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눈 한가운데는 기묘할 정도로 정적만이 맴돈다.
귓가를 찢을 듯 울려 퍼지는 그레이엄 카터의 포효도, 대지를 짓이기며 몰아치는 칠흑 같은 검풍도, 코앞까지 육박한 죽음의 무게마저도 서우의 감각 속에서는 한 장의 정지된 도표처럼 평평하게 늘어섰다.
스치기만 해도 살점이 뼈째로 분리될 것 같은 마나의 칼바람이 불과 한 뼘 거리까지 다가왔을 때, 서우는 차가운 손가락으로 가슴가에 매달린 펜던트를 꽉 움켜쥐었다. 황녀 엘리시아가 건네주었던, 기괴하게 뒤틀린 청동빛의 비유클리드 펜던트. 손바닥을 파고드는 금속의 서늘한 촉감이 머릿속을 하얗게 채우던 공포를 일순간 가라앉혔다.
‘동기화한다.’
서우의 눈꺼풀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겉보기에는 한없이 고요하고 오만한 지배자의 시선이었으나, 그의 내면에서는 1초에 수만 번의 연산 기호가 충돌하는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그레이엄의 돌진 속도는 초속 340미터에 가깝다. 그가 뿜어내는 마나의 파동은 단순한 압력이 아니라, 진행 방향을 따라 공간의 밀도를 극대화하는 벡터의 군집이었다. 일반적인 마법사라면 그 거대한 질량의 흐름에 휩쓸려 신체 제어권을 잃고 사지가 으스러졌을 터였다. 마나가 한 푼도 없는 서우에게는 더더욱 치명적인 즉사급의 궤적.
하지만 서우에게 이 전장은 마법의 대결터가 아니었다. 좌표계와 변수, 그리고 증명되어야 할 수식만이 존재하는 거대한 기하학적 캔버스에 불과했다.
‘지난번 야외 훈련장에서 보았던 그 고대 파괴 전차의 잔해…….’
머릿속 한구석에서 낡은 철판에 새겨져 있던 기괴한 무늬가 떠올랐다. 아카데미의 그 누구도 해독하지 못해 단순한 문양으로 치부했던, 공간의 물리적 마찰을 제로로 수렴시키던 고대인들의 비정형 나선형 수학적 보정식. 서우는 그 프랙탈 구조의 공식을 머릿속 도화지에 빠르게 그렸다.
그리고 엘리시아의 펜던트가 지닌 위상적 특이점을 매개체로 삼아, 그 수식의 방향성을 완전히 뒤집은 역함수를 현실의 공간 위에 투사했다.
“…….”
서우의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그의 전두엽이 미친 듯이 박동하기 시작했다. 뇌세포 하나하나가 가솔린을 끼얹은 듯 타오르는 극심한 과부하가 정수리를 관통했다. 이명이 머릿속을 난도질하고, 코끝으로 비릿하고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리려 했다.
서우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자신이 그저 나약한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이 탄로 난다. 그 가혹한 가면 증후군은 서우의 고통을 냉혹한 미소라는 기괴한 방어기제로 치장케 했다.
그는 붉게 물들어가는 시야 속에서도,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거구를 향해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속삭였다.
“Q.E.D. (증명 완료).”
그 순간, 결투장의 공기가 기묘하게 꺾였다.
그레이엄의 대검이 서우의 목덜미를 가르기 직전, 그가 딛고 있던 대지의 중력 벡터가 완벽하게 뒤틀렸다. 아래로 향해야 할 만유인력의 법칙이, 서우가 설정한 나선형 역함수의 궤적을 따라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발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쿠구구구궁!
“……엇?!”
그레이엄의 거친 외마디 비명이 진공의 균열 사이로 터져 나왔다.
엄청난 질량과 가속도를 품고 앞으로 질주하던 그의 신체가,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거인의 손에 붙잡힌 것처럼 허공을 향해 팽개쳐졌다. 앞으로 나아가던 운동 에너지가 그대로 위쪽을 향한 상승 기류와 결합하며, 그레이엄은 영문도 모른 채 결투장 천장을 향해 ‘낙하’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공중 부양이 아니었다. 중력의 방향 자체가 180도 뒤집힌, 지면 압력의 완전한 역전이었다.
“무, 무슨……!”
허공에서 허우적대는 그레이엄의 전신을 감싸고 있던 청동 갑옷이 비명을 지르며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대지에 발을 붙이고 방출되려던 폭풍의 마나들이, 디딜 곳을 잃고 시전자의 내부로 급격하게 역류하기 시작한 탓이었다.
쿠웅! 쿠웅!
그레이엄의 체내에서 마나의 기맥이 꼬이고 충돌하는 둔탁한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하늘을 향해 솟구치며, 그는 자신의 폐부가 짓눌리고 내장이 뒤틀리는 끔찍한 압박감에 눈을 부릅떴다. 자신이 뿜어낸 오검의 살상력이 고스란히 스스로의 육체를 파괴하는 역인과율의 덫에 걸려든 것이다.
관람석은 차가운 침묵에 잠겼다.
황실의 내로라하는 기사들도, 아카데미의 늙은 석학들도 이 기괴한 광경 앞에서는 숨 쉬는 법조차 잊은 듯했다. 마법의 영창도 없었고, 마나의 흐름도 감지되지 않았다. 오직 기하학적인 펜던트를 쥔 소년의 나지막한 선언 한마디에,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천재 무투가가 하늘 높이 매달려 과학 실험실의 쥐새끼처럼 비틀대고 있을 뿐이었다.
“이것이…… 태초의 권능인가.”
관람석 상단에서 대결을 지켜보던 제1황녀 엘리시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는 경외를 넘어선 종교적인 광신이 일렁이고 있었다.
“마나를 쓰지 않고 세상의 법칙 자체를 조롱하시는군요. 세이…… 당신의 깊이는 대체 어디까지입니까.”
그녀에게 서우의 행동은 미천한 인간들의 무력을 학문적으로 비웃는 마왕의 유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결투장 바닥에 서 있는 서우의 속사정은 전혀 달랐다.
‘죽을 것 같다.’
시야가 온통 붉은빛과 검은빛의 대비로 번뜩였다. 뇌세포의 과부하로 인해 귀에서는 삐익 하는 고주파의 이명이 멈추지 않았고, 입안 가득 쇠비린내가 고였다. 귓가로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피와 섞여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서우는 필사적으로 무릎이 꺾이려는 것을 참아내며, 오른손으로 펜던트를 꽉 쥐어 지탱했다. 관중들에게는 이 모습이 그저 ‘미천한 인간의 반격을 가볍게 조롱하며 다음 지옥을 설계하는 지배자의 여유로운 미소’로 비쳤을 것이다.
실상은 한 걸음만 더 내딛으면 그대로 뇌출혈로 쓰러질지도 모르는 빈사 상태의 경계선이었다.
결투장 무대 바로 밑, 은밀한 그늘 속에 숨어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이레네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그녀는 타인에게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은둔형 학자였지만, 서우가 보여주는 비정상적인 생체 반응만큼은 그 어떤 고대 유적보다도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었다. 이레네의 시선은 서우의 미세하게 떨리는 손가락과, 전두엽 부근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이한 뇌 신경 세포의 과열 징후를 정확히 포착했다.
‘인간의 육체로 저런 무지막지한 연산을 감당하고 있었던 건가.’
이레네는 품속에서 미리 준비해 둔 은색 유리병을 꺼내 들었다. 그녀가 며칠 밤을 새워가며 서우의 혈액 잔해를 분석해 만든 ‘신형 고농도 세포 조율 약조물’이었다.
철컥, 하며 가볍게 약병의 마개를 따는 그녀의 손끝에 긴장감이 서렸다.
‘저 고집불통 마왕 지망생 녀석. 조금만 더 뇌를 쓰면 정말로 전두엽이 타버려서 영구적인 백치가 될 거다. 결투가 끝나는 즉시 강제로라도 저 약을 입에 들이부어야겠어.’
그녀는 언제라도 결투장 위로 난입할 수 있도록, 그림자 속에 몸을 웅크린 채 도약의 타이밍을 재기 시작했다.
그 시각, 허공 높이 솟구쳤던 그레이엄의 신체가 마침내 정점에 도달했다가, 서우가 설정한 수식의 유효 범위가 끝나자 다시 지상으로 무섭게 추락하기 시작했다.
“커흑……!”
그레이엄의 입에서 붉은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전신이 무거운 청동 갑옷과 함께 대지에 처박히기 직전, 그의 눈에 광기 어린 살기가 서렸다. 이대로 끝날 수는 없었다. 수천 명의 관중 앞에서, 고작 마나도 없는 사기꾼 놈의 알 수 없는 요술에 당해 패배한다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추락하는 궤적 속에서, 그레이엄이 짓눌린 기맥을 강제로 열어젖혔다.
그의 몸 주변으로 검붉은 마나가 폭발하듯 솟구쳤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력을 제물로 바쳐 주변의 모든 물리적 실체를 파괴하는 광역 파멸 기예였다.
“오검 제5식- 진혼의 종말!”
그의 손에 들린 대검이 핏빛으로 강렬하게 타오르며, 결투장 전체의 대기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지면으로 추락하는 그의 신체가 하나의 거대한 폭탄이 되어 서우를 통째로 쓸어버리려는 단말마의 발악이었다.
그 가공할 파괴력이 연무장을 뒤흔드는 순간.
심판석 뒤편, 어둠 속에 서 있던 감시관 베르톨트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공간의 왜곡을 감지했다. 이 결투장은 이제 통제 불능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베르톨트의 목적은 결투의 승패가 아니었다. 서우의 정체를 밝히고, 그가 정말로 마왕이라면 그 권능이 완전히 깨어나기 전에 물리적으로 제거하는 것.
그가 미리 경기장 지하에 심어두었던 고대 침강 트리거가 작동했다.
쿠구구구구궁-!
그레이엄의 핏빛 폭발이 지면에 닿기도 전에, 결투장 바닥 전체가 기괴한 진동과 함께 아래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단순한 파괴가 아니었다. 그것은 공간의 위상이 찢어지며 발생하는 붕괴였다.
대지가 밑바닥부터 무너져 내리며, 그 틈새로 칠흑 같은 어둠이 아가리를 벌렸다. 아카데미 심층부에 숨겨진 금단의 영역이자, 일반적인 마법 공식이 무용지물이 되는 비유클리드적 위상 왜곡층인 ‘공간의 뒤편’ 절대 영도역이 결투장 바로 밑바닥과 강제로 연결된 것이다.
“어……?”
서우의 발밑이 허공으로 변했다.
머릿속의 연산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한한 심연의 인력이 그의 전신을 아래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위에서는 그레이엄의 마지막 파멸 기예가 대지를 찢으며 내려앉고 있었고, 발밑에서는 빛조차 삼켜버리는 어둠의 심연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끝없는 추락의 시작이었다.
중력의 구속에서 벗어난 신체가 허공에 붕 떴다. 사방을 에워싸고 있던 붉은 결계의 파편들이 거울 조각처럼 깨어져 내리며, 아침 햇살을 반사해 은빛 은하수처럼 흩날렸다. 그 아름다운 파멸의 풍경 속에서, 서우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끝없는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세이 님!"
멀어지는 연무장의 가장자리,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제단 끄트머리에 매달린 엘리시아의 비명이 아스라하게 들려왔다. 그녀의 눈동자에 서린 것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었다. 붕괴하는 세계마저도 고요히 수긍하는 듯한 서우의 무표정에서, 그녀는 기어이 신화 속 마왕의 초연함을 읽어내고야 만 것이다. 낙하하는 순간조차 흔들림 없는 그의 눈빛은 그녀의 영혼에 깊은 경외를 새겨 넣었다.
하지만 서우의 내면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제발, 누가 나 좀 잡아줘.'
등 뒤를 스치는 서늘한 공기가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언제 평범한 고등학생이라는 사실이 들통날지 모른다는 본원적인 공포가, 추락의 공포와 뒤섞여 목구멍을 조였다. 그러나 수천 개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쏟아지고 있는 한, 그는 나약한 소년의 얼굴을 보일 수 없었다. 서우는 피가 흐르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차갑게 굳어버린 시선으로 심연의 바닥을 응시했다.
바로 그 순간, 머리 위에서 가공할 만한 압력이 짓눌러왔다.
"같이 죽자, 이 괴물 놈아!"
추락하면서도 광기에 물든 그레이엄이 대검을 쥔 채 서우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핏빛 마나는 붕괴하는 전장의 파편들을 집어삼키며 하나의 거대한 용오름을 만들어냈다. 검붉은 불꽃이 서우의 제복 깃을 태울 듯이 육박했다.
서우는 이를 악물었다. 뇌가 타들어 가는 이명이 머릿속을 난도질했다. 머릿속의 수학적 좌표들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단기 기억의 일부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오늘 아침에 이레네가 건네준 약조물의 냄새가 무엇이었는지, 황녀가 자신에게 했던 첫마디가 무엇이었는지 순간적으로 기억나지 않았다. 연산의 대가가 그의 뇌세포를 거칠게 갉아먹고 있었다.
'그래도…… 여기서 죽을 순 없어.'
그는 가슴의 펜던트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번에는 방어막이 아니었다. 절대 영도역의 비유클리드적 위상 왜곡을 역이용하여, 자신과 그레이엄 사이의 공간적 '거리' 자체를 무한대로 발산시키는 기하학적 증명.
"Q.E.D. (증명 완료)."
짧은 선언과 함께, 서우의 코에서 붉은 선혈이 울컥 쏟아졌다.
동시에 기적이 일어났다. 코앞까지 다가왔던 그레이엄의 대검이, 갑자기 눈앞에서 수십, 수백 미터 뒤로 멀어지듯 왜곡되었다. 실제 물리적 거리는 불과 일 척에 불과했으나, 비틀린 위상 기하학의 공간 속에서 그레이엄의 공격은 결코 서우에게 닿을 수 없는 평행선의 궤적을 그리며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레이엄의 절규가 어둠 속으로 용해되었다. 위상의 왜곡을 견디지 못한 그의 광역 마나가 스스로 폭발하며, 그는 칠흑 같은 심연의 한구석으로 튕겨 나갔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은빛 그림자 하나가 서우를 향해 거침없이 몸을 던졌다.
"바보 같은 환자 녀석!"
이레네였다. 그녀는 무너지는 돌더미를 딛고 허공으로 뛰어내려, 기어코 서우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녀의 은색 눈동자에는 두려움 대신, 빈사 상태에 빠진 서우의 뇌 신경을 향한 광적인 집착과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녀는 품에서 마개를 딴 약조물 병을 서우의 입가로 밀어 넣으려 했다.
그러나 절대 영도역 '공간의 뒤편'은 침입자를 쉽게 허용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얽힌 채 추락하는 심연의 바닥에서, 거대한 푸른빛의 마법진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그것은 아카데미가 수백 년 동안 봉인해 왔던 고대의 자율 방어 체계였다.
웅웅웅—!
어둠 속에서 거대한 바위와 강철로 이루어진 수호 골렘들의 형상이 서서히 일어섰다. 그들의 안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마력광이 서우와 이레네의 전신을 무겁게 비추었다. 침입자를 말살하기 위해 가동된 고대의 병기들이 거대한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 너머, 심연의 가장 깊은 곳에서 차가운 기하학적 문양으로 빛나는 고대의 제단이 서우의 흐릿한 시야에 들어왔다. 그 제단 위에 새겨진 수식은,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원래 세계로의 귀환 공식—'종언의 방정식'의 제1 복제 고리였다.
수호자들의 거대한 주먹이 낙하하는 두 사람을 향해 무섭게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뇌의 과부하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는 상황. 서우는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자신을 꽉 움켜쥔 이레네의 손길을 느끼며, 눈앞으로 다가오는 거대한 파멸의 그림자를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