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턱밑을 겨누는 검날은 지독하리만큼 차가웠다.

아카데미 정문 광장, 붉은 단풍잎들이 비명처럼 흩날리는 한복판에서 한서우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뺨을 스치고 지나간 목제 테이블의 파편이 남긴 상처에서 붉은 피 한 방울이 고였다가 턱선을 타고 느리게 흘러내렸다. 비릿한 쇠 냄새가 콧수를 찔렀다.

눈앞에 선 사내, 그레이엄 카터의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실로 물리적인 질량을 지닌 것처럼 서우의 어깨를 짓눌렀다. 평범한 대한민국 고등학생의 영혼을 가진 서우로서는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 빌고 싶은 충동이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것처럼 날뛰었고, 손끝은 차갑게 식어 들어갔다.

하지만 서우는 알고 있었다. 여기서 나약함을 보이는 순간, 이 괴물 같은 이세계의 포식자들은 자신을 갈가리 찢어 발겨 그 실체를 파헤칠 것이라는 사실을.

그렇기에 서우는 웃었다.

가장 냉혹하고, 가장 우아하며, 상대의 목숨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오만한 지배자의 미소. 서우의 입꼬리가 비정상적일 정도로 매끄러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허풍쟁이라."

서우의 목소리는 광장의 소란 속에서도 기이할 정도로 맑고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마나 한 톨 섞이지 않은 순수한 성대만의 울림이었으나, 오히려 그 인위적인 담담함이 주변을 둘러싼 학생들의 숨통을 조였다.

그레이엄의 이마에 굵은 힘줄이 돋아났다. 그는 서우가 자신을 두려워하기는커녕, 마치 하찮은 미생물의 재롱을 보듯 조소하고 있다고 느꼈다. 카터 가문의 천재 검사로서 평생 받아본 적 없는 노골적인 멸시였다.

"그 혓바닥이 언제까지 놀아날지 보자꾸나!"

그레이엄이 들이밀었던 대검을 거칠게 거두어들였다. 그러나 그것은 물러섬이 아니었다. 그의 왼손이 허리춤 가죽 주머니에 매달려 있던 또 다른 무기, 가시가 돋친 거대한 강철 철퇴를 움켜쥐었다. 대검보다도 더 파괴적이고, 오직 살육과 파쇄만을 위해 고안된 야만적인 무기였다.

철퇴가 허공을 가르며 회전하기 시작하자, 웅웅거리는 중폭음이 광장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 궤적을 따라 붉은 마나의 잔상이 흉포하게 일렁였다.

서우는 슬그머니 왼손을 가슴팍으로 가져갔다. 얇은 사제 셔츠 너머로 제1황녀 엘리시아가 건넸던 황실의 보물, '비유클리드 비틀림 무늬 펜던트'가 만져졌다. 기괴하게 꼬인 나선형 금속 무늬가 손가락 끝에 닿자, 기묘하게도 요동치던 심박수가 안정을 찾아갔다.

펜던트의 독특한 기하학적 형태는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회전하던 수식들의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진정해라. 공간은 고정된 상자가 아니다. 관측자에 따라 휘어지고, 늘어나며, 비틀리는 유연한 직물일 뿐이다.’

서우의 머릿속 뇌세포들이 미친 듯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전두엽이 타들어 가는 듯한 뜨거운 열감이 목덜미를 타고 올라왔다. 귓가에서 이명이 가늘게 울렸지만, 서우는 이를 악물고 눈앞의 좌표계를 정렬했다.

그레이엄을 중심으로 한 삼차원 공간의 평면 직교 축. 축의 원점(0, 0, 0)을 고정하고, 타격이 가해지는 순간의 벡터 값을 계산한다.

[ x' = x \cos\theta - y \sin\theta ] [ y' = x \sin\theta + y \cos\theta ]

각도 $\theta$는 우측으로 정확히 15도. 평행이동 값 $d$는 Y축 방향으로 2.5미터.

서우는 마나를 다루지 못한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 밤을 새우며 풀었던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수식들은, 이 마법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공간의 인과율 자체를 직접 해킹하는 절대적인 마법 파괴 기술로 치환되어 있었다.

"죽어라, 사기꾼 꼬맹이!"

그레이엄이 포효했다. 그의 거구가 대지를 박차고 도약했다. 강철 철퇴가 서우의 정수리를 향해 일직선으로 낙하했다. 대기를 찢는 파공음과 함께, 철퇴에 실린 순수한 파괴 에너지가 서우의 머리칼을 거칠게 휘날렸다. 주변의 신입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찰나의 순간, 서우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딱-.

아주 미세한 마찰음이 울린 순간, 서우의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증명 완료(Q.E.D.)."

웅-!

순간, 그레이엄의 시야가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분명 서우의 머리통을 향해 일직선으로 떨어지던 철퇴의 궤적이,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유리 렌즈에 굴절되듯 우측으로 15도 꺾였다. 공간 자체가 우측으로 비틀려 평행이동한 것이다.

"어……?!"

그레이엄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자신의 온 체중과 마나를 실어 내리찍은 타격의 방향이, 제어할 수 없는 힘에 의해 강제로 변조되어 있었다.

쾅----------!

무지막지한 폭음과 함께 강철 철퇴가 대지에 처박혔다. 하지만 그곳은 서우가 서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서우의 우측 2.5미터 뒤편. 그곳에는 이번 신입생 동아리 모집 행사에서 가장 화려하고 거대하게 지어져 있던 황실파 귀족 친위 동아리 '로열 크레센트'의 대형 가죽 텐트가 위치해 있었다.

"꺄악!" "무, 무슨?!"

날벼락 같은 참변이었다. 그레이엄의 전력 타격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텐트는 단 한 방에 사분오열 찢겨 나갔고, 내부에 장식되어 있던 고급 대리석 테이블과 황금 식기, 마법 조명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텐트 안에서 우아하게 차를 마시며 세를 과시하던 고위 귀족 자제들이 비명을 지르며 흙바닥을 뒹굴었다.

"커헉!"

그레이엄 역시 자신이 쏟아낸 파괴력의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찢어진 텐트 천막과 흩날리는 흙먼지 더미 속으로 사정없이 처박혔다. 제국 최강의 검사 가문 후계자라는 위엄은 온데간데없이,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든 채 먼지구덩이 속에서 허우적대는 꼴은 실로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우스꽝스러웠다.

광장 전체에 기괴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손가락 하나 대지 않은 채 제국의 오검 후계자를 저 멀리 처박아버린 광경.

"……마나가 없었어."

광장 구석에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마법학부의 한 원로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노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떠졌다.

"마력의 흐름이 전혀 감지되지 않았네. 그런데 공간의 위상 자체가…… 그가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강제로 뒤틀렸어. 이건 마법이 아니야. 차원을 직접 조율하는 신의 권능, 혹은……."

"태초의 마왕이신가……."

상급 기사단원들 역시 마른침을 삼키며 서우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빛에는 이제 단순한 경계를 넘어선, 실존하는 재앙을 마주한 자들의 본능적인 공포와 경외가 서려 있었다. 자신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공간의 법칙을 재정의하는 존재. 그것은 그들이 아는 '인간'의 범주를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서우는 뇌가 터져나갈 것 같은 극심한 두통을 참아내며, 가슴팍의 펜던트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과부하로 인해 시야의 가장자리가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지만, 그는 뺨에 흐르는 피를 소매 끝으로 우아하게 닦아내며 여전히 차가운 미소를 잃지 않았다.

"시끄럽군."

서우가 낮게 읊조렸다.

"겨우 이 정도의 공간 변수 설계에 왜 이리 소란을 떠는 건가. 이 세계의 지성체들은 좌표의 평행이동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그 오만한 일침에, 주변의 석학들은 부끄러움과 두려움으로 고개를 숙였다. 마왕의 눈에는 자신들의 마법 체계가 얼마나 조잡하고 미개하게 보였을 것인가.

그때, 저 멀리서 차가운 금속음과 함께 수십 명의 무장 갑주 기사들이 광장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의 갑옷에 새겨진 문양은 황실의 상징인 검은 독수리였다.

"모두 멈춰라!"

대열의 선두에서, 타오르는 듯한 적발을 휘날리며 걸어 나오는 여성이 있었다. 제1황녀, 엘리시아 폰 로젠가르트였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분노로 차갑게 굳어 있었다.

황녀의 사병들이 즉각 서우의 전방을 겹겹이 포위하며 날카로운 창끝을 바깥으로 겨누었다. 철저한 옹위였다. 엘리시아는 먼지 더미 속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키는 그레이엄을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그레이엄 카터. 네놈이 감히 황실이 보증한 아카데미의 귀빈이자, 이 대륙의 진리를 쥐고 계신 분께 검을 겨누다니. 이는 명백한 반역이자, 황실에 대한 도전이다!"

엘리시아의 불호령에 일어선 그레이엄의 얼굴이 수치심과 분노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황녀 전하! 저 사기꾼 놈은 마나조차 쓰지 못하는 가짜입니다! 방금도 비겁한 수로 저를……!"

"닥쳐라, 무지한 무부(武夫)여."

엘리시아가 그의 말을 칼같이 잘라냈다. 그녀의 눈에는 서우가 보여준 공간의 뒤틀림이, 마법의 극의를 넘어선 우주의 진리 그 자체로 보였다. 그런 고결한 학문을 '비겁한 수'라 칭하는 그레이엄의 무식함이 황녀로서는 참을 수 없을 만큼 혐오스러웠다.

"세이 님께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네놈의 무모한 살기를 유희하듯 흘려보내셨다. 네놈의 그 보잘것없는 검기가 세이 님의 고차원적 증명 앞에 얼마나 무력한지 아직도 깨닫지 못했단 말이냐?"

엘리시아는 서우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이며 경의를 표했다.

"세이 님, 황실의 이름으로 이 무뢰한을 즉각 처단하겠나이다. 부디 노여움을 거두어 주소서."

서우는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아니요, 처단하지 마세요! 그냥 조용히 넘어가고 싶어요! 여기서 일 더 커지면 나 진짜 감당 못 해!'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서우의 표정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는 엘리시아를 흘긋 바라본 뒤, 콧방귀를 뀌듯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처단이라니, 번거롭군. 미천한 벌레 한 마리가 웅웅거렸다고 해서 대지를 뒤엎을 필요는 없지 않나, 황녀 전하."

그 자비로우면서도 오만한 언사에, 엘리시아는 다시 한번 전율했다. 마왕의 그릇은 인간의 사소한 원한 따위에 연연하지 않을 만큼 광대하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먼지 더미 속에서 일어선 그레이엄은 그 자비로운 조롱을 견딜 수 없었다. 카터 가문의 명예가, 자신의 검사로서의 자존심이 완전히 짓밟혔다. 이대로 물러선다면 평생 아카데미의 웃음거리로 남을 터였다.

"으아아아아!"

그레이엄이 광포한 포효를 내질렀다. 그의 눈이 핏발로 붉게 물들었다. 주위의 만류도, 황녀의 경고도 이제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품속에서 붉은 루비가 기괴하게 박힌, 검고 무거운 청동 판을 꺼내 들었다. 그것을 본 엘리시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레이엄! 네놈, 설마……!"

"이 사기꾼 놈! 학문이 어쩌고 법칙이 어쩌고…… 다 필요 없다! 진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장에서도 그 잘난 주둥이가 살아남을 수 있는지 보자!"

그레이엄이 자신의 오른손바닥을 대검 날에 사정없이 그었다. 붉은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와 청동 판을 적셨다.

"나, 오검의 후계자 그레이엄 카터는 카터가의 피와 영혼을 걸고, 비겁한 기만자 세이에게 '진혼 혈투'를 신청한다!"

콰아아앙-!

청동 판이 붉은 빛을 발하며 공중으로 솟구쳤다. 아카데미가 설립된 이래 단 한 번도 거부된 적 없는, 생사결의 절대 계약.

붉은 낙인이 서우의 발밑에 거대한 마법진의 형태로 새겨지기 시작했다. 피할 수 없는, 오직 한 사람의 죽음으로만 끝나는 봉인의 사슬이 서우의 발목을 옭아매듯 붉게 타올랐다.

서우의 동공이 미세하게 떨렸다. 머릿속의 수식들이 경고음처럼 붉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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