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쿠르릉, 하고 대지가 비명을 질렀다.

발밑에서부터 시작된 지동(地動)은 단순한 물리적 진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간의 뼈대가 뒤틀리고, 아카데미를 지탱하던 유구한 마법적 축이 일시에 무너져 내리는 파멸의 전조였다. 결속의 고리 결투장의 단단한 청백색 대리석 바닥이 거미줄처럼 쩍쩍 갈라지며 기괴한 흑색 마나를 뿜어냈다.

그 붕괴의 중심에서, 추락하는 그레이엄 카터가 광소했다. 그의 안구는 핏발로 가득 차 있었고, 온몸의 혈관이 터질 듯 팽창해 있었다. 심장을 흐르는 마나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 낸 최후의 광역 파멸 기예, ‘오검의 진혼곡’이 대검의 날끝에서부터 칠흑 같은 검기로 피어올랐다.

"세이……! 너와 함께 이 심연의 밑바닥에서 썩어 가겠다!"

그레이엄의 절규와 동시에, 경기장 외곽의 제어 석조물들이 일제히 붉은 빛을 발하며 부서져 내렸다. 조율관 베르톨트가 미리 장치해 둔 지하 침강 트리거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였다. 결투장의 밑바닥이 거대한 아가리를 벌리며, 아카데미 심층에 봉인되어 있던 가라앉은 어둠의 구역과 직접 연결되는 차원의 통로가 열리고 있었다.

위에서 짓눌러 오는 가공할 검기, 그리고 아래에서 영혼을 빨아들이듯 솟구치는 공간의 인력.

그 사선(死線)의 한가운데에 선 한서우의 등 뒤로 식은땀이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미치겠네. 진짜 뒤지는 건가?’

속으로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무릎을 끓고 살려 달라고 애원하고 싶은 충동이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자신은 마나 한 톨 다룰 줄 모르는 평범한 지구의 고등학생에 불과했다. 저 거대한 강철 대검이 몸에 닿는 순간, 뼈와 살이 분리되어 고깃덩이가 될 것이 뻔했다. 극도의 공포가 전신을 지배하려 했다.

하지만 서우는 본능적으로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위기 상황일수록 차갑게 미소 짓는, 그의 병적인 방어기제가 작동한 것이었다. 얼굴가죽을 뚫고 나올 것 같은 냉혹하고 오만한 '천재 대마법사'의 가면이 그의 얼굴 위에 완벽하게 덧씌워졌다. 눈동자는 심연보다 깊고 고요하게 가라앉았으며, 무너지기 시작한 대지 위에서도 그의 신체는 깃털처럼 고요함을 유지했다.

서우는 천천히 품 안으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 닿은 것은 차갑고 단단한 금속의 촉감이었다. 제1황녀 엘리시아 폰 로젠가르트가 그에게 충성의 맹세와 함께 바쳤던 황실의 비보, ‘비유클리드 비틀림 무늬 펜던트’였다.

은빛으로 매끄럽게 세공된 펜던트의 표면에는 인간의 기하학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스스로 순환하며 꼬여 있는 기묘한 나선형 무늬가 음각되어 있었다. 보통의 마법사들에게는 그저 기이한 마력 전도체에 불과하겠지만, 서우의 눈에는 달랐다. 이것은 3차원의 공간을 뒤틀어 고차원의 위상 기하학적 연산을 현실에 투사할 수 있게 돕는, 완벽한 물리적 하드웨어 촉매였다.

‘이 펜던트의 나선 무늬는 뵘-아하로노프 효과(Aharonov-Bohm effect)의 위상적 변형이다. 공간의 벡터 포텐셜을 강제로 왜곡하는 기하학적 영점.’

서우는 펜던트를 꺼내 허공으로 가볍게 던졌다.

스르릉, 하는 맑은 금속음과 함께 은빛 펜던트가 그의 눈앞에서 자전하기 시작했다. 서우의 뇌 속에서 복잡한 수식들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숫자가, 기호가, 비유클리드 공간의 좌표들이 그의 전두엽을 미친 듯이 타격했다.

"아아아윽……!"

머릿속에서 수만 개의 달궈진 바늘이 뇌세포를 사정없이 찌르는 듯한 극통이 밀려왔다. 연산의 규모가 커질수록 뇌가 과열되어 타들어 가는 대가. 이명이 귀를 찢을 듯 울렸고, 코끝에서부터 뜨겁고 비릿한 혈경(血徑)이 흘러내려 턱 끝으로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서우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세상을 조롱하는 듯한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뻗어 회전하는 펜던트의 중심축을 겨누었다.

"이 차원의 유클리드적 정의는 거짓이다."

서우의 목소리는 낮고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주변의 모든 소음과 붕괴의 굉음마저 뚫고 들어오는, 기묘할 정도로 명징한 목소리였다.

"공간의 곡률을 무한대로 수렴시킨다. 그레이엄 카터. 네가 딛고 선 좌표의 분모를 '영(0)'으로 정의하겠다."

수학에서 어떤 수를 영으로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정의되지 않는 영역, 즉 존재의 소멸을 의미했다.

서우는 펜던트의 비틀림 무늬를 일종의 광학 렌즈처럼 사용했다. 펜던트를 통과한 비가시적인 차원의 빛이 그레이엄이 방출한 거대한 검기의 접점을 향해 일직선으로 정렬되었다.

위상기하학적 투사. 공간의 인과율 자체를 해킹하는 수식이 허공에 푸른빛의 궤적으로 그려졌다.

"Q.E.D. (증명 완료)."

찰나의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쿠구구구—! 하고 울부짖던 그레이엄의 오검 검기가, 서우가 설정한 기하학적 특이점—'분모가 영이 되는 지점'—에 닿는 순간, 기이한 형태로 비틀리기 시작했다. 폭발도 없었고, 화려한 마력의 충돌도 없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가공할 위력의 붉은 검기들이 중심부에서부터 안쪽으로 꺾이며 스스로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에너지가 스스로를 상쇄시키며 영(0)으로 수렴하는 기하학적 소멸이었다.

"어……? 어째서…… 내 마나가…… 내 검이……!"

그레이엄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가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무투의 정수, 대지를 가르고 하늘을 찢을 것 같던 오검의 결계가 형편없이 우그러들었다. 마나의 흐름을 통제하는 기맥 자체가 기하학적 왜곡에 휘말려 꽈배기처럼 꼬여 버렸다.

쩍, 쩌적!

그레이엄의 체내에서 마나 통로가 차례로 파열하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그의 온몸에서 피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마력의 근원적인 통로가 완전히 뒤틀려 끊어지는, 영구적인 폐인의 상태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아아아아악!"

처참한 단말마와 함께 그레이엄은 대검을 놓치고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그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었고, 입에서는 검붉은 피가 거품처럼 뿜어져 나왔다. 단 한 번의 육체적 타격도 없이, 단지 허공에 펜던트 하나를 띄워 놓았을 뿐인데, 아카데미 최강의 무투파 천재가 완벽하게 파멸한 것이다.

서우는 가볍게 손을 뻗어 낙하하는 펜던트를 낚아챘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펜던트의 온기는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머릿속의 이명은 더욱 심해졌고, 시야가 붉게 물들어 갔지만, 서우는 턱에 묻은 피를 오만한 손짓으로 쓸어내리며 무너져 내리는 전장을 고요히 내려다보았다.

연무장을 가득 채우고 있던 침묵은, 이제 공포를 넘어선 종교적 경외에 가까웠다.

"……말도 안 돼."

누군가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마법을 쓰지 않았어. 마나의 파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단 말이다……." "그저 손짓 한번으로 공간의 법칙 자체를 새로 썼어. 저건…… 저건 태초의 권능이다."

관람석의 학생들이, 그리고 그들을 지도하던 중견 마법사들이 차례로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서우의 모습은, 피를 흘리면서도 가련하게 웃고 있는, 마치 인간의 미천한 발악을 유희로 즐기는 고고한 신적 존재—혹은 예언서 속 마왕 그 자체였다.

황녀 엘리시아는 조용히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는 황홀경에 가까운 빛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자신이 건넨 펜던트가 마왕의 손에서 공간을 지배하는 기적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목격한 그녀는, 이제 자신의 영혼마저 저 사내에게 저당 잡혔음을 직감했다.

"아아…… 세이 님."

그녀의 입술 사이로 젖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한편, 고지대의 특별 관람석에 위치한 원로원 감사단의 분위기는 초상집과 다름없었다. 그들은 사색이 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보았는가? 저건 아카데미의 그 어떤 결계로도 막을 수 없는 힘일세." "법칙의 찬탈자…… 예언이 맞았어. 태초의 마왕이 봉인에서 풀려나 우리를 시험하고 있는 거야!" "당장 본국에 연락하게! 영지에 비상 소집령을 내리고, 모든 마법 군단을 대기시켜야 하네! 그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제국은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될 걸세!"

그들은 서우의 뇌 과부하로 인한 고통의 표정을 '다음 지옥을 설계하기 위한 여유로운 심연의 미소'로 완벽하게 오해하고 있었다. 공포는 전염병처럼 그들의 심장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서우는 그들의 시선을 느끼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제발 그만해…… 나 진짜 머리 깨질 것 같단 말이야. 얼른 방에 가서 눕고 싶다고…….’

속은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냉혹한 지배자의 풍모를 유지한 채 천천히 돌아섰다. 승리의 광휘가 연무장을 가득 채우고, 모든 이들이 그의 발아래에 엎드리는 장려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사건은 그들이 승리의 여운에 젖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지익, 하고 전율할 만한 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

서우의 발밑, 그레이엄이 쓰러져 있는 결투장 중앙의 균열이 기이한 보랏빛으로 번쩍였다.

그것은 단순한 지반 붕괴가 아니었다. 조율관 베르톨트가 미리 설계해 두었던 지하 침강 트리거가, 서우의 비유클리드 기하학 연산으로 발생한 공간의 왜곡과 공명하면서 최악의 폭주를 일으킨 것이었다.

차원의 벽에 회복 불가능한 구멍이 뚫렸다.

아카데미가 수백 년 동안 숨겨 왔고, 오직 서우만이 그 기하학적 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금단의 구역—조율되지 않은 절대 영도역 '공간의 뒤편'이 그 거대한 아가리를 전면적으로 개방했다.

쿠구구구둥—!

엄청난 기압 차로 인해 발생한 초수위의 중력 차단 흡입력이 서우의 전신을 옭아맸다. 공기가 희박해지고, 주변의 잔해들이 중력을 잃고 허공으로 떠오르다 심연의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세이 님!" "환자 녀석!"

멀리서 엘리시아의 절규와, 관중석 뒤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레네의 다급한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하지만 뇌의 극심한 과부하로 인해 서우의 몸은 이미 마비된 상태였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중력의 법칙이 왜곡된 공간 속에서, 그의 몸은 서서히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이내 심연의 블랙홀을 향해 가차 없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차가운 절대 영도의 바람이 그의 전신을 얼려 붙였다.

눈앞이 캄캄한 어둠으로 물들어 가는 찰나, 서우는 자신을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는 이들의 실루엣을 보았다. 그리고 그 너머, 어둠의 심연 가장 깊은 곳에서 차가운 기하학적 문양으로 빛나며 자신을 부르는 고대의 제단—'종언의 방정식'의 희미한 광휘를 느꼈다.

서우의 몸이 완전히 어둠의 구역 속으로 납치되듯 빨려 들어가며, 지상의 빛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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