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릿한 철분 냄새가 연무장의 가을 공기를 단숨에 삼켰다.
그레이엄 카터의 거친 손바닥에서 흘러내린 선혈이 청동 판의 기괴한 홈을 따라 붉은 뱀처럼 기어갔다. 공중으로 솟구친 불꽃은 파지직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튀었고, 그 눈부신 명멸 속에서 한서우의 발밑에 거대한 혈색 마법진이 그물망처럼 얽혀들었다.
"나, 오검의 후계자 그레이엄 카터는 카터가의 피와 영혼을 걸고, 비겁한 기만자 세이에게 '진혼 혈투'를 신청한다!"
포효하는 그레이엄의 눈동자는 광기로 번들거렸다. 뿜어져 나오는 마나의 중압감이 사방의 대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망했다. 진짜 망했어.'
서우의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듯 요동쳤다. 사지를 타고 흐르는 소름 돋는 냉기에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당장이라도 저 미친 검사 놈을 피해 등을 돌리고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수천 개의 눈동자가 이 자리에 쏠려 있었다. 무엇보다 발목을 단단히 옭아맨 붉은 쇠사슬 모양의 마나 구속구는 공간의 인과를 묶어두고 있었다. 도망치는 순간, 저 붉은 사슬이 심장을 꿰뚫으리라는 불길한 직감이 뇌리를 스쳤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지만, 서우는 떨리는 입술을 짓눌러 억지로 가늘고 서늘한 호선을 그렸다. 마치 이 모든 상황이 하찮은 유희에 불과하다는 듯이.
"진혼 혈투라."
서우의 목소리는 낮고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연무장을 메운 소란이 그 단 한 마디에 썰물처럼 밀려 나갔다.
그레이엄은 대검을 바닥에 꽂아 넣으며 으르렁거렸다.
"겁이 난다면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어라! 네놈이 사기꾼이라는 걸 자백하면, 가문의 이름으로 목숨만은 살려줄 테니!"
서우는 대답하는 대신, 품속에서 차갑게 식어가는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제1황녀 엘리시아가 건네주었던 황실의 보물, 비유클리드 비틀림 무늬 펜던트였다. 손끝에 닿는 정교한 음각 문양들이 서우의 뇌 세포를 강하게 자극했다. 그의 시야에 붉은 마법진의 궤적이 기하학적 수식의 나열로 변환되어 투사되기 시작했다.
'이 마법진…… 단순한 결계가 아니야. 공간을 특정 좌표계로 고정하는 차원 구속식이다.'
서우는 펜던트의 곡면을 따라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대기 중에 떠오른 붉은 계약서의 텍스트들. 그것은 이세계의 고대 룬어로 쓰여 있었지만, 서우에게는 삼차원 공간에 투사된 위상학적 함수식으로 읽혔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카터가의 후계자라는 자가 고작 이런 허술한 경계 조건에 영혼을 파는군."
서우가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그의 손가락이 공중을 가볍게 튕겼다. 마나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순수한 물리적 궤적이었다.
"뭐라고?"
그레이엄의 눈썹이 꿈틀했다.
서우는 결투 동의서의 공중에 떠 있는 붉은 인장을 가리켰다.
"이 결투장은 유클리드 기하학에 기반한 평면 좌표계를 전제로 설계되어 있지. 경계의 한계 도메인을 반경 100미터의 원형 평면으로 정의하고 있어. 하지만 우리가 서 있는 이 대지는 완전한 평면이 아니다. 행성의 만곡률과 이 구역에 작용하는 국소적 중력 벡터의 변조를 고려하지 않은 차원식은, 미세한 위상 왜곡만으로도 경계의 정의 자체가 오염되지."
"무슨 개소리를……!"
"쉽게 말해줄까?"
서우는 펜던트를 들어 올려 붉은 결계의 중심축을 향해 정확히 겨누었다. 펜던트의 비틀린 금속 루프가 빛을 반사하며 기묘한 굴절을 만들어냈다.
"내가 이 결투를 수락하는 조건으로, 결투 구역의 경계 조건을 위상학적 도넛 모양인 토러스(Torus) 구조로 재정의하겠다. 결투장 내의 모든 벡터 좌표는 연속적이어야 하며, 경계를 벗어난 힘의 방향은 반대편 경계로 루프되어 돌아오도록 설정한다. 동의하지 않는다면, 네놈이 발동한 이 조잡한 결계는 내 존재의 인과율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붕괴할 테니까."
서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펜던트에서 보이지 않는 수학적 변조 파동이 흘러나왔다.
붉게 타오르던 결계의 사슬들이 순식간에 기하학적인 나선형으로 비틀리며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결계의 바깥 경계면이 마치 거울처럼 일그러지며 너머의 풍경을 왜곡시켰다. 결투장의 마법 공식 자체가 통째로 해킹당한 것이다.
지켜보던 아카데미의 원로들과 마법학자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들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고대부터 내려온 절대적인 피의 서약을, 마나 한 톨 쓰지 않고 단지 몇 마디의 수식과 기묘한 기구 하나로 제어해 버리다니.
"말도 안 돼…… 결계의 구조식을 강제로 재작성했다고? 그것도 영창도 없이?"
"세이 님은 이미 전장의 규칙 자체를 지배하고 계신다!"
그레이엄은 발밑의 붉은 빛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기이하게 요동치는 것을 보며 침을 삼켰다. 온몸의 털이 두려움으로 일어섰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좋다! 어떤 야바위를 부리든, 내 검이 네놈의 목덜미를 가르는 순간 모든 것은 끝난다!"
그레이엄이 거칠게 서약의 징표를 완성했다. 붉은 빛이 두 사람의 심장으로 스며들며, 사흘 뒤의 결투를 확정 지었다.
***
그날 밤. 아카데미의 동쪽 타워에 위치한 서우의 개인 숙소는 기묘한 고요에 잠겨 있었다. 창밖으로는 푸르스름한 달빛이 내려앉아 고풍스러운 가구들 위로 은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서우는 책상에 엎드린 채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아으으…… 머리 터지겠네."
낮에 결계의 위상 기하학적 경계 조건을 강제로 바꾸느라 뇌 세포를 과도하게 연산시켰던 탓에, 관자놀이가 바늘로 찌르는 듯 욱신거렸다. 한계를 넘어서면 뇌가 타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척수를 타고 흘렀다. 그레이엄과의 결투에서 이기려면, 그의 오검 기예를 완벽하게 예측하고 공간의 기하학적 틈새를 찾아내야만 했다.
탁, 탁.
방 안쪽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서우는 급히 머리를 감싸 쥐던 손을 내리고, 세상에서 가장 오만하고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제1황녀 엘리시아가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양가죽으로 된 두꺼운 두루마리들과 복잡한 마나 도표들이 들려 있었다. 그녀의 눈가에는 엷은 붉은 기운이 남아 있었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듯했다.
"세이 님."
엘리시아가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으며 두루마리를 바닥에 펼쳤다.
"미천한 인간의 도전 따위, 세이 님께는 한낱 불꽃놀이에 불과하겠으나…… 황실의 충복으로서 저 무뢰한의 무모한 칼끝이 세이 님의 고결한 의식을 더럽히는 것을 묵과할 수 없었습니다."
서우는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황녀님, 제발 나 좀 살려줘요. 그 무뢰한 칼끝이 내 목을 날리게 생겼다고요.'
그러나 겉으로는 나른하게 턱을 괸 채, 엘리시아가 가져온 자료들을 내려다보았다.
"쓸데없는 짓을 했군, 황녀."
"죄송합니다. 하지만…… 카터가의 '오검'은 바람의 마나를 극도로 압축해 진공의 궤적을 만드는 검술입니다."
엘리시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 그녀는 서우가 이 결투를 통해 마왕으로서의 진정한 권능을 해방하고, 이 세계의 인과를 다시 쓰기 위한 '위대한 의식'을 치르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레이엄의 검풍은 초당 340미터의 음속에 달하며, 검풍의 중심 압력은 주변부의 0.1배 이하로 떨어집니다. 이 압력차로 인해 발생하는 흡입력이 상대의 신체를 구속하지요. 하지만……."
엘리시아가 손가락으로 마나 분포도의 특정 곡선을 짚었다.
"그의 검풍이 최고 속도에 도달하기 직전, 좌측 37도 방향에서 미세한 마나의 지연 현상이 발생합니다. 오검의 구조적 설계 결함입니다. 세이 님의 위대한 눈에는 이미 보이고 있으시겠으나, 이것이 그레이엄의 가장 치명적인 취약 구역입니다."
서우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음속 340m/s. 중심 압력차에 의한 베르누이 효과. 그리고 좌측 37도의 지연 변수.'
이것은 단순한 마법 정보가 아니었다. 완벽한 물리적 수치였다. 서우의 천재적인 수학적 뇌가 대단히 빠른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의 빈 칠판 위로 유체의 흐름을 정의하는 나비에-스토크스 방정식(Navier-Stokes equations)이 그려졌다.
"호오."
서우가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 미소는 차가웠지만, 엘리시아의 눈에는 구도자의 길을 비추는 은총처럼 보였다.
"제법 쓸만한 장난감을 가져왔군, 엘리시아."
"세이 님……!"
엘리시아의 눈에 감격의 눈물이 고였다. 제국의 황녀로서 오만하기 짝이 없던 그녀가, 지금은 오직 한 소년의 인정을 받기 위해 온 마음을 바치고 있었다.
"그 바람의 궤적을, 전장에서 완전히 고체로 굳혀버리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서우는 차가운 연기를 펼치며, 속으로는 계산 체계를 가다듬었다. 바람의 벡터를 0으로 수렴시키는 위상 공간의 경계점. 그것을 증명하면 그레이엄의 검풍은 한낱 미풍으로 전락할 것이다.
***
결투를 하루 앞둔 황혼녘. 아카데미의 최고 의결 회의실은 납덩이를 삼킨 듯 무거운 침묵에 짓눌려 있었다.
둥근 탁자 주위로 사법 감시관 원장과 베르톨트를 비롯한 고위 원로들이 모여 있었다. 수정구슬 속에서는 사흘 동안 결투장 주변에 매복 설치된 마법 수색 진형의 진동이 조용히 깜빡이고 있었다.
"정말로 방치할 셈인가, 베르톨트?"
원장이 주름진 손으로 지팡이를 움켜쥐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저 '세이'라는 소년이 정말로 예언 속의 태초의 마왕이라면, 이번 결투는 아카데미 전체가 멸망하는 도화선이 될 수도 있네."
베르톨트는 안경테를 쓸어올리며 냉혹하게 미소 지었다.
"오히려 잘된 일입니다. 그동안 그는 마나를 숨기며 철저히 가면에 숨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생사결의 진혼 혈투장 안에서는 그 어떤 기만도 통하지 않지요. 그레이엄 카터의 목숨을 제물로 삼아서라도, 그가 감추고 있는 마왕의 본질을 끌어내야 합니다."
"하지만 만약…… 그가 이 아카데미의 모든 법칙을 깨뜨리고 우리까지 몰살하려 든다면?"
"그래서 사방에 5중 결계와 마력 소멸 진형을 매복시켰습니다."
베르톨트의 눈빛이 잔인하게 빛났다.
"그가 힘을 드러내는 순간, 우리는 그의 마법 체계를 해독할 겁니다. 인간의 뇌로 다룰 수 없는 초월적인 연산이라면, 그 대가로 그의 뇌 신경은 완전히 파괴될 터. 마왕이든 사기꾼이든, 내일 결투장에서 그의 진짜 바닥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속삭이는 이들의 탐욕과 두려움은, 결투장을 둘러싼 거대한 음모의 그물을 촘촘히 짜 내려가고 있었다.
***
그리고 마침내, 약속된 결투의 날이 밝았다.
아침 이슬을 머금은 연무장의 붉은 벽돌 위로 차가운 아침 해가 비쳐 들었다. '결속의 고리'라 불리는 거대한 원형 결투장 주변은 발 디딜 틈 없이 인파로 가득 찼다. 황실의 기사들, 아카데미의 석학들, 그리고 숨을 죽인 채 관람석을 메운 수천 명의 학생들. 모두가 이 세기의 대결을 지켜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서우는 결투장 한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가벼운 아카데미 제복 차림에, 손에는 무기 하나 들려 있지 않았다. 오직 가슴가에 매달린 비유클리드 펜던트만이 아침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빛날 뿐이었다.
건너편에서 그레이엄 카터가 천천히 가쁜 호흡을 내쉬며 걸어 나왔다. 그의 전신을 감싼 무거운 청동 갑옷에는 바람의 룬 문자들이 펄럭이듯 빛나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거대한 대검은 이미 폭풍 같은 마나를 머금고 웅웅거리는 진동음을 내뿜었다.
"기다렸다, 사기꾼 놈."
그레이엄의 목소리는 쇠를 긁는 듯 거칠었다.
"오늘 네놈의 허울 좋은 껍데기를 갈기갈기 찢어발겨, 학문 따위가 실전의 살육 앞에 얼마나 무력한지 똑똑히 보여주마!"
서우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지만, 표정만큼은 얼음 조각처럼 굳어 있었다.
'차분히 하자. 계산은 끝났다. 엘리시아가 준 데이터와 내 기하학 수식을 동기화하면 된다.'
[결투 시작을 선포한다!]
결투장의 감독관이 외침과 동시에, 거대한 붉은 장벽이 두 사람의 사방을 가로막으며 하늘 높이 솟구쳤다. 외부의 그 어떤 간섭도 허용하지 않는 절대적인 생사결의 공간.
그 순간, 그레이엄의 대검이 허공을 갈랐다.
"오검 제1식- 폭풍 장막!"
쿠구구구궁-!
그레이엄의 발밑에서부터 대지가 비명을 지르며 갈라졌다. 수만 개의 칼날로 조각난 검풍의 마나가 소용돌이치며 사방 수 마일 밖의 대기까지 요동치게 만들었다. 압축된 공기가 찢어지는 이명이 연무장 전체를 강타했다. 단순한 검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공간 자체를 고압의 진공 상태로 만들어 상대를 압사시키는 죽음의 폭풍이었다.
"죽어라아아아!"
그레이엄이 대지를 박찼다. 먼지 폭풍을 뚫고, 그의 거대한 신체가 음속에 달하는 검풍을 이끌고 서우를 향해 맹렬하게 대지를 가르며 돌진해 들어왔다.
엄청난 질량과 속도의 폭풍이 서우의 전신을 찢어발기기 위해 코앞까지 육박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서우는 도망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오른손을 뻗어 비유클리드 펜던트를 움켜쥐었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우주의 비틀린 기하학적 좌표들이 푸른빛으로 명멸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