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모든 수술실 시야가 걷히고 봉합 직후 환자의 심박이 힘차게 돌아온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 수술장 문을 열고 한 걸음 나서던 백강혁이 온몸의 수분이 증발한 듯 찬 바닥에 가슴을 움켜쥐고 고꾸라졌다.

쿵, 하고 무거운 육체가 시멘트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억……! 흑……!"

폐부가 찢어지는 듯한 단말마가 강혁의 목구멍을 찢고 흘러나왔다. 가슴 안쪽에서 뜨거운 용암이 요동치는 감각이었다. 심장이 갈비를 뚫고 나올 것처럼 불규칙하게 요동쳤다. 분당 180회에 달하는 부정맥. 생명 구원 장부의 기적이 남긴 가혹한 대가, 동조 통증이 그의 전신을 사정없이 짓밟고 있었다.

시야가 온통 붉은 핏빛으로 물들었다가 이내 암전과 백색 섬광을 반복했다. 손가락 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 마비감이 척수를 타고 빠르게 올라왔다. 식은땀이 눈을 가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다급한 발소리가 고요한 복도의 공기를 갈랐다.

"강혁아! 야, 백강혁!"

흐릿한 시야 너머로 송민우의 일그러진 얼굴이 보였다. 평소의 능글맞은 웃음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송민우는 강혁의 어깨를 거칠게 돌려눕히더니, 주머니에서 다급하게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갈색 유리병이었다.

"이 미친 새끼가 진짜……! 입 벌려! 빨리!"

송민우가 강혁의 턱을 억세게 벌렸다. 그의 손가락이 강혁의 입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혀 밑으로 쏙 들어오는 알약의 쌉싸름한 맛과 함께, 차가운 앰풀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렸다. 설하정으로 투여하는 급성 부정맥 치료제와 강력한 진통제였다.

"삼켜! 어서!"

강혁은 반사적으로 약을 삼켰다.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듯했지만, 이내 약효가 퍼지며 뇌를 죄어오던 통증의 사슬이 미세하게 느슨해졌다. 거칠게 요동치던 심박수가 서서히 하강 곡선을 그렸다.

송민우는 강혁의 상체를 끌어안은 채, 그의 가슴을 규칙적으로 압박하며 호흡을 유도했다.

"들이쉬고, 내쉬어. 내 박자에 맞춰. 쓰읍, 후우. 그렇지. 더 크게 쉬어."

강혁은 송민우의 흉부를 이정표 삼아 간신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차가운 복도 바닥의 냉기가 등을 타고 올라왔지만, 자신을 지탱하는 송민우의 단단한 팔뚝만큼은 비정상적으로 뜨거웠다.

한참이 지나서야 강혁의 눈동자가 초점을 찾았다. 가슴을 짓누르던 바위 같은 압박감이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송민우가 그제야 깊은 한숨을 내쉬며 강혁의 머리를 바닥에 툭 내려놓았다. 그의 이마에도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이 무모한 새끼야. 혼자 영웅 질 다 뒤집어쓸래?"

송민우가 바닥에 주저앉아 널브러진 강혁을 내려다보았다. 목소리에는 짙은 분노와 함께 형용할 수 없는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그러다 진짜 골로 간다고, 인마. 너 방금 심정지 직전까지 갔어. 알아?"

"……살았습니다."

강혁이 갈라진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뭐?"

"환자…… 살렸다고요."

송민우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더니, 강혁의 멱살을 잡는 척하며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래, 살렸다. 대단하신 백강혁 선생 덕분에 가온그룹 왕회장님이 숨을 쉬신다. 근데 집도의가 수술실 문 앞에서 급사하면 그게 무슨 개망신이냐? 어? 나 치프 레지던트야. 내 구역에서 인턴이 과로사로 뒤지면 내 목이 제일 먼저 날아가요, 이 자식아."

강혁은 송민우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대었다. 여전히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장부의 붉은 경고창은 완전히 사라진 뒤였다.

"다음부턴…… 조절하겠습니다."

"말은 잘해요. 가자. 행정팀 놈들 들이닥치기 전에 일단 쉬어야지."

송민우는 투덜거리면서도 강혁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타인을 전혀 믿지 못하고 모든 책임을 홀로 짊어지려던 강혁의 차가운 내면에, 송민우라는 존재가 아주 미세한 균열을 내고 있었다.

***

사흘 뒤인 3월 16일 오전.

가온대학병원 기획조정실.

통유리창 너머로 따스한 봄볕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실내의 공기는 냉동고처럼 차가웠다. 한태오 기조실장은 태블릿 PC에 띄워진 임시외상구역의 수술 실적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사장 일가 수술을 성공시켰다라……."

한태오의 건조한 목소리가 넓은 집무실을 채웠다. 그의 맞은편에는 외과 과장 차민혁이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었다. 차민혁의 이마에는 땀이 흥건했다.

"실장님, 그 백강혁이라는 인턴 놈이 보통내기가 아닙니다. 뒤에서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건지, 귀신같이 출혈점을 잡아서……."

"차 과장님."

한태오가 나직하게 그의 말을 자르고 태블릿을 책상 위에 툭 내려놓았다.

"저는 그 인턴이 천재든 귀신이든 관심 없습니다. 중요한 건 우리 가온메디컬 그룹의 방향성입니다. 외상구역은 존재 자체로 적자입니다. 연간 수십 억의 예산이 낭비되는 시궁창이죠. 거기를 폐쇄하고 VIP 리조트 센터를 짓는 계획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 그렇습니다만, 이번 일로 이사장님의 신임이 그쪽으로 쏠리면 폐쇄안 통과가 어려워질 수도……."

"그래서 손을 써야지요."

한태오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올라갔다. 그는 책상 서랍에서 붉은색 결재인이 찍힌 문서를 꺼내 차민혁에게 밀어 던졌다.

"임시외상구역 보급 자원 조정안입니다."

차민혁이 다급하게 문서를 펼쳤다. 내용을 읽어 내려가는 그의 눈이 크게 떼어졌다.

"이건……!"

"오늘부로 레드존에 공급되는 0형 농축 적혈구 팩을 기존의 3분의 1로 제한합니다. 광범위 항생제인 반코마이신과 메로페넴의 처방 총액도 70% 감축합니다. 원내 약제부와 혈액은행에는 이미 지시를 내렸습니다."

"하지만 실장님, 외상 환자들에게 피와 항생제를 끊는다는 건…… 수술을 하지 말라는 소리와 같습니다!"

"하지 말아야지요."

한태오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차갑게 대꾸했다.

"의사가 메스를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는 환경을 만드는 것. 그것이 가장 우아하고 확실한 고사 작전입니다. 환자가 죽어나가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자원 부족을 핑계로 수술을 강행한 임시외상의 집도의들에게 돌아갈 겁니다."

차민혁의 얼굴에 비열한 미소가 서서히 번졌다.

"역시 실장님이십니다. 행정처를 움직여 즉각 무기 회수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조용하고 신속하게 처리하십시오."

한태오의 지령서는 그렇게 행정처를 거쳐 즉각 관철되기 시작했다.

***

같은 시간, 임시외상구역(더 레드존) 스테이션.

강혁은 뻐근한 목을 돌리며 차트를 정리하고 있었다. 사흘 전의 충격에서 겨우 회복했지만, 아직도 심장 부근이 묵직하게 저려왔다.

바스락.

차트를 정리하던 중, 강혁의 시선이 스테이션 구석에 놓인 청소용 폐지 수거함으로 향했다. 환경미화원이 비우고 간 수거함 틈새로, 붉은색 대외비 직인이 찍힌 찢어진 종이 조각이 삐져나와 있었다.

강혁은 무심코 그 종이를 집어 들었다. 회귀 전, 가온그룹의 비리를 파헤치던 시절의 기억이 본능적으로 그의 손가락을 움직였다.

찢어진 종이 조각을 맞추어 나가던 강혁의 눈이 날카롭게 가라앉았다.

[……가온 메디컬 뷰티 리조트 설립 계획안……] [……차민혁 외과 과장 명의의 내부 지분 배분율 7%……] [……한태오 기조실장 및 해외 사모펀드 간의 이면 계약서 사본……]

비록 일부분이었지만, 그것은 한태오와 차민혁이 외상센터를 폐쇄하고 자신들의 사익을 채우려 했다는 결정적인 유착 증거의 파편이었다.

‘역시 이 시기부터 이미 판을 짜고 있었군.’

강혁은 종이 조각을 접어 자신의 가운 안쪽 깊숙한 주머니에 넣었다. 그때, 그의 눈앞에 푸른빛의 장부 시스템 메시지가 명멸했다.

[알림: 핵심 인물의 치명적 약점 정보가 감지되었습니다.] [정보를 장부의 보관함에 저장합니다. 적절한 시점에 반격의 도구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강혁의 입꼬리가 차갑게 굳어졌다. 한태오와 차민혁. 그들이 자신을 무너뜨리기 위해 쳐놓은 덫을 역으로 그들의 목을 조르는 올가미로 만들어 줄 기회였다.

그때였다.

쿵! 쿵! 쿵!

거친 구두 굽 소리와 함께, 양복을 차려입은 사내 서너 명이 레드존 스테이션 안으로 들이닥쳤다. 앞장선 사내는 행정처의 행무과장이었다. 그의 손에는 붉은색 '압류 및 봉인' 스티커가 들려 있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인턴 한 명이 당황해 앞을 막아서자, 행무과장이 거칠게 그를 밀쳐냈다.

"비키세요. 기조실 지시로 임시외상구역 내의 과다 보유 자원을 회수하러 왔습니다. 특히 혈액 보관고와 특수 약품고는 오늘부로 봉인 조치합니다."

"봉인이라니요! 여기는 중증 외상 환자들이 오는 곳입니다! 피가 없으면 환자들은 다 죽어요!"

"그건 행정처 소관이 아닙니다. 약제부와 혈액은행의 재고 관리 규정에 따른 조치일 뿐입니다. 자, 어서 봉인 스티커 붙여!"

행정팀 요원들이 혈액 보관고의 손잡이로 다가갔다. 레드존의 간호사들과 인턴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그들을 막아서려 했지만, 행무과장의 기세에 밀려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강혁이 메스를 쥐듯 손가락을 굳게 쥐며 한 걸음 내딛으려던 찰나였다.

"아아암~ 짜아악!"

스테이션 뒤쪽 당직실 문이 열리며, 턱이 빠질 듯 하품을 해대는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송민우였다.

그는 헝클어진 머리를 긁적이며, 슬리퍼를 질질 끌고 행무과장 앞을 가로막아 섰다.

"아이고, 과장님. 아침부터 남의 안마당에 와서 왜 이렇게 꽥꽥 소리를 질러대십니까? 당직 서고 겨우 눈 좀 붙이려는데 시끄러워서 잘 수가 있어야지, 원."

행무과장이 인상을 쓰며 송민우를 쏘아보았다.

"송 선생.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닙니다. 기조실 공식 지시입니다. 방해하지 말고 비키세요."

"지시라…… 참 좋은 단어죠. 윗분들이 시키면 까라면 까야 하는 게 우리 같은 을들의 비애 아니겠습니까?"

송민우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행무과장의 어깨에 턱하니 팔을 올렸다. 행무과장이 불쾌한 듯 그의 팔을 쳐내려 했지만, 송민우의 손아귀 힘은 생각보다 무척 강했다.

"근데 말입니다, 과장님."

송민우가 행무과장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나직하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스테이션 안의 모든 사람에게 똑똑히 들릴 만큼 명확했다.

"작년 10월이었나? 가락동에 있는 '텐프로' 룸살롱에서 긁으신 일백이십만 원짜리 법인카드 영수증 말입니다. 그거 원무과 소모품 구입비인 '복사용지 및 토너 구매' 항목으로 허위 청구하셨더라고요?"

행무과장의 몸이 순간 돌처럼 굳어졌다. 그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에이, 모르는 척하기는. 그날 같이 가신 분이 기조실 대리라면서요? 둘이 아주 신나게 양주 빨고 가온대병원 이름으로 결제하셨던데. 아, 참! 그 전 달에는 청소 용역 업체 선정 과정에서 뒷돈 받으신 내역도 제 낡은 가죽 수첩에 아주 예쁘게 적혀 있습니다."

송민우가 주머니에서 손때 묻은 갈색 가죽 수첩을 꺼내 들며 흔들어 보였다.

"이거 보건복지부 감사관실에 친한 형님이 계시는데, 심심할 때 읽어보시라고 팩스로 보내드리면 아주 재미있어하시겠어요. 안 그렇습니까, 과장님?"

"이, 이…… 건방진 레지던트 놈이……!"

행무과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주먹을 쥔 그의 손이 덜덜 떨렸다.

"어이쿠, 무서워라. 치프 레지던트 목 날리는 건 일도 아니시겠죠. 근데 과장님 목 날아가는 건 초 단위로 일어날 일 같은데, 한번 해볼까요? 우리 같이 한강 가볼까?"

송민우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날카롭게 빛났다. 평소의 흐리멍덩한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상대의 숨통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포식자의 눈이었다.

행무과장은 마른침을 꿀컥 삼켰다. 송민우가 들고 있는 수첩이 단순한 협박용이 아님을 직감한 것이다. 저 똘기 충만한 송민우라면 정말로 감사관실에 제보를 하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철수해."

행무과장이 짓씹듯 명령했다.

"예? 과장님, 하지만 기조실에서……."

"철수하라고 하잖아, 이 새끼들아!"

행무과장이 고함을 지르며 붉은색 스티커를 바닥에 팽개쳤다. 그는 송민우를 매섭게 노려본 뒤, 황급히 스테이션을 빠져나갔다. 그의 뒤를 따라 행정팀 요원들이 꼬리를 내린 개처럼 허둥지둥 쫓겨갔다.

"와아아!"

레드존의 간호사들과 인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송민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하품을 쩍쩍 하며 수첩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아휴, 졸려. 야, 백강혁. 나 커피 한 잔만 타와라."

강혁은 그런 송민우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겉으로는 속물 같고 제멋대로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자신들의 방패막이가 되어주는 선배.

"사양하겠습니다."

"이 싸가지 없는 새끼 보소? 선배가 목숨 걸고 밥그릇 지켜줬더니 커피 한 잔을 안 타줘?"

송민우가 투덜거리며 강혁의 통수를 가볍게 쳤다. 그들의 사이에 묘한 유대감이 흐르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레드존의 핫라인 전화기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울려 퍼졌다. 스테이션의 모든 간호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수화기로 쏠렸다. 수화기를 든 수간호사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갔다.

"예? 예! 알겠습니다! 즉시 준비하겠습니다!"

수간호사가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찢어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코드 레드! 인근 대형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비계 붕괴 사고 발생! 전신 철근 관통 환자 이송 중! 본원 수술실 자리가 없다고 저희 쪽으로 직배송한답니다! 5분 뒤 도착 예정!"

"뭐라고? 철근 관통?"

송민우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완전히 걷혔다.

"본원 놈들, 기조실 지시랍시고 우리한테 폭탄을 던지네. 수술 승인도 안 내주고 환자부터 밀어 넣어?"

강혁의 심장이 다시금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의 왼손 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단순한 통증의 여운이 아니었다. 장부의 치명적인 과부하가 남긴 불길한 징조, 왼손가락이 제멋대로 비틀리는 경련 현상이었다.

강혁은 떨리는 왼손을 오른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사선에서 밀려드는 환자, 그리고 자신을 압박해 오는 권력의 손길.

"준비해."

강혁의 차가운 목소리가 붉은 아수라장의 서막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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