장인가?]
“네, 이사님. 예정대로 진행 중입니다. 마침 한태오 실장님과 차민혁 과장님의 리조트 유착 계약서 원본이 테이블 위에 올라와서 확인하는 중이었습니다.”
[- 그래? 참으로 개탄스럽군. 기조실장이라는 자가 병원의 공적 자산을 사리사욕을 위해 팔아넘기려 했다니. 차민혁이 역시 공모한 게 확실하단 말이지?]
회의실 안의 징계위원들이 일제히 숨을 죽였다. 재단 실세 이사의 목소리가 대회의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자, 상황은 이미 단순한 병원 내부의 알력 싸움을 넘어섰다. 권력의 저울추가 급격히 백강혁과 송민우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네, 그렇습니다. 심지어 이들은 외상구역의 O형 적혈구 팩을 제한하고, 철근 관통 환자 같은 초응급 환자의 접수까지 조직적으로 방해했습니다. 의도적으로 사망률을 높여 외상구역을 폐쇄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는 단순한 비리가 아니라 살인 미수와 다름없습니다.”
윤설아의 목소리가 쐐기를 박듯 회의실을 울렸다. 그녀는 단호한 태도로 한태오를 매섭게 쳐다보았다.
“저는 흉부외과 펠로우로서, 그리고 당시 수술에 참여했던 의사로서 이 모든 과정을 증언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대한의사협회 법률지원단에도 이미 자문을 마친 상태입니다.”
윤설아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강혁은 그녀의 손끝을 응시했다. 수술실에서의 충돌로 인해 끝부분이 미세하게 마모되었던 그녀의 소중한 마이크로 메스가 떠올랐다. 조만간 장부의 개조 기능을 사용해 저 메스를 완벽하게 수리해 주리라, 강혁은 속으로 다짐했다. 자신을 위해 커리어까지 걸고 전면에 나선 그녀에게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성의였다.
[- 잘 알겠네. 한태오 실장과 차민혁 과장에 대한 직무 정지 및 긴급 이사회 소집 건은 내가 즉시 발의하겠네. 더는 가온의 명예가 저 부패한 자들 때문에 더럽혀지게 둘 수 없지.]
뚝.
전화가 끊겼다.
회의실 내부의 공기는 이제 한태오와 차민혁이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 이건…….”
차민혁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손이 탁자 위의 문서를 집어 들려 했으나, 극심한 수치심과 공포로 인해 손가락 끝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바스락거리는 종이 소리가 그의 파멸을 재촉하는 종소리처럼 들렸다.
“차 과장님.”
강혁이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큰 키가 차민혁의 머리 위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왼손의 경련은 여전했지만, 강혁은 도리어 그 왼손을 주머니에서 꺼내 탁자 위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굳어 버린 손가락이 억지로 펴지며 뼈마디가 하얗게 불거졌다. 통증이 척수를 차갑게 훑고 지나갔으나, 강혁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빛났다.
“의사 가운을 입고, 겨우 이 정도 비리 잡범에 불과하셨습니까?”
그 한마디는 비수였다. 학문적 지위와 명예만을 탐하며 전공의들의 뺨을 차트로 치고 폭언을 일삼던 가온대학병원 외과의 절대 군주. 그 차민혁이 단 한순간에 추악한 비리 잡범으로 격하되는 순간이었다.
“끄윽…… 끄으…….”
차민혁의 목에서 짐승의 더듬거리는 소리 같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오르더니, 이내 푸르스름하게 변해 갔다.
“과, 과장님?”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외과 교수가 깜짝 놀라 그를 붙잡았다.
그러나 차민혁은 이미 가슴을 움켜쥔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과호흡이었다. 극도의 스트레스와 공포가 그의 늙은 심장과 폐를 마비시켰다.
“억…… 헉……!”
차민혁의 몸이 뒤로 크게 기울어지며 의자와 함께 바닥으로 요란하게 고꾸라졌다.
쿵!
“과장님! 정신 차리십시오! 차 과장님!”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징계위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그의 상태를 살폈다.
“산소! 당장 응급실에서 산소마스크랑 들것 가져와!”
송민우가 능청스럽게 소리쳤지만, 그의 입꼬리는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강혁은 바닥에 쓰러져 버둥거리는 차민혁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앞에 붉은색 수치가 어른거렸다.
[차민혁 - 생존율 88% (과호흡 및 일시적 공황 발작)]
죽지는 않는다. 그저 권력의 정점에서 비참하게 바닥으로 추락했을 뿐이다.
잠시 후, 응급실 의료진이 들것을 들고 대회의실로 들이닥쳤다. 한때 병원장 자리를 노리며 거드름을 피우던 외과 과장은, 자신이 그토록 무시하던 인턴과 전공의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비참하게 들것에 실려 나갔다.
심문실의 숨 막히던 권력 구도는 단 1초 만에 백강혁에게 완전히 귀속되었다. 남아 있는 징계위원들은 이제 강혁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저에 대한 징계 사유는 소명이 끝난 것 같군요.”
강혁이 단정하게 가운 깃을 정리하며 말했다.
한태오는 구석에 우두커니 선 채, 넋이 나간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자신의 완벽했던 계획이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질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강혁 씨, 정말 대단해요.”
윤설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강혁을 향한 깊은 신뢰와 경외감이 서려 있었다.
“이제 외상구역을 건드릴 수 있는 명분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이겼어요.”
송민우 역시 강혁의 어깨를 툭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야, 백강혁. 너 진짜 물건이다. 그 영감탱이 쓰러지는 꼴 봤냐? 속이 다 시원하네!”
두 사람의 안도와 환호 속에서 강혁은 굳어 있던 왼손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손가락의 감각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기적의 대가는 가혹했지만, 그 대가를 치르고 얻어낸 승리는 달콤했다. 오직 환자만을 살릴 수 있는 독립적인 외상 센터의 설립이 눈앞에 다가온 듯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대회의실의 무거운 목조 문이 거칠게 열렸다.
쾅!
숨을 헐떡이며 뛰어 들어온 사람은 병원 비서실의 정예 직원이었다. 그의 얼굴은 차민혁이 쓰러졌을 때보다 더 하얗게 질려 있었다.
직원은 방 안의 험악한 분위기를 살필 겨를도 없이, 한태오 실장과 백강혁을 번갈아 바라보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실장님! 아니, 백인턴 선생님! 지금 당장 구관으로 가보셔야 합니다!”
강혁의 눈썹이 꿈틀했다.
“무슨 일입니까?”
직원이 마른침을 삼키며, 손에 쥐고 있던 태블릿 PC를 강혁의 코앞으로 들이밀었다. 화면에는 이미 결재가 완료되어 가온의료재단 전산망에 등록된 공식 문서가 띄워져 있었다.
“한태오 실장님이…… 조금 전 이 회의실로 들어오시기 직전에 최후의 결재를 올리셨습니다. 도주하기 전에 아예 대못을 박아버린 겁니다!”
직원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임시외상구역 수술 공간 및 레드존 부지의 강제 대형 철거 가결 서명본이…… 이사회에 이미 접수 완료되었습니다! 지금 본관 시설팀과 철거 업체 인부들이 장비를 싣고 구관 레드존으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윤설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가셨다.
“뭐라고요? 지금 수술실에 아직 회복 중인 환자들이 처치실에 누워 있는데 철거라니요!”
강혁의 시선이 한태오에게로 향했다.
어스름한 구석에 서 있던 한태오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일그러지며 비열한 미소로 변해 가고 있었다.
“내가 순순히 물러날 것 같았나, 백강혁?”
한태오가 깨진 목소리로 읊조렸다.
“내 손으로 리조트를 짓지 못한다면, 네놈들의 그 알량한 놀이터도 존재할 이유가 없어. 이미 법적 절차는 끝났다. 오늘부로 레드존은 철거된다.”
그와 동시에, 강혁의 귓가에 붉은색 경고음과 함께 생명 구원 장부의 텍스트가 강렬하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위기 상황 발생: 임시외상구역(The Red Zone)의 물리적 파괴 시작.] [경고: 구역 내 입원 환자 3인의 바이탈 급격히 저하 중.] [남은 시간: 15분]
강혁의 왼손 끝이 다시 한번 거세게 뒤틀리며 불길한 통증을 뿜어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